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독립운동가로서의 최원봉, 일제 협력 부역자로서의 최원봉
崔元鳳
1922년 4월 18일 ~ 1950년 11월 10일
1. 생애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큰 포목점을 운영한 아버지 최창민(1975년 사망)의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일항일학생의거 일명(노다이사건)에 간접 연루되었고 동래 중학교(현 부산
동래고등학교)를 19회 졸업하고 해방후에 국방부검찰과장, 1950년 5월 30일 경남 부산 무구 선거구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동향 선거 지역구의 무소속
김범부 의원과 자유구락부 국민회계로의 교섭 단체 구성을 시도했지만, 의원 정수 부족으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으로 활동을 하였다.
2대 국회의원 역임 당시 무소속 의원으로 이승만 정부와 각종 정책에 대해 대립을 하였는데, 특히나 이승만 정부가 고수하던
귀속재산처리법에 대한 입찰경매제 방식에서 연고자 중심으로의 매각 개정안을 두고 2대 국회 개원부터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최원봉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대다수 무소속 의원들은 현 귀속재산법 입찰경매제에서 연고자 우선 매각으로 개정하려 했다. 개정의 이유는 현 귀속재산처리법의 입찰경매제 방식은 특혜 또는 부정의 시비가 있어 개정하여야 하며,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국회를 하대 하려는 태도는 3천만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무시하는 일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귀속재산처리법의 입찰경매제 방식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만민평등한 복리의 형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연고자 우선 매각 개정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국회의 개정안은 일부점유자의 이익만을 위하는 편견이라고 반박했다. 당시 귀속재산의 연고자점유자의 대부분이 입찰경매재에 반대하고, 충무로의 명동 일대의 상인들도 입찰경매제의 반대를 뜻하기 위해 상가를 일시 철시하였다. 이에 최원봉 의원은 2대 7회 2차 본회의에서 귀속 재산 처리법 방식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다.
"이제 이진수 의원 외 27인 의원의 이름으로 긴급동의가 상정되었는데 여기에 대한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겠읍니다. 귀속재산 불하로 말미암아 거리에서 지금 남한 1500 강토에서 수만은 동포들이, 무산 동포들이 유산계급 및 현행 정부시책에 대하여 정명(正明)으로 투쟁하고 있는 것은 현하 이 시간의 사실이올시다. 그러나 싸우고 있는 그 동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쌀입니다. 위선(爲先) 먹어야만 싸움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싸울 힘조차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리에서 감히 이 동의에 있어서 재산의 문제도 큰 문제고 정부의 지금까지의 일체(一切)의 시책도 큰 문제입니다마는 보담 더 화급한 것이 미곡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가격 문제가 퍽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22일 지금으로부터 48시간을 기다릴 수도 도저히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농림장관이 백성의 굶주린 현실을 참으로 잘 안다고 하면 오늘 이 시간에 몰르드라도 당장 나와 가지고 백성을 사랑하는 애정이 추호라도 있다고 하면 얼마든지 우리들의 질문에 답변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제2차 회의를 여는 국회의원이 아닙니까? 과거 민국의 치안이니 혹은 국제 정세니 해 가지고 일체의 행정 내용을 기밀에 부치고 왔읍니다. 우리는 농림 정책에 있어서도 상세한 내용을 아직것 모르고 있는 현상이올시다. 그러면 질의는 22일 한다고 할지라도 오늘 일단(一旦) 농림장관으로부터 이 굶주린 이천만 동포들에 대한 시책을 적어도 한 시간 바삐 들어 가지고 여기에 대한 확호(確乎)한 태도를 결정해 가지고 다음에 22일 날 질의응답할 시간만 듣도록 하는 것을 개의하는바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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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가는 정부를 따라, 피난 갔다.
1950년 11월 7일 정부의 전쟁 책임을 물어 국무위원 인책 및 사직 권고 결의안을 최원봉 의원 자신의 대표 발의 외 80여명의 의원들의 공동 발의와 85명의 의원 연서로 본회의에 대표 발의하여 상정 되었으나, 무슨 이유서인지 상정 토의 결과
국회의장 신익희 의원 등이 현재 국회에 세법이 상정 되어 있는데 정부와의 불협 화음을 막기 위함과 아직도 전방에선 장병들이 피를 흘리며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 또한 이 결의안이 금년에 방한하는 유엔 한국 위원단에 국론 분열로 미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서범석,
이종현 의원 등의 결의안 찬성 의원들의 찬성 토론이 있음에도 국무위원 인책 및 사직권고 결의안 안건이 71대 23으로 보류 처리 되었다.
다음은 국무위원 인책 및 사직 권고안을 대표 발인한 최원봉 의원의 결의안 대표 발언이다.
"저는 6․25사변 전, 전 국무위원의 인책 사직 권고 결의의 건…… 오늘 상정되는 이 건 자체가 이 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요해 가면서 설명과 토의를 할 필요조차 없는 것은 여러 선배 의원께서 잘 아실 줄 압니다. 다만, 제안자로서 이 결의안을 제출한 이유의 일단, 실지 예를 들어서 몇 가지를 말씀을 드리고 결론을 맺고저 합니다. 총체적으로 국무위원은 국가 최고의 국무를 위임받어 가지고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소위 우리의 민의를 받들어서 모든 일을 해야 되겠는데도 불구하고 6월 25일부터의 모든 실책은 지금 우리 1대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이것을 영원히 누명을 씻을 수 없는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읍니다. 그 한 예들 들어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국방부장관 신성모 씨는 5월 10일경에 이미 신문기자와 회견석상에서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 적군이 남침할 우려가 있다, 5월 6일 대통령께서도 이것을 말씀하셨고, 또 이것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하여 일국의 위기라는 말을 5월 12일부 경향 각 신문지에 발표된 바 있읍니다. 이다음으로 5월 13일에는 또 연달아 말하기를 선박의 이동(異動)이 심하고 국내외 모든 정세가 험난한 이때에 38 이북의 적의 기갑부대나 항공부대가 많이 움지기고 있다는 것을…… 여기에 대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하였읍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서는 6월 25일 날 아침에 38선 경비하는 국군을 외출시켜 가지고 우리가 이제 당하고 있는 이러한 참화를 짧은 시간 안에 당하게 되었읍니다. 그 결과를 볼 때에 의례히 이것은 총 책임이 국방장관하고 또 그 사정을 아는 국무위원 전원에게 돌아가야 된다고 보아집니다. 또 6월 26일, 7일날 그 이틀간 취한 태도를 보면 6월 25일날 11시로부터 경무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는 총참모장 기타 군부의 요원 임석 하에 열려 가지고 수도의 포기를 결의한 바 있었읍니다. 그러나 6월 27일은 물론이고, 6월 28일 아침에 이르기까지 국방부 정훈국 지도자 담(談)에서 수도 포기는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을 방송한 사실도 있었읍니다. 정부와 시민은 물론이려니와 국방 내무의 간부에서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이 책임이, 전 책임이 물론 국무위원 전체에 돌아갈 것입니다. 6월 28일 아침에 한강철교를 파괴해 가지고, 그 책임을 한 개 최창식 대령에게 물리고 총살시킨다는 것은 그 역사적인 죄명을 국방부장관, 전 국무위원이 지지 않겠다는 의미 때문인지는 저는 모르겠읍니다. 또한 각부 장관의 예를 들어 한두 가지 말씀드리면, 백낙준 문교부장관은 그 당시에 우리 국군의 성벽이 될 만한 학도호국대에 대해서 약 8만의 학도에게 추호도 무장이나 혹은 긴박한 사태를 보고한 사실이 전연 나타나지 않고 적군 괴뢰집단의 중심세력을 만들어 낸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말었읍니다. 그뿐입니까. 어제 이 자리에 출석한 최순주 재무부장관이 여기에 와서 너희들은 너희들의 집을 불 못 지르면서 나에게 조선은행권을 다 태워 버리라고 말하느냐고 호언장담했읍니다. 그야말로 어제 말씀한 20억에 달하는 우리 지폐를 그냥 적군의 수중에 집어넣어서 사용케 했고, 또한 우리의 조폐국을 그대로 두어 가지고 적군이 이것을 완전하게 운전했다는 사실을 보드라도 이것은 삼척동자로서도…… 국무위원의 한 사람의 실책이라고 보아집니다. 농림부장관 윤영선 씨는 이미 본 사변이 일어나기 전에 사표를 제출하여 모든 시민의 굶주리는 그 책임을 진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 양심을 의심하는 바입니다. 외무부장관 임병직 씨는 외국 공사와 기타 신문에 수도를 포기하여 서울의 위기는 닥쳐온다는 한 점의 통고도 없이 몇몇 부하를 데리고 서울을 떠났었다, 이 사실을 보드라도 의례히 이 책임을 져야 될 것입니다. 국무위원의 한 사람인 임 장관이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중에는 이번에 자랑할 만한 빛나는 그러한 장관이 한두 분이 계십니다. 특히 김석관 교통부장관은 많은 미국 사람을 살 길로 인도하여 많은 공로를 세워 미국의 최고 훈장을 줄 그러한 치사를 할 만한 일을 하였다고 하는 말을 들은 사실도 있읍니다. 혹은 직장을 사수한 그러한 장관이 계신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국무 전체를 위임받은 위원이 대통령을 보좌 못 하고 국민으로 하여금 이러한 고생을 하게 하고, 수도를 3일에 적군의 수중에 넣게 한 이러한 결과를 나타나게 한 이 국무위원은 의례히 양심이 있고 체면이 있다면 벌써 남대문이 보이는 거리에 도달할 때에 사표를 제출해야 될 것입니다. 대구나 부산에서 국회에서 뭐라고 했으며 심지어는 신문기자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읍니까? 남대문이 보이면은 우리는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하겠다고 누누히 말한 사실도 있읍니다. 그런데 수도에 돌아온 후 한 달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자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 자리를 이용해 가지고 정부 시책을 행케 하는 그 자리에 있겠다는 말인지는 저는 모르겠읍니다. 이와 같이 역사적․대내적으로 우리 민족의 위기가 오고 우리 자신의 단결이 필요한 이때에 무능한 자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민족에 대해서 죄악이고, 우리 역사상으로도 죄악이라고 보아지는 무능한 현 장관은 정당히 유능한 사람과 그 자리를 바꿔야 할 것입니다. 의례히 정당이 우리를 원조해 주는 정부나 수많은 동지들이, 수많은 장병들이 남북통일에 참가하는 오늘날 이 피의 대가와 원조의 정신에서 보드라도 그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은 저는 철면피라고 보지 않을 수 없읍니다. 오늘의 힘이 되고 내일의 광명이 될 만한 참된 정부를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의 무능한 장관이 퇴진한다는 것은 의례히 해야 될 것이고, 또 무능이 폭로되고 무책임이 폭로된 이상에는 또 거기에 양심조차 없다는 그러한 누명을 듣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가라는 것이 이 결의안의 취지올시다. 문제는 우리가 맡은 바 임무는 민중으로부터 정부를 잘 만들라는 그것입니다. 본 국회는 하루빨리 이 정부로 하여금 중요하고도 역사적인 수난기에 모든 행정의 책임을 유능한 사람이 이 행정에 들어가서 대한민국을 빛나게 들어 달라는 것이 이 결의안의 취지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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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2일 후, 동년 11월 10일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 가던중에 경북 김천 황간 부근에서 북상하는 터키군 수송 차량의 갑작스런 도로 이탈로 충돌하여 사망하였다.
이에 국회는 1950년 11월 18일 2대 국회 8회 52차 본 회의 도중 최원봉 의원의 자동차 사고사를 듣고 신익희 국회의장은 직접 애도사를 통해 조문을 표했다.
"또 한 가지, 우리 국회로서 불행한 사실을 여러분에게 보고해 드립니다.우리 국회의원, 부산에서 선출한 최원봉 의원은 정확한 일자는 아직도 모릅니다마는, 아마 13, 4일이 되지 않나 생각하고 있읍니다. 자동차를 타고 부산을 향해 가는 도중에 대구 근방에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아직 정확한 보고를 못 들었읍니다마는, 대구 근방에서 미국 군대의 자동차인지 자동차하고 같이 충돌이 되어 가지고 중상을 당했다고 그럽니다. 그 결과 치료 무효하게 돼서 사망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16일 날 전보를 받아서 17일 날 장례식을 자기 고향인 동래 장전동에서 거행한다고 하는 전보를 받고 그 근방의 선출로 최 의원과 서로히 친분이 있던 서장주 의원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국회 전체를 대표해서 가서 조위를 하라고 보냈읍니다. 연소희유(年少稀有)한 의원으로 전도가 무한하던 우리 동지 한 분을 잃게 된 것은 우리 의원들이 다 같이 통석히 여길 뿐만 아니라 우리 전체 국가의 손실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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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후, 최원봉 의원의 죽음에 대해 유족들이 정부에 강력한 진상 조사 요구가 있었지만, 번번히 이유 없다는 이유로 거절 당한다.뒷날 1997년에 방영된 토요 미스테리 극장-어느 국회의원의 죽음-편을 통해 여동생 최옥순씨가 직접 출연하여 증언을 통해 오빠 최원봉 의원의 죽음에 대해 강력히 의문을 제기 하였다. 1952년 국회에서 한국 전쟁으로 인해 납북, 행방 불명 또는 사망으로 인해 공석된 이들 국회의원에 대해 국회의원 제적수에 관한 특별법으로 제명 처리 되었으며, 공석된 경남 부산 무구 지역구는 전쟁 중 행방 불명 또는 사망한 경북 달성의
권오훈 의원, 충남 공주의
김명동 의원, 충남 연기의
이긍종 의원, 전남 구레의 이판열 의원 등의 지역구 4곳과 함께 재보궐선거를 치루었다. 최원봉 의원의 선거구였던 경남 부산 무구의 재보궐 선거 당선자는 노동 운동가 유명한
전진한 의원이다.
2. 최원봉 의원이 발의한 법안
1950년 5월 30일 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최원봉 의원은 동년 11월 10일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하기까지 짦은 의정 생활이었지만, 의미 있는 법안들을 대표 발의 또는 공동 발의자로 의정 활동에 임했다.
- 1950-07-27 임시특별위원회설치에관한결의안(의안 020719호)
- 1950-07-28 2대 8회 본회의 의결(부결) 대표 발의자 이시묵, 공종 발의자 이시묵 김범부 김봉재 김익기 김형덕 노기용 윤성순 정헌주 최원봉
- 1950-07-31 국민총력동원선언에관한결의안(의안 020726호)
- 1950-07-31 2대 8회 본회의 의결(부결) 대표 발의자 김범부, 공동 발의자 김범부 김명수 김지태 박정규 배상연 서상국 서이환 이갑성 이병홍 이진수 정기면 최면수 최원봉
- 1950-08-01 휴회에관한건 발의자
- 1950-09-03 유엔총회및미국등예방의원파견의건 발의자
- 1950-09-06 대통령에게요청하는결의안 발의자
- 1950-09-12 피난민구호에대한임시조치법안 발의자
- 1950-09-16 회기재연기에관한건 발의자
- 1950-11-01 국무위원인책사직권고에관한결의안 대표발의자
- 1950-11-01 추곡매상에관한건의안 발의자
- 1950-11-02 이북탈환지역실정동사위문단파견에관한건 발의자
- 1950-11-02 이북애국동포에게멧세-지발송의건 발의자
- 1950-11-07 국민학교후원회비징수폐지요구에관한건의안 발의자
3. 독립운동가로서의 최원봉, 일제 협력 부역자로서의 최원봉
독립 운동가라는 평가 외에 당시 장안면 좌천리의 지역 유지로써, 1940년대 일제의 징용.징병에 협력했다는 현 생존해 있는 마을 주민들의 증언이 있다.직접 청취 하였다. 단순 협력인지, 적극 협력인지는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좌천리 현지 주민들의 증언이 있다. 현지 주민들 중 일부는 최원봉 의원이 당시 좌천리 마을 유지로써 1940년대 일제의 전쟁의 징용.징병에 협력하여 당시 마을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확실히 그의 당시 행동에 있어 판단하기는 현재 어렵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최원봉 후보가 부산 무구(현 부산 영도구) 선거에서 유세 발언 중 일부분이다.
"지금 국회의원에 입후보 하신 분들의 연설을 듣고 생각한바 있습니다. 모두 훌륭하신 입후보자 들이십니다. 여러분 이분들중에서 저보다 월등히 훌륭하다고 판단 되시는 분이 계신다면 여러분 의 귀중한 한표를 그분에게 전부 던저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 드리면서 조리 없고 두서 없는 말씀을 여기서 마치고 물러 나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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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그의 아들은
최백호 (가수)이다. 최백호씨는 뉴스 인터뷰에서 아버지 최원봉 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2011년 3월. 한국정책방송 KTV의 한 대담 토크쇼에서 아버지 최원봉 의원에 대해서 태어난지 5달이 채 되지 않아 자동차 사고로 돌아 가셨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기억은 없지만, 1950년 11월10일 삼촌들 및 지인들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 오던 중 경북 김천 부근 다리에서 마주 오던 터키군 수송 차량의 갑작스로운 도로 이탈로 추돌 사고를 당해 사망 하였다고 증언 하였다. 이에 아버지 최원봉 의원 죽음에 의문점을 내비쳤으며, 이 사건 이후, 할아버지 최창민 등 친가와 인연을 끊게 되었다. 이후 가수 최백호씨가 자신의 그림 전시회에 찾아온 아버지의 지인에 의해 다시 한번 아버지 최원봉 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