비비안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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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원한 스칼렛 오하라'''
— 로스 앤젤레스 타임즈 (LA Times), Harry Trimborn 1967년 7월 9일.
영화계에 관심이 없어도 웬만하면 다 아는 전설적인 배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회나 수상할만큼[2] 미모와 연기력을 동시에 소유한 어마어마한 배우이다. 역대 세계 영화 열 손가락, 아니 다섯 손가락 안에도 들어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역[3][4] 을 매력적으로 소화하며 일약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다. '''AFI(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여배우 16위'''에 올랐다.#'''''비비안 리만큼 아름다운 배우에게는 연기력이 필요없을 것이다, 비비안 리만큼 연기력이 훌륭한 배우에게는 아름다운 모습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 뉴욕 타임즈 (New York Times)
잉그리드 버그만과 함께 1910년대생 여배우들 중 가장 유명하며, 1940년대를 풍미한 인물이자 한 시대의 아이콘이다. 또한 전성기가 한참 지난 1951년에도 말론 브란도와 함께 출연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명연기를 보이며[5] 자신이 녹슬지 않음을 입증했지만, 자신의 외모에만 집착하는 팬들과 언론으로 인해 정신 건강이 좋지 못했고 이로 인해 주디 갈란드 등과 함께 개인적인 삶이 참 불행한 배우로 자주 꼽힌다.
2. 생애
1913년 11월 5일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의 다질링에서 태어났다.
연기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등도 배워서 어느 정도는 다룰 줄 알았으며, 무용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외동딸로 자랐고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인도에서 5세에 영국으로 귀국했고, 이후 가톨릭 미션스쿨을 다니다가 10대 초반부터 18세 때까지 아버지가 유럽 여행을 데리고 다니면서 학교를 몇 번씩 전학을 다녔다고 한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스트엔드의 연극 공연을 보고 배우가 될 결심을 하게되고, 런던 왕립 연극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 즈음 13살 연상의 귀족인 '허버트 리 홀먼'과 첫 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6] 보수적이었던 남편은 그녀의 배우 활동을 좋아하지 않았고, 때문에 그녀는 다니던 학교도 그만둬야 했다.
겨우 20세에 첫 번째 아이를 출산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 가정주부 생활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던 비비안 리는, 친구들의 독려로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되고 곧 자신의 에이전트를 만나게 된다. 이후 연극 무대에 데뷔한 그녀는 첫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이 경험은 그녀에게 좋은 기억이 아니라 나쁜 기억으로도 남게 되는데, 갑작스럽게 너무 큰 찬사를 받아서 연기에 대한 엄청난 부담감을 얻게된 것이다.
하여간 그 데뷔 무대를 본 로렌스 올리비에가 비비안에게 다가가고 둘은 곧 불륜 상대가 된다. 원래는 둘 모두 배우자와 이혼하려 했지만, 양쪽의 상대들이 모두 이혼에 반대하는 바람에 불륜이 되고 만 것이다.
비비안 리는 '클라크 게이블'과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배우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애쉴리 역의 '레슬리 하워드'와는 앙숙이었다고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개봉 후 드디어 리와 올리비에는 각각의 파트너와 이혼하고 결혼한다. 하지만 비비안의 전 남편은 비비안 사망 전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비비안 리는 알다시피 전설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스칼렛 오하라역으로 유명한데 원래 배우를 다 뽑아놓고 촬영 준비 단계였으나, 유일하게 스칼렛 역만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를 본 캐스팅 관계자로 인해 막판에 최종 선발되었다고 한다.[7] 사실 이 경우는 정말로 외모가 도와준 상황인데 원래는 '폴레트 고다드'가 스칼렛 역으로 거의 낙점 상태였으나 찰리 채플린의 아내라는 점과[8] 비비안의 등장으로 캐스팅이 무산되었기 때문. 이후 둘의 커리어를 대비해 보면 고다드 본인으로선 많이 안타까울 듯. 원래 코메디 연기로 유명 했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연기 변신을 할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칼렛 오하라 역에서 좌절된 이후, 채플린과 고다르의 사이는 악화되기 시작했고 위대한 독재자 촬영시에는 이미 별거 중인 상태였다고 한다. 결국 둘은 위대한 독재자 개봉 직후 이혼했다.[9]
영화 배우로서 성공한 이후 그녀의 조울증은 오히려 점점 심해지게 되는데, 첫 번째로 그녀는 "스타"가 되기보다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었으나 대중들은 점점 그녀를 스타로만 인식하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의 외모에 대한 과한 집중까지 겹쳐서 그녀는 더더욱 자신의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된다.
로렌스 올리비에와 결혼 후 부터는 영화보다는 그가 연출하거나 출연하는 연극에 함께 출연하게 되는데, 대다수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스타가 된 후, 평론가들이 그녀가 유명해지기 전부터 찬사를 받던 배우인 로렌스 올리비에를 칭송하면서 "비비안은 영화 배우이지 연극 배우가 아니다" 혹은 "올리비에가 잘 연출해놓은 걸 그녀가 망쳤다", "비비안이 옥의 티였다"라는 식의 인신공격성 혹평을 계속해서 내놓는다.
완벽주의자였던 비비안은 소수의 평에도 심한 상처를 입었고, 아무리 좋은 연극평이 나와도 나쁜 평에만 집착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이후 로렌스 올리비에와 함께 영화에 출연하기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지만 한 쪽이 캐스팅되면 한 쪽은 실패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결렬된다. [10] 설상가상으로 평소 비비안 리의 건강 상태가 안 좋았던 탓에 부부의 2세를 계속 유산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그녀의 조울증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결국 발작 증세까지 일으키게 된다. 특히, 영화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촬영 중에 아이를 유산했을 때 크게 낙심했다고 한다.
비비안은 한 번 발작을 시작하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며, 이를 말리는 올리비에를 폭행하는 등의 과격한 행동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바닥에 쓰러져 울다 기절했다고 한다. 깨어난 뒤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고 하며,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후엔 매우 부끄러워 했다고한다. 이런 증세가 심해지자 결국 비비안은 연극 투어 대부분에서 중도 하차/복귀를 반복했다.
발작이 가장 심했던 호주 투어 6개월 동안 비비안은 불면증으로도 고생하였고 부부 싸움도 잦았다. 결국, 비비안이 호주 배우와 바람을 피우기까지 한다. 이때 바람 피운 상대가 한참 후에 네트워크라는 영화로 사후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피터 핀치. 게다가 피터는 올리비에가 발탁한 인재였다니, 그의 배신감은 이중으로 컸을 터. 둘이 함께 호주에서 떠나기 위해 공항까지 왔는데, 비행기가 연착하는 사이 따라잡은 올리비에가 리를 설득해서 다시 데려왔다고 한다. 이 스캔들이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후에 이를 모티브로 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 주연의 'V.I.P.'란 영화가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훗날 올리비에의 회고에 의하면 "호주에서 비비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1951년, 비비안 리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던 루키인 말론 브란도와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출연하면서 또 한번 세계를 대표하는 여배우라는 것을 입증했다. 이 영화는 브로드웨이에서 극찬을 받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연극이 원작인 영화로서, 비비안 리를 제외한 모든 배우들이 원작 연극의 출연자들이었다. [11] 브로드웨이판 블랑쉐 두보아 (여주인공 이름)를 맡았던 여배우가[12] 유명도/외모가 역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짤리고 비비안이 캐스팅되자 다른 출연자들과 감독의 반발이 매우 심했으나 유일하게 말론 브란도만 좋아했다고 한다. 이유는 그녀가 섹시해서라고. 이 영화 촬영 중 비비안 리와 말론 브란도는 절친이 되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처음 촬영할 시기에는 캐스팅 문제도 있고 자신들과 다른 타입의 연기를 하는 비비안 리에 대한 다른 배우들의 견제가 심했지만 점차 그녀의 엄청난 노력으로 그녀를 인정하게 된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에서 메소드 연기를 하지 않고 전통적인 연극 배우식 연기를 하는 연기자는 비비안 리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배역 자체가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있는 과잉 행동을 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녀의 연기 스타일이 역과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의 열연으로 비비안 리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두 번째로 수상하지만, 배역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녀의 조울증이 악화되고 만다. 안그래도 이 영화 전에 연극에서도 블랑쉐 두보아 역을 맡았는데 영화 촬영 기간까지 합치면 무려 9개월 간 정신 이상자 역을 연기한 것이다. 리 본인도 블랑쉐 두보아 역할이 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다고 인정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출연한 시절까지도 함께 연극활동을 하던 비비안 리와 올리비에는 결국 1958년에 별거에 들어가고, 1960년에 이혼했다. 올리비에와 비비안 리는 이혼 후에도 서로를 그리워했지만, 이미 다른 사람과 사는 관계로 더 이상의 관계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후 올리비에가 재혼한 상대는 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코메디 전문 연기자 조안 플로라이트였다.[13] 비비안 리의 영화 활동은 1965년 <바보들의 배 Ship of Fools>에 출연한 것이 마지막이다. 여기서 리는 다시 한 번 몰락한 남부의 미녀를 연기하는데, 젊음도 미모도 꿈도 모두 잃고, 홀로 남겨진 자신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조롱하는 장면은 마치 당시의 비비안 리 자신을 연기하는 듯 보여 가슴이 아플 정도다.
1967년 7월 8일 비비안 리는 오랜 투병 끝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폐결핵에 걸리게 된 사유는 흡연. 사실 비비안은 하루에 담배를 3갑 이상을 피울 정도로 지독한 골초였다고 한다. 사망 당시 올리비에의 사진을 꼭 쥐고 있었다고한다.
비비안 리는 사망 당시 존 멜리발이라는 배우와 동거 중이었는데, 멜리발은 리의 죽음을 확인 후, 곧바로 올리비에에게 연락했고, 리의 집에 도착한 올리비에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올리비에는 리의 장례식을 실질적으로 준비했고, 그녀의 장례식에는 그녀 생전의 세 배우자 - 홀만 박사, 올리비에 경, 그리고 존이 함께 했다. 조안 플로라이트의 인터뷰에 의하면 리가 죽은 뒤 올리비에는 한밤중에 그녀의 영화를 돌려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
말년에 그녀가 영화 출연을 하지 못하고 잊혀져 간 것을 슬퍼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앞에도 썼듯이 비비안 리는 스타가 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배우로서만 인정받기를 원했다. 본인도 연극배우로서 성공하는 것을 더욱 큰 업적으로 생각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대스타가 된 후 25년의 세월 동안 찍은 영화는 불과 8편 뿐이다. 영화와 연극 중 어느 걸 더 중시했는지에 대한 방증. 말년에 우울증이 심해진 것도 건강 악화로 인해 연극에 자주 설 수 없어서이다.
3. 여담
- 허리 사이즈가 19인치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건 정말 과격하게 코르셋을 조인 상태의 사이즈, 실제 비비안 리의 허리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촬영할 당시에 23인치였다.
- 그녀의 이름을 따서 만든 속옷 회사가 있다. 코메디언 주병진이 설립한 속옷회사 제임스 딘과 같은 경우이다. 다만 제임스 딘이 남녀 속옷을 모두 담당한 반면 비비안은 여성 속옷만 전문적으로 다뤘다.
- 휴고 비커스의 <비비안 리:어 바이오그래피> 에 원작을 통해 각색해서 전기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다.
[1] 수잔 리 홀만(Suzanne Leigh Holman). 비비안이 20살 때 낳은 딸이다. 작가, 배우로 활동하다 2015년 향년 81세로 죽음.[2]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회 수상한 여배우는 10여명에 불과하다. 대표적으로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잉그리드 버그만, 엘리자베스 테일러, 메릴 스트립, 조디 포스터, 힐러리 스웽크, 프랜시스 맥도먼드(2018년 기준) 등이 있다.[3] 비비안 리가 나타나자마자 '이 사람이 스칼렛 오하라다' 라며 바로 캐스팅했다고 한다...[4] 다만 해당 항목에도 나오지만 소설의 시작부터 스칼렛 오하라는 미녀가 아니라고 못 박을 정도로 그녀는 타고난 미녀설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매력적으로 여겨지던 요소 (잘록한 허리, 하얀 피부)를 가진 "호감가는 외모" 정도는 충분히 되었고, 본인의 화술과 매력으로 "주변 사람들이 그녀가 미녀가 아니란 걸" 눈치 못하게 할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비비안 리는 연기력으로 매력적인 스칼렛을 잘 표현하긴 했지만, 한눈에 봐도 절세미녀인 그녀는 엄밀히 따지면 설정에 딱 맞는 캐스팅은 아니다.[5] 여기 같이 출연한 말론 브란도와는 비비안 리가 죽을때까지 친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론 브란도는 메소드 연기를 제대로 보이며 본인을 각인시켰는데, 자신과 연기 스타일이 다른 비비안 리에게 훈수를 뒀다가 몇대 엊어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비비안 리는 연극배우답게 연기 스타일이 메소드 연기가 아닌 연극식의 연기를 하였는데, 이로 인해 다른 배우들에게 이름값에 비해 영 좋지 못한 취급을 받았지만 말론 브란도가 비비안 리가 섹시하다며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비안 리는 죽을 때까지 말론 브란도와 어느 정도 친했다고 한다.[6] 알려진 성인 리(Leigh)도 여기서 얻게된다.[7] 참고로 비비안 리는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팬이었고 배우 생활 초기에 만약 소설이 영화화가 된다면 자신이 스칼렛이 될 거라고 예언한 바 있다.[8] 당시 중국에서 비밀 결혼을 한 데다가 둘 다 공식 석상에서 결혼 여부에 대해 말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둘이 결혼을 했다 안 했다는 문제로 사회적으로 스캔들이 있었다. 당시 보수적 시대상에 여배우에게 이혼남과 동거하는 미혼녀 이미지가 박히는건 치명적이었다. 당대 유명 여배우인 로레타 영도 미혼모 출산을 숨기기 위해, 출산 후 친딸을 입양하는 연극을 보여야 했다.[9] 그렇다고는 해도 딱히 사이가 안 좋아져서 이혼 한 것은 아니라고. 채플린과 함께 하는 것이 고다드의 커리어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채플린은 영화를 느리게 만들기로 유명했다) 커리어를 위해 이혼 했다는 말이 많다.[10] 로렌스 올리비에가 히스클리프를 맡은 "폭풍의 언덕 (1939)"에서 상대 역인 캐시를 비비안에게 주려고 노력했으나 하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촬영 스캐줄과 겹쳤다. 이후 히치콕의 "레베카(1940)"에 부부 동반으로 주역에 물망에 올랐으나 캐스팅 된 건 로렌스 올리비에 뿐이었다. 덕분에 비비안 리를 제치고 선택된 조언 폰테인에게 로렌스 올리비에는 매우 차갑게 대했고 거기다 촬영 스태프가 죄다 영국인들인지라 미국인인 폰테인을 왕따시켰다고 폰테인이 후에 털어놓았다.[11] 사실 비비안도 영화에 캐스팅되기 직전 로렌스 올리비에가 연출을 맡은 영국판 공연에서 주연으로 출연 했었다. 그러나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에 출연한 거의 모든 배우들은 액터스 스튜디오 출신의 메소드 액터들이었다.[12] 브로드웨이 초연 배우는 제시카 텐디. 훗날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로 아카데미 최고령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그 배우다.[13] 코메디로 유명하지만 모든 연기 커버가 되는 대배우로 영국 왕실에서 작위도 수여받았다. 얼굴이 매우 평범한게 유일한 약점이라 젊은 시절에 코메디 장르에 자주 타입캐스트 되었다. 인터뷰 등등을 보면 외모와는 달리 고상하고 지적이면서도 유머있는 성격인데 아이러니 하게도 비비안 리도 조울증세가 오기 전에 그런 성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