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퍼셀

 


'''역대 웨스트민스터 사원 오르가니스트'''
존 블로

'''헨리 퍼셀'''

존 블로
[image]
1695년에 그려진 헨리 퍼셀의 초상화. 존 클로스터맨 作
'''Henry Purcell'''
'''출생'''
1659년 9월 10일
[image] 잉글랜드 연방 런던
'''사망'''
1695년 11월 21일 (향년 36세)
[image] 잉글랜드 왕국 런던
'''국적'''
[image] 영국
'''직업'''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청년 퍼셀
2.3. 오페라와 무대음악
2.4. 말년
3. 작품세계와 주요 작품
3.1. 무대음악, 오페라, 가면극
3.2. 기타 성악곡
3.3. 기악곡
4. 퍼셀에 대한 평가


▲ 세미오페라 《아서 왕''King Arthur, Z.628''》 3막 중 겨울 신의 아리아 '너는 무슨 힘으로''What Power Art Thou'''. 미칠듯한 분위기와 간지로 인해 영화 음악으로도 여러 차례 사용되었다. [1] [2]

▲ 부수음악 《압델라자르''Abdelazer, Z.570''》 중 론도(Rondeau). 연주는 Voice of Music으로, 시대연주 버전이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의 천재임이 틀림없다.'''

― 토머스 터드웨이, 퍼셀의 친구.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클래식 1001" p.68에서 재인용.

'''일찍이 영국에는 그보다 위대한 음악 천재가 존재하지 않았다.'''

― 로저 노스, 『음악의 문법학자''The Musicall Grammarian(1728)''』 中


1. 개요


바로크 시대영국 작곡가이자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오르가니스트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사람이며, 그의 생전에는 유명한 영국 음악가가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영국 음악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퍼셀 사후 유럽과 세계에서 영국의 지위는 날이 갈수록 상승하여 대영제국으로까지 발전했으나, 200년이 지나 19세기 후반에 드디어 에드워드 엘가구스타브 홀스트가 동시에 등장할 때까지 영국에서는 성공회 교회음악가 몇몇을 제외하면, 클래식 음악계 전반에서 저명한 작곡가를 배출하지 못했다.[3]는 점에서 헨리 퍼셀이 영국 고전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입지는 매우 크다. 36세에 너무나 아쉽게 요절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659년 9월 10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음악가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퍼셀의 형인 토마스 퍼셀(Thomas purcell)은 가수이자 작곡가였고, 역시 동생 대니얼 퍼셀(Daniel Purcell) 또한 걸출한 작곡가였다.[4] 그러나 퍼셀이 불과 5살이던 1664년에 '''퍼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 퍼셀은 마찬가지로 궁정 예배당에 직위를 가지고 있는 삼촌 토마스 퍼셀(Thomas Purcell)에게 맡겨지게 된다. 삼촌 아래 보호를 받으면 10살이 되던 1669년 궁정 예배당의 소년 성가대에 들어갔는데, 합창단의 지휘자였던 헨리 쿠크(Henry Cooke)와 그의 후임자인 펠햄 험프레이(Pelham Humfrey)의 밑에서 음악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바흐하이든이 그랬던 것처럼 퍼셀 역시 변성기를 피하지는 못했다. 14살이 되던 해인 1673년 퍼셀은 성가대를 나와 악기 관리인이었던 존 힝스턴(John Hingston)의 조수가 되었다. 공부 쪽으로는 그를 가르쳤던 험프레이가 타계하자 퍼셀은 존 블로의 밑에서 공부를 계속한다. 또한 3년 뒤인 1676년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필사자로 임명된다.
퍼셀은 모차르트처럼 어린 나이에서부터 작곡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남아있는 퍼셀의 최초의 작품은 1670년 작곡된 Sweet tyranness이다. 이 곡[5]은 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후에는 찬송가를 많이 작곡하는데, 16살이 되던 1675년에는 When Thyrsis did the splendid eye를 작곡한다.

2.2. 청년 퍼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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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셀은 스무살이 되던 해에 스승인 존 블로가 맡고 있던 웨스트민스터 성당의 오르가니스트 직을 물려받았다. 이 시기부터 퍼셀은 무대용 작품들과 비올을 위한 환상곡 등을 쓰기 시작한다. 한편으로 안정된 직위를 얻게 되자 퍼셀은 결혼도 하고[6] 동시에 교회음악 작곡에도 박차를 가했는데, 그가 결혼했던 1681년쯤 작곡한 《주여,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Hear My Prayer, O Lord''》등은 번민하는 듯 불협화음, 복잡한 대위법 등을 사용한 심오한 작품이다.

2.3. 오페라와 무대음악


1683년에 퍼셀은 성 세실리아 축일의 송가를 처음썼고, 극장용 음악도 점점 많이 썼다.《디도와 아이네아스''Dido and Aeneas, Z.626''》를 시작으로 1690년 오페라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sian, Z.627''》를 작곡하고, 1691년에는 《아서왕''King Arthur, Z.628''》, 1692년에는 《요정여왕''The Fairy Queen, Z.629''》등 걸작들을 쏟아냈다.

2.4. 말년


1695년 겨울이 끝나갈 무렵, 메리 2세를 위한 장송곡[7]을 작곡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자신의 장송곡이 되고 말았다. 퍼셀의 아내는 남편이 술집에 항상 너무 오래 죽치고 있어서 화가 나 있었는데, 어느 날 또 퍼셀이 술먹고 늦게까지 안 돌아오자 이번에야말로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문을 걸어잠가 버렸고, 퍼셀은 결국 계단에서 밤을 새다가 독감에 걸려서 죽었다고 한다.(...) 흠좀무. 퍼셀이 조금만 더 살아 창작을 계속했다면, 어떤 성취를 해낼지 짐작만 할 뿐이다.

3. 작품세계와 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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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셀은 언어와 음악의 절묘한 접목과 선율, 프랑스이탈리아 양식을 모두 포괄하는 음악성, 특이한 작법[8] 등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은 오페라 《디도와 아에네아스》(Dido and Aeneas)이다. 작곡 연도는 1689년. 당시 영국은 음악의 변방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기악곡 및 오페라에서 별 볼 일이 없었다. 그나마 블로, 애비슨, 스탠리 같은 작곡가들이 있다는 정도쯤? 그런 와중에 퍼셀의 이 오페라는 전체 바로크 오페라들을 놓고 보더라도 기념비적인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 오르간트럼펫을 위한 곡을 작곡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클래식덕후 외에는 그다지 알려진 기악곡 히트작이 없다. 이하에 소개되는 "뉴 그라운드" 같은 몇몇 건반 소품들이 그나마 알려져 있고, 1997년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장례를 치를 때에도 퍼셀의 곡이 연주되었다. 그런데... 제목은 모르는데 곡조는 아는 작품이 하나 있다! 다름아닌 '''《압델라자르》(Abdelazer)[9] 중 론도(Rondeau)'''[10]로, 영화 《오만과 편견》 에 삽입되었으며 훗날 벤저민 브리튼의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 에서 한번 더 활용되기도 했던 선율이다. 귀족적인 우아함과 당당함 덕분에 마성의 BGM/시크 왜곡계로도 분류되고 있다.
퍼셀의 작품은 알파벳 Z로 표기하고 있다. 아래의 숫자를 보면 알겠지만 퍼셀도 상당한 다작 작곡가.
주요 작품들을 소개하자면 이하와 같다.

3.1. 무대음악, 오페라, 가면극



3.2. 기타 성악곡



《메리 2세 여왕을 위한 장례 음악》 Z.860 중 행진곡(March : Sounded Before Her Chariot).

3.3. 기악곡



건반 악기를 위한 《Music's Handmaid》 중 〈A New Ground〉 Z.682.[11] 연주는 시대연주의 본좌인 구스타프 레온하르트. 연주 악기는 하프시코드.

4. 퍼셀에 대한 평가


'''퍼셀의 음악은 움직임으로, 춤으로 가득하다. 세상 어디를 봐도 그의 음악만큼 연기하기 편안한 음악은 없다.'''

구스타브 홀스트

'''셰익스피어가 아무리 위대해도 퍼셀의 세이렌의 노래[12]

가 없었다면 대중을 사로잡지 못했을 것이다.'''

―퍼셀의 추도문 中, 1695년

'''우리가 마침내 찾아낸, 세계 최고에 필적할 만한 영국인의 가치를 지닌 퍼셀.'''

―존 드라이든(John Dryden)


[1] 우리의 사랑(À nos amours)(1983)(클라우스 노미 버전), 사울의 아들 예고편,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 본래는 베이스를 위한 곡이지만 전위 뮤지션 클라우스 노미의 커버처럼 카운터테너 레퍼토리로도 자주 쓰이며 안드레아스 숄이 부르기도 했다. 심지어 스팅까지도 커버한 적 있는 아리아. 이 때문에 'cold song'이라는 제목으로도 유명하며,[3] 조지 프레드릭 헨델이 일찌감치 런던에 정착하여 영어로 된 오라토리오를 남겼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도 음악가로서 전성기의 후반부를 런던에서 누렸지만, 이 둘은 독일-오스트리아 음악의 거장으로 분류되지, 영국 음악가로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다만 헨델은 완전히 영국에 귀화했기 때문에 영국 음악가로 분류하기도 한다.[4] My dearest, my fairest는 헨리 퍼셀의 곡인지 대니얼 퍼셀의 곡인지 논란이 있는 곡이다.[5] 3성부이다.[6] 슬하에 여러 명의 자식이 있었으나 성인이 된 자식은 아들과 딸 한명 뿐이었다.[7] Funeral Sentences and Music for the Funeral of Queen Mary Z.860[8] 대표적으로 아서 왕 중 서리 장면에 나오는, 아래의 떨리는 듯한 아리아 What Power Art Thou가 있다.[9] "무어인의 복수" 라고도 한다.[10] 사실상 이 곡이 퍼셀의 대표곡이자 가장 유명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11] 잠깐만 연습하면 쉽게 칠 수 있는 저난이도의 곡이다. 구성은 두도막 형식. Pieter-Jan Belder나 Malcolm Proud의 연주도 좋다.[12] 오페라 아서 왕에 나오는 아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