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행정원

 


中華民國行政院 / The Executive Yuan of the Republic of China (Taiwan)
[image]
(중화민국 행정원 청사)
[image]
(행정원 로고)
1. 개요
2. 역사
3. 조직
4. 역대 행정원장
5. 역대 행정원 부원장
6. 기타


1. 개요


오권분립에 의거하여 중화민국(대만)의 행정부이다.
본청사는 타이베이시 중정구에 있으며, 본청사는 좁기 때문에 휘하 부서들은 타이베이 도심 총통부 인근에 흩어져 있다.

2. 역사


[image]
난징 시절의 행정원 건물. 총통부 영역 안에 있었다.
장제스중국 국민당국민혁명을 완수한 1928년에 국민정부의 행정부로써 출범하였다. 당시 초대 행정원장은 탄옌카이.
이후 1947년에 중화민국 헌법이 제정되면서 정식으로 헌정에 기반한 행정원이 출범했다.

3. 조직


행정원은 원장 1인, 부원장 1인, 비서장 1인, 부비서장 2인(비서실 차장), 여러 명의 정무 위원(무임소 장관), 각 부처 부장/부서장(장관) 및 상무차장 또는 정무차장(둘 다 차관에 해당), 주임위원(줄여서 주임, 위원회 위원장을 말한다)으로 구성된다.
행정원장은 총리에 해당하며 총통이 임명한다.[1] 영어 표기로는 총리를 뜻하는 Premier를 쓴다. 그리고 행정원 원장이 부원장, 비서장, 부비서장, 정무 위원(무임소 장관으로서 타이완성 주석 및 푸젠성 주석 직책이나 일부 위원회의 주임을 겸임한다), 각 부처 부장/부서장, 각종 위원회 주임, 행정원 대변인, 중앙은행 총재, 국립고궁박물원 원장 후보자를 제청하며 총통은 이에 따라 임명하고 이들이 내각을 구성한다. 그러나 일부 독립된 위원회의 주임위원(예를 들면 선거관리위원회 등)은 입법원의 동의를 받아야 임명될 수 있으며, 주어진 임기를 보장받는다.
본래는 행정원장의 임명에도 입법원의 동의가 필요했지만 1997년의 헌법 수정으로 현재는 행정원장의 인사권이 전적으로 총통에게 있다. 하지만 지금도 행정원이 입법원의 신임을 받아야 한다는 관습은 어느 정도 있다. 입법원은 행정원장에 대해 불신임안을 제출할 수 있고, 관례적으로 입법원 선거를 치르고 나면 새 입법원의 원내 구성과 상관없이 내각 구성원은 총통에게 사직서를 제출한다.[2] 또한 입법원의 동의권이 사라진 지금도 입법원 다수당이 마냥 안 된다고 뻗대는 사람을 총통이 행정원장으로 임명하기는 어렵다. 이게 정권교체가 일어나는 레임덕 기간에 간간히 벌어지는 일이다. 예를 들어 2016년 총통 선거와 입법원 총선에서 민주진보당이 압승했지만 중국 국민당마잉주 총통이 4개월간 계속 총통 자리에 있는데 국민당 출신인 마오즈궈(毛治國) 행정원장과 내각이 총사퇴서를 제출했지만 마잉주 총통이 사퇴서를 반려하고 차이잉원 총통 당선인과 민주진보당에게 4개월 간의 임시 행정원장 추천권을 준 사례가 있다. 민진당 측에서는 개헌이 필요하다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마잉주 총통의 계속된 양보[3]로 국민당-민진당 간 타협으로 무소속 장산정(張善政)[4] 행정원장을 지명하고 임시 내각을 운영한 예가 있다.
내각은 한국의 국무회의에 해당하는 행정원회의(行政院會議)를 열어 국가 정책을 결정한다. 행정원 원장, 부원장, 각 부처의 부장(장관), 정무위원은 의무 참석 대상이며, 그 외의 내각 구성원이나 직할시장(타이베이, 신베이, 타오위안, 타이중, 타이난, 가오슝), 기타 행정원 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인사가 참석 가능하다.
부서 및 위원회와 관련해서는 국가행정조직/중화민국을 참조.


4. 역대 행정원장


중화민국 역대 행정원장 문서 참조.

5. 역대 행정원 부원장


중화민국 역대 행정원 부원장 문서 참조.

6. 기타


  • 본청사는 타이베이시 중정구에 위치해 있으며 일제시대 타이베이시청이었다. 이 건물이 행정원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57년으로, 해방 직후에는 타이완 성 정부청사로 쓰였다가 타이완 성 정부청사가 난터우 중싱신춘으로 이사가면서 빈 건물에 행정원이 들어섰다. 해당 건물은 1940년에 지어졌는데, 화려하게 건물 장식을 붙이던 일제시대 관청 건물들과는 달리 소박하게 생겼다. 중일전쟁으로 인해 물자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한다. 행정부 본청사는 대만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국부천대 이전 행정원은 당시 중화민국 수도인 난징에 있었으며, 지금은 중국 인민해방군 난징정치학원(中国人民解放军南京政治学院)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해당 건물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중일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충칭에도 임시 행정원 청사로 쓰였던 건물이 남아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 북양정부에서는 국무총리의 직함을 사용했지만 북양정부를 엎어버린 중국 국민당에서 쑨원을 '''영원한 총리'''라고 신격화했고 장제스은 '''영원한 총재'''라며 신격화했다. 그래서 총리라는 명칭을 쓰지 않는다.[2] 1995년에 이에 관련된 헌법 해석이 이루어진 바 있다. 링크(중국어)[3] 어차피 입법원이 민진당이 절대과반수(68석/113석)인 상황에서 마잉주 총통이 국민당 내각을 4개월간 레임덕 상태에서 이끌어봐야 마찰만 벌어진다는 이유다.[4] 4년 후 총통선거에서 한궈위 당시 가오슝 시장의 부총통 런닝메이트로 출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