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공주

 



'''조선 장조의 왕녀
청연공주 | 淸衍公主
'''
'''조선 사도세자의 딸
청연군주 | 淸衍郡主
'''
'''출생'''
1754년(영조 30년) 7월 14일[1]
'''사망'''
1821년(순조 21년) 6월 9일
(향년 68세)
'''부왕'''
사도세자
'''모후'''
혜경궁 홍씨
'''부군'''
광은위 김기성[2][3]
'''자녀'''
2남 1녀
(장남) 김재창
(차남) 김재삼
(장녀)
1. 개요
2. 생애
2.1. 탄생
2.2. 혼인 생활
2.3. 죽음
3. 유물
4. 청연 공주를 연기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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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사도세자혜경궁 홍씨의 적장녀. 정조동복 동생으로, 청선공주의 언니가 된다.
본래 작위는 세자의 적녀에게 주어지는 정2품 군주(郡主)였으며, 1899년(고종 36) 대한제국 시기에 고종이 사도세자를 추존하면서 청연군주에서 청연공주로 추증되었다.

2. 생애



2.1. 탄생


1754년(영조 30) 7월 14일, 당시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낳았다. 한중록에 따르면, 원래 출산 예정일은 6월이었으나 달을 넘기는 바람에 한산부부인 이씨[4]가 대궐에서 50여 일을 머물렀다고 한다.

그해 7월 14일에 내 청연을 낳으니, 영조께서 "백여 년 만에 군주(郡主)가 처음 나니 귀하다" 하시며 기뻐하시더라.[5]

《한중록》[6]

여기서 영조의 편협함이 드러나는데, 청연군주와 같은 해 2월에 태어난 은언군을 비롯해서 사도세자의 서출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7] 반면에 영조는 청연에 대해서는 어릴 적에 역질을 앓았다가 회복했을 때도 직접 보러 왔고, 혼인하여 일가를 이룬 뒤에도 사저에 들르는 모습이 보인다.[8]

2.2. 혼인 생활


1765년(영조 41) 참의 김상익의 아들 김기성의 아들이 간택되어 같은 해 4월 11일에 혼인하였다. 그런데 정조가 남긴 존현각일기를 보면 김상익에 대해 좋은 평을 찾아볼 수 없다. 홍인한정후겸이 겨루는 형세를 관망하다가 권세를 독점할 생각을 한 사람으로 보고 있고, 왕세손으로 있을 때는 "소조(小朝)의 차대(次對)에 한번도 들어오지 않았고"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9]
20세이던 1773년, 동생 청선공주, 궁녀였던 후궁 의빈 성씨와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하였다. 어린 나이에 혜경궁 홍씨의 궁녀로 들어온 의빈 성씨와의 인연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때는 청연이 이미 혼인하여 궁 밖에서 생활하던 때였는데, 독서와 필사가 당대 왕실 여성들의 취미 생활로 추측된다.[10]

2.3. 죽음


1821년(순조 21) 사망하였다. 혜경궁 홍씨의 자녀중 유일하게 어머니보다 오래 산 자녀이다. 청연은 남편과의 사이에 7남 2녀의 자녀를 낳았지만, 그 중 2남 1녀만 성인으로 성장하는데 훗날 수원화성으로 능행할 때, 그녀의 두 아들도 동행한 외빈 명단에 있다.
왕세자의 딸이기 때문에 내내 '청연군주'로 살았다. 1899년(고종 36) 고종이 5대조를 추존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면서 공주(公主)로 추증되었다. 따라서 살아생전에 '공주'로 살았던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는 셈.

3. 유물


  • 《청연군주 노의》: 우리나라 복식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유물로, 1963년 경기도 광주에서 청연군주와 김기성의 합장묘를 이장하던 중 발굴한 200여점 중 하나다. 노의(露衣)는 왕세자빈, 왕세손빈, 내명부 여성과 대군의 정실인 부부인, 왕자의 정실인 군부인 등 정4품 이상의 정실부인이 착용하였다.
  • 《청연군주 당의》: 18세기 궁중용 당의의 모양을 알 수 있으며, 금실을 넣어 짠 석류와 칠보, 겉저고리와 안저고리 2겹으로 한 벌을 이루는 당의다.
  • 《청연군주 토황색 명주저고리》: 겹저고리 두 점이 끼워져 있는 4겹의 '두벌저고리' 형태다.

4. 청연 공주를 연기한 배우


[1] 승정원일기, 영조 30년 7월 14일. # [2] 본관은 광산, 초명은 두성(斗性), 자는 성여(成汝), 호는 이길헌(頤吉軒),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3] 원래 광은부위였으나 청연군주가 청연공주로 추증되면서, 광은부위도 광은위로 추증되었다. [4] 혜경궁 홍씨의 어머니이자 홍봉한의 아내. [5] 숙종인경왕후에게서 공주 둘을 얻었지만 요절하였고, 경종이나 영조는 왕비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했다. [6] 혜경궁 홍씨, 정병설 편역, 『한중록』, 문학동네, 2010. [7]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이 그것이라도 손자라 하시며, 영조나 선희궁께서 약간이라도 봐주시거나 또는 경모궁께서 이것에게 혹하시면, 내 비록 도량이 있다 해도 부녀자의 마음으로 어찌 편안하리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아서 영조와 선희궁께서 알은체 않으시고" 라고 언급했다. 즉, 영조와 영빈 이씨 모두 사도세자의 서출에 대해서는 관심이나 애정을 주지 않았다. [8] 영조실록 105권, 영조 41년 4월 12일 정사 2번째기사. # [9] 영조실록 127권, 영조 52년 2월 27일 기사 4번째기사. # [10] 숙명공주의 후손인 심익운의 문집 '백일집(百一集)'에서 효종인선왕후가 함께 《삼국지연의》를 번역, 필사했다는 기록이 있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물 중 《손방연의》라는 책에는 영빈이씨의 영빈방 인장이 찍혀있으며, 정조의 왕비인 효의왕후도 《만석군전》과 《곽자의전》을 필사한 유물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