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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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왕족.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차남이다.
2. 생애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는지, 궁 밖으로 피접을 많이 다녔다. 좌참찬 윤효손#, 승지 김감과# 임사홍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그 중 승지 김감에겐 특별하게 수양아버지라 불렀다고 한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으로 아버지 연산군이 쫓겨나자 충청도 제천으로 귀양을 갔다.# 아버지가 왕이었던 것을 부정당했기 때문에 창녕대군의 군호 역시 폐작되었다.
중종은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연산군 자녀들의 처리를 매듭 지으려 했다. 하지만 반정 공신들이 폐주(연산군)의 아들들을 놔두면 위험하다면서 죽일 것을 계속 청했다. 중종은 가슴이 아파 차마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공신들의 강한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조카들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래서 1506년 10월 10일에[2] 사약을 받고 죽었다.# 향년 만 6세.[3] 같은 날 친형 폐세자 이황과 이복형 양평군 이인, 이복동생 이돈수도 각자의 유배지에서 죽었다.
3. 사망 이후
중종은 죽은 조카들을 안타까이 여겨 장례라도 후하게 지내주려 했다.[4] 하지만 반정 공신들은 이미 죽은 서인에게 후한 대우는 필요 없으니 관곽이나 내려주라고 하여 역시 무산되었다.# 이 때 죽은 연산군의 자녀들이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인 걸 감안하면 공신들이 어지간히 불안해했고 또 그 만큼 자신들의 반정에 자신감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이후 인조반정 때에는 폐세자 이지의 나이가 이황보다 더 많았고 광해군은 연산군에 비해 쫓겨날 명분이 부족했는데도 인조와 인조반정의 공신들은 이지를 죽이지 않았다. 단 나중에는 죽이는데, 그마저도 이지가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다 걸렸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연산군은 쫓겨날 명분이 충분했고[5] 그 자식들까지 모조리 사사시킨 걸 보면[6] 중종반정 핵심부들의 취약성을 보여준다.[7] 백 번 양보해서 이황은 한 때 세자였기에 위험하다고 해도, 창녕대군까지 죽인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나중에 중종은 박원종에게 어느 정도 야속감이 있었는지 그가 죽은 후에 그의 하나뿐인 아들(서자)인 박운이 분경[8] 을 하는 죄를 저질렀다는 김안로 측에 고변이 들어와 그를 변방으로 유배보냈는데 정광필이 "공신의 하나뿐인 자식인데 선처해주죠"라고 하니 싸늘하게 말하기를 "공신의 자손이라고 봐주면 분경을 하는 자가 또 나타나지 않겠느냐" 하며 거절했다.
실제로 중종은 신하들에게 냉혹했지만 자신의 친족과 혈육에게 자상한 군주였다. 하기사 자신의 형인 연산군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었고 신하들에게 옹립된 왕이니 인조와 궤를 달리 할 수밖에.
[1] 군호는 경상도 창녕군(昌寧郡)에서 유래했다.[2] 음력 9월 24일.[3] 세는나이 7세.[4] 사실 도리상 이게 맞긴 하다. 죽을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죽인다면 적어도 장례 쯤은 후하게 치러주는 게 예의다. 실제로 진짜 '''죽을 짓 한''' 폐비 윤씨, '''좀 꺼림찍하지만 진짜 죄를 지은''' 장희빈도 나라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도왔고 이후 왕비에 준한 제사를 치루게 했다.[5] 연산군을 쫓아낸 게 잘못이라며 일어난 사건은 없었다. 반면 광해군은 쫓겨난 이후 역모사건에 계속 연루된다.[6] 실제로 어린이와 노약자는 역모에 연루되어도 노비로 만들거나 용서해주는 선에서 그쳤다. 정말 예외가 있었다면 기축옥사 때 이발의 아들이 곤장 맞다 죽었고 봉산옥사 때 어린이들까지 끌려와 국문받은 게 거의 전부다.[7] 사실 핵심부들은 모두 다 연산군 밑에서 한자리 했었던 사람들이다. 유자광부터가 무오사화의 주역이다.[8] 奔競, 벼슬을 얻기 위해 청탁을 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