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대의 관습

 

1. 개요
2. 원인
2.1. 정보
2.2. 명예
2.3. 기타
3.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4. 손님의 룰
5. 의의
6. 문화권별 양상
6.2. 동유럽
6.3. 이슬람
6.4. 유대교
6.5. 몽골
6.6. 한국
6.7. 기타
7. 사례
7.1. 유명 예
7.2. 어긴 예
7.2.1. 주인이 손님을 받아들인 뒤 공격한 사례
7.2.2. 손님이 대접받은 뒤 공격한 사례
8. 매체에서


1. 개요


주인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을 최대한 접대하고 해를 끼치지 않으며, 손님은 그 대가로서 주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관습.
옛날에는 요즘에 비해 여행이라는 것이 매우 위험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1] 이런 와중에 다른 마을에 이르러도 안심하고 묵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이러한 이방인들을 후하게 접대해주는 문화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현대에 이르러서 관습 자체는 많이 희석되었지만, 지금도 집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면 극진히 대접하는 식으로 이어진다.[2]

2. 원인



2.1. 정보


얼핏 보면 주인 입장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을 왜 돈과 정성을 들여 챙겨줘야 하는지 의아할 수 있는데, 이는 현대와 확연히 다른 과거의 상황과 문화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과거엔 오늘날과 달리 신문도 인터넷도 없었기에 정보들을 접할 수단이 매우 빈약했고, 이런 외지에서 찾아온 손님들이 푸는 지역 정세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돈주고도 못구하는 매우 값진 정보들이었다.
특히 귀족이나 상인, 그리고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부농층은 정보를 통하여 혹시 모를 위기에 대처하거나 혹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기도 하였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설사 말이 안 통한다 해도, 타지에서 온 여행자의 행동 양식이나 옷차림 등 다른 문화에 대한 경험은, 살면서 딱히 자극이랄 게 없던 옛 사람들에게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하였다.

2.2. 명예


더 큰 이유는 바로 명예이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건 요즘 세상에서나 통하는 말이고, 과거 수많은 문화권에서의 가치의 중점은 단연 '''명예 > 목숨'''이었다.
법질서와 같은 사회적 규범이 상대적으로 미비하던 전근대 사회에서 명예란 단순히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상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나, 또는 내가 속한 집단(가문 등)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나 위상과 직결된 것이었다. 즉, '명예롭다'는 평판을 받는 이는 다른 사회 구성원과의 관계에서 신뢰받고 좋은 대우를 받는 반면 '명예를 잃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는 불신의 대상으로써 박대당하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현대로 치면 신용 개념과 유사한 면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라면 '돈 빌린 뒤에 안 갚으면 그게 이득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신용을 상실하면 그 이득 이상의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된다. 근대 이전에도 신용처럼 체계적인 개념은 없었을지언정 명예와 평판이란 형태로 구성원의 사회적 위상은 지속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그 시절에는 보편 인권과 같은 개념이 없던 시대였기에 이 평가는 현대보다 더욱 혹독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접대의 관습'이 주요한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잡은 이상 손님을 극진하게 대하는 것, 하다못해 찾아온 손님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숙식을 제공해 은혜를 베푸는 것은 다름 아닌 '''주인의 명예와 직관된 일'''이었던 것. 마을에 터잡고 사는 주인 입장에서 무조건 빈객이나 여행객을 배척하면 자신과 자신이 속한 가문에게 불명예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구두쇠라도 일단 기본적인 식사와 잠자리를 베풀었다.

2.3. 기타


만약 손님이 중요한 임무 중에 있거나 다른 부족/국가의 고위 인물이라면, 함부로 해쳤다간 자칫 집단 간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위험을 피하려면 손님을 함부로 해쳐서는 절대 안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와 그 가족이 여행객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서라도 접대의 관습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을 터이다.

3.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래도 혹여 손님이 정말 마음에 안 들거나 대접해줘서는 안 될 거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기 마련이다. 이럴 경우 처음부터 손님을 집에 들이지 않고 내쫓는 것은 주인에게 불명예이긴 해도 그렇게까지는 문제시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안전보장의 서약을 어겼을 때, 그러니까 ''''손님으로 대접해주겠다고 속이고 해를 끼쳤을 때''''가 문제였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접대의 관습 위반 사례로 널리 알려진 '타타르족예수게이 살해'를 살펴보자. 명백하게 타타르족의 적인 예수게이가 손님으로 찾아온 상황이다.
이때 만약 '''"너는 본래 우리 씨족의 적이지만, 지금은 손님으로 왔으니 접대하겠다."''' 며 숙식을 제공하고 대접한 뒤 안전하게 돌려보낸다면 이는 관대함으로 널리 칭송받을만한 행동이 된다. 유목민 사회에서 타타르족은 명예로운 씨족이라는 평판이 널리 알려져 존중받을 계기가 되는 것.
하지만 <널리 칭송받을만한 행동> 이란 돌려 말하면 <보통은 하기 힘든 행동> 이란 뜻이고, 진짜 적을 두고 손님으로 인정하여 대우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적대 세력에서 이 씨족을 정찰하기 위해 보낸 정탐꾼이 손님인 척 들어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너는 적이지, 우리의 손님이 아니다."''' 라고 손님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쫓아내는 방법이 있다. 손님으로 온 이를 받아주지 않고 쫓아내는 것은 불명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접대의 관습을 어기는 것처럼 쌍놈 취급받을 죄악으로 여겨질 정도는 아니다. 더구나 타타르족과 예수게이처럼 누구나 다 아는 명확한 적대관계라면 당연히 딱히 흠잡힐만한 사안조차 아니다. 어쨌건 손님을 받을지 말지는 주인의 권리이기에 '''적절한 이유가 있다면''' 손님을 거절하는 것도 불명예가 아닌 것이다.[3] 만약 타타르족이 그냥 거절하고 쫓아내기만 했다면 예수게이 쪽도 "당연히 쫓겨날 게 뻔한 자리에 왜 가서 사서 망신을 당하느냐?" 고 살짝 놀림감이 될 일이기도 하고. 정말 굳이 억지로라도 타타르족에 트집을 잡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적이라도 그때는 손님으로 찾아온 것인데 대접하지 않았다. 타타르족은 구두쇠다" 라는 식으로 꼬투리를 잡을 수는 있겠는데, 이런 식의 악담을 할 정도면 어차피 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예수게이는 우리의 적, 놈을 없애버리자."'''면서 바로 쫓아가서 죽였다고 하면 분쟁의 소지가 있기는 하겠으나, 어쨌건 접대의 관습을 어긴 것은 아니다. 당시 초원의 환경에서 적대적인 씨족이나 부족의 구성원들이 마주쳤을 때 칼부림이 일어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까지 다짜고짜 쳐죽이고 다니는 작자들은 경멸받았지만[4] 예수게이와 타타르족은 이미 적이었으므로 해당사항이 없다. 적대적인 타타르족이 주변에 있는 줄 몰랐다거나 알았어도 피하지 못하고 맞부딪혔다면 그건 예수게이의 책임인 것이고, 타타르족에게 자기 발로 찾아온 적대 부족의 사람까지 건드리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들인 테무친은 부친의 죽음에 대해 복수할 권리를 가지겠지만, 어차피 서로 쳐죽이는 사이인데 복수할 권리가 없다고 안 싸울 것도 아니지 않는가?[5]
하지만 타타르족은 예수게이를 손님으로 받아주는 척 - 속임수를 쓴 후, 접대의 관습을 깨트리고 자신들이 대접한 음식으로 독살했기 때문에 변명이나 옹호의 여지가 없는 추악하고 비겁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규탄당하게 된 것. 이 행위를 저지른 당시에는 덕분에 얼마간의 이득을 보았지만[6], 그 댓가로 아들 테무친(칭기즈 칸)이 타타르족에게 지독한 원한을 품게 되었고, 당시 초원의 도덕율에서 그 원한이 단순히 개인/씨족간의 보복이 아니라 '정당한 응징' 이라는 명분을 가지게 된 것이다.

4. 손님의 룰


당연히 손님도 '''자신에게 숙식을 제공한 주인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룰을 지켜야 했다.
보통 자기 본거지를 떠나 여행중인 손님보다는 본거지에 머무르고 있는 주인이 더 강자인 경우가 훨씬 많기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긴 하지만, 대부분의 접대 관습에서 '자신을 받아준 주인을 해치지 않을 의무'는 '자신에게 찾아온 손님을 해치지 않을 의무'와 동등한 것이었다. 즉, 손님으로 들어와 주인을 해치는 것은 '''손님으로 위장하고 남의 집에 들어온 비열한 범죄'''로 간주되었으로 그 자리에서 때려죽여도 정당하다 여겼다. 조조여백사 살해가 정사에 기록될 정도로 큰 사건으로 여겨졌던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5. 의의


사학, 인류학계에서는 이러한 접객과 상호신뢰의 관습을 인류가 타 동물들과 차별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 차이점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동물은 거처를 옮겨다니는 철새가 아닌 이상 무리생활의 여부를 막론하고 자신의 구역을 침범한 타 개체를 적대시하며 내쫓으려 한다. 하지만 인간만은 자신의 구역에 들어온 다른 개체를 무작정 공격하지 않고 상호간 기본적 신뢰를 바탕으로 숙식을 제공하여 환송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들은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고 더 나은 문물과 문화를 공유하며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6. 문화권별 양상



6.1.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에서는 주인과 손님이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가짐 '크세니아'(ξενία, xenia)를 몸소 감시하던 신이 바로 '''제우스'''였으며, 따라서 주인과 손님이 서로를 박대하거나 무시하는 행위는 곧 제우스를 모욕하는 것과 같은 신성 모독으로 간주되었다.
관련된 신화가 바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바우키스와 필레몬 부부의 이야기. 온 마을에서 거지 부자를 내쫓았지만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이 노부부만이 거지를 받아들여줬는데 그 거지 부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제우스헤르메스'''였고, 제우스는 친히 부부의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을 금은으로 장식된 거대한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고, 나머지 집은 모두 그 신전 앞의 거대한 호수로 만들어버렸다.[7]
이 외에도 영웅 신화에서는 영웅이 정체를 숨기고 적진으로 들어갔는데, 적국의 왕이 이미 영웅을 손님으로 대접해버려 해치지 못하고 대신 괴물과 싸움을 붙여 차도살인을 시도하는 패턴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영웅은 주인공 보정을 받아 괴물을 무찌르지만. 이아손벨레로폰이 그 예.
호메로스일리아스에서 메넬라오스파리스를 경멸하며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할 때 한 말이 '나는 파리스가 내 집에서 머물 때 나와 같은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대접하며 손님 대접을 해줬는데 저 놈은 내 부인이랑 도망친 배은망덕한 놈이다!'였다. 위에서 접대의 관습이 주인이 손님을 해쳐서도 안 되는 것이지만 손님 또한 주인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한 점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손님이 관습을 깬 케이스. 또한 오디세이아에서는 오디세우스는 이 접대의 관습 덕분에 항해 중 겪은 고난을 해결하게 되거나, 간신히 이타카에 도착한 이후 제대로 손님 대접을 받으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6.2. 동유럽


동유럽에는 '빵과 소금(Bread and Salt / Хлеб и Соль)'이라는 관습이 있는데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집안의 안주인, 혹은 젊은 여성이 빵과 소금을 접대하는 관습이다. 여기서 빵이란 전근대엔 상당히 귀했던 오직 밀만으로 만든 부드러운 '''흰빵'''을 말하며, 소금은 과거엔 상당한 고가품이었다.[8] 동시에 빵과 소금이란 귀하면서도 가장 흔한 것으로 대접함으로서 최소한으로나마 자신은 손님에게 접대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는 의미가 담겨있다. '빵과 소금'은 집주인에게는 손님에게 하는 최고의 접대 중 하나였고 손님에게도 최고의 영광이였다. 때문에 손님이 빵과 소금을 거부하는 것은 '''"나는 당신에게 해를 끼치겠다"'''와 같은 의미로 취급되었으며, 빵과 소금을 받은 후에 주인에게 해를 끼칠 경우 천벌이 내려진다는 믿음이 있었다.
요즘도 러시아에서는 국가적인 귀빈이 방문하면 전통의상을 입은 젊은 여성이 빵과 소금을 들고 바로 대접하는 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의 민담에서 여정을 떠나는 주인공들이 영적 존재(예: 바바 야가)의 오두막에 초대받고서 그들이 여정을 떠나는 이유를 물을 때 '''"먼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목욕을 시킨 다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주시는 것이 도리가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얼핏 손님이 무례하게 행패를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먼 길을 오며 지친 손님에게 접대도 하지 않고 질문부터 하는 것은 관습에 어긋나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간보다 초월적이고 위험한 영적 존재들에게도 겁먹거나 기죽지 않는 주인공의 담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접대의 관습이 일방적인 약속이 아닌 손님도 주인을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상호 존중의 의사도 담겨있음을 알수있다. '나를 해치지 않으면 나 역시 당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

6.3. 이슬람


이슬람 문화권이라 부르는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소금'의 관습이 존재하며, 또한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집에는 천사도 찾아오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손님이 방문했을 때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무슬림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특히 사막이라는 절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민족들이 많았던 만큼 자신들도 누군가의 손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아랍인들의 집이나 가게 앞에는 물이 가득 든 항아리와 컵을 놓아두어 목마른 자들이 마음껏 마실 수 있게 하는데, 이는 손님 접대문화와 관련이 있다. 집의 구조에서도 특징이 나타나는데 무슬림 가정의 대부분은 커다란 홀을 가지고 있다. 이 홀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것으로써 가족들의 방보다 우선하여 비중을 두고 있다. 위키백과에서는 이를 환대와 접대보다 동맹과 신뢰의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서아시아 지역의 민담, 이야기들을 정리한 아라비안 나이트 중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서 도적 두목이 상인으로 변장하고 복수하고자 알리바바의 초대에 응했을 때 음식을 주문할 때 소금을 빼달라고 한다. 알리바바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마르자나는 그의 정체가 손님이 아닌 복수자임을 의미한다고 언급한다. 소금을 알리바바에게서 받아버리면 알리바바의 손님이 되므로 알리바바를 해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한낱 도적조차도 접대의 관습은 어기지 않으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영역본을 쓴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은 이에 대해 유럽의 접대의 관습과 성격이 같다고 주석으로 언급하였다.[9]

6.4. 유대교


고대 유대인들에게도 이와 같은 풍습이 있는데, 성경의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나 이 나그네로 변장한 천사들을 극진히 접대하고 나그네의 안전을 자기 가족을 희생해서라도 보장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또한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던 때, 나발이라는 한 지주의 잔치에 손님으로 찾아갔다 문전박대를 당하게 된다.[10] 다행히 나발의 아내가 몰래 다윗을 대접하고 설득해 보복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발은 천벌을 받은 건지 얼마 후 병으로 사망한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소돔고모라가 망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도 이 두 곳의 사람들이 단체로 몰려와서 에게 손님 대접을 받고 있던 천사들을 강탈[11]하려 한 것이었다. 롯은 이들에 비하면 의인이었기에 접대의 관습을 지키고자 손님이었던 천사들을 내놓지 않았지만, 대신 자기 딸들을 내주겠다고 제안했다.[12] 결국 천사들이 본모습을 드러내고 몰려온 자들을 일시적으로 장님으로 만든 뒤 떠나는 것으로 사태는 해결되었다.

6.5. 몽골


몽골족에도 비슷하게 '손님은 누가 됐건 해하지 않고 후하게 대접한다'는 풍습이 있었다. 위에 언급한 타타르족의 예수게이 살해에 테무친(칭기즈 칸)이 그토록 큰 원한을 가진 것도 이를 대놓고 어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타르족은 이 관습을 어기는 일이 많았는지 칭기즈 칸의 증조부인 암바가이 칸 역시도 선대인 카불 칸 시절부터 대립해온 타타르족과 화해하기 위해 결혼 동맹을 추진하려고 했는데 타타르 쪽이 직접 딸을 데리고 온 암바가이 칸을 금나라에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다.
이는 단순히 개인 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 단위로도 적용되었다. 호라즘 왕국은 몽골이 친선으로 보낸 사신과 상인들을 대접하기는커녕 이들의 재물을 강탈하고자 첩자로 몰아 모두 죽였기에 몽골로부터 잔혹한 보복을 당하고,[13] 고려 또한 미제 사건이라 진범은 알 도리가 없지만[14] 몽골에서는 저고여 피살 사건을 고려가 일으킨 것이라 생각했기에 여몽전쟁의 신호탄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몽골 제국 법에 손님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먹고 음료수를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어 환영한 손님은 독살하지 못하게 했다.
지금도 몽골 유목민 게르에 불쑥 찾아가도 애초에 관광객용 천막이라면 돈을 받고 재워줄 것이고, 일반 유목민 천막이면 십중팔구는 공짜로 먹이고 재워준다. 인터넷상에도 경험담은 널리고 널린 편이지만,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 무작정 믿는 것은 위험하니 웬만하면 관광객용 천막을 이용하자.

6.6. 한국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전통이 있다. 처음 보는 낯선 나그네라고 할지라도 식사와 잠자리를 부탁하면 여건이 되는 한 반드시 손님을 받아들였고,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라고 해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잔치를 벌일 때면 동네 거지에게도 잔치음식을 베푸는 관습까지 존재했다. 전래동화 등에서 지나가던 나그네가 '밤이 깊었는데 하룻밤 재워줄 수 있겠소?'라고 묻는 장면, 나그네를 받아준 집주인이 밥상 및 잠자리를 내어오는 장면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15] 그 외에도 하룻밤 묵어가는 나그네, 스님, 점쟁이, 무인 등이 묵게 해준 집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식의 이야기는 어사 박문수 등 매우 많이 있다. 또한 여행객들을 무조건 거부하거나 위협하면 그 집주인과 가문은 전국적으로 인색한 집안으로 소문이 나서 본인과 본인 속한 가문 전체가 과거 같은 출세길이 대대손손 막힐 수도 있었다.

사실 당시 여행이 가능한 사람은 양반이거나 양반의 심부름꾼이 많았을 것이고, 양반이라면 거의 대부분 서로 족보를 대면 간접적으로는 서로 아는 사이였기에 친지를 대우하는 것과 같이 손님 접대를 한 것이며, 여행 이외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길을 떠나야 하는 경우는 일반 상민이나 천민들도 신분에 따른 대우가 달랐을 뿐 똑같이 손님으로 대접 받았다. 게다가 조선은 필연적으로 여행을 하는 사람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과거 제도 때문에 시험 보러 지방에서 중앙으로 오고 가는 사람은 늘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옛날 이야기에서 선비가 과거 보려고 서울로 가는 게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의 기록에도 많이 나오지만 개항 이후 외국인들의 기록에도 많이 보인다. 당시 외국인들의 기록에는 조선인들은 여행객뿐만 아니라 접대하는 주인조차 이런 접대의 관습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숙박업이 발전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집안 구조 자체도 손님이 숙박할 수 있는 사랑방이 안채와 나누어져 있을 정도로 집안 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종갓집에서 현대까지 대대손손 내려져오는 집안의 전통 요리를 살펴보면, 크게 제사음식과 접대음식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접대는 종가집 살림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런 관습은 해방 이후 6.25 전쟁 이전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현대에도 시골에선 큰 잔치가 벌어지면 지나가는 길손님에게도 음식을 대접하는 풍습이 약간 남아 있다. 심지어 도시에서도 친구나 지인의 집에 찾아가서 놀다 갈 때면 집주인이 '밥 먹고 가라'고 말하거나 집에서 밥을 먹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근처 식당에서라도 밥 한 끼 사주고 보내기도 하니. 나이 드신 분들은 밥 때가 되어서 손님이 돌아가려고 하면 밥을 먹고 가라고 강권하시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접대의 관습과 연관이 많다. 물론 식사 약속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면 굳이 붙잡지는 않지만...
또한 이 풍습이 해양에도 확대되어 전근대 한중일 상호간에 바다에서 표류하는 이가 생기면 구해주고 자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상호 원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타국에 표류된 각국인들은 접대를 받고 돌아오면서 체험한 각국의 풍습이나 상황을 기행문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표해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풍습은 조선에서 이후 서양의 이양선에게도 적용되어 어지간하면 "유원지의(柔遠之義)"라고 멀리서 온 손님들을 잘 대접한다는 뜻으로 음식과 물 등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고 '''돌려보냈다.'''[16] 물론 해적선들에겐 얄짤 없었고 헨드릭 하멜과 같은 예외도 있긴 했지만.[17]

6.7. 기타


게르만족 역시 손님들에게는 매우 우호적이었고 일부 부족들은 손님을 문전박대하는 것을 신에 대한 죄로 여기고 손님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했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中) 북유럽 신화오딘이 다른 가르침을 주는 시가인 하바말에 또한 먼길을 온 여행객을 난로불 곁에서 융숭히 대접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림니르의 비가'에서는 그의 양아들이 이것을 지키지 않았다가 죽는다. 자세한 것은 게이로드 문서 참고.

7. 사례



7.1. 유명 예


  •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도 안전을 보장한 손님들을 해하는 자들은 지옥 마지막 9층인 배신의 층의 제3원 프톨로마에아에서 다른 배신자들과 함께 얼음속에서 얼굴 바로 밑까지 갇혀 고통받는다고 묘사된다. 배은망덕 다음으로 끔찍한 배신이라고 한다. 적어도 죽은 이후에 끌려와서 고통받는 다른 죄인들과는 달리 손님을 해한 자들은 그 즉시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고, 지상에 남은 육신은 남은 일생동안 악마가 차지해 살아간다고 한다. 실제로 영혼이 산 채로 지옥에 가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여하간 제 집에 든 손님을 해친다면 그 순간부터 "저놈은 악마나 다름없는 놈이다"라고 보는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십자군 전쟁 당시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측 기독교군을 몰살시키고 예루살렘 왕국의 왕 기 드 뤼지냥을 포로로 잡았을 때 사막에서의 전투로 초췌해진 기 왕에게 시원한 음료를 권하며 "손님으로서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적이 있었다. 이 때 기 왕이 자신과 함께 잡힌 휘하 영주 르노 드 샤티용에게 살라딘이 준 음료를 나눠주자 살라딘은 "나는 예루살렘의 왕에게 음료를 준 것이지 르노에게 준 것이 아니다", 즉 "내가 기 왕의 신변보호는 약속해 주겠는데 르노는 어림도 없다"고 말한 뒤 르노를 참살했다. 이는 르노가 단순한 강경파로 살라딘과 결전을 주장한 정도가 아니라 해적질, 상단 약탈, 불가침조약 파기에다 일설에는 살라딘의 누이를 살해했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로 어그로를 끌었기 때문에 살라딘이 아무리 관대해도 살려줄 수 없었던 것. 기 왕은 약속대로 살려서 보내주었다.[18]

7.2. 어긴 예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대놓고 어긴 경우 또한 많다.[19]

7.2.1. 주인이 손님을 받아들인 뒤 공격한 사례


  • 성서 판관기에 야엘이라는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스라엘 군대에 패해서 도망쳐온 적장을 집에서 재운 다음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버린다.
이 경우는 이미 야훼가 판관 데보라를 통해 적장의 참살을 명령했기 때문에 오히려 칭송을 받는다. 구약성서의 도덕 관념은 현대의 상식에도, 심지어 고대의 상식과도 상당히 동떨어져 보이는 부분이 많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아무리 잔혹한 행위라도 야훼의 뜻에 부합하면 선행이며, 아무리 상식적으로 정당한 행위라도 야훼의 뜻에 부합하지 않으면 악행으로 간주되는 것이 구약성서의 도덕률이다. 이같은 신본주의적 윤리관은 또한 어찌 보면 구약 성서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만 현대의 해석에서는 적장 시스라가 먼저 주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손님의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야엘을 찾아 온 장수 시스라는 구약 시대 고대 근동의 접대의 원칙 중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먼저 위반하였다. 1. 손님은 주인에게 어떠한 것도 요청해서는 안 된다.[20] 2. 손님은 자신이 주인의 안전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시스라는 야엘에게 2가지 요청을 함으로써 첫 번째 원칙을 위반했고, 자신을 찾는 사람이 밖에 나타나면 없다고 그 장막 안에 자신이 없다고 거짓말을 해 달라고 주인에게 요청함으로써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칙을 동시에 위반했다. 따라서 적장 시스라는 스스로를 신속하게 제거되어야 하는 위협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이 사례는 주인이 손님을 받아들인 뒤 공격한 위반 사례가 아니라, 접대의 관습을 먼저 위반한 손님을 주인이 정당방위로 처리한 특수 사례로 볼 수 있다.
  • 홍문연 - 항우유방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항우 측 인사들이 유방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 유비 - 여포 휘하에서 약탈을 일삼던 양봉을 술자리에 초청한 다음 주살하였다.
  • 조양자 - 대나라 왕을 초대한 다음 요리사를 시켜 국을 푸는 척하며 국자로 때려죽였다. 그 직후 조양자는 대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고 결국 대나라는 멸망했다. 당시 조양자의 누이가 대나라 왕의 부인이었는데 이 사람은 결국 비녀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고 한다... 안습. 당시엔 이런 일이 흔했다.(...) 인상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진나라 왕의 초청을 조나라 왕이 망설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초회왕으로 비록 대나라의 군주처럼 얻어맞아죽은 건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스파르타는 전비조달을 위해 그리스의 부자들을 왕의 초대를 빙자해 납치를 했고 몸값을 지불해야 풀어줬다.
  • 3세기에 로마 황제 카라칼라가 아르더번 4세와 만나 파르티아의 황녀와 결혼식을 올렸지만,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어 파르티아 측 하객들을 공격했다. 새신부를 포함한 수많은 파르티아 왕족과 귀족들이 살해당했다.
  • 아바스 왕조 - 초대 칼리프 아부 알 아바스가 역성혁명을 이룬 후 친교를 맺는다는 핑계로 우마이야 왕조 사람들을 모두 초대한 후 그들을 몰살시켰다. 이때 아부 알 아바스는 우마이야 왕족의 시체 더미를 앞에 두고는 시종들에게 음악을 계속 연주하고 남은 손님들에게 잔치를 즐기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간신히 탈주하여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로, 그는 모로코로 도망간 후 최종적으로 스페인의 아바스 왕조 세력을 제압하고 후우마이야 왕조를 건설한다. 그리고는 바그다드로 돌아가서 아바스 왕조에 복수하는 것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았으나, 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에 시달리느라 결국 복수는 이루지 못하였다.[21] 그래도 죽음의 위기에서 맨몸으로 탈출하여 근 300년간 이어진 나라의 건국자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 예수게이를 살해한 타타르족 - 예수게이가 그의 적이었던 타타르족에게 신분을 숨기고 손님으로 찾아갔으나 타타르족은 그를 알아보고 음식에 독을 타 그를 살해한다. 후일 예수게이의 아들 칭기즈 칸은 타타르족을 격파하고 수레바퀴 축보다 키가 큰 남자는 모두 죽이는 방법으로 복수한다.[22] 그리고 위에서 나왔듯, 동맹을 위해 찾아온 칭기즈 칸의 증조부를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 고려의 여진 정벌 - 고려 윤관여진족 추장들과 병사들을 환대하며 잔치를 벌였다가 몰살시켰다. 그 기세를 몰아 고려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축성하며 영토확장에 성공하...는 듯 하였으나, 결국 그 사건으로 친 고려파 여진족이 완전히 사라지고 남은 여진족들이 원한에 똘똘 뭉쳐 매서운 반격을 시작하면서 상황은 역전. 갈라수 전투에서 한반도 역사상에 남을 대패를 당하고 결국 동북 9성도 돌려주면서 결과적으로 고려의 여진 정벌은 실패로 돌아간다.
  • 검은 만찬(Black Dinner) - 1440년 스코틀랜드 더글러스 클랜의 일원들이 당시 왕이었던 제임스 2세[23]에게 초대받았다 죽은 사건이다.
  • 그리스 신화테세우스가 처치한 악당 중 한 명인 프로크루스테스는 손님을 접대한 다음 침대에 눕히고 침대 길이에 맞춰 다리를 자르거나 늘리는 방식으로 여행객들을 살해해왔다. 이에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똑같은 방법으로 죽였다.
  • 우범선을 살해한 고영근은 우범선을 집들이를 겸하여 초청한 후 철퇴로 내리쳐 죽였다.
  • 스톡홀름 대학살 -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2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항복한 스웨덴 귀족들을 용서한다고 하고 만찬에 초청해놓고 모조리 다 죽였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구스타프 1세 바사가 탈출하여 스웨덴 독립전쟁을 이끌고 칼마르 동맹은 영원히 깨진다.

7.2.2. 손님이 대접받은 뒤 공격한 사례


아래의 사례는 위의 사례들과는 다르게 손님이 집주인에게 대접을 받았음에도 집주인을 공격한 사례다.
  • 글렌코의 학살
1692년에 있었던 사건인데 표면상으로는 맥도날드 클랜이 윌리엄 3세의 충성서약서에 늦게 서명했다는 이유로 일어났다.
당시 맥도날드 클랜의 대표는 악천후 때문에 정해진 데드라인 직전에 목표한 곳에 도착했고, 그 곳에는 충성서약을 받아줄 사람이 부재하는 등의 악재가 겹쳤다. 전후사정을 고려하면 충성서약의 지연을 문제 삼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글렌코의 맥도날드 클랜은 캠벨 클랜의 지휘관이 이끄는 병사들이 방문했을 때도 즉각적인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열흘 이상 후하게 대접받던 병사들은 2월 13일 새벽에 갑자기 돌변하여 주민들을 학살하였는데 희생자 수는 40에서 300 정도로 다양한 견해가 있다.
출전에 따라 정당방위로 기록되어 있는 책도 있지만, 현대의 사학자들은 대체로 조조가 접대를 받았음에도 배은망덕하게 이를 살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초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는 쪽은 조조 옹호의 성격이 좀 있는지라...
어쨌든 조선에선 셔먼호 인원들을 손님으로 대접한 뒤 타일러 돌려보내려 했지만 셔먼호는 자신들의 욕심을 버리지 못해 주인 입장에 있던 조선을 공격한 사건이다.
오페르트 일행이 남연군 묘를 도굴하기 전까지 조선에선 나름 접대의 관습을 베풀었다. 하지만...

8. 매체에서



8.1.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


이 작품에도 이를 간접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있다. 에드몽 당테스가 백작의 신분을 가지고 파리 사교계에 나타난 뒤, 원수인 페르낭 드 모르세르의 집에서 연 무도회에 참석한다. 이때 메르세데스는 아들인 알베르를 시켜서 백작에게 음료나 음식을 꾸준히 권했다.
이는 단순히 집주인으로서 손님에게 대접하려 한 게 아니다. 메르세데스는 이미 백작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백작의 복수를 걱정하고 있었다. 만약 백작이 음식을 받아들인다면 메르세데스로선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손님으로서 음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주인, 즉 페르낭과 메르세데스에게 적대심이 없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중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끝까지 음식을 거부했다. 메르세데스가 온실에서 함께 산책하겠다는 백작과 단 둘이 있을 때 메르세데스가 직접 온실의 과일을 권유했지만 이 역시 거절하고 오히려 모르세르 가에 대한 적대를 에둘러 표현한다. 메르세데스가 백작의 과거에 대해 묻자, 백작은 '나는 몰타 출신으로 고향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지만, 전쟁에 참전하러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오니 그녀는 이미 결혼을 했더라'라고 자신의 과거를 각색해 말해준다. 이 말에 메르세데스가 "그렇다면 그 사람이 백작님을 괴롭게 한 것에 대해 용서하셨나요?"라고 물으니 백작의 대답은 "그녀'''는''' 용서했습니다." 즉 메르세데스는 용서했지만[24] 페르낭을 포함한 자신의 원수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 메르세데스도 총명한 사람이라 이 뜻을 한번에 알아들었다. 결국 메르세데스는 백작의 복수심을 확인하고 절망한다. 마침 이 부분이 나오는 챕터의 제목이 '빵과 소금'이다. 작중에서도 동양[25]의 빵과 소금 풍습을 언급한다.
이 장면 이전에 백작이 자기 집에서 파티를 열었을 때도 백작은 (자신의 원수들인 빌포르와 당글라르를 포함한) 손님들에게만 음식을 먹게 하고 자신은 먹지 않았는데, 접대의 관습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원수들과는 물 한 모금도 같이 마시고 싶지 않았던 듯. 나중에 모종의 사유로 백작에게 의심을 품게 된 빌포르와 당글라르 부인[26]의 대화에서, 빌포르가 "백작은 정말이지 음식을 한입도 하지 않았소. 누가 보면 그가 우리를 전부 독살하려고 했다고 오해했을 거요."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물론 백작의 복수 계획은 독살로 목숨을 빼앗아 끝내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치밀했지만.

8.2. 얼음과 불의 노래


''''접대의 관습' 또는 '접대의 율법'(The Laws of Hospitality)'''이라고 불리는 이 관습은 웨스테로스 전역에서 인정되며, 최초인들만큼 오래되었고, 또 종교처럼 신성하게 여겨진다. 손님을 맞아들여 접대를 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주인은 손님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것으로 간주된다. 동시에 손님 역시 주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하는 쌍방의 합의이기도 한데, 실제로는 대체로 손님이 약자인 경우가 많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손님의 안전을 보장하는 주인의 의무로 해석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손님의 권리(Guest Right)'''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때 손님의 권리가 발생하게 되는 최소한의 기준은 음식을 대접받는 것이다. 조금 더 전통적인 형식으로는 빵과 소금을 대접받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넓은 의미에서 음식을 대접 받으면 충분한 것으로 여긴다. 피의 결혼식 직전에 캐틀린에게 빵과 소금을 받아서 먹으라고 충고하였으며, 왈더 프레이 역시 빵과 소금을 꼬집어 말한 바 있다. 드라마 시즌 3 9화를 보면 왈더 프레이가 롭과 일행들에게 환영 인사와 함께 빵과 소금을 대접하며 '일곱 신들의 은총 아래 환대와 보호를 약속한다'고 말한다. 왈더와 프레이 가문 사람들도 먹는 걸 보면 정식 행사(?)에서는 집주인도 먹어야 하는 모양.
집주인이 직접 손님의 안전을 위협한다면 스스로 천하의 개쌍놈 선언을 하는 셈이며 극악무도한 범죄가 된다. 킹스가드가 왕을 살해하는 것보다도 더 심하고[27], 존속살해 정도는 돼야 동급으로 여겨진다.
손님의 권리를 깼다가 저주를 받은 요리사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기도 하는데, 쥐 요리사 문서 참고.

8.2.1. 작중에서


롭 스타크에드무어 툴리로슬린 프레이의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이 관습을 믿고 안전을 확신하고 무방비하게 있었지만[28], 프레이 가문이 이 관습을 대놓고 깨면서 피의 결혼식이라는 대학살극이 펼쳐졌다. 프레이 가문 이전에 관습을 깬 사례가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 걸 보면 최소한 귀족 레벨에서는 프레이 가문이 최초인 듯 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프레이 가문은 웨스테로스 전역에서 경멸받는 천하의 개쌍놈이 되었다. 다섯 왕의 전쟁에서 철저히 중립을 유지한 베일 출신의 린 코브레이가 협상 중 칼을 뽑고 결투로 풀자고 하자 '너 프레이였냐?'라고 할 정도.
월 너머의 와이들링들에게 이 관습이 있는지는 따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만스 레이더크래스터는 지키고 있는 중이다.
만스 레이더는 작중 존 스노우에게 자신의 손님으로 있는 동안에는 해치지 않으니 걱정 말라고 했고, 잡히면 참수될 밤의 경비대 탈영병이면서도 이걸 믿고 로버트 왕의 행차 때 태연하게 윈터펠에 구경가서 성에서 대접해준 음식을 먹었다. 만스 레이더는 이 관습을 심장 나무만큼 신성하다고 했는데, 심장 나무는 옛 신 신앙의 핵심인 신의 숲 중앙에 위치한 얼굴을 조각한 위어우드를 말한다.
크래스터 역시 그의 성채 내부에 밤의 경비대를 맞아들였을 때 접대의 관습에 대해 언급한다. 하지만 식량 배분 문제로 밤의 경비대 측에서 내분이 벌어지면서 프레이 가문과는 반대로 밤의 경비대 측에서 크래스터를 죽임으로써 접대의 관습이 깨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때 제오 모르몬트는 관습을 깬 이들이 신들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 탄식했다. 그리고 직후에 분노한 배신자들의 칼에 쓰러졌다.
크래스터가 도끼를 휘두르며 밤의 경비대 대원들에게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한 것 역시, 대원들이 먼저 크래스터를 쪼잔하다고 모욕한 것, 즉 손님과 주인의 상호존중을 저버린 것이 시작이었고 크래스터는 대원들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고 '나를 욕하는 놈은 내 손님이 아니니 내 집에서 나가라'고 요구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손님으로서 일단 대접을 받았으면서도 주인을 모욕한 대원들이 먼저 잘못했고, 크래스터는 손님의 잘못에 대해 주인의 권리를 행사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즉, 전체적으로 보면 크래스터는 손님을 잘 대접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명목상 흠 잡을 수 없을 정도까지는 접대의 관습에 충실했던 데 비해, 밤의 경비대 대원들은 대놓고 접대의 관습을 어겼다는 점. 잘못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
손님이 주인을 존중하는 것 역시 관습의 일부였다. 캐틀린 스타크가 술집에서 사람들에게 '저자가 내 집에 손님으로 오더니 내 아들을 죽이려 했다'며 티리온 라니스터를 잡는 걸 도와달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기꺼이 도왔던 이유에는 집안 간의 친분도 있었지만[29] 손님이 음식과 잠자리를 대접해 준 사람의 아이를 죽이려 했다는 게 터무니없는 악행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30] 루스 볼턴제이미 라니스터브리엔느에게 음식을 대접하면서 깽판을 치려는 제이미에게 "니가 아무리 막나가도 접객의 법을 어기는 건 좀 아니지 않느냐"는 투로 말했다. [31] 바로 위에서 써있듯이 밤의 경비대 배신자들이 크레스터를 죽였을 때도 제오 모르몬트가 같은 언급을 했다.

8.3. 더 위쳐 3: 와일드 헌트


본편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확장팩인 블러드 앤 와인에서 이 관습을 지키지 않았다가 저주를 받아 망령(Wight)으로 변해버린 인물이 등장한다.
본래 이름은 마를렌 드 트라스타마라로 백여 년 전의 사람이다. 장원을 물려받을 부자였는데, 어느 날 친구들을 불러서 연회를 열었다. 이 때 어떤 거지가 '''숟가락'''과 그릇 하나를 가지고 구걸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구걸을 하러 온 거지도 엄연한 손님이므로 접대의 관습에 따라 당연히 대접을 해줘야 했다. 하지만 마를렌은 옛 풍습 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사람이었고 남은 음식을 거지한테 주느니 차라리 개들에게 주겠다며 문전박대를 해버렸다. 그러자 그 거지는 분노하여 숟가락을 부러뜨리면서 이런 내용의 저주를 걸었다. '''연회를 하고 있었으니 '그 누구도 당신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을 것'이며, 외모가 아름다웠으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게 될 것'이며, 빵부스러기조차도 주지 않았으니 '어떤 숟가락도 굶주림을 채워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반점망령으로 변해버린 마를렌은 저주를 풀기 위해 약 100년 간 많은 숟가락을 훔쳤고 사람들을 납치해 강제로 자신과 식사하도록 했지만 저주를 풀지 못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나중에 밝혀지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의지'''로 함께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쓰지 않고''' 식사를 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거울이 아닌 물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게임에서 게롤트의 선택에 따라 저주를 풀 수 있다. 인간으로 돌아온 마를렌은 저주 그 자체보다 지인들이 수명을 다해 죽어가는 걸 보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고. 이후엔 게롤트의 저택에서 요리사로 취직한다.
정황상 이 거지는 하츠 오브 스톤에 등장하는 군터 오딤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저주 내용을 설명할 때 흘러나오는 하츠 오브 스톤 메인 테마곡으로 반쯤 확인사살. 지못미...

8.4. 늑대와 향신료


중세 유럽 고증으로 유명한 일본의 라이트 노벨 늑대와 향신료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된다. 늑대와 향신료 14권에서 "이 마을의 관습상 여행객은 촌장이 혼자 대접하는 것이 예의인지."라는 대목이 등장.

8.5.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 편에서 캐스피언 왕자가 의식을 잃은 후 예전 나니아인들의 집에서 깨어났을 때 어떻게 할지를 논할 때, 검은 난쟁이 니카브릭은 "지금 당장 죽여버리자"고 하자, 붉은 난쟁이 트럼프킨은 "죽이려면 그 자리에서 죽였어야 했어. 아니면 거기에 내버려두거나. 지금 죽이면 손님을 해치는 것이야."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8.6. 제9중대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될 소련군 병사들을 교육하는 장면에서 일종의 정훈교육을 진행하던 장교가 유사한 사례를 언급한다. 마을에 들어온 소련군을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받아들여주고 차도 대접했지만, 소련군이 마을을 떠나자 무자헤딘으로 돌변해 등 뒤에서 총을 쏘아댔다고.

[1] 우선 기본적으로 걸어야 했고, 개중 여건이 좋아 이라도 타고 다닌다 해도 말을 먹이는 비용이 든다. 가는 길에는 도처에 도적이나 맹수가 많았다. 심하면 황무지에서 길 잃고 헤매다가 아사하거나 동사할 위험도 있었다.[2] JTBC의 예능 프로그램 한끼줍쇼의 포맷 역시 접대의 관습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3] 다른 '정당한 이유'의 예로 그 집안이나 씨족 내에 뭔가 우환 등이 있을 경우 오는 손님을 거절하거나 머물던 손님에게도 떠나달라고 요청하더라도 무례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 점에서 보면 사실 예수게이가 적대관계인 타타르족에게 손님으로 받아달라고 찾아간 것 자체가 좋게 보면 대담하고 개방적인 행동이지만 나쁘게 보자면 손님이 지켜야 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에 가까운 것이었다.[4] 이 정도의 안전보장도 안 될 정도면 초원에서는 어디를 가든 한 씨족 전체가 움직이지 않는 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고, 자연히 씨족/부족간의 교류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즉 소속 씨족이나 부족을 떠나 소수로 움직이는 인원은 손님으로 인정하고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은 당시 초원 유목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한 공감대였기에 이를 위배하는 경우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되는 것.[5] 당장에 테무친의 이름도 예수게이가 그 날 죽였던 타타르족 장수 '테무친 우게'의 이름을 딴 것이다...[6] 예수게이는 뛰어난 전사였고 그 동행인들 역시 예수게이가 신뢰하는 전사였을 테니 실력은 상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정말 정면에서 때려잡으려 들었다가는 타타르족에서도 인명 피해가 나올 수 있었다는 것.(대체로 초원의 유목민들은 인구가 많지 않고 각각의 씨족 집단 규모도 그리 크지는 않기에 한두명 정도만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어도 꽤 속쓰린 피해가 된다. 그리고 숙련된 전사를 상대로 한꺼번에 덤벼들 경우 격전의 와중에 다치는 사람이 나올 가능성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다.) 또는 상황에 따라서는 예수게이가 먼저 눈치채고 도주를 시도할 경우 추격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과 자원이 소모되고 인명 손실이 발생하거나, 최악의 경우 예수게이가 도주에 성공해버릴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즉 타타르족의 속임수는 이런 불확정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예수게이를 확실히 제거한다는 단기적인 이익을 가져다주기는 한 셈. 물론 접대의 관습을 어긴 시점에 그 단기적인 이익 이후의 대가는 부족의 멸망일 수밖에 없었다.[7] 판본에 따라서는 금은으로 장식된 거대한 저택을 선물했는데, 노부부가 이를 신전으로 바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후에 이들 부부는 죽을 때가 되자 제우스에게 '''한날 한시에 죽게 해달라'''고 청했고 제우스는 이 기도를 받아들여 이들을 동시에 나무로 변하게 하였다.이것도 판본에 따라서 제우스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필레몬이 제우스 신을 모시는 신관이 되어 평생 제우스님을 섬기게 해달라고 하고 아내 바우키스가 자신은 남편이 죽을 때 한날 한시에 죽고 싶다고 말해 제우스가 이를 들어줬다는 이야기로 전해진다.[8] 소금은 수요가 높았기 때문에 현대의 기준으로 가격이 떨어지게 된 계기는 냉장고와 냉동고의 개발로 인한 식품저장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그전까지 모든 음식은 소금에 염장하는 방식으로 저장했기 때문에, 소금은 어느 지역에서나 상당히 귀한 식품이었다.[9] 단 이 이야기는 복수를 하려는 자가 그 복수를 완성할 때까지 강한 의지로 쉬지도 멈추지도 않음을 상징하는 '복수자는 복수를 완성할 때까지 소금을 먹지 않는다'는 일화를 모태로 했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이는 상징이자 비유적 표현이디 진짜 안 먹은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소금을 안 먹으면 금방 죽는다.[10] 사실 다윗은 이전에 나발의 양치기들을 아무 대가없이 지켜준 적도 있었으나, 나발은 친사울파였기에 관습을 무시한 채 그를 쫓아낸다.[11] 그들은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천사들이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천사들을 강간하려는 목적으로 이들을 빼앗으려 했던 것으로 주로 해석된다.[12] 이를 오독해서 롯이 딸을 물건 취급했다고 봐서는 안된다. 아무리 고대 근동에서 여성 인권이 낮았다고 한들, 가장이 집안 여성을 지키는 것은 중대한 의무였고 모욕을 당한 여성을 위해 가족이 사적으로 복수하는 것도 어느정도는 변호되었다.(참고: 창세 34장) 즉 본문이 동시대 독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1차적인 문학적 의미로 보자면, 롯은 딸을 지켜야 한다는 (고대이기에 오히려 강력한) 가장의 의무와 접대의 관습 사이에서 양자택일로 후자를 선택한 것으로 봐야 한다.[13] 사실 호라즘 왕국 쪽에서 이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처벌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면 적당한 선에서 끝날 수도 있었는데 하필 그 사람이 당시 호라즘 왕국 태후의 친척이라 처벌도 받지 않았고, 한술 더 떠서 배상은 커녕 몽골 사신들의 수염을 밀어버리는 도발까지 감행하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수염이 남성성의 상징인 이슬람교도들에게 수염을 밀어버린다는 건 보통 모욕이 아니다. 사실 호라즘은 몽골이 얼마나 거대한 제국인지 파악을 못했기 때문에 첫 조우부터 끊임없이 깝죽댔지만 알다시피 몽골은 아시아를 평정하고 머지않아 유럽 연합군까지 밟아버린 대제국이었다.[14] 고려 측은 이를 여진족의 소행으로 보았으나 아직까지는 누가 저질렀는지 밝혀진 것은 없다.[15] 그 외에도 거지가 동냥하러 오면 찬밥 한 덩이 정도는 내 주고 중이 시주하러 와도 여유있는 집에서는 쌀을 조금이라도 내 준다. 이런 관습을 무시하고 깐깐하게 굴었다가 큰코다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옹고집전이다.[16] 따라서 통상 수교를 요구하러 온 서구 사절들에게 적당히 그 뜻을 거절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17] 하멜 같은 경우는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배가 완전히 부서져 자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그렇다고 청나라를 통해 보내려고 하니 병자호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하멜 일행이 혹시나 조선 사정을 청나라에 유출할 우려가 있어 보낼 수 없었고, 일본 역시 당시 임진왜란의 상흔이 남아 있는데다 시마바라의 난이 끝난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라 공식적으로는 하멜 일행이 일본에 가면 죽을 우려가 있어서라고. 물론 하멜 일행은 성상파괴운동을 겪은 개신교도인지라 일본에서 딱히 문제 삼지 않았지만 그 이전 벨테브레의 송환을 거부한 적이 있고 해서 조선에선 상세한 상황을 몰랐기도 했고.[18]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살라딘이 기에게 물을 주자 기가 받아마신 뒤 르노에게 넘겨주고, 살라딘이 르노를 향해 "네게 준 것이 아니다"(=너는 살려주지 않겠다)고 말하자 르노가 "나는 이 물을 물로서 받을 뿐이다"(=목이 마르니까 받아마셨을 뿐, 네가 나를 살려주길 기대하진 않는다)고 대꾸한다. 이후 살라딘은 현장에서 칼을 뽑아 르노의 목을 긋고, 살라딘 휘하의 무사들이 르노를 끌고 나가 목을 잘라낸다. 그리고 살라딘이 기에게 "왕은 왕을 죽이지 않는다, 훌륭한 선왕에게서 배운 것이 없느냐"고 타박하면서 해당 장면 종료.[19] 사실 역사상으로 중요한 관습이긴 하지만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처럼 철저하게 지켜진 건 또 아니긴 하다. 그리고 상대가 교활한 자라 이런 식으로 유인하여 제거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사악하거나 위험분자인 경우도 있어서서 어긴 것을 두고 반드시 나쁘다고 하기 뭣한 경우도 의외로 꽤 있다.[20] 무언가를 요청한다는 것은 주인이 손님을 제대로 접대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어 주인의 명예가 손상되었다.[21] 애당초 아바스 왕조의 중심과는 북아프리카를 빙 둘러 가야했기에 멀어도 너무 멀었다.[22] 유목민들은 정주민들보다 훨씬 더 접대의 관습에 엄중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23] 당연히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가 아니다.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는 스코틀랜드 기준으로는 제임스 7세라고 할 수 있다.[24] 에드몽을 잃고 페르낭과 결혼할 때까지 그녀의 처지는 에드몽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이해와 별개로 기분이야 씁쓸했겠지만.[25] 작중에서는 '동양'이라고 부르지만, 여기서 나오는 동양은 동아시아보다는 중동 지역에 가깝다.[26] 당글라르 부인이 당글라르와 결혼하기 전, 그녀는 빌포르와 불륜 관계로 사생아까지 있었다. 원수들에게 복수할 정보를 수집하던 백작이 이것을 알게 되었고 이 파티에서 그에 관한 말을 슬쩍 흘려 둘을 겁에 질리게 한 것.[27] 제이미 라니스터는 폭군으로 유명했던 아에리스를 죽였는데도 14년 넘게 뒷말을 듣고 있다.[28] 결혼식장으로 가면서 '걔들이 빡쳐있을 텐데 칼이라도 뽑으면 어쩌나?', '구더기를 먹으라고 줘도 뭐든 먹으면 '손님의 권리'로 보호받아 안전만은 확실하니까 일단 먹고 아무 걱정 마라' 등의 대화를 나눴다.[29] 캐틀린의 친정인 툴리 가문의 기수 가문이나 친한 가문의 사람들이었으며 캐틀린은 각 기수 가문 사람들에게 툴리 가문과 그 가문과의 친분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우회적으로 지지를 구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리버랜드 지방은 라니스터 가문의 서부와 사이가 나쁜 편이다.[30] 물론 현대의 기준으로 봐도 손님 대접해 준 집의 아동을 살해하는 건 엄청난 범죄이다. 거기에 브론은 돈 때문이었다.[31] 본인은 참여만 했을 뿐이지 직접 초대한 건 아니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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