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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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image]
'''여우주연상'''
'''제33회
(1960년)'''

'''제34회
(1961년)'''

'''제35회
(1962년)'''
시몬 시뇨레
(꼭대기 방)

'''엘리자베스 테일러
(버터필드 8)'''

소피아 로렌
(두 여인)

'''제38회
(1966년)'''

'''제39회
(1967년)'''

'''제40회
(1968년)'''
줄리 크리스티
(달링)

'''엘리자베스 테일러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캐서린 헵번
(초대받지 않은 손님)


''' 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
[image]
''' 여우주연상 '''
''' 제19회
(1966년) '''

''' 제20회
(1967년) '''

''' 제21회
(1968년) '''
줄리 크리스티
(달링)

'''엘리자베스 테일러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

에디스 에반스
(The Whisperers)

'''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image]
'''여우주연상 - 드라마'''
''' 제16회
(1959년) '''

''' 제17회
(1960년) '''

''' 제18회
(1961년) '''
수잔 헤이워드
(나는 살고싶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지난 여름 갑자기)'''

그리어 가슨
(선라이즈 앳 컴포벨로)


''' 역대 베를린 영화제'''
[image]
'''은곰상 - 여자연기자상'''
''' 제21회
(1971년) '''

''' 제22회
(1972년) '''

''' 제23회
(1973년) '''
시몬 시뇨레, 셜리 맥클레인
(고양이), (데스퍼레이트 캐릭터스)

'''엘리자베스 테일러
(해머스미스 이즈 아웃)'''

없음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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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이름'''
'''엘리자베스 테일러
ELIZABETH TAYLOR
'''
'''분야'''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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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color=#dda0dd> '''{{{#ffd700 6336 Hollywood Blv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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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e Elizabeth Taylor
DBE[1]
'''
'''본명'''
일리저버스 로즈먼드 테일러
(Elizabeth Rosemond Taylor)
'''국적'''
[image] 영국, [image] 미국
'''출생'''
1932년 2월 27일
영국 런던
'''사망'''
2011년 3월 23일 (향년 79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엔젤레스
'''직업'''
배우
'''활동'''
1942년 – 2003년
'''종교'''
유대교
'''신장'''
160cm[2]
'''배우자'''
콘래드 힐튼 주니어 (1950년 결혼 / 1951년 이혼)
마이클 와일딩 (1952년 결혼 / 1957년 이혼)
마이크 토드 (1957년 결혼 / 1958년 이혼)
에디 피셔[3] (1959년 결혼 / 1964년 이혼)
리처드 버튼 (1964년 결혼 / 1975년 이혼) (1975년 결혼 / 1976년 이혼)
존 워너 (1976년 결혼 / 1982년 이혼)
래리 포튼스키 (1991년 결혼 / 1996년 이혼)
'''자녀'''
아들 마이클 하워드 와일딩 주니어(1953년생)
아들 크리스토퍼 에드워드 와일딩(1955년생)
딸 엘리자베스 리자 프랜시스 토드(1957년생)
딸 마리아 버튼(1961년생)[4]
'''서명'''
[image]
1. 개요
2. 외모
3. 인간관계
4. 그 외
5. 어록


1. 개요


'''The Beauty'''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세기의 미녀[5]'''라고 평가받는 전설적인 여배우이자 출연하는 영화마다 대히트를 치며 '''30년[6] 가까이 명성인기를 한몸에 받은 톱스타'''이다. '''AFI(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7위'''에 선정되었다.
영국에서 태어난 영국, 미국의 영화배우. 런던 햄스티드에서 미국인인 프랜시스 렌 테일러(1897~1968)와 역시 미국인인 세라 비올라 웜브롯[7]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형제자매는 오빠 하워드 테일러가 있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은 할머니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애칭인 '리즈(Liz)'로 자주 불렸다. 영국에서 미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났기 때문에 출생 때부터 미국과 영국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었다.[8]
유대인과 무관했으나 유대인 남편인 마이크 토드와 결혼하면서 유대교개종하여 시오니즘에 지지를 보냈기에 아랍권에서 반발을 일으켜 입국금지를 당했다. 이집트피라미드를 보고 싶어했지만 이집트에서 입국금지를 당했다가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국교를 회복한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집트 여행을 갈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가족이 미국 LA으로 귀국하였다. 어릴때부터 예쁜 외모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1942년 10세 때 배우로 데뷔했으며 인기를 얻은 것은 <녹원의 천사>라는 영화에 아역배우로 출연했을 때부터였다. 이후 2001년까지 50편의 영화 - 드라마나 미니시리즈, 성우로 출연한 것까지 합치면 80여 편 - 를 찍으며 세계 최고의 미녀로 뽑히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젊은이의 양지>, <자이언트>,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클레오파트라>,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버터필드 8> 등이 있다. 단순히 외모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두 번이나[9] 받았으며 골든 글로브 4회, 영국 아카데미 2회 수상자이기도 했다. 특히 리처드 버튼과 함께 출연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외모를 잊게하는 리얼한 막장 부부 연기를 보여준 걸로 유명한데[10] 리처드 버튼[11], 조지 시걸, 그리고 샌디 데니스까지 네 명의 남녀 주조연들이 전부 아카데미의 해당 분야에 노미네이트 된 정도로 모든 출연자들의 연기 앙상블이 뛰어나다. 이 중 아카데미에서 수상한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샌디 데니스.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그저 미녀 배우로만 알고 있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8번의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도 유명하며, 2011년 3월 23일 울혈성 심부전증 투병 중 향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실상 그녀의 사망으로 20세기 할리우드의 여신이라 불리었던 여인들(마릴린 먼로,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대부분이 이제는 모두 역사 속으로만 남게 되었다.[12]

2. 외모


[image]

'''(美)의 화신(The Beauty Incarnate)'''

'''The NY Times[13]

'''

말 그대로 미녀대명사. 는 약 160cm였다는데, 그녀의 전성기 시절 엔 그녀의 키 역시 미인의 기준[14]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1963년 개봉한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역인 리처드 버튼과 열연한 주인공 클레오파트라 7세 역은 그녀가 아니면 소화하지 못했다고 할 정도.[15][16]
[image]
보라색 눈으로 유명하다. 다만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눈은 사실 짙은 파란색으로 사진과 조명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리즈의 눈, 먼로의 입술' 이라는 조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지금도 역대 최고의 아름다운 눈을 가진 배우로 평가 받는다. 또한 속눈썹이 두 겹으로 나서 더 예뻐 보인다.

3. 인간관계


리즈 테일러에 대해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결혼이혼인데, 힐튼 호텔의 후계자 콘래드 힐튼 주니어와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자그마치 8번의 결혼과 이혼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17] 결국 이덕분에 롤스로이스 팬텀 구매를 거부당했다.[18] 결혼까지는 안 갔다 하더라도 그 외에도 수많은 남자 배우들과의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말년에는 콜린 파렐과 친해졌는데 그는 리즈의 8번째 남편이 되길 원했다.
  • 콘래드 니키 힐튼 주니어 (Conrad Hilton Jr.) (1950-1951) - 힐튼 호텔의 경영자의 아들. 결혼 당시 테일러의 나이는 겨우 17살이었다. 이혼 사유는 남편의 폭력. 기사
  • 마이클 윌딩 (Michael Wilding) (1952-1957) - 영국 출신의 영화배우. 이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들 두 명을 낳았다.
  • 마이크 토드 (Mike Todd) (1957-1958)- 영화 제작자. 유태인으로 본명은 아브롬 히리쉬 골드보겐. 매우 재능 있는 사람이었지만 '테일러 남편'으로 더 알려졌다. 결혼 1년만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 딸 한 명을 얻었다.
  • 에디 피셔 (Eddie Fisher) (1959-1964) - 프랭크 시나트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팝 가수. 이 시기부터 테일러의 막장행보가 시작되는데, 에디 피셔는 유부남인 데다 마이크 토드의 친구였고 그의 부인인 영화배우 데비 레이놀즈는 테일러의 친구였다. 즉 남편의 친구이자 친구의 남편과 바람을 피운 것. 막장 드라마가 남의 일이 아니다. 이때, 아들과 참석한 파티에서 에디 피셔가 그의 아들에게 리즈 테일러를 가리키며 '저 여자 죽이지 않냐'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교황청에서도 이 불륜에 대해 비난했다. 그러나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라 출연 중에 상대 배우인 리처드 버튼이랑 눈이 맞아서 이혼했다.[19]
사실 에디 피셔도 엄청난 바람둥이었다. 심지어 여기저기 사생아를 만들다 보니 할리우드 파티에 참석한 에디 피셔의 아들이 이상하게도 유난히 끌리는 여자가 있기에 작업을 걸었는데 그 여자가 '우리 이복남매사이예요. 울 아빠도 에디 피셔'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사람의 이 유명한 스타워즈레아 공주역을 맡은 캐리 피셔. 참고로 캐리 피셔는 테일러의 딸은 아니다. 상술한 데비 레이놀즈의 딸. 테일러와 이혼한 에디 피셔는 슬럼프에 빠져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데비 레이놀즈는 테일러가 죽기 직전 병문안을 가서 화해를 했다고 한다.
  • 리처드 버튼 (Richard Burton) (1964-1975, 1975-1976) - 당대 최고의 터프가이로 유명한 웨일즈 출신의 배우.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역을 맡아 테일러와 함께 영화를 찍으며 사랑에 빠졌다. 버튼은 다혈질적인 성격에다가 알코올 의존증까지 있어서 테일러와 엄청나게 싸웠지만 테일러가 가장 사랑한 남자였고[20] 테일러는 죽은 후에 이 사람과 함께 묻히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둘의 결혼식은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불리웠으며, 이 때 버튼이 테일러에게 선물한 33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가 유명했다. 테일러와 에디 피셔 사이에서 입양한 딸 마리아를 재입양하기도 하였다.
  • 존 윌리엄 워너 (John William Warner) (1976-1982) - 정치인. 테일러와 결혼한 이후 그 후광으로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이후 5선까지 당선. 해군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 래리 포튼스키 (Larry Fortensky) (1991-1996) - 20살 연하의 건설 노동자이자 트럭 운전기사. 마이클 잭슨의 농장인 네버랜드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버턴과 이혼하고 워너를 만나기전, 주미 이란 대사인 아르데시 자헤디와도 염문을 뿌렸지만, 당시 이란 국왕 레자 팔레비의 압력으로 헤어졌다.
한때 할리우드 최고의 바람둥이이던 워런 비티와도 교제했다. 하지만 같은 바람둥이인데도 '사랑하면 결혼해야한다.'는 테일러와 '사랑해도 결혼은 최대한 미루자'는 워렌 비티의 결합은 곧 깨어진다.
[image]
'''마이클 잭슨과 절친한 친구 사이[21]였다.''' 둘은 1980년대 초에 처음 만났다. 마이클 잭슨이 아무런 연유도 없이 LA에서 열리는 자신의 콘서트 티켓을 리즈 테일러에게 보냈는데 마침 콘서트 날짜가 그녀의 생일인 2월 27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리즈 테일러는 콘서트를 구경하러 갔는데, VIP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불쾌해하며 자리를 떴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은 공연이 끝난 뒤 그 사실을 알고 다음 날 울면서 그녀와 통화를 시도했고, 리즈 테일러는 "마이클, 나 같은 유명한 스타는 절대 싼 좌석에 앉지 않아."라고 답을 하고 사과를 받아준 뒤 잭슨이 투어를 할 때마다 매일 통화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1989년 마이클 잭슨이 네버랜드로 이사하기 전 리즈 테일러가 잭슨에게 자기 집에 사는게 어떻겠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문제가 너무 복잡해질 것 같다고 느낀 마이클 잭슨은 계획대로 네버랜드로 이사를 갔다. 이후 마이클 잭슨은 1991년 리즈 테일러가 래리 포텐스키와 결혼을 했을 때 결혼식 장소로 네버랜드를 제공해주기도 하고 1993년 그가 성추행 논란에 휩싸였을 때 리즈에게 많이 의지하기도 했다.[22] 그리고 잭슨의 자녀 3명의 대모가 되었다.(대부는 맥컬리 컬킨) 2001년 잭슨의 마지막 공연때도 함께해주었다. 그리고 잭슨이 사망한 지 2년 뒤에 따라간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어서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원래는 취임식 때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암투병 때문에 방문이 무산되어 마이클 잭슨이 대신 그 친서를 전달해주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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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인 록 허드슨[23]에이즈 투병을 고백했을 때, 편견 없이 이전과 똑같이 대해준 몇 안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4. 그 외


  • 비슷한 클래스의 당대 여배우들[24]보다 장수하긴 했지만 향년 79세로 여자치고는 꽤나 이른 나이에 사망했는데, 상당히 지병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녹원의 천사>에서 승마하는 연기를 하다가 척추를 다쳤다. 이후 이 고질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고 말년에 휠체어 신세를 지기도 했다. 또한 뇌종양에 걸려 고생했고, 결국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 AIDS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는데, 1992년에는 이를 주제로 한 영화로 상을 받기도 했고 사망 후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에이즈 협회'라는 단체가 생기기도 했다.[25]
  • 2000년, 영국 신년 서훈명단(2000 New Year Honours)에서 대영제국 훈장 여성 2등급(DBE)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대영제국 훈장의 2등급은 받으면 호칭(Sir/Dame)이 따라붙는 '작위급 훈장'이다.[26] 남성의 기사작위(Knight Bachelor)와 동급인 특전인 것이다. 이에 따라, 리즈 테일러는 이때부터 '엘리자베스 테일러 여사(Dame Elizabeth Taylor, DBE)' 로 불렸다.
  • 2011년 12월에 테일러의 보석 컬렉션이 화제가 되었다. 낙찰 총액이 무려 115,932,000달러에 달했다고. 위에서 언급한 33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는 한국이랜드그룹에게 낙찰되어 대구의 테마파크 '이월드'에서 전시될 예정. 이 외에도 테일러는 진귀한 보석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리처드 버턴이 사준 것이었다. 버턴은 성격이 기분파였고 보석을 고르는 안목이 매우 뛰어나 테일러에게 불쑥불쑥 보석을 많이 선물했다고 하는데, <타지마할>의 주인공인 무굴 제국의 왕비가 소유했던 하트 모양의 다이아몬드나, 윈저 공작부인이 소지하고 있던 보석, 500년 전 파나마만에서 한 노예가 건져올려 펠리페 2세메리 1세에게 선물했던 세계 최대 크기의 천연진주 '라 페레그리나 진주'가 달린 목걸이[27]등이 있다.
  • 생전 테일러가 에이즈 예방 홍보대사였고, 성 소수자 인권 운동에 호의적이었다는 이유로 웨스트보로 침례교회에서 "잘 죽었다" 팻말을 들고 테일러의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 교회는 동성애 반대 운동을 굳이 장례식장에서 하는 것과 고인드립으로 악명 높다. 한편 장례식은 비공개로 거행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정많은 의리 있는 성격에 성 소수자 인권운동에 힘쓰고 동물을 무척 사랑했던 스타로 유명하다고 한다. 절친인 마이클 잭슨이나 동시대의 인격자 오드리 헵번에 가려졌지만 이분 또한 대인배이자 인성갑이었던 셈.
  • 그런데 의외로 공화당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6번째 남편이 공화당 정치인 존 워너여서 가입한 것이고,[28] 실제로 레이건 정부 시절에는 레이건 정부의 미진한 에이즈 대응으로 인하여 공화당과 사이가 좋았을 리가 만무하다.[29] 1982년에 이혼했는데, 그 이유들 중 하나가 레이건의 미진한 에이즈 대응으로 인한 공화당에 대한 불만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5. 어록


나는 항상 남편과 아이들을 원했지만, 가정주부로서의 내 삶은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내 자리는 관객들이 봐주는 영화속이다.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하지만 내가 정말 필요로 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 그것 뿐이었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헤어진다.'''

- 리처드 버튼과 이혼하면서[30]

성공은 탈취제 같다. 과거의 향기를 다 앗아가 버리니까.

나는 많은 남편과 보석을 얻으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내게도 삶은 그저 발생했다.

나는 남편 이외의 남자와 잔 적은 한번도 없다.

당신이 스캔들에 휘말릴 때 진짜 친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아름다움'''.

- 아카데미 시상식 후 피로연에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꼽으라고 했을 때의 대답.

내가 아는 이탈리아 단어는 오직 불가리(이탈리아 최고의 보석상, 리즈는 불가리의 뮤즈였다.)뿐.


[1] DBE를 받은 배우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외에 줄리 앤드루스, 헬렌 미렌, 매기 스미스, 주디 덴치,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등 열손가락 안에 든다. 다른 분야로는 추리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DBE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기사 준 2등급(Knight Bachelor)보다 높으며 KBE를 받은 찰리 채플린과 동등한 정식 2등급 기사 등급이다.[2] 프로필에는 157cm라고 나와 있으나 활동 당시 신체 정보가 나올 때 160cm라고 나왔고, 주변에서의 언급도 160cm였다.[3] 스타 워즈레아 오르가나로 유명한 캐리 피셔의 아빠다.[4] 입양한 딸이다.[5] 미의 상징이 된 많은 미녀들은 많지만, 그중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흔히 절대미의 배우라고 불린다. 다른 미덕들은 차치하고, 이상적인 외모 자체를 타고났다는 의미다. 그야말로 당대 의 표본. 누구보다 사진을 잘 받는, 어느 각도에서 촬영해도 결점이 없는, 가장 포토제닉한 등의 수식어가 붙는 아름다운 비율(比率)과 이목구비의 완벽한 얼굴로 평가 받는다.[6] 40년대~60년대. 10살부터 아역으로 타고난 연기자였으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번이나 수상한 뛰어난 연기력까지 갖춘 여배우. 알 사람은 아는 필모그래피와 연기력이지만 미녀 배우들이 그렇듯이 대중들에게 쉽게 연기파 배우로 조명되지 않는다. 그녀가 미의 기준으로 군림했던 당시 할리우드에서 존재감을 알 수 있다.[7] 1895~1994. 엄청난 극성 엄마였다. 이름을 그다지 날리지 못한 무명 배우 출신이라, 무명 시절 컴플렉스가 작용하여 엘리자베스를 스타로 만들려고 혹독히 키웠다. 또한 매일같이 엘리자베스의 사생활, 연인, 유명세 등등의 문제에 사사건건 난입하여 집착 증세를 놓지 못했다. 리즈 테일러의 절친 마이클 잭슨, 전성기 당시 제 2의 리즈 테일러라며 극찬을 받은 브룩 쉴즈와 비슷한 예시. 자신이 포기한 연예인의 꿈을 딸의 성공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전형적인 케이스라 볼 수 있겠다. 이러다 보니 엘리자베스가 커서 어머니랑 무척 크게 다퉜고 결국 절연하다 싶이 지내서 그녀의 집착에 대해 법적으로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죽을 때는 대충 참석만 하고 얼른 자리를 나오기도 할 정도. 비슷한 케이스가 드루 배리모어가 있다.[8] 당시에는 영국도 현재의 미국, 캐나다와 마찬가지로 국적 속지주의를 채택하여 부모의 국적과 관계없이 영국 영토 내에서 태어난 신생아에게는 자동적으로 영국 국적을 부여하였다. 물론 현재는 국적법이 속인주의로 개정되어 영국에서 태어났다고 자동으로 영국 국적이 부여되지는 않는다.[9]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회 수상한 여배우는 10여명에 불과하다. 대표적으로 잉그리드 버그만, 비비안 리, 메릴 스트립(2011년 기준), 조디 포스터, 힐러리 스웽크 등이 있다.[10] 이때 아카데미를 탔는데, 대리시상자가 다음해 졸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배우로 뛰어오르는 앤 밴크로프트이다. 여담으로 앤 밴크로프트는 1963년 오스카 수상자인데, 이때 참가하지 않아서 '''조안 크로포드'''가 대신 수상했다. [11] 찍을 당시 실제로 부부 였기에 더더욱 실감나고 살벌한 부부싸움 연기를 보여준다[12] 그녀 사망 이후인 2012년 그녀가 셀럽들 중 사후 수익 랭킹 1위를 차지했는데, 공교롭게도 이전까지 1위를 지속적으로 차지하던 인물이 돈독한 사이였던 '''마이클 잭슨'''이다.[13] 마릴린 먼로는 섹시함의 여신(sex goddess)이었고, 그레이스 켈리는 얼음 여왕 (ice queen) 이었으며, 오드리 헵번이 영원한 말괄량이(eternal gamine)였으면,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미의 화신 (beauty incarnate)이었다. -뉴욕 타임즈.[14] 당시 미국 여성 평균키는 160cm보다 컸다. 그녀는 당시 미국 여성 중에서도 왜소한 편이었던 것. 그랬는데도 닥치고 키 큰 거 좋아하는 미국에서(당시에도 키 170cm 이상 여자연예인들은 많았다.) 저런 얘기가 농담으로라도 나왔다는 것은 그녀의 인기 임팩트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15] 하지만 영화는 쫄딱 망했다. 당시 역대 최대규모인 약 4,500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였으나 흥행수익은 겨우 2,600만 달러(사실 그 해에 가장 높은 흥행수익을 거둔 영화긴 하지만, 제작비가 워낙 엄청난지라...)로 제작사인 20세기폭스사의 재정을 휘청이게 했다. 4,500만 달러는 2013년 기준으로 약 3억 5,000만불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근데 영화제작비가 이렇게 천정부지로 뛴 데는 테일러의 잘못이 크다. 대형세트를 짓고 엄청난 엑스트라를 동원해 영화를 찍다가, 남자주인공인 리처드 버튼과 사랑에 빠지자 감독과 제작사에겐 말도 없이 촬영을 중단하고 밀월여행을 떠나버린 것. 결국 영화 제작 기간이 크게 늘어나면서 제작비는 천정부지로 뛰어버렸고,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히던 조셉 L. 맨키위즈 감독(영화 '이브의 모든 것'으로 아카데미 작품상 및 감독상을 수상하는등 아카데미 감독상만 2번 수상)의 커리어도 그대로 끝나버렸다.[16] 다만 테일러의 책임이 100%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 테일러 자신도 당시에는 너무 아팠고(이때 사경을 해메는 수술을 한 탓에 목에 흉터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촬영이 여러번 중단되었고 영화 자체도 몇번 엎어졌다가 재촬영한 부분이 많다. 더군다나 감독과 배우의 요청으로 '''런던'''에서 이집트 장면을 찍는 바람에 사막의 이집트에서 입에 김이 나는 장면도 나올 정도이니 몇번의 재촬영을 겪은 것. 내용 자체는 그냥 셰익스피어 연극의 극화 정도니...[17] 그러나 이는 안타깝게도(?) 최고 기록은 아닌데, 자자 가보 라는 선배 배우가 9번이라는(!) 기록을 보유하였기 때문이다. 이 중 여덟 번째 결혼은 단 하루 만에 끝난 걸로도 유명하다. 참고로 자자 가보의 언니인 마그다 가보는 6번의 결혼을 하였고, 동생인 에바 가보는 다섯 번의 결혼을 하여 세 자매가 한 결혼 횟수를 모두 합하면 무려 20회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자자 가보의 세 번째 남편 이었던 조지 샌더스는 나중에 마그다 가보와 다시 결혼하고 1년 만에 이혼하였다. 이들 자매의 엄마인 졸리 가보도 세 차례의 결혼 경험이 있다. 패리스 힐튼과는 혈연으로 연결되진 않았지만, 자자 가보의 두 번째 남편이었던 콘래드 힐튼이 패리스 힐튼의 증조부이기 때문에, 항렬로 따지자면 패리스 힐튼은 자자 가보의 증손녀 뻘인데 그래서 페리스 힐튼이 한창 막장 행보로 이름을 날릴 때 자자 가보와 비견 되기도 하였었다. 1917년생인 자자 가보는 2011년에 과거에 당했던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한 감염 때문에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사경을 헤매다 2016년 12월 18일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자자 가보의 유일한 딸이었던 프란체스카 힐튼은 2015년 1월 어머니에 앞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링크한 기사 내용대로, 자자 가보 보다 26세 연하였던 마지막(9번째) 남편 안 할트와 프란체스카 힐튼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었다.[18] '''당시 롤스로이스는 엘비스 프레슬리에게도 판매를 거절했었다.'''[19] 클레오파트라 촬영장 근처 호텔에서 머물 때, 테일러는 피셔에게 자기를 안고 계단을 올라가달라고 요구했지만, 피셔가 비틀거리자 터프가이인 버튼이 피셔에게서 테일러를 빼앗아 계단을 올라갔고 피셔는 다음 날 역기를 샀다는 일화가 있다.[20]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과는 이혼 후 재혼했다가 다시 이혼했다.[21] 심지어 이 사람과도 염문설이 돌았다. 참고로 26살 차이.[22] 하지만 이는 마이클 잭슨에게 독으로 작용하기도 했는데, 리즈가 잭슨이 고용한 변호사들보다 더 나서는 바람에 전략회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23] 두 사람은 영화에서 부부 역할을 했었다.[24] 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 그레이스 켈리 등의 1950년대 스타들은 대부분 사고 혹은 건강문제로 일찍 숨졌다. 사실 당대 여배우들 중 장수한 인물이 거의 없긴 하지만...[25] 92년에 역시 에이즈로 사망한 프레디 머큐리 트리뷰트 공연에 나와 에이즈와 관련해 이야기하기도 했다.[26] 3등급 CBE, 4등급 OBE, 5등급 MBE는 그것만 받아서는 호칭이 따라붙지 않는 일반 훈장이다.[27] 테일러는 이 목걸이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선물한 버턴의 성격이 워낙 지랄같아 말도 못하고 한 층 전체를 차지한 스위트룸의 카페트를 일일이 발로 밟아가면서 몇 시간을 끙끙거리며 찾다가 키우던 개의 입속(!)에서 찾았다는 에피소드가 있다.[28] 당시 공화당 최대 유력자가 영화배우 출신 레이건인 것도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29] 정작 에이즈로 사망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절친 록 허드슨은 레이건의 절친이기도 하다. 허드슨의 사망으로 질병 이름이 에이즈로 공인되었다고.[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