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래드 힐튼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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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래드 니콜슨 힐튼(Conrad Nicholson Hilton). 미국의 기업가.
1887년 12월 25일 ~ 1979년 1월 3일
미국의 사업가로 힐튼 호텔 창업자이다. 이름과 이력을 보면 알겠지만 힐튼 호텔을 보유한 힐튼 가문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사업가이자 셀럽으로 유명한 패리스 힐튼과 니키 힐튼 자매가 콘래드 힐튼의 증손녀이다. 몇 안 되는 전통 있는 부호 가문이지만 워낙 이슈를 많이 몰고 다닌 힐튼 자매 외에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1]
2. 생애
19세기 말, 미국 뉴멕시코 준주(현재는 뉴멕시코주)에서 노르웨이계 독일인 이민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 육군 예비포병사관후보생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프랑스로 보내졌다. 종전 후에는 텍사스 시스코로 이주해서 은행을 인수해 은행업을 하려고 했는데 은행 대신에 우연히 찾아낸 모블리 호텔을 인수하면서 호텔 경영을 시작했다. 호텔 경영이 잘 이루어졌는지 1930년에는 힐튼 호텔 브랜드 최초의 고급 호텔인 플라자 호텔을 개업했는데 그 후 대공황이 터지는 바람에 파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재건하여 1946년에는 힐튼 코퍼레이션이라는 브랜드로 주식 시장에 상장까지 되었고 그 후로는 사업이 비교적 순조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1925년에는 메리 아델라이드 배런과 결혼하여 1934년에 이혼할 때까지 총 3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 후에는 배우 자 자 가보르와 결혼하여 1947년에 이혼하기 전까지 한 명의 아이를 낳았다. 일에 빠진 많은 기업가들이 가정에 소홀해지기 쉽듯이 부인과의 사이는 매우 나빴던 것으로 보이는데 첫번째 부인도 10년도 안 되어 헤어질 정도로 너무 빨리 이혼 했으며 두 번째 부인은 자신이 성폭력을 당하여 아이를 낳았다고 할 정도였다. 그 후 1976년에는 메리 프란시스 켈리와 세 번째 결혼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세번째 부인과는 헤어지지 않고 1979년에 사망할 때까지 결혼을 이어갔다고 한다.
자녀들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은데 딸 프란체스카 힐튼이 몇 년 전 2015년에 사망했다고 하며 아들 배런 힐튼이 사업을 물려 받아 30년 동안 경영을 맡으면서 호텔 힐튼을 세계적인 체인으로 키워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사업가 겸 정치가 도널드 트럼프와 비슷하다. 평행이론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큼지막한 공통점들이 많은 편이다. 호텔 부동산이라는 사업 분야도 매우 비슷하고 첫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3명의 자녀들을, 미모의 두번째 부인과[2] 자녀 한 명을 낳은 후 세번째 결혼을 했다는 점도 같다. 둘 다 배런이라는 아들이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는데 아직은 모르지만 트럼프의 사업 역시 배런이 키워나갈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막내아들이기는 하지만 사실 한진가를 제외하고 장자 승계가 이뤄지는 일은 흔하지 않으며 삼성 역시 장자도 차남도 아닌 삼남과 막내딸이 기업을 물려 받아 현재와 같은 거대기업을 일궈냈다. 다만 한국을 제외한 타 국가의 경우 현재는 자녀에게 기업을 승계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다.[3]
3. 남긴 유산
희대의 거부 답게 남긴 큼지막한 유산들이 많은데 이는 앤드루 카네기를 비롯해 당시 여러 거부들에게서 거의 공통적으로 보이는 점들이다. 다만 이들은 당시로써는 소위 강도 귀족이라고 불리는 악덕 자본가인 경우가 많아[4] 이미지 세탁과 세금 감면 등을 위해 일부러 계산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비판이 많다. 따라서 이를 가지고 그들이 훌륭한 일을 했다고 평가하기는 애매한 부분이다.
3.1. 사회 공헌
- 콘래드 N. 힐튼 재단 : 1944년 콘래드 힐튼에 의해 창립 되었는데 본인이 생전에 직접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재단의 사명은 전 세계 인류의 고통을 경감 시키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름만 봐서는 정확한 분야는 알기 어렵다.
- 콘래드 니콜슨 힐튼 인도주의 상 : 1996년 콘래드 니콜슨 힐튼 재단에 의해 세워졌다.
- 콘래드 니콜슨 힐튼 칼리지 : 휴스턴 대학교의 호텔관광경영학부이다
- 콘래드 니콜슨 힐튼 도서관 : 미국 요리 협회에 위치하여 있다.
3.2. 자서전
- 나의 손님이 되라 (프렌티스 홀 출판사 출판, 1958)
- 여관 주인의 영감 (개인 출판, 1963)
4. 기타
역사적 기록을 남길만큼 성공한 사업가들 중에서[5] 독실한 기독교인이 별로 없는데 그 중 현재까지 그 당시의 명성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살아남은 사람은 더더욱 없으며 사실상 이 콘래드 힐튼이 거의 유일하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비록 인류 역사상 최고 부자라는 타이틀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으며[6] 그의 회사들이 엑슨모빌, 쉐브론 등 거대 에너지 기업들로 남아있다고는 해도 일단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그 당시의 회사는 남아있지 않으며 존 워너메이커라는 이름은 아예 역사에서 사라졌다. 콜게이트와 맨소래담 역시 전세계적으로 그렇게 이름 있는 브랜드는 아니다. 그나마 칙필레 정도가 명성을 잇고 있는데 KFC와는 달리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매우 마이너하고 그 정도로 유명하지는 않다.[7]
다만 이들이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고 해서 도덕적, 윤리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당장 위에 상술된 록펠러와 힐튼만 해도 알아보면 문제들이 참 많았다. 요즘도 기독교인이라면서 훌륭한 삶을 살지 않아 소위 성경 속에서 외식하는 자로 불리는 가짜 신자들이 아주 많이 있다.
92세에 사망했는데 그 당시로써는 엄청나게 장수한 편이다.[8]
[1] 사실 전통과 규모가 있는 부호 가문은 알려진 바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경우는 비밀스러움이 특징으로 보일 정도이고 발렌베리 가문 정도면 그래도 정보가 많이 밝혀진 편이다. 이 외에도 코흐 가문과 마스 가문 등도 그리 유명한 편은 아니다.[2] 미인인지 아닌지는 모르며 개인이 판단할 몫이지만 힐튼의 두번째 부인은 배우였고 트럼프의 두번째 부인은 모델이었으므로 둘 다 당시의 미인이었을 확률이 높다.[3] 애플만 해도 스티브 잡스가 아들 잡스가 아닌 팀 쿡에게 물려줬다.[4] 이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는 기껏해야 허쉬 초콜릿의 창립자 밀튼 허쉬 정도였다. 밀튼 허쉬는 허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로 당시의 자본가치고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카네기만큼은 아니지만 인류 역사상 최고 부자라고 밝혀진 존 데이비슨 라커펠러도 지독한 자본가였다. 2020년대에 들어선 현 시점에서 아마존닷컴의 제프 베조스 정도만 되어도 괴물 취급을 받는데 그 당시에는 훨씬 더 심했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도 비슷한 이미지가 있었고 현재는 마크 주커버그도 그런 인식이 있다.[5] 그냥 큰 돈을 벌어서 갑부가 되어 잘 살았다 정도가 아니라 거대기업을 건설하여 경제사 속에 기록될만한 수치를 의미한다.[6] 아직도 만사 무사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인 줄 아는 이들이 있는데 만사 무사는 당시로써는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한데다가 실제로 록펠러의 재산이 더 많았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인류 역사상 최고 부자는 록펠러이다.[7] 비슷한 예로 맥도날드에 비해 다소 마이너한 웬디스가 있다.[8] 비슷한 시대를 살아간 석유재벌 존 데이비슨 라커펠러는 훨씬 더 오래 살았는데 한국 나이로 99세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