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현(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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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전 관료, 정치인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종현은 1903년 3월 5일 평안남도 덕천군 군내면 관서리(현 덕천시 덕성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의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갔다 온 뒤 귀국하여 3.1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경상북도 김천군 김천면 황금정(현 김천시 황금동)에 주소지를 두고서 고향 덕천에 자주 왕래하던 중 1920년 만주 관전현(寬甸縣)[3] 에 본부를 두고 있는 대한독립단에서 파견된 연락원 박승혁이 정진원(丁進源)·정계록 등과 함께 덕천지단을 설치하자 여기에 가입, 지단 통신원에 임명되었다.
그는 지단 통신원으로서의 업무 뿐만 아니라 무장 독립군의 원조와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다가 1921년 5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21년 10월 2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공갈 등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8.15 광복 후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운수부장에 선임되었다. 그 후 월남하여 조선민주당 사무국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초대 강원도지사를, 1949년부터 1950년까지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국회 산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대한국민당에 입당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선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인천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재곤 후보에 75표 차이로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다.
1959년 1월 5일 서울특별시 중구 동자동(현 용산구 동자동) 자택 인근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어 수도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이틀 뒤인 1월 7일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