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인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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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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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전투의 상상화[2][3]
제2차 여몽전쟁에서 일어난 전투로 경기도 용인에서 고려의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저격해 사살한 뒤 몽골군을 대파시킨 전투이다. 지역 주민들이 주축으로 몽골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방어전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여몽전쟁의 가장 주요한 승리 중 하나이다.
2. 배경
1232년 8월. 몽골 제국의 대대적인 2차 침략이 시작되었다.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서경을 홍복원의 도움으로 무난히 함락시킨 후 같은 해 10월, 개경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고종은 정부를 강화도로 이전한 상황. 살리타이는 강화도를 건너서 공격할까를 고민하다[4] 결국 배를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고려 전체를 불태워 버려 고려 정부, 아니 고려 왕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남하를 시작했다. 1,000여 명의 별동대가 방화와 약탈을 일삼으며 빠른 속도로 남하를 진행하고 있었고[5] 살리타이가 이끄는 직할군인 제4군은 수갈래로 나뉘어 남진을 진행했다.
그해 11월 한양산성을 점령하고 경기도 광주에 도착한 살리타이는 광주성을 공격했지만, 목사 이세화를 필두로 결의를 다지던 광주성은 끝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살리타이는 귀주성에서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결국 공격을 포기하고 우회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주력 병력을 강화 쪽으로 돌리고 직접 지휘하는 일부 병력으로 도달한 곳이 바로 현재의 용인이었다. 구성동에 위치했던 용구현성(龍駒縣城)을 무혈입성하여 함락시킨 후 제4군의 주력을 용인 → 수원 → 군포 → 부평 → 김포를 경유해서 강화도의 통진으로 진출시켜 강화도를 압박하게 하고 본인의 일부 병력으로 남하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곳에 둘레 425m[6] 도 안 되는 작은 토성(土城)인 처인성(處仁城)을 마주하게 된다. 얼마나 작은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100명 정도가 물자를 가지고 들어갔을 때 꽉 차는 정도라고 보면 된다.
3. 처인성
처인성은 위에도 언급했듯이 자그마한 토성이었다. 거기다 처인성이 위치한 지역은 바로 천민들의 거주지, 처인부곡(處仁部曲)이었고 성 안에 피난해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정규군이 아닌 용인시 일대 수령들이 이동시킨 약간의 병력과 백성들[7] , 그리고 김윤후를 비롯한 승려 100여 명과 다수의 부곡민들이었다.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될 싸움이었지만 살리타이가 공격을 감행한 이유는 그곳에 있던 군량창고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처인성 전투 자체가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여 벌어진 사건이었다. 원래 살리타이의 목표는 광주를 점령하여 남부 지방으로 항하려 했는데, 막상 광주에서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진로를 용인시로 바꾸었고, 막상 또 용인에 와 보니 주민들은 전부 피난가고 빈 성만 있었고, 그러다가 인근 처인성에 군량 창고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리로 향했는데, 막상 처인성에 소수의 천민들이 피난해 들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분풀이 대상으로 삼고자 공격한 것이었다.
사실 용인시의 주 방위산성은 처인성이 아니라 보개산성[8] 이었다. 이미 귀주와 광주에서 한번 뜨끔하게 데인 살리타이는 그냥 공성전을 포기하고 지나가려는 찰나 처인성이라는 작은 토성에 군량창고, 거기다 수도 얼마 안 되는 부곡민들이 들어갔다는 정보에 싸움을 건 것이니 애초에 싸움을 매우 쉽게 보았을 것이다.
살리타이가 처인성에 도달하고 본대에서 500여 기의 기병을 직접 차출해 처인성 동북쪽의 완장리, 매룡리 일대를 점령해 포위공격을 할 준비를 시작했다.
4. 전투의 시작
1232년 12월 16일. 처인성에서 동북쪽으로 50리 지점에 도착한 살리타이는 완장리, 매룡리 일대에 병력을 3개 대로 분산 배치해 완벽한 포위망을 설치하였다. 이에 대비해 처인성의 백성들은 싸우기로 결정, 승려 김윤후를 대장으로 추대했다. 김윤후는 백성들에게 무기를 나눠 주고 그들의 동요를 막는 모습을 보여주며 다가울 싸움에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들의 주요 공략지로 판단한 처인성 동문 밖 300m 지점에 저격수 수십 명을 배치시켜 유사시를 대비했다.
그리고 하늘이 도왔고 기적이 일어났다. 물론 운이라기보다는 전술이 빛을 발한 것이다. 당시 이런 저격 전술을 사용이나 했을까? 김윤후 스님이 시간을 달리는 전술을 사용한 것에 대어가 낚인 것. 처인성 공격의 지휘자이자 고려침공군의 총사령관 살리타이가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것이다.
특히 몽골군은 총사령관이 전사하는 경우가 몽골 제국~원나라 역사에 있어서도 한손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었기에 진영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사기가 땅으로 떨어졌다.
5. 전투의 향방
기록에 따라 다 다르게 나와있다. 12월 16일 살리타이의 지휘아래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는 기록과, 살리타이가 일부 기병을 데리고 처인성 동문을 정찰왔다가 저격병의 기습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김윤후와 저격병들이 살리타이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것[9] , 그리고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당황해 했고 처인성의 승병과 천민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몽골군을 모조리 대파해버렸다는 것이다.[10]
6. 2차 여몽전쟁의 종료
총사령관이었던 살리타이의 사망은 몽골군으로썬 굉장한 충격이었다. 부원수였던 테케는 고려 왕이 나올 때만을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고려와의 강화를 체결하고 철군하게 되었다. 이때 모습은 굉장히 다급한 철수라는 것이었다는 것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전투 이후 고려 조정에선 김윤후에게 상장군의 직위를 내렸으나 김윤후는 거절하였다.[11]"몽고 군사는 일시에 함께 돌아가지 않고, 혹은 먼저 가기도 하고 혹은 뒤에 떨어지기도 하고, 동으로 갈까 북으로 갈까 망설이면서 그 향할 곳을 알지 못하였다." - <<동사강목>>
이러니 조정에서는 그의 거절을 받아들이면서도 고마움을 잊을 수 없어 조금 낮추어 종6품 정도의 직책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김윤후는 21년 뒤 장수가 되어 다시 활약을 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충주성 전투이다.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겠습니까? - 고려사 권103, 김윤후열전
처인부곡은 처인성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처인현으로 승격되었다.
7. 같이보기
[1] 각 고을에 피난 온 군민 1,000여 명 + 승병 100여 명.[2] 전쟁기념관 소장. 그림 왼쪽에 있는 승병(김윤후)이 활을 쏘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그런지 국사 교과서 등에 이 사진이 올라오면 매우 높은 확률로 교과서 낙서의 희생양이 된다(...)[3] 상상화라 상식적으로 저지를 이유가 없는 장면이 들어가있는데, 바로 몽골군 기병들이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토성에 돌진하는 중이라는 것(...).[4] 이때 포로로 잡힌 태주(현재의 평안북도 태천군)사람이었던 변여를 고문해서 해로를 알려고 했지만, 그는 끝내 모른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사망했다.[5] 이때 충청도와 대구광역시를 지나 부인사를 불태워 버렸고 그때 초조대장경이 불타 없어지게 되었다. 이때 대구에서도 승려와 일반 백성들이 결사 항전했으나 패배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6]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250m 가량이다.[7] 이들 합이 총 10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8] 길이 약 750m, 봉수대까지 있었다.[9] 원나라의 공식 기록인 원사에서도 유시(流矢)에 맞았다고 적혀있다. 눈먼 화살, 즉 난데없이 날라온 화살이라는 뜻.[10] 기본적으로 몽골군의 특징이 총사령관이 죽는 순간 전투를 멈추고 돌아가는 습성이 있다.[11] 상장군은 고려의 장수 지위 중 가장 높은 벼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