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콴
1. 소개
2. 선수 경력
2.1. 1992-93 시즌
2.2. 1993-94 시즌
2.3. 1994-95 시즌
2.4. 1995-96 시즌
2.5. 1996-97 시즌
2.6. 1997-98 시즌
2.7. 1998-99 시즌
2.8. 1999-00 시즌
2.9. 2000-01 시즌
2.10. 2001-02 시즌
2.11. 2002-03 시즌
2.12. 2003-04 시즌
2.13. 2004-05 시즌
2.14. 2005-06 시즌
2.15. 은퇴
3. 스케이팅 스타일
4.1.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생긴 일
5. 은퇴 이후 근황 겸 학업과 기부
6. ISU 공인 최고 점수
7. 프로그램
7.1. 프로그램에 대한 비화
8. 출전 및 입상 기록
8.1. 경기 이외의 수상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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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계 미국인 前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축구 선수이던 홍콩 이민자 대니 콴(Danny Kwan)과 그의 아내 에스텔라 콴(Estella Kwan)의 셋째로 태어났다. 오빠는 아이스하키를 하고, 2살 위의 언니 캐런과 같이 만 5세 때부터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했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근 '''10년 동안'''[6] 군림한 미국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의 최강자. 토냐 하딩 사건으로 미국에서 급속도로 식어가고 쓰러지던 피겨 스케이팅의 인기를 되살린 주요 영웅 중 한 사람이다.
세계선수권 5회 우승, 전미선수권 9회 우승(8연패), 동계올림픽 2회 입상[7] 을 포함, 무려 '''43회 우승'''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8] 을 쥐고 있는 , 챔피언 중 챔피언이다. 또한 피겨 스케이팅 역사상 전세계 선수들의 순위를 꼽으라고 하면 반드시 순위권에 지명되는 선수이다. 여자 싱글의 레전드라고 하면 꼭 카타리나 비트[9] 와 미셸 콴,이리나 슬루츠카야,김연아를 거론한다.[10]
현역 선수 생활을 은퇴한 뒤에는 아이스 쇼보다는 학업에 집중하였다. 2010년에 명예 박사 학위를 받으며 졸업했다. 은퇴한 지 3년 만에 프로 복귀를 했는데, 이 복귀 쇼가 김연아 선수의 2009 세계선수권 우승 직후 한국에서의 아이스 쇼였다. 김연아가 세계선수권에서의 활약으로 '''빙상의 여왕'''으로 인정받은 직후라, 사람들의 반응은 前 피겨여왕과 現 피겨여왕이 만난다고 두근거리는 상황이었다.
부모가 착실하게 공부도 시켰지만 잘 가르쳐서 정신력이 무척 강인하다. 콴의 아버지가 말하길, 콴이 운 것은 1991년 주니어 전미선수권에서 9위를 했을 때 뿐이라고 한다.
이런 훌륭한 삶과 강인한 정신력, 그리고 아름답고도 예술적 스케이팅 스타일으로 인하여 많은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우상이 되었다. 김연아도 가장 존경하는 선수가 미셸 콴이라고 이야기를 했을 정도다.
피겨 스케이팅이 유명해진 지 겨우 3~4년(2011년 기준) 정도밖에 되지 않은 한국의 대부분 신규 팬들에게는 김연아 선수의 우상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사실 김연아 이전에도 대표적인 여자 싱글 선수로써 이름 정도는 알려져 있었다.[11]
2. 선수 경력
만 5세 때부터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 다음해부터 전문 수업을 받고 각종 지역 대회에서 우승하게 된다. 8세 때 프랭크 캐롤 코치를 만났다. 이때 캐럴의 평가는 "'''기운만 세고 섬세하지도 않고 예술성도 없는 말괄량이'''" 랬다.
그 성격을 증명이라도 하듯 콴은 빨리 시니어로 나가고 싶어했지만, 캐롤 코치는 좀 더 기술과 예술성 모두 콴 자체를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질세라 콴은 훈련 시간을 2배로 늘려 학교를 다니면서 하루 3시간 훈련을 하기 시작한다. 콴은 하루 4시간을 훈련하게 해달라고 부모에게 졸랐지만, 성장기이던 콴의 몸을 걱정한 부모는 거절했다. 그리고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공부도 뒤쳐지지 않게 만든다.
2.1. 1992-93 시즌
'''불과 만 12세'''로 1993 전미선수권을 통해 시니어 데뷔하여 6위를 차지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국제대회인 가데나 스프링 트로피 주니어 부문에서 우승하였다.[12] 전문가들은 이때부터 미셸 콴을 살펴 보기 시작한다.
2.2. 1993-94 시즌
1993년 7월 만 13세가 된 콴은 올림픽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우승하였다. 이 대회에서 대회 역사상 최연소 우승이었던 데다 6개의 트리플 점프를 성공시켜 관중과 전문가들을 경악시킨다. 이때 떨리지 않냐고 물었던 한 인터뷰의 대답이 대단하다. "'''저의 기분이 어떻건, 관중이 많건 적건 저는 예정된 프로그램을 해야 합니다'''". 과연 어렸을 때부터 기질이 보였다.
이외에도 Goodwill Games 2위, 스케이트 아메리카[13] 에서 7위를 하였다.
1993년 11월~12월에 걸쳐 열린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만 13세 5개월이 조금 안 된 나이로 우승하였다.
올림픽 선발전으로 치러진 1994 전미선수권에서 2위를 하였으나, 당시 우승자였던 토냐 하딩과[15] 부상으로 내셔널에 나오지 못한 낸시 케리건이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기 때문에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출전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4번 항목 '인연 없는 동계올림픽' 참조.)
이후 1994 세계선수권에 출전하여[16] 쇼트에서 실수가 많아 11위, 프리에서는 6위를 기록하였고 종합 8위로 경기를 마감하였다.
2.3. 1994-95 시즌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은메달, 트로피 랄리크에서 동메달을 땄다. 전미선수권에서 2위, 1995 세계선수권 4위를 차지했다.
2.4. 1995-96 시즌
챔피언 시리즈 스케이트 아메리카, 스케이트 캐나다, Nations Cup에서 모두 우승했다.[17] 이어 1995-96 챔피언 시리즈 파이널에서도 우승했다.[18]
전미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고, 1996 세계선수권에서도 첫 우승을 차지하며 '''시즌 스윕'''을 달성했다. 이 때 콴의 나이는 만 15세였다.
그러나 세계선수권이 북미인 캐나다에서 개최된 대회가 아니라면, 천루가 금메달이었다는 논란이 있었다. 미국, 일본 심판이 프리에서 예술점수 6.0을 콴에게 주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전년도 우승자인 천루에게 금메달이 돌아갔을 것이다.
2.5. 1996-97 시즌
그랑프리 스케이트 아메리카와 트로피 랄리크에서 모두 우승하고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하였지만 타라 리핀스키에 밀려 파이널에서는 은메달을 땄다.
전미선수권에서도 리핀스키에 이어 2위, 세계선수권도 2위를 기록했다.
2.6. 1997-98 시즌
Goodwill Games에서 우승하며 시즌을 시작하였다. 그랑프리 스케이트 아메리카,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모두 우승했다. 전미선수권에서 우승하며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3-3 콤비네이션 점프 없는 안정적인 구성과, 평소보다 느린 스피드로 인해, 프리 2위로 결국 타라 리핀스키에 밀려 은메달에 머물렀다. 올림픽이 끝나고 세계선수권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2.7. 1998-99 시즌
콴은 비록 그랑프리 시리즈를 건너뛰고 TV를 위해 만들어진 pro-am 시리즈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선택했지만 이 시즌에도 계속해서 국가대표 선수로 뛰었다.
1999 전미선수권에서 우승하며 세번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999 세계선수권에서는 마리아 부티르스카야에 이은 은메달을 땄다.
2.8. 1999-00 시즌
그랑프리 스케이트 아메리카,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모두 우승하여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하였다. 1999-00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이리나 슬루츠카야를 제치고 1위였으나, 1-2위 선수들끼리 프리 경기만으로 다시 겨루는 '슈퍼 파이널'에서 이리나에게 밀리는 바람에 최종 은메달을 땄다.
2000 전미선수권에서는 4번째 우승이자 3연패를 달성했다. 2000 세계선수권에서는 3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2.9. 2000-01 시즌
이 시즌부터 향후 6년 동안, 콴은 대회와 갈라 의상의 대부분을 디자인할 유명한 디자이너이자 전직 피겨 선수이기도 한 베라 왕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이는 낸시 케리건[19] 에 이은 두번째 사례였다.
그랑프리 스케이트 아메리카 우승, 스케이트 캐나다 2위를 하였고 2000-01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2위를 하였다.
2001 전미선수권에서는 쇼트와 프리에서 모두 9명의 심판들에게 만장일치 1위로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하며, 통산 5번째 우승이자 4연패를 달성했다.
2001 세계선수권에서는 2연패이자 통산 4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우승은 3-3-2 점프까지 성공시킨 이리나 슬루츠카야였어야 한다는 논란이 있었다. 유로 해설자가 미쉘 콴의 우승이 말이 안된다고 생중계로 해설할 정도로, 국적빨 우승이라는 말이 많았다.
2.10. 2001-02 시즌
Goodwill Games에서 2위를 하며 시즌을 시작하였다. 그랑프리 스케이트 아메리카 우승, 스케이트 캐나다 동메달을 땄다.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은메달을 땄다. 3년 연속 은메달이자 4번째 은메달이다. 전미선수권에서는 5연패이자 6번째 우승을 달성하며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출전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같은 미국 동료 선수 사라 휴즈가 금메달을 차지한 가운데 '''동메달'''을 차지했다.
올림픽 이후에 열린 2002 세계선수권에서는 이리나 슬루츠카야에 이은 은메달을 땄다.
2.11. 2002-03 시즌
그랑프리는 스케이트 아메리카 한 대회만 출전하여 우승하였다. 전미선수권에서 7번째이자 우승이자 6연패를 달성했다.
2003 세계선수권에서 전무후무한 '''5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2.12. 2003-04 시즌
그랑프리 시리즈를 스킵하였고 전미선수권에서 8번째이자 7연패를 달성, 2004 세계선수권에서는 동메달을 땄다.
2.13. 2004-05 시즌
역시 그랑프리 시리즈는 참가하지 않았고 전미선수권에서 9번째이자 8연패를 달성하였다. 처음으로 신채점제로 열린 2005 세계선수권에서는 4위에 머물렀다. 이로써 10년 연속 포디움 기록은 아쉽게 9년에서 멈추었지만 이미 대단한 기록이다.
2.14. 2005-06 시즌
2005 세계선수권 이후 부상으로 한 번도 대회에 나오지 않았던 콴은, 그나마 2005년 12월 TV 프로그램을 통해 이번 시즌 쇼트 프로그램을 선보였지만 그 직후 부상이 심하게 도져버려 결국 올림픽 선발전인 전미선수권에 나오지 못했다. 그래도 그동안의 업적을 인정해준 미국 피겨 스케이팅 연맹의 특별 혜택으로, 5명의 심사위원 앞에서 비공개로, 2006년 1월 27일 이전에 콴의 건강 상태와 프로그램 연기를 선보이는 것을 조건으로 올림픽 행을 미국 연맹은 승인한다. 콴은 쇼트와 프리 모두를 선보여 토리노 동계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재차 부상으로 결국 직전에 기권하게 되었다.[20] 운명의 장난처럼 미셸 콴이 불참한 자리에는 사라 휴즈의 여동생인 에밀리 휴즈가 들어가게 되었다.
2.15. 은퇴
2008년 현역 은퇴를 하고, 아이스 쇼로 돈을 벌며 프로 생활을 하기보단 학업에 정진한다. 학업을 완전히 마쳐 졸업하고는 아이스 쇼도 참가하기 시작한다. 김연아의 한국에서의 아이스 쇼는 그녀의 첫 복귀 이후로 매년 참가하고 있고, 덩달아 콴의 팬들도 방한 주기가 잦아지고 있다.
3. 스케이팅 스타일
그야말로 우아함과 압도감을 동시에 지닌 타입으로, 기술답보라고 불릴만큼, 기술력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다. 이리나 슬루츠카야가 빠른 스피드, 스핀, 점프, 연기의 넓은 스펙트럼이 장점이라면 콴은 뛰어난 체력, 안정적인 컨시, 우아함, 카리스마가 장점이다.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콴은 피겨 스케이터의 몸매치곤 굴곡이 예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8등신도 아닌, 속히 말해 예쁘지 못한 몸매이지만 그녀의 포스는 관객을 장악할 만한 압도력이 엄청나게 있다.
43회 우승이라는 먼치킨이기도 하지만, 구 채점제 시대에서 만점이었던 6.0점을 국내대회를 포함하여 무려 '''57번''' 받았고 이것은 구 채점 제도시대의 '''최다 만점 기록'''이다.[21] 1998 전미선수권 때는 18명의 심사위원 중 15명이 만점 6.0점을 주기도 했다.
4. 동계 올림픽에서의 불운
유난히도 동계 올림픽 금메달과는 지독히도 인연이 없다. 근데 놓친 건 동계 올림픽 금메달뿐이라서 사실상 콩라인이라 하기엔 무리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미셸 콴이 거둔 다른 대회에서의 성적이 워낙 압도적이기 때문.
처음 동계 올림픽과의 악연은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대표 선발전이기도 한 1994년 전미선수권으로부터 시작한다.[22] 프리 스케이팅에서 2위를 해서 결과적으론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선수가 될 수는 있었지만, 미국 빙상 연맹의 규정 중 하나던 "연맹은 올림픽 선발전에 참가하지 않은 선수를 선발할 수도 있다" 가 작용, 당시 우승자이던 토냐 하딩과 연맹 국제위원회 투표에 따라 그 당시 최고의 선수였지만 불의의 사고로 출전하지 못했던 낸시 케리건이 출전하게 되었다. 이렇기에 콴은 대기 선수로 지정되었고 노르웨이까지 날아가 경기 시작일이던 2월 23까지 대기 상태에 있게 된다. 사실 이때 콴은 거의 참가가 가능했다. 하지만 상황이 꼬일 대로 꼬여서 마치 될 듯 말 듯 싶었다. 2월 1일 토냐 하딩이 유죄를 시인했고, 그에 따라 연맹은 징계 절차에 들어갔다. 하지만 10일 하딩 측이 미국 연맹에 2천만 달러 손해 배상 소송을 접수하고, 막후 협상 끝에 12일 연맹은 토냐가 올림픽에 가는 것을 승인하며 올림픽 후 징계 절차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론 못 나가게 되었다. 또 노르웨이에서 토냐는 발목을 접질러버렸지만 의사가 OK 사인을 내버려서 결국 진짜 헛고생을 하였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드디어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는데, 이 대회에서는 타라 리핀스키가 피겨 스케이팅 역대 최연소[23] 3-3 컴비네이선 점프 2번이라는 승부수를 성공시키며,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당시 세계랭킹 1위였던 콴은 안전한 경기운영으로 은메달로 만족해야 했다.[24] 쇼트에서 단독 점프가 상위권 중 가장 난이도가 낮았다.[25]
홈그라운드인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콴, 그리고 이번이 2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26] 점을 의식한 듯 엄청난 부담감에 억눌리던 콴은, 결국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프리에서 2번의 실수를 했고, 같은 미국 동료 선수인 사라 휴즈가 금메달을 차지한 가운데 콴은 결국 동메달을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참가할 수도 있던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도 출전할 계획이었으나, 2005 세계선수권 이후의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엔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오랜 전부터 앓고 있던 고관절염증이 심해졌다.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까지 가서 개회식에 참석했으나, 그것이 무리가 되어 다음날 연습에 여러차례 넘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올림픽 프레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은퇴를 밝혔다.
4.1.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생긴 일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피겨 스케이팅 스캔들 문서 참조.
5. 은퇴 이후 근황 겸 학업과 기부
은퇴 후 대학에 들어가 학업에 신경쓴다. 대학은 다른 곳도 아니고 스탠퍼드 대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27] (그야말로 엄친딸) 고향인 토랜스 시가 있는 LA 지역의 UCLA에 1년간 다니다가 훈련지인 콜로라도 주의 덴버 대학교로 편입학을 했다. 이유는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의 은메달이 아쉬워 다음 올림픽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2008년 11월에 덴버 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으며, 보스턴의 명문 터프츠 대학교의 플레처 스쿨에서 국제관계학 석사과정을 이수하다가 2010년 2년제 사립대학인 사우스 버몬트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으며 졸업하였다. 또한 이런 축사도 전했다. 상당히 감명 깊은 연설로, 기회가 되면 한 번 들어볼 것을 추천한다.
스포츠계를 위한 일도 상당히 했다. 2006년 11월 미국 국무부장관으로부터 최초의 공공외교사절로 임명, 전세계를 누비며 젊은이들과 리더십에 대해 논하고 사회와 교육을 주제로 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국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
2009년 1월에는 일상 체육활동을 통한 미국인의 건강증진방안에 대해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체력단련 및 스포츠 자문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2012년 세계 피겨 스케이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선수 생활을 2006년에야 마감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빨리 헌액된 셈이다.[28]
2013년 1월 19일 백악관 국가안전보장위원회에서 일하는 클레이 펠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2013년 11월 남편 클레이 펠이 로드 아일랜드 주 민주당 주지사 후보에 도전을 검토 중이란 뉴스가 떴다. 하지만 2017년 3월에 이혼 소송이 일어났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피겨 스케이팅 판정 논란 때 김연아의 연기에 대해 "Unbelievable"이라는 트윗을 했는데 국내에서는 "미셸 콴이 판정 결과를 믿을 수 없어한다" 라는 내용으로 와전되어 보도되었고, 같은 시기에 FOX의 인터뷰를 받고 한 말로 인해 김연아의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된 일이 있었다. 링크된 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트리플 점프의 개수로 인해 소트니코바가 이길 수 있었다고 콴이 인터뷰했고 나중에 콴이 말을 바꾼 것이다. '''채점 시에는 트리플 점프의 기초점, 퀄리티, 그리고 비점프 요소 모두를 고려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콴의 말에는 상당히 어폐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콴의 언행은 상당히 논란이 되었다.
6. ISU 공인 최고 점수
7. 프로그램
7.1. 프로그램에 대한 비화
워낙 유명한 프로그램이 많다.
김연아의 2008-09 시즌 프리 프로그램인 세헤라자데는 콴의 세헤라자데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이다. 김연아는 초등학생 시절, 미셸 콴의 세헤라자데를 비디오로 녹화해두고 여러 번 돌려보았다고 한다. 김연아는 보통 프로그램에 쓸 음악을 데이비드 윌슨이 가져온 곡들 중에서 선곡하는 편이었는데, 세헤라자데 만큼은 그녀가 하고 싶다고 먼저 말한 곡이기도 하다.
실제로 김연아의 세헤라자데가 처음으로 발표되자, 복장과 피니쉬 포즈 등이 어느 정도 콴의 세헤라자데를 떠올리게 하여 팬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시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콴의 가장 유명한 프로그램 중 하나인 이 세헤라자데를 김연아는 2009 세계선수권에서 그 누구도 아닌 콴의 눈앞에서 연기를 펼치게 된다. [30]
아사다 마오의 2009-10 시즌이자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프리 프로그램이던 라흐마니노프의 모스크바의 종을 미셸 콴도 탈 뻔했다.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프리 프로그램 주제곡이었고 당시의 안무가가 바로 아사다 마오의 2009-10 시즌 코치이자 안무가이던 '''타티아나 타라소바'''였다![31]
그러나 결국 콴은 부상 때문에 이 프로그램을 보일 수 없게 되었다.[32] 2005-06 시즌 쇼트 프로그램인 리스트의 죽음의 무도는 그나마 2005년 12월 TV 프로그램을 통해 선보였었지만 그 직후 부상이 심하게 도져버려 결국 올림픽 선발전인 2006 전미선수권에 나오지 못했다.
아사다 마오의 종을 본 콴의 팬들은 ''''미셸이 안하길 잘했다.'''' 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저 선수가 저랬을 뿐이지 우리 미셸이 했다면 상황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반응이 다수였다.
8. 출전 및 입상 기록
8.1. 경기 이외의 수상
- 1998년 여성 스포츠재단 선정 여성 스포츠 선수상
- 2001년 셜리번 미국 최고의 아마추어 운동 선수상
- 2002 틴(Teen) 초이스 최고의 여성 스포츠 선수상
- 2002년 올해의 코스모스 걸 상
- 2002년 피플지 선청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 입상
- 2002~3년 키즈 초이스 최고의 여성선수상
- 2003년 미국올림픽위원회 선정 올해의 여성 스포츠 선수상
- 2003년 7번째의 올해의 피겨 스케이터 상 수상자이자 2번 복수 수상[33]
(이중 꽤 다수가 김연아가 수상한 상들이기도 하다.)
9. 기타
- 돈이 지독하게 들기로 유명한 피겨 스케이팅을 했기 때문에 가족이 희생을 많이 했다. 1993년에 콴과 카렌의 피겨 스케이팅 교습비로만 5만 달러였다고 한다.[34] 자금 마련을 위해 아버지는 살던 집을 팔고 할아버지의 집으로 가족 전부가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미셸의 아버지는 전혀 그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딸들에게 피겨 스케이팅을 선물해줘서 자신은 기뻤다 한다. 언니인 카렌도 같이 피겨 스케이팅을 했다. 1997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은퇴, 보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이후 콴 가족 소유의 링크에서 안무가로 진로를 바꿨다. 또한 디자이너 베라 왕에게 인턴을 한 탓에 피겨 스케이팅 의상도 디자인하기도 한다.[35] 후에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페어 동메달리스트와 결혼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브라이언 오서 다음으로 김연아선수의 2010-11 시즌 코치였던 피터 오피가드였다.[36]
- 콴의 팬들은 흰 부츠를 선호하는데, 이유는 콴이 선수 시절 흰 부츠를 내놓았기 때문이다.[37]
- 한국에서 열린 아이스 쇼에 방문했을 때, 한국인들이 자신을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게에서 자신을 김연아 선수가 존경하던 모델이라고 알아봤다고 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찍었다며 엄청 놀라워했다.
-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을 지지하며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캠프에 본격적으로 합류하여 선거유세를 도왔다. 선거캠프에 합류한 이후 종종 본인의 SNS에 바이든의 지지를 호소하는 게시글들을 많이 올리고 있다. 사실 콴은 이전의 2016 미국 대통령 선거때도 힐러리 클린턴 캠프에 합류했던 적이 있었다. 콴의 인종과 출신 지역을 봤을 때 민주당 지지성향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38]
[1] 번체자[2] 간체자[3] 한어병음[4] 광둥어식 월어병음. 콴의 집안은 홍콩 출신 이민자 집안이었기 때문에 중국식 보통화보다는 광둥어에 더 익숙한 집안이다. 미들네임인 Wingshan 또한 穎珊의 광둥어식 월어병음이며, 따라서 이쪽이 더 정확한 중국식 이름이라고 봐도 된다. 실제로 콴은 집안에서 영어와 광둥어 둘 다 써오면서 자라왔다고 한다.[5] Q와 K 둘 다 ㅋ 발음을 이용한 것이다. 현 피겨 스케이팅 여왕 김연아의 별명도 Yuna Queen인것 처럼 외국 방송에서마저 사용하는 것처럼 공식적인 별명이 되어버렸다.[6] 피겨 스케이팅 항목에 써 있지만, 피겨 스케이팅은 결코 오래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7] 은메달과 동메달 각 1회씩인데 아쉽게도 금메달을 따지 못해서 무관의 제왕이란 별명이 붙었다.[8] 미국의 피겨 스케이팅 역사 100년간 남녀 선수를 통틀어 이처럼 많은 세계선수권 타이틀과 전미선수권 타이틀, 동계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선수는 '''없다.'''[9]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과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여자 싱글에서 단 두명 뿐인 올림픽 2연패의 기록을 갖고 있는 선수이다. 나머지 한명은 소냐 헤니로 3연패 기록.[10] 물론 카타리나 비트, 이리나 슬루츠카야는 미국에서 저평가를 받고, 미셸 콴은 유럽에서 저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다.[11] 이전 서술에 "남나리가 1999년 전미선수권 2위를 했을 때 1위가 미셸 콴이었고, 이것이 한국에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고 적혀 있었는데, 물론 경기 결과는 맞지만 남나리가 2위를 해서 1위인 미셸 콴이 알려졌다기보다는 '''그 미셸 콴에 이어서 2위를 한 대단한 선수'''로 남나리가 알려졌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12] 참고로 이 때 프리 프로그램은 미스 사이공이었다.[13] 이 시기에는 그랑프리 시리즈가 아닌, 그냥 국제대회들 중 하나였다. 그랑프리 시리즈라는 포맷은 1995-96 시즌부터 생겼다.[14] 왼쪽부터 차례로 4위 엘레인 자약, 동메달리스트 니콜 보벡, 토냐 하딩, 은메달리스트 미셸 콴.[15] 그러나 이 대회에서의 토냐 하딩의 우승 기록은 삭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토냐 하딩 사건 문서 참조.[16] 토냐 하딩은 예정된 대로 올림픽 이후에 징계를 먹었고, 낸시 케리건은 부상 때문에 결국 은퇴하였다.[17] 당시에는 그랑프리 시리즈를 세번까지 출전할 수 있었다.[18] 그랑프리 파이널의 초대 챔피언이다.[19]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이자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이다.[20] 원래 출전권은 에밀리 휴즈에게 있었지만, 내셔널 출전 없이 콴이 연맹측에서 출전권을 따낸거라 말이 많았다.[21] 지금은 채점 제도가 바뀌였지만, 대단한 기록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22] 1996년부터는 ISU가 정한 '''연령 제한 규정'''에 따라 시즌이 시작되는 해의 7월 1일을 기준으로 '''만 15세'''가 넘어야 시니어 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콴은 1980년 7월 7일 생이니, 1994 동계올림픽이 열린 1993-94 시즌에는 만 15세를 넘기지 못하므로 현재 규정으로는 나갈 수 없다. 참고로 현 규정대로 하면 6일 차이로 '''노비스''' 레벨이다. 그렇지만 이때는 법이 만들어지기 전이어서 출전은 가능했다.[23] ISU에서는 1996년부터 연령 하한선을 설정했다. 시즌 개막일인 7월 1일 기준으로 만 15세 이상만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출전이 가능하다. 리핀스키의 경우는 연령 제한을 겨우 20일 넘겨서 출전했다.[24] 평소보다 아주 느리게 스케이팅을 했다. 상위권 중 유일하게 3-3 점프, 3-3 시컨스 조차도 없었다.(타라 리핀스키:3-3 컴비네이션, 3-3 시퀀스, 미셸 콴:3-2 컴비네이션 점프, 천루:3-3 컴비네이선 점프, 마리아 부티르스카야: 3-3 시퀀스, 이리나 슬루츠카야:3-3 컴비네이션 점프)[25] 리핀스키는 플립, 부티르스카야와 이리나는 룹, 콴과 천루는 토룹을 뛰었다. 그럼에도 쇼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26] 위에서도 서술되어 있지만 여자 싱글 종목은 오래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 대부분 여자 선수들에게 올림픽에 2번 참가하면 그것이 많은 거고, 3번을 참가하면 메달은 기대도 안하고 마무리 기념이라 생각한다. [27] 미국 대학이라고 한국 대학이랑 많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학교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유명인과 그 자제들을 일류대학에서 거의 모셔가려는 것은 도리어 한국보다 심하기도 하다.[28] 예를 들어 선수 생활을 2003년에 마감한 알렉세이 야구딘이 아직도 헌액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29] 재미있게도 이때 콴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이리나 슬루츠카야 역시 같은 곡을 사용했는데, 프란츠 리스트가 작곡한 죽음의 무도였다. 김연아의 카미유 생상스 작곡 <죽음의 무도>와는 다른 곡이다.[30] 이때 이 경기를 중계했던 NBC는, 메인 스포츠 아나운서인 밥 코스타스와 남자 싱글의 올림픽 2연패 이상 선수 중 유일하게 생존 중인 미국 피겨 스케이팅의 원로 딕 버튼이 함께 한 별도 중계석에 미셸 콴을 초대했다. 프리 프로그램 마지막 그룹의 웜업 도중 당시 컴백설이 돌고 있었던 미셸 콴을 두고 다른 2명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컴백설의 진위를 물었는데 이때 미셸 콴은 트리플 점프도 연습 중이라며 나름 긍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다가, 프리 프로그램이 끝나고 답변을 하겠다고 미뤘다. 프리 프로그램 종료 후 김연아 칭찬을 자자하게 늘어놓던 미셸 콴에게 다시 컴백설에 관해 물으니 미셸 콴의 대답은 "김연아의 경기를 보고 나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라고 답하였다. 이 때 딕 버튼은 콴의 컴백의 관건은 자기와 함께 페어로 컴백하느냐 아이스 댄싱으로 컴백하느냐라고 농담을 했다. 대회가 끝난 후 김연아와 마주쳤을 때, 김연아가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있었다고 하였다. 콴이 "Hi Yuna, Nice to meet you!" 라고 인사를 건네도 아무 소리도 못했다고 한다.[31] 타라소바의 "빙상의 신은 아사다 마오를 사랑하신다" 라는 대사는 원래 "God loves Michelle(빙상의 신은 미셸을 선택하셨다)" 라는 미셸에 대한 칭찬이었다.[32] 정확히는 2005 세계선수권 4위 이후 한 번도 대회에 나오지 않았다.[33] 이 때문에 트로피 이름이 "미셸 콴 트로피" 로 바뀌었다.[34] 그 당시 최고 수준의 대학을 졸업한 MBA가 받는 연봉이다![35] 참고로 베라 왕은 콴의 프로그램 의상을 자주 담당했다.[36] 김연아의 코치를 그만 둔 이후로는 캐럴라인 장의 코치를 맡았다.[37] 이건 일종의 취향이며 몇몇은 콴처럼 부츠를 내놓는 데 반해, 몇몇은 스타킹으로 부츠를 전부 덮는다. 물론 반만 덮는 선수들도 있다.[38] 실제로 미국에서 아시아계 여성이거나 캘리포니아 출신이면 거의 전형적인 민주당 지지자일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