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
1. 개요
바로크 초기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건반악기 연주자. 비슷한 시기의 같은 이탈리아 음악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가 오페라와 성악곡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프레스코발디는 기악음악, 특히 건반악기 음악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유럽 음악사의 대작곡가 중에서 최초로 기악음악에 매진했던 인물이었으며 그 덕분에 건반악기는 반주악기의 수준을 넘어 독자적인 음악영역과 예술성을 가진 악기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의 기악음악은 후대의 바로크 음악가들, 특히 북스테후데, 프로베르거, 바흐, 헨리 퍼셀 등 건반음악의 대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쳄발리스트들과 오르가니스트들의 중요한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프레스코발디는 1583년 이탈리아의 페라라(Ferrara)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필리포 프레스코발디(Filippo Frescobaldi)는 오르가니스트[2] 였으며 꽤 재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음악에 대한 관심과 재력 덕분인지 프레스코발디는 어려서부터 쟁쟁한 스승들 밑에서 음악을 배웠는데, 특히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이자 음악 교육자였던 루자스코 루자스키(Luzzasco Luzzaschi) 밑에서 음악교육을 받은 것이 나중에 그의 음악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자스키는 당시의 최신 발명품(?)에 해당되었던 아치쳄발로(archicembalo)에 대한 뛰어난 이론가이자 연주자였는데, 그 덕분에 프레스코발디는 건반악기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3]
프레스코발디는 어려서부터 음악 신동으로 각광받았는데 불과 14살 때 지역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고, 일찌감치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작곡과 연주를 선보였다. 20살이 되기 전에 이미 촉망받는 음악가로 귀족들의 후원도 받았다.
이처럼 전도유망했던 청년 음악가 프레스코발디는 20세경에 페라라를 떠나 로마로 간다. 그가 언제 로마로 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로마에서 프레스코발디에 대한 행적은 1607년 트라스테베레의 산타 마리아 성당(Santa Maria in Trastevere)의 오르가니스트(Girolamo Organista)로 1월부터 5월까지 재직했다는 기록에서 최초로 나타난다. 동시에 그는 로도스의 대주교 귀도 벤티볼료(Guido Bentivoglio, Archbishop of Rhodes)의 전속 음악가로 활동했으며 교황의 외교 사절(nuncio)이었던 귀도 대주교를 따라 유럽 각지를 여행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브뤼셀 궁에서 당시 영국 출신 유명 작곡가 피터 필립스(Peter Philips)를 만나기도 했으며 [4] 안트베르펀을 방문하여 플랑드르 음악을 공부하였다.
2.2. 이탈리아에서 일하게 되다
1608년 7월, 프레스코발디가 아직 네덜란드 지역에 머물고 있을 때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St. Peter's Basilica)에서 프레스코발디를 전속 오르가니스트로 데려오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그는 여름동안 네덜란드에 계속 머물렀으며 귀국 도중 밀라노 머물면서 자신의 건반음악 모음집까지 출판했던 탓에 영입 결정 후 무려 3개월이 지난 10월 말이 돼서야 정식으로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하였다. 프레스코발디는 이 직책에 연연하지 않고 다른 음악활동도 활발히 했으나 공식적으로는 죽을 때까지 이 오르가니스트 직책을 유지하였다.
같은 해인 1608년, 프레스코발디는 앞서 귀도 벤티볼료 대주교가 속한 벤티볼료 가문의 전속 악단에 참여하지만 정확하게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여성과 연애사건을 일으키는 바람에 탈퇴하게 된다. 1610년부터는 피에트로 알도브란디니 추기경(Cardinal Pietro Aldobrandini) 소속의 음악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1613년에는 오솔라 트라발리니(Orsola Travaglini)라는 여성과 결혼하는데, 결혼하기 전에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다. 프레스코발디 부부는 결혼 후 3명의 자녀를 더 낳아서 총 5명(3남 2녀)의 자식을 둔다.
1615년 건반악기를 위한 리체르카레 및 칸초나곡집을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까지도 자주 연주되는 그의 기악음악들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작곡 및 출판되었는데, 토카타 1집(1616), 토카타 2집(1627), 콘티뉴오와 악기를 위한 칸조나곡집(1628) 등이 연이어 출판되었다.
로마에서 13년간 활발한 연주 및 작곡활동을 하던 프레스코발디는 1628년 투스카니 대공(Grand Duke of Tuscany)으로부터 거액의 급료를 제안받고 피렌체(Florence)로 떠난다.[5] 프레스코발디는 약 6년간 피렌체에 머물면서 성당의 오르가니스트 및 궁정음악가로 활동하는데, 1630년에는 피렌체에서 두 개의 아리아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2.3. 말년
1634년 로마로 돌아온 프레스코발디는 교황 우르바노 8세(Pope Urban VIII)가 속한 바베리니(Barberini) 가문의 전속 음악가로 활동하게 되며 동시에 성 베드로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도 복귀한다. 이 시기 그는 매우 중요한 건반음악(주로 오르간을 위한)작품 모음집인 피오리 무지칼리(Fiori musicali, 음악의 꽃)를 출판하게 된다. 1635년에 초판을 발행한 후 1637년에는 증보판을 발행했는데, 이 작품집에 있는 작품들은 바로크시대를 넘어 19세기까지도 연구되었을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피오리 무지칼리를 출판할 당시 프레스코발디의 몸값은 당대의 어떤 음악가보다도 비쌌다고 한다. 이렇게 높은 인기와 명성을 누렸던 프레스코발디였지만 60살이 되던 1643년, 원인이 확실히 알려지지 않은 병에 걸려 10일간 크게 앓아 누었으며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12사도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18세기 후반 성당의 재건축 과정에서 무덤이 소실되고 말았으며, 현재 12사도 성당에는 그의 무덤 대신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3. 프레스코발디의 음악
3.1. 기악 음악
프레스코발디는 당대부터 건반음악의 대가로 널리 알려졌으며, 한동안은 그의 음악이 그대로 로마에서 유행하는 음악이 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의 음악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루자스코 루자스키를 비롯, 아스카니오 마요네(Ascanio Mayone), 지오바니 마리아 트라바치(Giovanni Maria Trabaci), 클라우디오 메룰로(Claudio Merulo) 와 같은 베네치아 악파의 선배작곡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프레스코발디의 음악에 사용된 화성과 대위법도 기본적으로 베네치아 악파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고 있다. 이처럼 프레스코발디는 음악어법 자체에 혁명을 가져온 작곡가는 아니었지만, 건반악기를 위한 각종 연주기술을 창안하고 음악양식을 확립한 데에서 그의 진가가 드러난다.
르네상스 시기에 발명된 건반악기는 처음에는 통주저음에 사용되는 반주악기 또는 류트나 성악 등의 대체 악기 정도로 사용되었으며 연주 양식이나 기법 측면에서도 기존 악기(또는 성악)의 수법들을 많이 모방하였다. 그런데 프레스코발디는 화려한 장식음, 빠른 전개(속주), 반음계적인 패시지 등 건반악기의 특성에 어울리는 독자적인 연주수법들을 많이 창안하거나 발전시켰다. 특히 프레스코발디는 그간 사용되었던 정량기보법(mensural notation)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곡의 템포를 지정하고 곡 내에서도 자주 템포를 변화시켰다. 이런 템포의 지정과 변화는 프레스코발디가 처음 창안한 것은 아니고 이미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나 몬테베르디 등의 선배작곡가들이 성악곡에 기쁨이나 슬픔 등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었으나 프레스코발디는 이를 '''기악작품에''' 본격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3.1.1. 자유로운 곡들
전술한 여러 특징들을 보여주는 프레스코발디의 음악들을 하나 들어보자.
프레스코발디는 건반음악의 양식 측면에서도 많은 공헌을 했는데, 토카타, 카프리치오(capriccio), 리체르카레(ricercare), 칸조나(canzona), 환상곡(fantasia) 등의 음악 양식을 건반악기용으로 정착시켰다. '''토카타/카프리치오'''는 주제가 불규칙하게 반복되고 템포가 자주 바뀌면서 연주자의 연주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화려한 연주기법을 장착한 음악양식이 되었고,[10] '''리체르카레'''는 주제 제시 후 성부간 모방을 특징으로 하며 후에 푸가(fugue)로 발전하였고, 토카타와 리체르카레의 중간쯤 위치한 '''칸초나'''는 원래 성악곡 양식이었는데 기악 양식으로 이식되면서 리듬을 강조하고 곡 전체가 몇 개의 부분(section)로 나누어지는 특징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환상곡'''은 즉흥곡(impromptu)에서 유래한 음악 양식으로 형식이나 대위법 등의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작곡자의 악상을 자유롭게 풀어나간다.
3.1.2. 변주곡
한편 프레스코발디는 춤곡을 차용한 변주곡 양식을 최초로 시도한 작곡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원래 '''춤곡'''이었던 샤콘느(ciaconna)나 파사칼리아(passacaglia)의 변주기법에 주목하여 이를 좀더 확장시키고 체계화시켜서 건반악기용 음악장르로 정착시켰다. 1637년에 발표된 '100개의 선율을 묶은 파사칼리아(Cento Partite Sopra Passacagli)'는 프레스코발디의 건반음악 가운데 가장 길고 복잡한 작품으로 그의 건반음악의 절정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이 파사칼리아는 진짜 100개 수준의 악절을 합쳐놓은 작품인데, 단순히 각 악절을 평면적으로 엮어놓은 것이 아니라 각 악절이 다른 악절의 특징 일부를 공유하여 한 선율이 다른 선율의 변주에 해당되도록 작곡한 것으로, 작곡가로서 프레스코발디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프레스코발디의 변주곡인 'Aria detta la Frescobalda(프레스코발디의 아리아로부터)'는 자작 주제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변주곡으로 알려져 있다. 당대의 유행음악이나 다른 사람이 작곡한 선율을 바탕으로 변주곡을 작곡한 경우는 프레스코발디 이전에도 있었지만 자작 주제를 사용한 것은 프레스코발디가 최초인 것. 변주 패턴이 정해져 있는 샤콘느나 파사칼리아와 달리 이 작품은 특정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주제가 변용된다.[11] 기타편곡도 들어보자.
이처럼 프레스코발디는 그 때까지 주로 반주나 성악곡의 막간 연주 등에 사용되었던 건반악기를 독자적인 음악성을 가진 연주악기로 탈바꿈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그의 음악은 그의 사후에도 무려 1세기 이상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오늘날 피아노라는 건반악기가 서양의 모든 악기 중에서도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으며 수많은 음악인들이 이 악기를 위한 연주와 작곡에 매진하고 있는데, 이렇게 건반악기가 '''악기의 황제'''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최초의 음악가가 바로 프레스코발디이다. 후술하는 것처럼 심지어 현대의 작곡가들도 프레스코발디의 음악에 관심과 경의를 표시하고 있다.
3.2. 피오리 무지칼리(음악의 꽃)
피오리 무지칼리(Fiori Musicali, 음악의 꽃)는 1635년 베네치아에서 발표된 오르간 미사곡집이다. 작곡자 본인이 이 작품집에 '음악의 꽃'이라고 이름붙일 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이 피오리 무지칼리는 프레스코발디 기악음악의 정점에 있는 작품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의 작품 가운데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따로 항목까지 작성된 것이다. 성악이 아니라 기악을 위한 미사는 프레스코발디 이전에도 종종 시도되었으나 이 피오리 무지칼리에서 기악 미사의 음악적 가능성이 본격 확인되면서 유행처럼 기악 미사들이 작곡되기 시작하였고, 후에 바로크 시기 프랑스의 중요한 음악장르였던 프랑스 오르간 미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바흐도 이 피오리 무지칼리를 필사해가면서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그가 남긴 오르간 미사에 이 피오리 무지칼리의 흔적이 엿보인다.
피오리 무지칼리에는 3곡의 미사가 있는데 각각 미사 도메니카(Missa della Domenica, 일명 주일 미사), 미사 아포스톨리(Missa degli Apostoli, 사도들의 미사), 미사 마돈나(Missa della Madonna, 성처녀의 미사)이다. 이 피오리 무지칼리의 세 미사는 키리에(Kyrie), 글로리아(Gloria), 크레도(Credo), 상투스(Sanctus), 베네딕투스(Benedictus), 아뉴스 데이(Agnus Dei) 등의 통상문[12] 에 근거한 기존의 성악 미사들과는 다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입당송에 해당되는 avanti la Messa, 키리에/크리스테(Kyrie/Christe), dopo l'epistola(Graduale, 화답송), dopo il Credo(Offertorium, 봉납송), per l'Elevazione(Elevatio, 승천송), post il Communio(post Communio, 후영성체송) 등 6부(part)로 구성되어 있다.[13]
프레스코발디는 이 오르간 미사의 각 파트에 독자적인 음악형식을 만들기 보다는 기존의 기악음악의 형식을 활용하였는데, 첫 번째 입당송은 토카타, 화답송은 칸조나, 봉납송은 토카타와 리체르카레, 승천송은 토카타(사도들의 미사에서는 토카타와 리체르카레), 후영성체송은 칸조나 형식으로 작곡되었다. 언급하지 않은 키리에/크리스테 부분은 좀 특별한데, 전례음악인 그레고리오 성가의 키리에와 크리스테의 선율을 바탕으로 한 여러 개의 짧은 곡(verse)으로 구성되어 있다.[14]
이 작품집이 특별한 것은 세속 기악양식인 토카타/칸조나/리체르카레 등으로도 얼마든지 심오하고 경건한 종교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일종의 전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피오리 무지칼리에서는 특유의 화려한 기교나 장식음 등을 절제하고 있으며 각 곡의 길이도 2~3분 내외로 비교적 짧은 편이다. 하지만 기법적으로는 한층 더 복잡한 대위법을 비롯한 각종 음악적 실험을 시도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사도들의 미사에 나오는 승천송 리체르카레(Recercar con obligo del Basso come apare)는 하나의 주제를 5도권(Circle of fifths) 법칙을 바탕으로 C → E(5도권 상행) → C → Eb(5도권 하행) → C 와 같은 식으로 주제의 조성을 변화시킨다.
한편 피오리 무지칼리에는 3곡의 미사 이후 2개의 카프리치오가 포함되어 있는데, 각각 Capriccio Bergamasca와 Capriccio sopra la Girolmeta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당시의 세속 유행가의 선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별한 종교적 의미가 없는 두 카프리치오가 왜 피오리 무지칼리에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는데, 종교적 의미 여부와 별도로 음악적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작품이다. 각 작품은 다시 여러 부분(sect)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동일한 유행가 선율을 각 sect마다 상당히 다른 분위기로 전개시킨다.
3.3. 성악곡
기악분야에서 우뚝 빛나는 별인 것과 달리 성악분야에서 프레스코발디의 위상은 상당히 초라한 편이다. 그의 성악곡은 기악곡과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인기가 없어서 한동안은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가 그나마 최근의 고음악 부활 분위기를 타고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은 당시 성악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던 선배 작곡가 몬테베르디 등에게 밀렸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 그의 성악곡들이 대체로 당대의 음악문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탓에 임팩트나 독창성이 부족한 점이 더 크게 작용하였다. 예를 들어 1630년에 피렌체에서 출판된 그의 2개의 아리아집 중에 1권의 'A piè della gran croce(거대한 십자가의 발밑에서)'를 들어보자.
이 아리아 모음집은 창법이나 선율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자신보다 한세대 이전의 작곡가였던 줄리오 카치니나 야코포 페리(Jacopo Peri)의 모노디가 연상될 정도로 옛스러운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세속음악 외에 미사나 모테트 등의 종교음악 분야에서도 프레스코발디의 작품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다성양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등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연주도 자주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너무 부정적인 측면만 서술했는데 그래도 현재에는 그의 성악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특히 몇몇 작품들은 프레스코발디라는 이름값을 등에 업고 상당한 유명세를 타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아리아 'Se l´aura spira tutta vezzosa(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와 같은 작품은 유튜브 등에서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자주 연주되고 있으며 음반도 다수 나와 있다.
4. 여담
- 프레스코발디는 현대 작곡가들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작곡가로, 특히 대위법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작품을 참고한다고 한다. 벨라 바르톡은 프레스코발디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토카타 2집에 있는 토카타 5번을 피아노용으로 편곡하기도 했고, 리게티는 자신의 피아노곡 '무지카 리체르카타(Musica Ricercata)의 마지막 곡에서 프레스코발디의 테마와 대위법을 활용하였으며 아예 부제를 'Omaggio a Frescobaldi(프레스코발디의 오마쥬)'라고 적어 놓았다.
[1] 초상화에 적힌 라틴어 문구는 "히에로뉘무스 프레스코발두스('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를 라틴어 식으로 쓴 것) 페라라 출신의 36세의 로마시 성 베드로 성당 오르가니스트"이다. 그림 좌측 하단에 화가(클로드 믈랑(Claude Mellan. 1598-1688))의 서명이 보인다.[2] 직업 오르가니스트였는지는 불확실[3] 이 악기에 대한 자세한 것은 위키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4] 피터 필립스는 영국 출신이었으나 가톨릭 수도자라는 이유로 당시 개신교 분위기가 강했던 영국에서 추방당해서 주로 네덜란드 지역에서 활동하였다.[5] 원칙적으로 피렌체로 떠나기 위해서는 성 베드로 바실리카 성당의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그만두어야 했는데 성당에서는 그를 해고하는 대신 일종의 휴직처리를 해서 자리를 유지하도록 했다. 당시 프레스코발디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6] 이 부제를 번역하면 대략 '노력하는 자가 끝에 도달한다'라는 뜻. 노력을 하면 이 곡을 끝까지 칠 수 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노력을 하면 결실을 거둔다는 통상적인 교훈일 수도 있는데, 이 외에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7] 위 음악은 토카타집 2권의 토카타 9번으로 'Non senza fatiga si giunge al fine'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6] 자세히 들어보면 트릴과 아르페지오를 비롯한 다양한 장식음, 양손의 음렬 병진행, 대위법에 의거한 성부간 선율 및 리듬의 모방 등 바로크 이후의 건반음악에서 일반화된 각종 연주법들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지속적으로 템포가 바뀌면서 빠른 진행과 느린 진행이 번갈아가면서 나타난다.[8] 1분 5초 경에 2번째 부분이 시작되고 2분 46초 경에 3번째 부분이 시작된다. 잘 들어보면 각 악절의 분위기가 사뭇 다른 것을 알 수 있다.[9] 총 3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8] 위에 예시한 토카타와 달리 템포와 박자가 비교적 일정하고 리듬이 선명하게 드러나서 좀더 무곡(舞曲)에 가깝게 들린다.[10] 카프리치오는 순수한 기악양식이었던 토카타와 달리 성악 양식인 마드리갈 등에서 기원했으나 프레스코발디 시절에는 이미 이 두 장르간의 차이가 그리 명확하지 않았다.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여서 같은 곡을 토카타로 명명할 것이나 카프리치오로 명명할 것이냐는 어디까지나 작곡자의 재량이다.[11] 예를 들면 샤콘느나 파사칼리아의 경우 주제와 변주의 마디수가 같다. 즉 주제가 8마디라면 변주도 8마디로 유지된다. 또한 적용하는 화성의 패턴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그래서 샤콘느나 파사칼리아는 대체로 주제가 짧고 변주의 범위도 어느 수준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데, 이는 두 장르가 기본적으로 춤곡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에 일정한 리듬과 박자를 특징으로 하는 춤곡의 특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던 탓이다. 자세한 것은 샤콘느 항목 참조.[12] 여기에 키리에 전에 입당송(Introitus)을, 아뉴스데이 뒤에 영성체송(communio) 또는 후영성체송(post communio)를 추가하기도 한다.[13] 다만 성처녀 미사는 후영성체송이 빠진 5부로 구성되어 있다.[14] 각각 일요일 미사는 12개, 사도들의 미사는 8개, 성처녀 미사는 6개의 verse로 구성되어 있다. 이 verse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절 그레고리오 성가 정선율을 바탕으로 작성된 다성음악 양식의 기악 버전으로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