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데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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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기원전 1274년 5월 12일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전투. 카데시의 위치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의 지도 참고. Qadesh라고 표기된 곳이 카데시, Damas가 고대에는 우피라고 불린 다마스쿠스이다. 우피는 카데시 전투의 결과 부분에서 다시 언급된다. '''현대에 어느정도 재현이 가능할 정도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세계 최초의 전쟁'''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 모두 이 전쟁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 내용이 서로 다르다. 이집트의 기록은 백성들에게 보이기 위한 선전용으로 작성된 것[2] 임에 반해 히타이트의 기록은 내부용으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이집트 기록이 좀 더 과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이집트의 기록이라고 해서 이집트의 일방적인 승리만이 기술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자신들의 실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기록하고 있다.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이집트 측과 히타이트 측의 설명이 서로 다르며, 양쪽 모두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기록했다. 때문에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지만,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히타이트가 승리 내지는 우세한 상황에서 끝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전투의 자세한 경과가 기록된 곳은 라메세움 장제전, 카르낙, 룩소르, 아부심벨 등 이집트 측뿐이므로, 아래 설명은 대부분 이집트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2. 발단
이집트의 신 왕국(18~20왕조) 시대에 가나안과 시리아 지역은 이집트군의 공격 범위 내에 있었으며 항상 분쟁지역이었다.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는 메기도 전투에서 카데시 및 그의 동맹국들을 복종시켰고[3] 이후 이집트는 가나안 지역과 시리아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아멘호테프 4세(아케나톤)와 투탕카멘, 아이 등의 치세를 거치면서 아시아에서의 이집트의 영역은 계속 줄어들기만 했다. 파라오 호렘헤브는 이 지역에 원정을 감행해서 이러한 추세를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세티 1세는 적극적인 아시아 원정으로 마침내 카데시를 다시 점령하고 아무루를 복속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 원정에는 람세스 2세도 참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카데시와 아무루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람세스 2세가 즉위했을 때 카데시는 히타이트가 점령하고 있었고 아무루는 히타이트의 동맹국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아무루가 히타이트에서 벗어나서 다시 이집트와 동맹을 맺는 사건이 벌어졌다.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는 히타이트의 기록에 따르면 크게 화를 내며 아무루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준비했고,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역시 이를 히타이트를 격파할 좋은 기회로 여기고 히타이트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양측의 군세는 히타이트군은 대략 4만 명의 보병과 3700여 대의 전차, 11,000명의 용병으로, 이집트군은 대략 1만 6천 명의 보병과 2000여 대의 전차, 4천명의 용병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4] 히타이트 군이 2배 이상의 전력을 동원한 셈이다.[5]
이집트의 기록에서는 히타이트가 '''모든 동맹국의 군대를 총동원'''했다고 하며 동맹국들의 목록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명의 신뢰도는 높지 않지만 이 중 트로이의 실제 이름인 윌루사와 호메로스가 트로이의 동맹국으로 언급한 다르다니아가 포함된 점이 흥미롭다.
3. 함정에 빠진 이집트군
람세스 2세의 이집트군은 아문, 라, 세트, 프타의 4개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진격하던 이집트군은 두 명의 '바다의 사람들'[6] 을 발견했는데, 이들은 히타이트 군이 람세스 2세가 진격해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며 이미 카데시 요새를 빠져나가 북쪽으로 도망치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에 람세스는 신속하게 카데시를 손에 넣고 히타이트 군을 추격하기 위해서 부대의 이동속도를 좀 더 높이기로 했다. 그 결과 부대 사이의 간격이 크게 벌어졌다. 람세스 2세는 제일 선두에서 전방의 상황을 살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그 뒤를 아문 부대와 라 부대, 세트 부대, 프타 부대가 간격이 크게 벌어진 채로 따라오는 형태가 되었다. 이때 이동을 서두르다보니 부대 사이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서 서로의 상황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세트 부대와 프타 부대는 너무 뒤쳐졌기 때문에 카데시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전투에 전혀 참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 이집트 척후병들이 히타이트군 몇 명을 잡아왔고, 람세스는 뭔가 상황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집트의 기록에 따르면 '람세스 2세 혼자만이 매우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해서' 이 척후병들이 히타이트군의 공작원임을 눈치 챘고, 이들을 고문하여 히타이트 군이 사실은 카데시 주변에서 매복하고 이집트 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근데, 다시 보듯이, '''파라오 혼자 알았다는 이야기는 나머진 아무도 몰랐단 이야기다.''' 즉, 이집트군은 히타이트의 거짓 정보에 넘어가서 완벽하게 함정에 빠진 것이다.
람세스 2세는 남쪽에서 빠르게 북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척후가 완벽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히타이트군은 이를 대비해 카데시 성채의 북쪽에 군대를 매복시켜 람세스 2세로서는 성채에 가려져 히타이트군의 존재를 알기 힘들었다.
이때 아문 부대는 오론테스 강을 건너 카데시 요새를 향하고 있었고, 라 부대는 오론테스강을 건너고 있었으며, 세트 부대와 프타 부대는 남쪽 멀리에 떨어져 있었다. 이제 람세스는 이집트 부대들에게 적의 공격을 경고하고 방어 준비를 시키며 세트 부대와 프타 부대를 급히 합류시켜야 했지만, 이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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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히타이트군의 공격
오론테스강을 건너는 라 부대 앞에 히타이트의 전차부대가 크게 회전하여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대로 돌격하여 라 부대를 급습했다. 이집트군은 4개 부대 간에 서로 연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력도 히타이트 군에 미치지 못했고, 더구나 라 부대는 방심한 상태로 그것도 강을 건너는 도중에 습격당했기 때문에 히타이트군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궤멸되었다.
히타이트군은 이어서 선두의 아문 부대를 공격했으며, 아문 부대 역시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받고 궤멸 당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전개 과정은 이집트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이집트의 부조에는 아문 부대의 모습과 이후 아문 부대가 히타이트 전차부대의 공격으로 무너지는 모습 등이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때 당연하게도 일부 히타이트군은 람세스 2세를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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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반전?
여기까지는 이집트의 기록도 명확하며 히타이트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이집트의 기록은 서로 모순되기 시작하며 히타이트의 기록과도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다음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결과적으로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군에게 잡히지 않은 것과 카데시 요새는 함락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이집트의 기록에 따르면, 람세스 2세는 이 시점에 '''신으로 변했다'''고 한다. 람세스 2세의 곁에는 오직 마부 한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다른 이집트군은 모두 달아났다. 람세스의 마부 역시 겁에 질려있었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마부를 독려하고, '''신으로 변해서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히타이트 군을 대학살하고 승리'''한 후 유유히 이집트 군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집트 측 기록에 의하면 당나귀 턱뼈를 집어 들어 근처의 히타이트 군을 홀로 몰살했다고 한다.[7] )
아무리 람세스가 훌륭한 전사였다고 해도 한 사람의 힘으로 히타이트군을 궤멸시키고 승리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이집트의 전차부대는 히타이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다른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활이 주 무기였으므로, 아무리 본인이 신으로 변했다고 해도 자기가 가진 화살 숫자보다 많은 적을 살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8]
게다가 당시의 무장을 보면 납득이 전혀 안 된다. 중세 시대라면 기사들이 온 몸을 갑옷으로 무장해 화살이나 칼날이 박힐 부분이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칠 수는 있다. 하지만 저 시대에는 그 정도 중무장은 아니고 발목이나 팔꿈치 정도는 노출된 복식인데 그런 옷을 입고 무쌍을 찍는다?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나마도 저 중세 시대의 기사 갑옷도 총과 대포가 상용화되면서 도태했다.
만약 이집트의 기록이 이것으로 끝이었다면 람세스는 그냥 혼자 간신히 달아났으며 히타이트의 승리로 끝났다고 간단히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위의 '문자로 된' 설명에 붙어있는 부조의 내용은 설명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이집트의 부조에서도 분명히 람세스는 혼자서 신나게 날뛰고 있지만, 부조 한쪽 구석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집트 측의 부대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설명에서는 람세스가 혼자서 이겼다고만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으므로 이 부대의 정체에 대한 단서가 없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파라오의 근위대(메자이)라고 추정하기도 하고[9] , 가나안인 용병대라고 하기도 하며, 아무루의 원군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10][11] 그러나 이 모든 설명들은 정황을 바탕으로 한 추측에 불과하다.
설명이 전혀 없다는 이유 때문에 이 정체불명의 부대가 전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이 부대는 부조에서도 단지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 히타이트군은 람세스 혼자서 때려잡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한 사람의 힘만으로 군대를 물리쳤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며, 이들이 전투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람세스 2세 혼자서 히타이트 군을 격파하고 승리했으며 주위에 람세스를 도와줄 사람은 마부 한 명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설명과 모순되는 부대의 존재를 굳이 그려놓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부대는 뭔가 '생략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역할이 대체 무엇인가이다.'''
이집트가 실제로 히타이트 군을 격파하고 승리했다고 보는 쪽에서는 그것이 람세스 혼자의 힘이 아니라 이 정체불명의 부대가 적절한 시점에 히타이트 군에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카데시 전투에서 이집트가 히타이트를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집트 측의 기록을 신뢰한 해석이다. 승리한 것 자체는 사실이고, 단지 람세스 2세가 자신의 공적을 과장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에서는 히타이트 군이 이미 승리했다고 생각해서 군기가 느슨해져(고대 전쟁에서는 흔히 있던 일이다. 후일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도 페르시아 별동대는 마케도니아군 후방을 습격하였으나 본래 목표인 마케도니아군 후방 공격을 망각하고 마케도니아군 캠프에서 약탈을 하는 바람에 전장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이집트 군이 남기고 간 물자를 약탈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그 정체불명의 이집트군 부대가 나타나서 람세스와 함께 히타이트 군을 기습해서 격파했다고 본다.
히타이트의 승리라는 측에서는 이집트군은 단순히 패배했으며 이 정체불명의 부대는 단순히 람세스나 람세스의 아들 등을 구출해서 호위했을 뿐이라고 해석한다. 람세스의 용감무쌍한 전투는 단순히 달아나기 위해 혈로를 뚫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설명의 근거는 숫자가 좀 더 많다. (그중에는 단순한 정황증거도 많기는 하다.)
- 이집트의 부조에서 그 정체불명의 부대는 전차부대가 아닌 단순한 보병부대로 묘사된다.[12] 따라서 대규모 전차부대가 격돌한 상황에서 전황을 뒤집을 전력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그 부대는 규모도 작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의 4개 부대에 필적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면 처음부터 언급되었을 것이다.
- 또한, 남쪽에서 느리게 오던 세트와 프타 부대의 정황이 적혀져 있지 않아 추측이지만, 뒤늦게 나타난 군대가 이들일 수 있고 람세스와 아들을 구해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요새를 향해 공격하려고 전진한 부대들은 아몬과 라 부대였고 세트와 프타부대는 아직 람세스 부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대의 대장들은 서둘러서 람세스가 있는 곳까지 갔으나 이미 전투가 시작되어 아몬부대는 완전히 궤멸당했고, 라 부대는 공격받고 있으며 람세스와 아들은 절체절명 위기였던 찰나에 이 두 부대들이 때마침 도착하였고 아마 람세스에게 있어서는 극적인 출현이자 히타이트들도 당황해 했을 것이다. 이 두 부대들이 진퇴양난에 빠진 람세스와 아들을 구출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나타나 람세스를 구출해주었어도 요새를 함락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해 준비해둔 4부대 중 아몬 부대는 궤멸되고, 라 부대는 거의 전멸하다 싶이 했으며 뒤늦게 도착한 세트, 프타 부대도 람세스를 구출하느라 사실상 피해도 많았을 것이니 람세스도 굳이 이런 상황에서 요새를 함락시키지 않았을 것이다.[13]
- 람세스가 신으로 변했다는 기록도 근거가 된다. 스스로 신으로 변해서 혼자서 히타이트 군을 몰살했다는 어마어마한 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패배를 승리로 조작하는 정도는 문제도 아닐 것이다. 실제로 람세스 2세는 그 후에도 다른 파라오가 만든 건축물에서 해당 파라오의 이름을 삭제하고 자기 이름을 써넣거나 하는 등의 사기를 친 전력이 있다. 투탕카멘도 이렇게 묻혔다고 보기도 하고...
- 히타이트군의 군기가 느슨해졌다거나 하는 종류의 설명은 사료상의 근거가 전혀 없다. 그 정체불명의 부대가 히타이트 군을 공격하는 모습 역시 이집트의 부조에는 묘사되지 않았다.
- 전투에 직접 참여한 것은 히타이트군의 일부였으며, 보병의 대부분은 카데시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진 것은 요새에서 가까운 지역이었으므로 실제로 히타이트 군이 위기를 맞았다면 지원군이 출동했을 텐데, 요새의 히타이트 군이 움직이지 않았다.
- 람세스가 어떤 부대의 힘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 부대에 대한 찬사가 완전히 삭제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단순히 공적을 과장하기 위해서라면 아군을 비난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이 전투의 기록에서는 람세스는 이집트 군을 분노에 찬 어조로 비난했으며, 어떤 부대에 대한 찬사도 남아있지 않다. "...나만큼 너희들에게 많은 일을 해준 파라오가 있었느냐? ...따라서 나는 전쟁터에서 너희를 믿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희는 모두 비겁하게 행동하였다! ...너희들의 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물론 비난이 끝난 후에는 그들을 격려하기는 한다. "기운을 내라, 나의 병사들이여..." 그러나 이 또한 승리보다는 패배한 군사들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 전투의 결과가 히타이트의 승리 쪽으로 더 잘 설명된다. 무엇보다도 전투 직후 람세스 2세가 무와탈리 2세에게서 전투 행위를 그만두고 물러날 것을 권고하는 서신을 받았을 때 이집트군은 일제히 람세스에게 그 권고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으며, 실제로 이집트군은 무와탈리의 권고대로 물러났다. 이는 평화조약이 아니었다. 히타이트군은 물러나지 않고 작전을 계속 수행했기 때문이다.
- 이집트가 이 원정에서 가지고 온 전리품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매우 빈약하다.
- 히타이트에서는 이집트 군을 물리치고 승리했다고 기록했다. 히타이트 측에서는 전투의 자세한 경과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카데시 전투는 이 전투에 참여한 하투실리 3세에게는 대단한 업적으로 언급된다.[14] 또한 히타이트의 하투실리 3세는 카데시 전투를 이집트의 승리로 기록한 것에 항의하는 편지를 람세스 2세에게 보냈으며, 이 편지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물론 하투실리에겐 중요한 업적이니 이쪽에서도 과장했을 수도 있다.
6. 결과
카데시 전투의 결과 이집트군은 본국으로 철수했다. 히타이트군은 그대로 군사작전을 계속하여 이집트의 중요한 거점인 우피(현재의 다마스쿠스 주변)를 점령했다. 또한 이집트의 동맹국인 아무루를 공격해서 약탈했다. 아무루는 이때는 히타이트에 항복하지 않고 버텨낸 것으로 보이지만, 전투가 벌어진 지 1년 이내로 도로 히타이트의 동맹국이 된 것은 확실하다. 이로써 아시아(중동)에서의 이집트의 영역은 가나안 지역만으로 축소되었다.
[image]그 후에도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 분쟁이 이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후에 평화조약이 맺어진 것을 보면 그랬을 수도 있다. 단, 흔히 알려져 있는 대로 이 전투의 직접적인 결과로 평화조약이 맺어진 것은 아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의 공식적인 평화조약이 체결된 것은 전투에서 무려 16년이 지난 기원전 1258년의 일이며, 이때도 이집트의 왕은 여전히 람세스 2세였지만 히타이트의 왕은 새로 즉위한 하투실리 3세였다.
여하간, 카데시 전투 이후에 맺어진 평화조약은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이라고 한다. (전쟁에서의 승리나 패배로 한 쪽이 다른 쪽에 복종하는 조약이 아닌 대등한 두 세력의 공존을 명시한 평화조약으로서 최초라는 뜻이다.)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에서 당시 맺어진 조약의 내용이 담긴 설형문자 점토판이 발견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이 조약문 원본은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가 되어있으며, 복사본은 국가 간 평화공존의 상징으로 국제연합 본부에 걸려있다.
아부심벨 대신전의 기둥의 방을 감싸고 있는 벽에 카데시 전투의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7. 그 외
홈월드에서 카락으로 유배되다가 길을 잃은 히가라인의 후손으로 7.8번째 미션에서 적으로 등장하는 '''카데시'''가 이 카데시에서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그쪽 스펠링은 Kadesh. 더불어 홈월드2엔 '''엘로힘'''이란 이름의 쉽야드가 등장하기도 한다.
-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서 카데시 전투가 잠시 나온다.
[1] 람세스가 기원전 1279년에 즉위했다는 정설을 바탕으로 한다. 날짜는 물론 이집트에서 기록했다.[2] 이집트 측의 기록은 부조와 벽화 형태, 또는 시와 기록 형태로 남아있는데, 람세스 2세의 장제전 라메세움과 카르나크, 룩소르, 아부심벨, 아비도스 신전에 기록되어 있다.[3] 정작 전투 자체는 별게 없었다. 이집트의 기록에 따르면, 이집트의 대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카데시 및 그 동맹국의 왕들은 요새로 도망쳤고 군대는 흩어져 달아나버렸다. 이후 이집트 군에게 포위당하고 구원의 희망도 보이지 않자 카데시의 왕 등은 이집트에 항복했다고 한다.[4] 다만 전차부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이설도 있어서, 실제 양측의 전차부대 규모는 수백 대, 그보다 극단적으로는 수십 대 규모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5] 이집트 군에서는 전차마다 2명씩, 히타이트 군에서는 전차마다 3명씩 탔으므로 전차부대의 인원수 역시 히타이트가 이집트의 2배 이상이다.[6] 베두인족으로 추측하기는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들이 나중에 (두 세대 뒤인 1180년대) 히타이트 등 오리엔트의 청동기시대 국가들을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공격한 그 '바다 민족'과 같은 민족인지도 알 수 없다.[7] 사사기의 삼손 역시 비슷한 전승이 있는 걸 보면 당나귀 턱뼈는 당시에 맨손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무장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8] 이 부분에 대해서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저서 전쟁의 역사에서 람세스가 generalship(장수의 본분)을 발휘하여 부대 단위 모랄빵을 막고 지휘 체계를 유지하여 활로를 뚫은 것으로 해석한다.[9] 영화 미이라 처음에 등장해서 아낙수나문이 죽게 하고 이모텝을 처리한 근위대는 바로 이 설을 바탕으로 카데시 전투 부조의 모습을 따라서 만들어졌다.[10]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의 경우 아무루 측의 원군으로 묘사하고 있다.[11] 아니면 뒤쳐져 있던 세트와 프타 부대였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아직 남쪽에서 파라오의 본진과 합류하지 못하였기에 서둘러서 전투가 시작한 시점인 뒤늦게 도착했을 것이다. 이 두 부대가 본 것은 이미 람세스의 본진이 무너지기 직전인 완전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히타이트는 신나라하고 파라오의 군대를 부수고 있는 광경을 보고 급히 전투에 합류했을 것이다. 히타이트 역시 갑자기 나타난 두 부대인 세트와 프타 부대의 출현에 당황해했을 것이고 이 부대는 그래도 아직 전투도 치루지 않은 온전한 상태라서 람세스 2세와 아들을 구출할 수 있었지만 승리로 이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엄연히 추측이고 이 두 부대 역시 그 멀리 떨어진 남쪽에서 어떻게 그 시간인 타이밍 맞게 도착했는지는 기록도 이야기도 없기에 그저 추측일 뿐이다.[12] 이집트의 부조는 미술적으로는 정형화된 양식이지만 고증은 상당히 충실해서, 이집트군의 전차와 히타이트군의 전차의 차이나 시대에 따른 히타이트군 전차의 변화까지 분명하게 묘사했다. 예를 들자면 히타이트는 철기 시대에 돌입해서 전차의 축을 철을 사용해 3명을 버틸수 있는 전차를 묘사했고, 이집트 전차는 아직 청동기 시대를 벗어나지 못해 전차 축을 청동을 써서 2명밖에 버티지 못하는 전차를 그렸다. 게다가 수필룰리우마 1세 시대의 히타이트군을 묘사한 부조에는 히타이트군도 전차에 2명이 탄 것으로 묘사하여 현대인들도 히타이트군 전차가 언제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오오![13] 물론, 추측이니 정설이 발표될 때까지는 이 가설을 추측으로만 생각하길 바란다.[14] 하투실리 3세는 무와탈리 2세의 동생이자 무르실리 2세의 아들이다. 원래 무와탈리 2세가 사망한 후에는 그 아들인 우르히-테슙이 무르실리 3세로서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삼촌인 하투실리를 제거하려다 반격으로 오히려 왕위를 빼앗겼다. 이 과정에서 카데시 전투에서의 성과는 하투실리에게 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