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원
1. 소개
昌慶苑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창경궁을 훼손하여 만든 유원지. 1983~1986년에 거쳐 철거되고, 동물원 기능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전되었다.
1983년 폐쇄되기 전되기 전까지 서울에서 가장 큰 유원지이자 동식물원이자 테마파크, 놀이공원으로써 주말마다 가족 나들이객으로 붐비며 각광받았던 곳이다. 80년대 이전부터 서울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창경원에 가족들과 놀러가 바람을 쐤던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2. 상세
1909년(융희 3년)에 일본인들이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 등으로 우울함과 걱정 근심에 빠진 순종의 마음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궁궐에 동물을 들여왔는데,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궁궐 안 전각 일부를 철거하고는 일본식 정원과 건물을 세우고, 창경궁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개명해 격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창경궁은 궁궐이 아닌 유원지로 바뀌어 버린다. 개원식에 순종은 모닝코트에 중절모와 지팡이까지 짚은 서양 신사의 모습으로 참석했으나 정작 동물원 개원을 주도했던 이토 히로부미 전 총리는 개원 닷새 전에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하여 참석하지 못했다.
순종이 조선 시대의 신분 제도상 일반 평민과 천민들도 궁궐을 자유롭게 오가고 구경할 수 있도록 창경원으로 바꿨다는 설도 있었는데 순종이 즉위하기 20여 년전에 갑오개혁(갑오경장)을 통해서 법적인 신분제가 사라졌으며, 양반일지라도 관직에 있거나 어명이 있지 않은 이상 누구도 궁에 들어올 수 없었으므로 그 반론은 타당하지 않다. 게다가 순종 당시 실권이 누구에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순종이 그렇게 명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온전히 순종의 뜻이라고 볼 수도 없다. 순종 생전에는 순종이 산책하던 매주 목요일이 창경원 휴무일이었다.
많은 훼손 끝에 왕족의 거주 공간이었던 창경원은 개원과 동시에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누구나 입장료만 지불하면 이용할 수 있는 공중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배치를 살펴보면, 중앙에는 박물관 영역, 북쪽에는 식물원 영역, 남쪽에는 동물원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식물원 지구에는 대온실을 중심으로 한 식물배양실등 열대 식물의 전시 및 관리 기능이 집약되었으며, 동물원 영역의 연못은 수금방양소로 만들고, 이 주변으로 각종 동물사와 동물 온실을 신축했다. 박물관 시설은 본관 건물뿐만 아니라, 기존의 전각들을 전시 시설로 흡수했으며, 전각 사이에는 서양식 정원을 조성해 꽃을 계획적으로 재배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 이르면 아동운동장이나 말운동장과 같이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첫째, 창경원은 동·식물원을 통해 희귀한 동물과 식물들을 대중적으로 접할 수 있는 낙원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는 꽃관상이나 동물 구경과 같은 새로운 대중오락을 만들어냈다. 둘째, 창경원은 도시의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도시 안에서 도시 밖 자연을 간직한 낙원’을 상징하며, 도시민의 여가 공간이 되었다. 셋째, 벚꽃의 개화기에 야간 개방이 시작되면서 창경원에서는 조명 효과를 중심으로 ‘환상적인 밤 경관’이 연출되었다. 이러한 밤벚꽃놀이는 각종 공연, 음주 등과 결합되면서 선정적으로 변해갔고, 그 결과 창경원은 일탈의 낙원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창경원은 다양한 성격의 시설이 혼재되면서 유원지라는 새로운 유형의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했으며, 사람들은 유원지에서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오락 문화를 수용했다.
1922년에는 창경원에 벚꽃을 심어서 일본인들이 벚꽃놀이를 즐기도록 하였으며 1924년에는 불꽃놀이도 열었다. 일본인들이 기틀을 닦아서인지 앵무새들은 해방 이후에도 일본어[1] 를 따라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폭격으로 우리가 파손될 경우 맹수들이 탈출하여 사람들을 해칠까봐 일제 군경에 의해 호랑이, 사자, 코끼리 등, 21종 38마리의 동물들이 몰살되기도 했으며[2] 광복 이후 280마리 정도의 동물들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얼마 안가 1950년 6.25 전쟁이 터졌고, 개전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됨에 따라 사육사들과 동물들은 순식간에 인민군 치하에 놓였다. 근데 의외로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도 동물들은 안전하게 보살핌을 받으며 살 수 있었다. 아마 이데올로기와 동물이 전혀 관계가 없었을테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대한민국이 동물원을 수복했을 때도 사육사와 동물은 무리 없이 인수됐지만 1951년 1월, 중공군의 개입과 반격으로 1.4 후퇴가 이뤄지고 이때는 사육사들도 피난 행렬에 동참했다. 2개월 뒤 서울을 재수복하고 사육사들이 창경원으로 돌아왔을 땐 말 그대로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낙타, 사슴, 얼룩말 등은 피란민들에게 도살되어 잡아 먹힌 듯 머리만 남아 있었고, 여우와 너구리, 오소리, 삵 등은 굴 속에서 혹은 돌 틈에 끼어 죽어 있었다. 그 밖에 다른 동물들도 모두 굶어 죽거나 얼어 죽어서 열어 둔 동물사에 살아 움직이는 동물은 한 마리도 없었다.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창경원의 텅 빈 우리에 전방의 군인들이 야생에서 잡아서 보낸 곰과 산양, 노루, 삵 등이 다시 들어오자, 전쟁 후 피폐한 삶을 살던 시민들의 큰 위안이 되었다. 얼마 뒤 동식물원 재건 위원회가 출범하여 정부 기관 및 기업체, 독지가들로부터 42만 2천 달러의 재건 기금을 모았다. 이런 노력 끝에 드디어 1954년 7월 15일 창경원의 동식물원이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3] 또 1955년 사자와 호랑이, 코끼리, 북극곰, 물개, 하마, 낙타 등 10여 종의 동물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등 지속적인 노력으로 동물원 재건 2년 만에 100종 500마리를 전시하여 동물원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동물원 외에도 놀이공원, 케이블 카 등의 시설이 운영되었다. 구경거리가 된다는 관용구로 "창경원 원숭이 꼴"이라는 말이 있었다. 지금도 40대 ~ 50대 이상의 연령대는 자주 쓰는 말이다. 1970년대 서울 강북 지역에 살았던 국민학생들은 여기로 소풍을 많이 갔다고 한다.
1976년 신문기사를 보면, 1년에 동물 구입에 쓸 수 있는 예산이 18,000달러밖에 되지 않는데 이 돈으로는 기린 1쌍밖에 살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짝을 잃은 동물 대부분은 독수공방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3. 이모저모
3.1. 사건 사고
한국 동물원 역사의 산증인인 김정만 박사의 술회에 의하면 1958년 그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제대로 된 동물학 장서조차 없었고 의료 장비도 열악해서 동물이 아파도 원인을 못찾아서 장님 코끼리 만지듯 진료하다 맥없이 폐사하는 사례도 많았다고 한다. 따로 책을 찾아 공부하고 일본 동물원에 가서 어떤 장비로 어떤 진료를 하는지 배우고 도입하면서 차차 보완해 나갔다고. 김 박사가 라디오에 출연해 밝힌 옛이야기중엔 시대별 관람문화에 관한 것도 있었는데 모두가 못살던 60년대에는 싸온 주전부리를 관객들만 먹다가, 경제사정이 다소 나아진 70년대에는 반쯤 먹다 던져주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때문에 사람의 전염병(대표적으로 결핵)이 동물로 옮겨지는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한다.
3.1.1. 표범 피습 사건
일제강점기 중의 일이라고 한다. 일본인 사육사가 한국 표범 우리를 청소하고 있었는데, 닫힌 줄 알았던 내실 문이 열려 있었다. 살그머니 기어나온 표범이 사육사를 정면에서 덮쳤고 -한데 엉킨 사육사와 표범은 한덩어리가 되어 우리에서 굴러나왔다. 이때 마침 동물원 경비를 맡고 있던 일본군 헌병 장교가 지나가다가 현장을 발견하고 군도를 뽑아 표범을 찔러 사육사를 구했고, 얼굴이 상처투성이가 된 사육사는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용감히 싸웠다 해서 훈장도 받았으나 창경원은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한편 표범은 몸에 칼을 꽂은 채 내실로 도망쳤고, 누구도 '''칼 맞은 표범이 있는 내실'''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헌병 장교는 빈 칼집만 차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표범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보름이 지나자 표범은 멀쩡하게 내실 밖으로 걸어나왔고, 군도는 후에 녹슨 채로 내실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것을 꺼냈다고 한다.
후에 태평양 전쟁 시기 모든 맹수를 독살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독을 든 고기를 주니 사자나 호랑이들은 바로 먹고 자빠지는데 표범들은 그 희미한 독 냄새를 맡고 바로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다른 표범들은 며칠 뒤에 결국 독먹이를 먹었는데, 한국 표범은 스무날이 되도록 먹지 않아 결국 따로 처분해야 했다고...
3.1.2. 반달곰 사건
1956년 11월 13일 사육사 윤봉우 씨가 곰 사육사에서 아침 청소를 하던중 반달곰에게 엉덩이를 물어 뜯겼다. 반달곰이 관광객들이 가져온 음식 냄새를 맡고 청소를 하기 위해 열어놓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걸 보고 윤씨가 다급히 문을 닫자 화가 난 반달곰이 깔아뭉개고 엉덩이를 물어뜯은 것. 당시 경비를 위해 나와있던 육군 헌병이 권총 3발을 발사, 반달곰은 사살되었고 윤씨는 목숨을 구했다.
3.1.3. 녹두 사건
1961년 9월 30일 동양 철학을 연구한다는 백영주 씨가 창경원에 들어와 사슴 한마리의 목을 잘라갔다. 외팔잡이인 백씨는 동양 철학에 관한 책을 읽다가 사슴을 활로 죽인다음 녹두를 잘라서 백일 동안 먹으면 천하 장사가 된다는 얘기를 보고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 사건은 4년 동안 해결되지 않아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가 백씨가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대한민국 수사진은 엉터리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을 옆자리에 있던 형사가 듣고 조사한 결과 범인이라고 밝혀졌다.
3.1.4. 비단 구렁이 탈출 사건
1965년 7월 29일 창경원 수조에 들어있던 비단 구렁이 한마리가 탈출했다. 길이 2.7m 직경 15cm의 이 비단 구렁이는 베트남에 파병된 군인들이 베트남 현지에서 붙잡아 창경원에 기증한 것으로 수조를 받치고 있던 돌을 밀어내 그 틈으로 빠져나갔다. 당시 돈 3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비단구렁이 수명이 30년(최대 40년)이라니 2021년인 지금쯤이면 진작에 아마 수명 다하고 저 세상 가지 않았을까.
3.1.5. 호랑이 사건
1976년 11월 10일. 충청도에서 목수 일을 하다 서울구경 하러온 서씨는 창경원에서 친척들과 소주 4병을 마신 뒤 호랑이 우리 앞에 와 "이 호랑이는 사람 말을 잘 듣게 생겼다"며 철책 사이에 손을 밀어 넣어 과자를 주려 했다. '''그런데 그가 일을 저지른 3시에서 3시 반 사이는 사육사가 호랑이에게 먹이를 주던 시간이었다.''' 먹이 기다리던 호랑이는 서씨의 팔을 덮썩 물어버렸다. 사육사가 급히 기름 솜 방망이에 불을 붙여 위협하면서 10분만에 구해 냈다. 서씨는 병원으로 옮겨질 때도 술에 너무 취해 주변에서 플래시를 터뜨리는 기자들을 때리며 행패를 부리고 자신의 팔이 잘린 줄도 모르고 "그 호랑이 힘이 참 센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3.1.6. 코끼리 사건
1981년 9월 27일 서울 상공을 지나던 제트기의 폭음에 놀란 코끼리 '자이언트'가 쓰러졌다. 몸무게 6.5톤 키 3m50인 이 코끼리는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쓰러져 급성 위식체 현상을 보이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창경원 측은 긴급 상황에 묘방을 찾다 체인으로 들어올려 6시간 만에 코끼리를 살려냈다. "구출 작전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육중한 체구에 폐가 압박돼 폐 기능 마비로 숨졌을 것"이라고 당시 창경원 관계자는 밝혔다.
해당 코끼리는 1955년에 삼성물산이 태국에서 들여와 창경원에 기증했으며, 1984년에 과천으로 이사간 뒤에도 건강하게 살다가 2009년에 58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3.2. 벚나무와 벚꽃놀이
1986년의 복원 사업 당시 일각에서는 창경원 시절 일제가 심었다는 벚나무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는 주장과 그냥 나무이니만큼 그대로 두자는 주장이 맞서기도 했지만, 결국 벚나무 일부는 베여지거나 일부는 서울특별시 여의도 윤중로 등으로 자리를 옮겨서 심기도 하였다. 창경원 시절부터 사육해온 동물들과 식물들은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졌다.
창경궁은 창경원 시절에만 해도 당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세대들에게는 궁궐이라기보다 어린이들의 놀이동산, 코끼리 먹이 주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으며 당시 휴일만 되면 창경원 입구가 많은 인파로 붐벼서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암표상까지 기승을 부려 속앓이를 썩히기도 했다. 여기에 미아들까지 발생하여 어른들의 부주의까지 겹쳤고 화장실도 많은 인파 때문에 초만원이 되는 등 난장판이 되기도 하였다. 이 때의 기억이 꽤 남아있는 지 궁을 안내를 하시는 분들의 말씀에 따르면 아직까지도(2016년 6월 기준) 창경궁이 아닌 "창경원 벚꽃놀이가 언제인지 문의"하는 전화가 오기도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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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1973년 서울어린이대공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1950년대 ~ 1960년대 수도권의 '''유일한''' 동물원 및 놀이동산이었고 어린이 대공원과 에버랜드(당시에는 용인자연농원)가 개장한 이후로도 이전의 독보적인 지위는 잃을지 몰라도 어쨌거나 상당한 지위를 차지한 테마파크(?)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1970년대 일부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나체팅'[4] 의 장소로도 알려져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의 위상에 먹칠을 하기도 했다. 그 시절 서울에 살았던 국민학생들의 소풍 장소이기도 했다.
3.3. 창경원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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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원 시절 명물이자 마스코트격으로 떠올려지는 것이 바로 창경원 코끼리였는데 이 당시 창경원에 놀러왔던 중노년 세대들에게는 어린 시절 창경원에 서식하는 코끼리에게 먹이를 던져주거나 코끼리가 길다란 코로 먹이를 먹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 하거나 환호가 나올 정도로 인기가 높았었던 동물이었다.
3.4. 구 이왕가박물관 -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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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가박물관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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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시절의 모습.
우리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근대적 박물관으로, 1907년부터 '''제실박물관'''이란 명칭으로 추진되어 초기에는 황제의 관람을 목표로 했다가, 1909년 개장 후 식물원, 동물원과 함께 '''창경원'''의 일부로서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며 명칭도 '''이왕가박물관'''으로 격하되었다. 초기에는 명정전, 통명전, 양화당 등 전통 목조건물 7개를 쓰다가 1911년 자경전 터에 위 사진과 같은 일본식 새 건물이 세워져 그리로 이전됐다. 1912년에 처음으로 <이왕가박물관 소장품 사진첩>을 내고 쓰에마츠 구마히코가 사무관으로서 강진 청자가마를 답사하고, 금동반가사유상이나 청자삼강 표주박모양 주전자 등을 수집하기도 했으나 학술적인 목적이 아니라 일본인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수집해왔다.
어찌 됐든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박물관이고 순종 황제의 의지로 지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는데다 소장품도 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어받은 터라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으로 대우받고 있다. 물론 정말 순종 황제의 의지로 세워졌는지 아니면 창경궁 온실이 그렇듯이 순종 황제를 위해 짓는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을 훼손하기 위한 일제의 수단 중 하나였는지는 알 수 없다.
1938년에 제실박물관이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하면서[5] 함인정 남쪽 4층짜리 일본식 건물에 있던 장서각이 위 건물로 이전되었으며, 해방 이후인 1948년에는 미군정에 의해 운영권이 구왕궁사무청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장서각에 보관돼 있었던 조선왕조실록 적상산본 등 귀중한 고문서들이 소개도 못한 채 북한군에 의해 일부 노획 / 반출되었다.
1955년부터 장서각 관리 소관업무가 구왕궁사무청에서 창경원사무소로 이관되었고, 1961년 9월 13일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1969년부터 관리 소관 업무가 또다시 문화재관리국으로 이관되었다. 1981년에 보존 문서 전량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옮겨진 후 빈 건물로 방치되었다가 1992년 11월 2일에 철거되었다.[6] 현재 창경궁의 궁궐 권역이 그러하듯 나무가 심어져 공원처럼 꾸며진 공터다.
4. 철거와 원형 복원
이후에도 창경원은 서울의 대표적인 유원지로 계속 남게 되었지만 일제가 만든 잔재이니만큼 궁궐로 복원해야한다는 움직임에 따라 문화공보부와 서울특별시청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 및 서울대공원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창경원 시설을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에 궁궐을 짓고, 동물원과 식물원은 경기도 과천시에 짓는 새 공원으로 이전하는 계획이었다.
1983년 12월 일반인의 출입 및 관람을 중단하고 일본식 건물 및 정원 등을 없애고 역사적 고증에 따라 당시 존재해 있었던 전각과 편전들을 복원한 끝에 1986년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 일부 전각과 편전 등은 복원하지 못한 채 소실된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1909년에 일제가 만든 대온실 건물은 200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고 보수공사를 통해 다시 개방됐다. 원래 쓰였던 타일이 1905년 영국에서 만든 제품이라는 것을 확인해 복구에 참조했다.
계획에 따라 창경원에 있던 유원지의 놀이기구 시설은 철거되었고, 동물원과 식물원은 경기도 과천시 막계동의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해 각각 1984년과 1985년에 재개장했다. 그리고 유원지와 동물원, 식물원 터는 거의 대부분 산책로로 다시 바뀌었다.
이후의 내용은 창경궁 문서 참고.
5. 기타
종로구의 법정동 지명에서 '원서동'(창경원 서쪽), '원남동'(창경원 남쪽) 등에 구 창경원의 흔적이 남아 있다.[7]
아기공룡 둘리 초반부에 둘리가 동물원의 코끼리를 역관광시킨 편(구판과 신판 양쪽 다 방영)에서, 애니판에서는 서울대공원으로 나오나 원작에서는 창경원이었다. 해당 연재분이 투고될 당시는 1983년 여름이라 겨울에 이루어진 창경궁 복원사업 시행 전이었기 때문.
6. 관련 문헌
- 오창영 저, 『韓國動物園八十年史 昌慶苑編』(한국동물원 팔십년사 창경원편) 서울특별시, 1993년.
[1] 당시 얼마 안되었던 조선인 사육사의 회고에 의하면 고라 바까가 말버릇이었다고 한다. 즉, '짜샤! 바보!'를 지나가던 관람객들에게 했다는 소리.[2] 독살 말고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수를 줄여 나갔다고 한다. 낙타는 사료를 주지 않고 굶겨 죽였고, 하마는 겨울에 일부러 난방을 하지 않아 얼어 죽게 했다. 심지어 초식 동물들은 육식 동물 우리에 그대로 풀어놓고 잡아먹히게 했다. 이렇게 동물들의 수를 줄인 이유는 태평양 전쟁이 패색이 짙어지면서 발생한 전쟁 물자 부족 때문이었는데, 동물원 우리의 창살들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뜯겨 나갔다. 이렇게 동물원의 동물을 죽이는 조치는 일본 본토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뤄져서 지금도 도쿄에 있는 우에노동물원에는 그 당시 죽은 동물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3] 당시 대한민국 재벌들을 불러 놓고 돈으로 내라고 하면 기분이 상할까봐 일부러 '동물원 만들게 동물 한쌍씩 기부좀 하슈.' 라고 돌려 말했다고 한다. 가격이 제일 비쌌던 코끼리 '자이언트'는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이 태국에서 사왔고, 가격이 비싸진 않지만 제일 간지나는 사자의 경우 당시 대한민국 경제계의 왕이라 불리던 한국은행에서 사왔다.[4] "나"이트 "체"리 블로썸 미"팅" 이다. 알몸으로 하는 게 아니라 밤 벚꽃 미팅.[5] 이 과정에서 이왕가미술관과 통합됐다.[6] 일제가 지은 건물이더라도 근대 건축물 특성상 보존될 수도 있었겠지만 천수각을 본뜬 지붕이 올라간 매우 기괴한 건물이 궁궐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터라 철거 된 것으로 추정된다.[7] 두 동은 관할 행정동이 서로 다르다. 원서동은 가회동 산하에 있고 원남동은 종로동(종로1~4가동) 산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