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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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동독, 독일의 前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며, 현재는 독일의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설적인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 중 한 명으로, 미셸 콴, 김연아 등으로 이어지는 '''피겨 여제''' 계보의 원조다. 올림픽 2회 연속 우승, 세계선수권에 4회 우승을 기록을 갖고 있으며 여자 피겨 스케이팅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손꼽한다.
2. 선수 경력
어린 시절 국가 차원에서 운영하는 스포츠 영재학교[1] 에 발탁되었고, 동독의 체계적인 체육 프로그램을 통해 엘리트 선수로 길러졌다.
2.1. 1978-79 시즌
블루 스워드 트로피에서 우승하고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1979 동독선수권에서는 동메달을 땄고 1979 유럽선수권에서는 14위를 기록했다.
2.2. 1979-80 시즌
블루 스워드 트로피와 1980 동독선수권에서 모두 은메달을 획득했다. 1980 유럽선수권에서 13위, 1980 세계선수권에서 10위를 기록했다.
2.3. 1980-81 시즌
1980 NHK 트로피와 챌린지 컵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1981 동독선수권에서는 처음으로 우승했다. 1981 유럽선수권과 1981 세계선수권에서는 모두 5위로 마쳤다.
2.4. 1981-82 시즌
블루 스워드 트로피와 챌린지 컵에서 우승했다. 1982 동독선수권에서는 2연패를 달성했다. 1982 유럽선수권과 1982 세계선수권에서는 처음으로 모두 은메달을 획득했다.[2]
2.5. 1982-83 시즌
1982 NHK 트로피에서 우승하고 1983 동독선수권에서는 3연패를 달성했다. 1983 유럽선수권에서는 첫 우승을 차지하고 1983 세계선수권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
2.6. 1983-84 시즌
1983 스케이트 캐나다와 챌린지 컵에서 우승했다. 1984 동독선수권과 1984 유럽선수권에서는 각각 4연패와 2연패를 달성했다.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에서는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로잘린 섬너스와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섬너스가 프리에서 트리플 점프를 더블링으로 처리하여, 비트가 금메달을 가져갔다. 1984 세계선수권에도 참가하여 첫 우승을 달성했다.
2.7. 1984-85 시즌
1985 동독선수권, 1985 유럽선수권, 1985 세계선수권에서 모두 우승했다.
2.8. 1985-86 시즌
1986 동독선수권과 1986 유럽선수권에서 우승했다. 그러나 1986 세계선수권에서는 데비 토머스에게 패배해 은메달을 획득했다.
2.9. 1986-87 시즌
1986 NHK 트로피에서 우승했다. 1987 동독선수권과 1987 유럽선수권에서는 7연패와 5연패를 달성했다. 1987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3번째 세계선수권 우승을 달성했다.
2.10. 1987-88 시즌
1987 NHK 트로피, 1988 동독선수권, 1988 유럽선수권에서는 6연패를 달성했다.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데비 토머스와 함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급인 일명 '''카르멘 전쟁'''으로 여자 피겨 라이벌리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 당시 카타리나는 피겨 프로그램에 최초로 캐릭터와 스토리텔링을 포함시켰고 말 그대로 '연기' 그 자체를 실현한 최초의 스케이터가 되었다. 그러나 컴펄서리와 쇼트에서 1위였던 토마스가 부담감을 느껴 프리에서 실수하고 다른 메달 후보였던 엘리자베스 맨리도 실수함에 따라 비트가 우승을 거머쥐었다.[3] 이로써 '''소냐 헤니 이후 여자 싱글 부문 두 번째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1988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한 후 은퇴하였다.
은퇴한 이후로는 동독 국적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드물게 미국으로 건너가서 프로 무대에서 활동했다.[4]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이 되면서 완전한 활동의 자유를 얻었고,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2.11. 1993-94 시즌
이 시즌 복귀를 선언했으나, 예전만큼의 기량은 선보이지 못했다. 1994 독일선수권에서는 타나 세젠코에 이어 2위를 하고 1994 유럽선수권과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는 각각 8위와 7위를 했다. 그러나 비트는 이 대회를 통해 오히려 더 큰 인기를 끌었는데 "나이가 들어도 선수로 뛸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이야기했다.
3. 은퇴 이후
아이스 쇼와 영화에도 출연하기도 했으며, 방송 진행도 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리고 1998년 플레이보이에 누드 화보가 실렸을 때는 메릴린 먼로 화보가 실린 창간호 이후 2번째로 전량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100만 달러의 거금을 받고 찍었다 보니, 아무래도 "스포츠마저 성 상품화에 오염된 것 아니냐?"라는 논란과 비판의 목소리도 있긴 했다. 이에 카타리나 비트는 나중에 인터뷰에서 "빙판 위에서의 귀엽고 공주같은 고정된 이미지를 도발적인 이미지로 바꾸고 싶었다."라고 밝혔었다. 은퇴 이후에도 아이스 쇼에서 최고의 인기 스타였고, 프로 활동을 2008년까지 했을 정도로 피겨 스케이팅의 대중화에 관심을 가지고 가장 크게 기여한 선수이기도 하다.
4. 평가
뛰어난 예술성을 가진 선수였으며 기술력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5] 다만, 점프의 파워풀함은 동시대 선수였던 데비 토머스를 더 인정해준다.
1980년대 후반 당시 공산권 국가들을 비롯해서 2010년대의 김연아가 주목을 받았던 것 이상으로 전세계에서 주목을 한 몸에 받는 빙상의 여제였다. 동독은 물론이고 공산권 국가에서도 동계 스포츠의 자존심이자 간판 선수였으며 '''"공산권 국가에서 배출한 가장 자본주의적인 상품"'''이라는 평가까지 따라다녔을 정도였으며 서구권을 비롯한 세계구급으로 인기가 정말 많았던 선수였다. 지금도 피겨 스케이팅의 역사에서 비트의 전성기는 반드시 언급된다. 그녀가 활동했던 냉전 시대에 스포츠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의 대리전이나 마찬가지였고,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수많은 선수들이 그녀의 아성에 도전했으나 선수로서의 역량은 물론 스타성으로도 당대에 그녀를 뛰어넘는 여자 싱글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5. 출전 및 입상 기록
6. 기타
- 1990년 동서독 통일 직후, 그녀가 8살 때부터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에 의해 그녀의 모든 일상생활이 감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동독에서는 그녀가 서방 세계로 망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상생활을 감시했는데, 3000쪽에 달하는 그녀의 감시 기록에는 "성관계를 몇 시에 시작해서 몇 시에 끝났다."는 기록까지 있었다.[6]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동독을 나쁘고 끔찍한 나라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내가 운동선수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최대한의 지원을 해준 나라이며 그에 맞춰 최상급 대우를 받으며 멋진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나라"라고 말했다.
- 브룩 실즈를 닮은 빼어난 미모와 아직까지도 스포츠 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자 운동선수 랭킹에서 지속적으로 상위권에 들 만큼 뛰어난 몸매를 가졌다. 선수 시절 키는 167cm로, 요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선수로서는 조금 큰 키이다.
- 1985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후 대한민국을 방문해서 서울 태릉 아이스링크와 대구 스포츠센터 아이스링크에서 시범경기를 하기도 했다. 세계선수권에서 입상한 다른 나라 선수들과 함께 내한했는데, 동독 선수 외에도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 선수들도 포함되었다. 이는 냉전이 끝나기 전이던 시절 공산권 선수들 여러 명이 한꺼번에 한국을 방문하여 경기를 한 최초의 사례였다. 당시 피겨 스케이팅이 비인기 종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방한이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는 2011년 동계올림픽 유치전 당시, 경쟁 도시 뮌헨의 유치위원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평창 유치위원회에서 활동한 김연아와 함께 구 여왕과 현 여왕의 대결로 해외 언론에서 자주 거론되어, 피겨 스케이팅에 문외한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이 때 꽤나 이름이 알려졌다.
-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 김연아가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금메달을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에게 내주자 독일 국영방송 ARD와의 인터뷰에서 "완전히 열받았다. 아델리나 소트니코바를 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화가 난다." 라고 말하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너무 짜증이 난다. 이럴 수는 없다고, 이건 토론이 필요한 문제다."라면서 크게 분노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진정하라는 진행자의 말에도 "진정을 할 수가 없어요!" 라면서 강력한 분노를 표시했다. 이후 캐나다 CBC 방송에서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사실 이 경기의 판정은 비트 뿐만 아니라 많은 전현직 선수들도 의문을 표하기는 했었으나 특히 비트의 이러한 발언은 그녀의 피겨 스케이팅 철학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출전 이후에 했던 인터뷰에서 "피겨 스케이팅은 빙상 예술이지, 도약 경쟁이 아니다"라고 했던 발언이 그 예이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당시에 캐나다 언론과 했던 인터뷰에서도 예상 우승자로 김연아를 지목하면서 김연아의 연기력과 예술성을 높게 평가한 바 있다.[7]
- 독일의 테니스 선수인 보리스 베커 등 현역 시절부터[8] 은퇴 이후까지 숱한 염문설이 있었고 구애하는 남자들도 많았으나, 2014년 현재까지 미혼이다. 아무래도 구 동독 시절부터 사생활까지 감시당했던 경험도 있거니와, 현역 시절부터 "결혼에 대한 생각이 분명히 없다"고 밝힐 정도로 독립심이 강한 성격인 탓도 있다. 하도 결혼을 안 해서 독일인들도 "제발 결혼 좀 하라"고 할 정도이다. 참고로 도널드 트럼프의 데이트 신청을 최초로 거절한 여성이라고 한다.
[1] Kinder- und Jugendsportschule, 일명 KJS라고 불렸다.[2] 당시 세계선수권 금메달은 미국의 일레인 자약이라는 선수로, 트리플 토룹 점프를 무려 네 번이나(...) 뛰어서 논란이 있었다. 이후 같은 트리플 점프를 두 번 이상 뛰지 않고, 두 번 중에 한 번은 반드시 콤비네이션 점프로 뛰게 하는 ‘자약 룰’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3] 프리에선 맨리가 1위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구채점제 규정상, 맨리가 금메달을 따기 위해선 프리에서 자신이 1등, 비트와 토마스가 모두 3위 이하 등수를 차지해야 했는데, 맨리 1위, 비트 2위, 토머스 3위가 됨으로써 총점에서 비트가 금메달을 차지하게 되었다. 맨리는 은메달, 토마스는 동메달을 챙겼다.[4] 후술할 슈타지 감시 논란도 그렇고, 동독 정부는 자국의 간판급 스포츠 스타였던 비트가 서방 세계로 망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항상 감시했다. 비트의 코치인 유타 뮐러의 딸이자 1968 그르노블 동계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가브리엘 세이페르트를 포함하여 1980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아네트 푀치도 제대로 된 프로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소냐 헤니 이후 56년만의 올림픽 2연패’라는 조건으로 겨우 프로 활동을 약속받을 수 있었고, 그마저도 벌어들이는 수입의 대부분을 동독 정부가 가져갔다. 결국 비트에게 두번째 올림픽 도전은 (선수로서의 승부욕도 당연히 있었겠지만) 자유가 걸린 상황이었던 것.[5] 트리플 플립 점프를 여자 싱글 선수 최초로 랜딩했다. 그러나 84년 올림픽 이후 트리플 살코-더블 플립 시퀀스 점프로 대체했으며 구채점제 시절 많은 선수들이 그랬듯 더블 럿츠 점프의 엣지는 불분명하다.[6] 첨언하자면, 성관계 기록에 대해서는 그녀 뿐만이 아니라 당시 슈타지의 감시하에 있던 동독인이었다면 모두가 피할 수 없었다.[7] 초창기 올림픽 3연패를 달성한 선구자격인 소냐 헤니를 제외하면 여성 쪽에선 유일하게 2연속 올림픽 챔피언이라는 기록을 본인만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치에서 제대로 된 판정이 나왔다면 자신과 같은 2연속 올림픽 우승 기록을 가지게 되는 김연아를 대기록 독점 욕심 없이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고평가하고 칭찬하고 불의에 화까지 내는 모습으로 보아, 아무래도 대인배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본문에 상기했듯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전 때도 각각 뮌헨과 평창의 홍보를 맡았다가 평창에 진 기억도 있었다.[8]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당시, 이탈리아의 세계 정상급 스키 선수인 알베르토 톰바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던 일이 유명하다. "비트가 금메달을 못 따면 내 금메달을 주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당연히 비트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정작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기간에는 둘이 데이트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