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후
1. 개요
고려 시대의 승려이자 여몽전쟁의 전쟁 영웅. 살리타를 전사시킨 승려.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출가해서 승려가 되고 백현원에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나 백현원이 지역의 명칭인지, 사찰의 명칭인지, 가족 관계는 어떠한지, 어떻게 승려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공을 세운 장수치고는 기록이 부실한 편.[2][3]
2. 여몽전쟁
'''한국사의 조명되지 않는 전쟁영웅'''
몽골의 2차 침입(1232) 당시 살리타의 대대적인 남하를 막으면서 역사에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처인성 전투 참조. 처인 부곡은 단순한 토성으로 군량이 있다는 것 외에는 전술적 의미가 거의 없었지만 김윤후의 화살이 살리타의 머리를 꿰뚫으며 결국 몽골군이 퇴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김윤후가 아니라 이름없는 병사나 부곡민이 사살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고려사 김윤후 열전에 보면 '전투할 때 나는 활이나 화살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무거운 상을 받겠는가?'라며 '활과 화살이 없었다'고 말했다는 것이 근거인데 이게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지, 예의를 차리는 표현인지는 판단하기 나름. 학계의 논문에는 말 그대로의 의미인 궁수가 아닌 지휘관으로 전투에 임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아래 열전의 기사와 같은 맥락의 말이라고 보면 자진하여 병사로 지원하여 참전한 것이 아니라 난을 피하다 불가피하게 싸운 와중에 세운 공이었다는 의미일 가능성은 열려 있다.
이후 고려 조정에서는 김윤후에게 포상과 함께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했지만
라고 사양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섭랑장(攝郞將)에 임명하게 되었다.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겠습니까?
- 고려사 권103, 김윤후 열전
21년 뒤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몽골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김윤후가 방호별감으로 있던 충주성에 도달하였고 70일간의 혈투가 진행되었다. 군량이 떨어지고 사기가 저하되자 "힘을 다해 싸운다면 훗날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벼슬을 내릴 것이다!"라고 격려하며 '''관청에 보관된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몽골군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 등을 사람들에게 나눠줘 사기를 이끌어 냈다.
결국 몽골군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충주성 사람들은 관노나 백정부터 일반 백성까지 벼슬을 제수받았으며 김윤후의 공도 인정받아 감문위 상장군(監門衛 上將軍)에 임명되었다.[4]
처인성 전투와 충주성 전투의 항쟁이 정말 대단한 이유는 노비, 승려, 백성들의 항쟁이었기 때문이다. 1232년 몽골군이 처음 충주에 쳐들어왔을 때 고을 수령과 군 지휘부들은 다 도망을 가고 성을 지킨 것은 노비와 백성들이었다. 그런데 몽골군이 물러가자 돌아온 충주군 지휘관들은 몽골군이 약탈해 간 고을의 기물과 물자를 노비들이 훔쳐갔다고 뒤집어 씌운다.[5] 분노한 노비군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진압되고 만다. 이러니 1258년 충주에 있던 노비와 백성들이 고려 조정과 최씨 무신 정권에 반감을 가졌으면 가졌지,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었던 셈. 김윤후는 이런 사람들을 이끌고 끝내 성을 지켜낸 것이다. 몽골과의 항쟁 중에 양민은 물론이고 노비들이나 천민까지 몽골군에 맞서 싸웠던 것은 처인성만이 아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정규군보다 더 잘 싸웠다.
다만 씁쓸한 이야기를 하자면 승전 후 김윤후가 임명된 감문위는 2군 6위 중 전투와는 가장 거리가 먼 부대였다. 개성의 성문을 지키는 부대로 부대 편제도 1령(약 1,000명)에 불과하고 전투에 나서기 힘든 늙은 병사들이 주로 배속받았다. 즉 실권과는 거리가 먼 한직. 오늘날로 따지면 향토동원사단장과 같은 직책이다. 전장에서는 가장 치열한 곳으로 보냈지만 전쟁이 끝나자 한직으로 내몰아버린 것이다. 해석하기에 따라 내쫓겼거나 본인이 몸을 피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6]
3. 이후
1259년 동북면(함경도) 병마사가 되기도 했으나 이때 동북면은 몽골 땅(쌍성총관부)이라 의미가 없었다. 원종 때인 1262년에는 추밀원 부사, 1263년에는 수사공우복야까지 올랐고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윤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거의 남아있지 않다.
4. 창작물에서
- MBC 주말 드라마 무신에서는 박해수[7] 가 역을 맡았다. 주인공 김준이 어린 시절 절에 있을 때의 스승으로 법명은 금강[8] . 원래 군관이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출가해 절에서 승려들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있다가 역모에 연루되었다. 염불보다는 무술에 관심이 많고 술 정도는 그냥 마시는데다 사람이 맞아 죽어나가는 과격한 격구 경기를 즐기며 보는 땡중. 역사에서도 승려보다는 장군으로 두각을 보인 인물이니 무리한 설정은 아니다. 28화에서 살리타이를 처단하는데 기록과는 달리 활로 쏘아 죽이는 게 아니라 언월도를 들고 직접 제압한다.
- 코에이의 게임 원조비사의 시나리오2에서 등장한다. 능력치는 정치/전투/지휘/매력이 D/C/B/B로 김경손, 박서와 더불어 초반을 이끌어나가는 훌륭한 장수이다.
5. 같이보기
[1] 이 영정의 그림에서 쓰고 있는 사모는 우왕 이후 도입되어 여말선초에 쓰인 사모이므로 고증 오류다. 김윤후가 살던 시대에 맞게 그리자면 각진 복두를 써야 한다.[2] 다만 원래라면 전투와 거리가 멀 승려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전시에 2번이나 전투를 이끌고 승리를 쟁취한 점, 1번째 전투에서 동원된게 군사 훈련을 받지도 않은 일반 백성들이 대다수였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김윤후 본인이 전쟁 전부터 전술적 소양을 쌓아뒀을 가능성은 있다. 어느 전투든지 마찬가지지만 지휘는 맨땅에 헤딩 식으로 하는게 아니며 지휘관은 아무나 되는게 아니다. 임용한 박사는 저서 <전쟁과 역사> 3권에서 김윤후가 있었다는 백현원이 관영 숙박 시설인 ‘원’이고 김윤후는 원과 인근 도로의 치안을 관리하던 무승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3] 이후 시대 분위기상 김윤후의 기록이 부실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결국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 되어 내정 간섭기를 거치게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원나라를 상대로 김윤후가 공을 세운 것이 공이 아니게 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후 새로운 왕조 조선은 유교를 기반으로 한 국가인데 승려가 전쟁 영웅이라는 이야기가 당시 유교 중심의 사회에서는 쉽게 나올 이야기가 아니게 된 것이다.[4] 고려 시대 상장군은 무관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위계인 동시에 2군 6위라는 고려의 6개 중앙군 가운데 하나를 총괄하는 직위이다. 그리고 2군 6위의 상장군과 대장군들이 모여서 하는 회의가 '장군방'이라고 불린 중방이다.[5] 임진왜란 때 형조 관아와 임해군의 집이 백성들에 의해 불에 탔는데 나중에 뭐라 한 적이 없는 것과는 대조적이다.[6] 씁쓸하다기 보단 이런 전쟁영웅에 대한 전형적인 공이다. 실권이 있는 자리에 맡길경우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권력을 가질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전쟁영웅마저 죽여버리는 나라라면 이후에는 아무도 그 나라를 위해서 충성하지 않는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대대손손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직위를 내리되 실권은 없는 자리로 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또한 직무는 현대의 향토동원 사단장이랑 비슷할지언정 직급은 군단장 이상이라고 보는게 옳다.[7]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이지란 역할을 맡았다. 다만 대중적으로는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김제혁 역할이 더 유명하다.[8] 금강이라는 법명은 극중의 창작이다. 고려사에도 법명은 나오지 않고,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가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정도로만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