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범석(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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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範錫
1902년 10월 19일 ~ 1986년 4월 2일
일제강점기 초기엔 3.1 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였으나, 이후 변절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본관은 대구(大丘)[1] , 호는 백봉(白峰)이다.
1902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2] 에서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서정희와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의 네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서문중(徐文重)의 10대손으로, 고조부 서병순(徐秉淳)은 서문중의 6대 종손으로 종3품 선산도호부사를 지냈다. 조부 서병갑(徐丙甲)[3] 은 1874년(고종 11) 정시 무과에 급제하여# 1876년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에 제수되었던# 무관이었다.
1919년 양정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졸업 후 중국으로 유학하여 베이징대학 정경과를 다니다가 2학년 때 중퇴하였다.
1925년 4월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 중에 적기시위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같은 해 6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10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박헌영·김단야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에서 해직되었다#. 이후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였고 베이징특파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28년 1월에는 사회주의 청년단체 경성청년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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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신의주주재특파원으로 있다가 그 해 11월 펑톈에 특파되었다.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같은 해 7월 일어난 만보산 사건을 적극 취재하는 한편, 랴오닝성 외교협회 간부와 접촉하여 한국인의 입장을 설명하는 등# 충돌을 유화시키려 노력했다. 그후 1932년 7월까지 특파원으로 근무한 것이 확인된다#.
1933년에 조선일보 만주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신영우(申榮雨)와 함께 돌연 친일 성향의 신문 만몽일보(滿蒙日報)에 입사하여 편집국원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사실상 친일로 전향하였다. 1934년에는 만몽일보를 퇴사하고 건축·토목회사 협동공사(協同公司)를 창설하여 경영하기 시작했다#. 1936년 12월에는 최린·박희도·이진호·신태악·성원경·조성근 등과 함께 조선인징병제 요망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7년 만주국의 선전기관 역할을 하던 펑톈 흥아협회(興亞協會) 간부로 있었다##2. 1938년 만주국 관변 정치 조직인 만주국 협화회 펑톈시본부 선계공작간사회(鮮系工作幹事會) 실천부장이 되었다.
한편, 1937년 3월 조선민족혁명당의 기관지 「앞길」제2호에서는 서범석을 '일제의 주구' '관동군의 앞잡이' 등으로 칭하면서 월간 재만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 사무장 겸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사실을 밝혔다#.
1940년 당시에도 펑톈에서 흥아협회 기관지였던 월간 재만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의 주간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1941년에는 신징의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본부(東南地區特別工作後援會本部) 상무위원으로 있으면서 김일성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귀순 권고문을 작성하는 듯 후방공작을 일삼았다#. 그 밖에 펑톈 동광학원(東光學園)의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8.15 광복 후인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옹진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독립당 오택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흥문과 신민당 복수공천을 받아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고흥문 후보와 민주공화당 정래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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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範錫
1902년 10월 19일 ~ 1986년 4월 2일
1. 개요
일제강점기 초기엔 3.1 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였으나, 이후 변절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본관은 대구(大丘)[1] , 호는 백봉(白峰)이다.
2. 생애
1902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2] 에서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서정희와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의 네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서문중(徐文重)의 10대손으로, 고조부 서병순(徐秉淳)은 서문중의 6대 종손으로 종3품 선산도호부사를 지냈다. 조부 서병갑(徐丙甲)[3] 은 1874년(고종 11) 정시 무과에 급제하여# 1876년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에 제수되었던# 무관이었다.
1919년 양정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졸업 후 중국으로 유학하여 베이징대학 정경과를 다니다가 2학년 때 중퇴하였다.
1925년 4월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 중에 적기시위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같은 해 6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10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박헌영·김단야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에서 해직되었다#. 이후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였고 베이징특파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28년 1월에는 사회주의 청년단체 경성청년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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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신의주주재특파원으로 있다가 그 해 11월 펑톈에 특파되었다.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같은 해 7월 일어난 만보산 사건을 적극 취재하는 한편, 랴오닝성 외교협회 간부와 접촉하여 한국인의 입장을 설명하는 등# 충돌을 유화시키려 노력했다. 그후 1932년 7월까지 특파원으로 근무한 것이 확인된다#.
1933년에 조선일보 만주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신영우(申榮雨)와 함께 돌연 친일 성향의 신문 만몽일보(滿蒙日報)에 입사하여 편집국원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사실상 친일로 전향하였다. 1934년에는 만몽일보를 퇴사하고 건축·토목회사 협동공사(協同公司)를 창설하여 경영하기 시작했다#. 1936년 12월에는 최린·박희도·이진호·신태악·성원경·조성근 등과 함께 조선인징병제 요망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7년 만주국의 선전기관 역할을 하던 펑톈 흥아협회(興亞協會) 간부로 있었다##2. 1938년 만주국 관변 정치 조직인 만주국 협화회 펑톈시본부 선계공작간사회(鮮系工作幹事會) 실천부장이 되었다.
한편, 1937년 3월 조선민족혁명당의 기관지 「앞길」제2호에서는 서범석을 '일제의 주구' '관동군의 앞잡이' 등으로 칭하면서 월간 재만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 사무장 겸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사실을 밝혔다#.
1940년 당시에도 펑톈에서 흥아협회 기관지였던 월간 재만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의 주간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1941년에는 신징의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본부(東南地區特別工作後援會本部) 상무위원으로 있으면서 김일성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귀순 권고문을 작성하는 듯 후방공작을 일삼았다#. 그 밖에 펑톈 동광학원(東光學園)의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8.15 광복 후인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옹진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독립당 오택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흥문과 신민당 복수공천을 받아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고흥문 후보와 민주공화당 정래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3. 선거 이력
[1] 만사공(晩沙公) 경우(景雨)파. 대구 서씨 27세 석(錫) 항렬.[2]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출생지가 전라남도 광주부 광주읍 서광산정(현 광주광역시 동구 서남동)으로 기재되어 있다.[3] 초명은 서광정(徐光正)이며, 1885년(고종 22) 종6품 부사과(副司果)로 재직 중에 서병규(徐丙圭, 徐丙奎)로 개명했다.# 족보명은 서병진(徐丙眞), 무보(武譜)에는 서광진(徐光眞)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