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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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영의정'''
'''《第 50 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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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年~
中宗 5年'''}}}
'''제50대'''
'''1509.9.27~
1510.3.6'''








朴元宗
1467년(세조 13년) ∼ 1510년(중종 5년).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연산군 시절
3. 어마어마한 집안
4. 한국 사극에서


1. 개요


조선의 무신. 본관순천 박씨, 자는 백윤(伯胤), 시호는 무열(武烈). 평양군 박중선의 외아들이자 성종의 친형 월산대군의 처남이며 윤임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외숙부이다. 중종반정의 실질적인 기획자이고 사실상 반정의 주인공이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부친은 박중선으로 박원종의 친할머니이자 박중선의 어머니는 태종에 의해 의도적으로 죽임을 당한 세종의 장인 심온의 딸이다. 즉, 소헌왕후는 박원종의 할머니의 언니(이모할머니). 박중선 본인도 이시애의 난과 성종 즉위에 공을 세운 공신이자 병조판서로 군권을 쥔 거물이었으며 반란 토벌로 잔뼈가 굵은 무인이었다. 박중선 사후 박중선의 묘지명은 당대 명문장가였던 임사홍이 지어주는데 훗날 아들 박원종에 의해 임사홍이 참살당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박원종은 부친을 닮아 무술에 뛰어나서 음서로 무관[1]에 기용되었다.[2] 1486년(성종 17년) 선전관으로 있을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내승으로 승진해 오랫동안 왕의 측근이 되었다. 박원종의 손윗누이는 월산대군의 부인인데 성종이 그런 이유로 박원종을 기용했을 수도 있다.[3][4]

2.2. 연산군 시절


연산군이 즉위하자 중추부지사 겸 경기도 관찰사,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다음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지고 도총부 도총관을 겸직하였다.
1506년 성희안, 유순정 등과 함께 연산군을 폐위하고 신수근, 임사홍 등을 제거하여 중종을 옹립한 중종반정의 주도적 역할을 맡아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종종 즉위 후 출세일로를 걷던 박원종은 중중 3년인 1509년 영의정에 오르고[5] 평성부원군에 봉해졌지만 몇 달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3. 중종반정


박원종의 큰 누이는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였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연산군이 누이를 범한 것이 박원종이 반정을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연산군이나 중종반정 문서에 나와있듯이 이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박원종의 둘째 누이는 윤여필에게 시집을 가서 윤임과 장경왕후를 낳았다. 셋째 누이는 제안대군의 후처이다. 다만 제안대군이 후처 박씨와 이혼하기 위해 그녀를 레즈비언이라고 모함한 후 일방적으로 쫓아냈다.
졸기에 따르면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의 집에는 뇌물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궁궐에서 나온 이름난 창기들을 많이 차지하였으며 거처나 음식이 신하로서의 한도를 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반정에 기대를 품었던 사람들에게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박원종에게는 적자가 없어 박원종이 죽은 후 박원종의 서자박운제사를 받들었는데[6] 박운은 이항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첨을 했다는 혐의로 김안로 일파의 공격을 받아 유배를 갔다.[7] 반정 1등 공신 박원종의 제사를 받드는 아들이라는 점을 들어 정광필이 "박운을 선처해달라"고 청하였지만 중종은 거부하였다. 중종이 박원종에게 얼마나 쌓인게 많았나를 엿볼 수 있는 부분.

3. 어마어마한 집안


박원종의 행실과는 별개로 집안 자체는 어마어마했다. 할머니만 해도 소헌왕후의 여동생이었으며 위로 둔 3명의 누이는 모두 왕실과 관련이 있다. 큰 누이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8] 둘째 누이는 중종의 둘째 부인이자 인종의 모친인 장경왕후의 어머니(순천부부인 박씨). 셋째 누이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으나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부인 박씨이다.

4. 한국 사극에서


44세라는 상당히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극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배우들이 박원종 역을 맡는다.[9] 그나마 영화 왕의 남자에서 젊은 배우가 맡은 적이 있다.

[1] 때문에 같은 무관 출신인 유자광탄핵을 받아 궁지에 몰리자 박원종을 찾아가 '문관들이 무관들을 배척하려 하니 다음에는 당신 차례일 것이다'라며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물론 유자광이 무오사화 등으로 공공의 적 취급을 받게된지 오래인 것을 안 박원종은 이를 무시했다.[2] 쏘기를 동네 푸줏간 주인한테 배웠다고 한다.[3] 실제로 성종은 월산대군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4] 박원종의 둘째 누이가 윤여필혼인해 중종비 장경왕후와 윤임 남매를 낳았다.[5] 조선시대 무과 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2명 중 1인이다. 나머지 한명은 신립의 아들이자 인조반정의 주역 중 한 명인 충익공 신경진(1575~1643). 다만 신경진은 영의정이 되고 불과 5일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6] 참고로 서자가 적자로 신분 세탁을 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 마지막 방법은 역모를 막는 일이다.[7] 파직되어 고향에 가 있던 이항이 이 소식을 듣고는 분개하여 승정원으로 가서 억울함을 토로한 것을 보면 박운의 혐의는 김안로 일파의 무고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 역시 "이항의 탐욕스러움은 일세에 비할 자가 없다"고 까면서도 "박운에게 뇌물을 받은 일은 증거가 확실치 않다"고 기술하였다.[8] 연산군과의 야사로도 유명하다.[9] 참고로 자신이 탄핵한 유자광의 아들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