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데이비슨 록펠러

 


'''John Davison Rockefeller'''
'''본명'''
존 데이비슨 라커펠러
(John Davison Rockefeller)
'''출생'''
1839년 7월 8일
미국 뉴욕 주 리치퍼드
'''사망'''
1937년 5월 23일 (향년 97세)
미국 플로리다주 오몬드비치
'''국적'''
[image] 미국
'''직업'''
기업인
'''가족 '''
父: 윌리엄 록펠러 Sr. (1809-1906)
母: 엘리자 데이비슨
배우자: 로라 셀레스티아 스펠먼 록펠러 (1839-1915)
슬하: 5명
엘리자베스, 앨리스, 앨타, 에디스, 존 데이비슨 록펠러 Jr.
'''학력 '''
Owego Academy (전학) (1851-1853)
클리블랜드 센트럴 고등학교[1] (졸업) (1853-1855)
챈슬러 대학교[2] (1855)
'''종교'''
개신교 (침례회)
''' 신체'''
180cm
'''정당'''

'''재산'''
'''$1.4billion''', (인플레이션 적용) '''한화 약 500조원'''[3]
'''서명'''
[image]
1. 개요
2. 상세
3. 생애
3.1. 유소년기
3.2. 창업, 그리고 석유왕이 되다.
3.3. 반독점법과 해체
3.4. 시한부 선고와 자선사업 시작
4. 음모론
5. 후손
6. 사업 방식
7. 록펠러에 관한 오해와 진실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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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기업인. 석유 산업에서 이름을 떨쳐 '''석유왕'''으로 불리기도 한 인물이다. 앤드루 카네기와 함께 대공황 이전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미국의 기업가였다. 다만 동시에 당대 석유 산업의 90%를 독점한 독점왕으로 악명을 얻기도 했다.[4]

2. 상세


1937년도 사망 당시 그의 재산인 14억 달러를 지금 으로 환산하면[5] 2020년 기준 4090억 달러로 이는 한화로 환산시 약 '''500조 원'''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라고 한다.[6][7] 말콤 글라드웰의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주장한 바에 의하면 '인류 역사상 최고 부자'라고 한다.
당시 미국 GDP의 3%가 록펠러 한 사람 소유였다는 말도 있고, 당시 혼자서 미국 경제의 1.5% 이상을 차지했다는 말도 있다. 간혹 말리 제국의 황제였던 만사 무사가 록펠러를 넘는 환산가치 약 4000억 달러의 재산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만사 무사는 1300년대 사람이라서 정확한 계산이 어려울 뿐더러, 2019년 다시 계산된 록펠러 회장의 총 재산이 약 4090억 달러로 밝혀져서 역시 록펠러보단 적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재산으로 따지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기준으로 하면 록펠러가 압도적인 1위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뉴딜 정책 때 소득세를 엄청 올리면서 연소득 500만 달러 이상은 79%를 과세했는데, 1900년대에 여기에 해당되는 건 록펠러 1명뿐이였다고 한다. 참고로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연 50억 이상 버는 사람들은 극소수인데, 하물며 80여년 전 통화 가치로는... 만 97세 10개월로 장수까지 했다. 심지어 가문빨은 조금 있었지만 30대의 젊은 나이에 미국 석유의 90%대 세계 석유 시장의 95%를 지배했고 거의 모든 산업에 문어발 확장을 한 결과 40대엔 당대 미국 최고 부자 자리에 오른다.
한 조사에 따르면, 인류 역사상 부자 순위 1위가 록펠러, 만사 무사가 2위, 앤드루 카네기 회장이 3위이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자산은 1429억 달러로 전체 15위이며 빌 게이츠가 역대 37위이다. 물론 빌 게이츠처럼 대대적인 자선 사업에 재산을 투입하여 자산을 줄여가는 케이스도 있어서 좀 부질없는 비교긴 하다만. 4090억 달러가 실감이 안 간다면 쉽게 생각해 2018년 기준 아랍 에미리트의 1년 GDP(=4141억 달러)보다도 약간 더 적은 액수를 개인이 가졌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참고로 아랍 에미리트는 경제 규모 30위의 나름 한가닥하는 나라다. 이를 보면 그의 재산이 실로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 사람이 일본을 통해서 소개돼서 그랬는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몰라도 '록펠러'로 표기하고 있지만, 가운데에 e가 묵음이 아니어서 사실은 록펠러가 아닌 ''' '라커펠러' '''로 적어야 한다. 실제 영어를 쓰는 원어민들이 읽는 발음도 이와 비슷하다. 물론 앞부분을 더 정확히 말하면 '롸크'에 가까운데 적어도 'ㄱ'받침 발음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록펠러보다는 라커펠러가 원래 발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외래어 표기법에선 더글러스 맥아더처럼 예외로 인정하였다.

3. 생애



3.1. 유소년기


1839년 7월 8일에 태어난 록펠러는 그의 전기에서 종종 이렇게 자문하곤 했다. "나처럼 전혀 가진 것 없이 시작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 이 문구만 보면 진짜 흙수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록펠러의 집안은 중산층 이상은 되었다. 물론 아버지가 후술되어있듯 똘끼 충만한 사람이라 행복한 가정 생활을 했냐면 그건 별개의 문제겠지만, 어쨌든 경제적으로 나쁘진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는 그 자신의 기적같은 성공을 더욱 포장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8] 물론 유년 시절 대비 이후 재력가로서 엄청난 성공을 한건 맞지만.
록펠러의 아버지 윌리엄 록펠러 시니어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의사를 사칭하며 이상한 약장사까지 한 사기꾼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집을 오랫동안 비우는 행동이 잦은 탕아였다. 이 아버지란 인간은 본처가 살아있을 때도 가정부랑 바람을 펴서 사생아를 두명씩이나 뒀고, 본처가 세상을 떠나자 아직 어린 아이들을 버리고[9] 가명을 쓰고 캐나다로 도주해 젊은 여자랑 재혼해서 오랫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아버지가 사기꾼 겸 장사치라서 애들한테 장사 수완 등의 교육은 혹독하게 시켰다고 한다.
예를 들면 용돈을 주는 대신에 파리를 잡으면 3센트, 쥐를 잡으면 5센트씩 주는 식으로 용돈벌이를 하게 시켰으며, 어머니의 직장에서 일손을 거드는 식으로 노동의 과정에서 경제관념을 익히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록펠러는 어린 나이부터 수입 장부를 만들어 돈 버는 재미를 익혔다. 심지어 아버지는 성인이 된 록펠러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으며, 아버지의 새 집에 들어가는 대가로 집세를 낼 정도였다. 또한 하루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자기가 받아준다는 아버지의 말에 록펠러는 의심 없이 아버지 품으로 떨어졌으나, 아버지는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고선 하는 말이 '''아무도 믿지 말거라. 심지어 아버지인 나조차도.''' 이런 아버지의 교육방식 때문에 록펠러는 일생을 불안감에 가까운 철두철미함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10]
하여튼 이를 바탕으로 그의 집안은 아버지의 잦은 부재하에도 여러 부업을 하며 좋은 장사 수완으로 중산층 정도의 생활은 했다. 아버지는 아들 록펠러가 엄청난 거부가 된 후에도 여전히 문명을 거부한 채 평생 야인으로 미국 전역을 떠도는 삶을 살다 95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갔다. 정확히 말하면 문명을 거부하기보다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라 사회나 심지어 가족조차도 거부하고 다녔다. 아내가 바람을 피워도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할 정도.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한달 앞둔 1855년 5월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사업에 투신하였는데 일자리를 찾을 때에도 "작은 기업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뭔가 큰 규모를 갖춘 업체에만 관심이 있었다" 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신의 디딤돌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휴잇 & 터틀사의 경리 직원으로 채용된다. 록펠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고작 몇년 전이었는데, 직후 대통령이 되는 에이브러햄 링컨도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교 중퇴고 부통령은 장가가기 전까지 문맹이었으니 고졸만 해도 당시 사회에선 나름 괜찮은 학력이었다.[11]

3.2. 창업, 그리고 석유왕이 되다.


1858년 연봉협상에 회사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그는 대뜸 사업 파트너를 구해 자신들의 사업을 꾸려나기기로 하는데, 이 당시 회사를 만들기 위한 자본금이 부족했던 그는, 은행에서 닥치는대로 엄청난 돈을 빌려서 큰 자본금을 만들어 사업에 투자하고, 이득이 나면 돈을 갚는 것보다는 재투자로 돌려서 더 큰 이득이 나온 다음에야 갚는 방식을 이용했다. 한마디로 수익률이 이자율보다 한참 높아야 가능한 무모한 짓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사업은 성공했고, 꽤나 준수한 실적을 올렸다. 물론 록펠러가 본격적으로 거상이 되는건 이후 닥친 남북전쟁과 이른바 재건 시기에 기회를 포착하고 빠르게 사업을 확장한 덕분이 컸다.
남북전쟁 당시 모건-록펠러-듀폰 커넥션[12]의 일원이던 록펠러는 전쟁 이후 록펠러의 삶을 바꿔놓은 중대한 사건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최초의 유전이 발견된 것이었다. 그 당시 석유는 별로 가치가 없었던 물건이었으나, 곧 연료로서의 가치가 재조명되고[13] 결과적으로 그 유전지대는 꽤나 번성하게 된다.[14]
유전이 발견된 초기만 하더라도 록펠러는 이쪽 관련 사업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어느 순간 사람들이 석유 채굴에 눈을 돌리지만 진짜 돈이 되는 사업은 석유를 정제하는 정유사업이라는 걸 깨닫고 '이거다!' 라는 느낌을 받아 정유업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석유업계에 발을 딛기 시작할 무렵, 그는 동업자였던 모리스 클라크 외에 새뮤얼 앤드류스까지 끌여들여 사업의 규모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 록펠러는 사업 확장에 별 뜻을 보이지 않는 동업자인 클라크를 못미더워했고, 결국 앤드류스와 손을 잡고 기업을 사기로 결정한다. 이때의 일화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는데,

경매는 1865년 2월 2일에 열렸고, 록펠러는 앤드류스와 손을 잡고 클라크에게 맞섰다. 클라크가 500달러부터 입찰을 시작하자, 록펠러가 바로 1000달러를 불렀다. 가격은 계속 올라가서 4만, 5만, 6만 달러가 되었다. 어느 쪽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 동안 가격은 어느덧 7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리고 긴 침묵이 흘렀다.
"7만 2000달러." 절망적인 목소리로, 모리스 클라크가 말했다.
"7만 2500달러." 록펠러가 주저없이 대답했다.
클라크는 손을 들었다. "이제 이 회사는 자네 것일세."

록펠러가 스스로는 말하기를, 이날이 '''살아갈 길이 정해진 날'''이라고 표현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정해졌다. 놀라운 것은, 당시 불과 26살에 불과했음에도 상기된 7만 달러 이상의 회사 매입자금을 신용 하나로 대출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클리블랜드 금융가에서 이미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회사의 부채는 10만 달러가 넘어갔지만, 록펠러가 주장한대로 당시는 긴축이 아니라 확장을 해야 성공할 수 있는 시대였고, 당해 연간 수입은 100만 달러였고 이듬해에는 200만 달러로 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록펠러는 자기의 회사가 얼마만큼 성장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없었다.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 그와 같이 일했던 그 누구도 몰랐다. 또 이때 상당히 이 좋기도 했는데, 바로 존 록펠러의 바로 아래 동생인 윌리엄 록펠러가 형을 보고 자신도 뉴욕에서 석유 사업을 하며 꽤 규모를 키운 뒤에 형의 회사에 인수되는 방식으로 합병을 해준 것이었다. 윌리엄 록펠러는 이외에도 여러 사업을 하며 엄청난 돈을 벌어서 그것을 스탠더드 오일에 투자하는 든든한 자금줄이 된다.[15]
당시 그가 살던 클리블랜드는 대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었다. 클리블랜드 자체는 인구 5만 정도의 소도시였는데, 당시 철도업계의 1인자였던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가 석유 운송을 장악할 요량으로 클리블랜드에 진출한다. 이는 그에게 둘도 없는 기회가 된다. 일단 석유를 생산하면 옮겨야 하는데 이를 해결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다큐멘터리 '미국을 일으킨 거인들'에 의하면 밴더빌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마차가 고장나서 아침 기차를 놓쳤고 그 기차가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생기자 이를 신의 뜻으로 이해하고 이후의 사업에서 무자비한 행보를 이어가게 되었다고 한다.[16]
서서히 그의 사업이 확장되는 와중에 록펠러는 그가 처음으로 여론의 비난을 받을 여지를 제공한 악명높은 방식을 개발해 내는데, '''리베이트''' 시스템의 도입으로 인해 비단 정유업뿐만 아니라 철도 운송에도 손아귀를 뻗치기 시작한다. 그의 회사의 거대함으로 인해, 록펠러는 철도업계에 일정하고 높은 수준의 수송량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록펠러는 리베이트 계약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기 시작한다. 이를 바탕으로 1870년, 록펠러는 100만 달러의 자본금을 가진 스탠더드 오일을 창설했다. 압도적인 생산량에서 나오는 단가 절감 뿐만 아니라, 리베이트 시스템으로 인한 운송비 절감에 힘입어 스탠다드 오일의 힘은 점점 강해져만 갔고, 그 영향력은 다른 업계에까지 미쳐, 철도왕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 그리고 밴더빌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 톰 스콧에게 가장 큰 물량을 제공하는 고객으로서, 리베이트를 점점 올려가며 운송요금을 후려쳐갔다.[17]
사업을 커지고 주머니는 두둑해져 가지만, 그의 절약과 검소함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자세는 전혀 변함이 없었는데, 그 대표적인 일화가 스탠더드 오일 창설 직후에 있다. 본인 소유의 정제소를 시찰하던 중 록펠러는 본인 회사 소유의 원유 운송용 나무통의 땜질이, 총 40번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휘하 직원에게, "38번으로 해보시오."라는 말을 던지고 확인 결과, 38번의 땜질을 거친 나무통 중에는 새는 것이 있었지만, 39번의 땜질을 거친 나무통은 새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9번의 땜질 지시가 담긴 공문이 전 지사 및 사원에게 회람되게 된다. 장년~노년즈음에, 관련하여 질문을 받은 그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그걸로 꽤 많이 아꼈지."라고 회상하게 된다.
집에서도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하나만 사주고 공유하게 하였고, 옷이 해지기 전에는 절대 새옷을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 아이들에게 집에서 알바도 시켰는데 다른 일꾼들과 똑같은 인건비를 주었다고 한다.[18]
이런 점을 볼때 분명 무리한 독과점으로 세간에서 욕도 많이 먹은 사람이지만, 문헌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은 물론 심지어 국가나 법률도 믿지 않고 그냥 자기 신념대로 일을 처리한 사람으로 보이며 이는 석유 산업을 수직 계열화하여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자리잡도록 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회사 이름이 STANDARD인 이유는 당시 등유 품질이 나빠 등켜 놓고 자다가 폭발로 불나는 등 불순물이 많은 저질 등유가 많았는데 우수한 기본 품질을 유지하는 인상을 주려고 한 것이었으며, 땅에 파이프만 꽂으면 석유가 나오는 당시 미국 펜실베니아에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석유 개발과 정유업에 뛰어들어 블랙홀로 빠질 수도 있는 석유 산업을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초기에 쓸어버려 빨리 정착하게 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1880년대 들어서 전 세계 원유 공급의 90%가량이 스탠더드 오일이 필라델피아를 통해 공급하고 있었고, 이를 본 다른 국가에서도 산유지를 찾아 원유를 채굴하기 시작한다. 즉, 석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록펠러는 43세에 미국 최고 부자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미국의 경제 중심지인 뉴욕으로 사업의 중심을 옮기며 순식간에 뉴욕 재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때 그는 철강 산업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며 메사비 대광산을 매입하는 것을 필두로 철강 사업에도 발을 담그기 시작했는데, 그쪽에는 본좌인 앤드루 카네기가 버티고 있었고 둘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지만, 결과적으로 아쉬울 게 없는 록펠러 쪽에서 철강 산업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면서, 마침 카네기의 사업을 인수한 존 피어폰트 모건에게 스탠더드 오일 측에서 보유하고 있던 대광산 채굴권을 "적절한 조건과 대우"를 받고 넘김으로써 록펠러 측에서는 모건의 철광산업 트러스트 형성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 와중에도 본업인 석유 사업은 꾸준히 성장하여 53세에 확고한 위치를[19] 다진다.

3.3. 반독점법과 해체


이후 미국의 주마다 있는 스탠더드 오일 사의 지점을 쪼개 새로운 법인을 만들고, 규제가 강한 뉴욕주보다 맨해튼에서 가깝고 규제도 상대적으로 약한 뉴저지주의 스탠더드 오일사를 지주회사로 전환하며 어떻게든 유지해보려고 했으나, 1911년 결국 스탠더드 오일은 반독점법 위반으로 인해 해산 명령을 받게 되며 34개의 회사로 분리된다. 이때 지주회사인 뉴저지주 스탠더드 오일사(Esso: 스탠다드 오일 (SO) 오브 뉴저지)가 지금 석유회사의 본좌인 엑슨, 뉴욕주의 스탠더드 오일사(Socony: 스탠다드 오일 오브 뉴욕)가 모빌,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의 스탠더드 오일사(Socal: 스탠더드 오일 오브 캘리포니아)가 쉐브론이다.
그런데 이 해체 결정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렇게 분리된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가 주식시장에 상장되자마자 주식 가격이 최소 2배 이상 뛰어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 이에 따라 원래 스탠더드 오일 전체 지분의 25%를 소유하고 있었던 록펠러는 새로 탄생한 34개 사의 지분을 골고루 소유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스탠더드 오일이 존속했을 경우보다 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오죽하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조적으로 국정회의에서 "요즘 월 스트리트에서는 '자비로운 하나님, 제발 한 번만 더 해체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를 한다는군."이라고 언급했을 정도. 심지어 록펠러는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해산될 즈음 같이 골프를 치던 친한 목사님에게 돈 벌고 싶으면 스탠더드 오일 주식을 사두라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 쪼개버린 덕에 유럽계 석유회사들은 쾌재를 부르게 되었고, 쪼개진 스탠더드 오일사의 일부를 인수하기도 했다. 실제 해산되기 전 스탠더드 오일은 '''거의 전 세계 석유시장을 독점한 상태'''였다.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을 장악한 이후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최대주주인 로열 더치 쉘, 알프레드 노벨 일가가 운영하는 러시아의 노벨브라더스와 경쟁했고, 결국 승리했는데 이후 세계 석유시장은 스탠더드 오일이 해체되기 전까지 그야말로 한 기업이 독점했던 셈. 이런 록펠러 시대의 스탠더드 오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사례였다.

3.4. 시한부 선고와 자선사업 시작


사실 50대 중반부터 이미 록펠러는 과도한 다툼과 경쟁 때문인지 스트레스성 소화불량우울증 증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때문에 록펠러 본인도 50대 이후부턴 동생들과 아들한테 사업을 넘기고 그냥 가진 돈 가지고 편하게 살고 싶어했다.
실제 20세기 들어 록펠러는 사실상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상태였고, 가문과 기업의 실질적인 지휘는 아들인 록펠러 주니어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1914년 월급을 올려달라는 광부들의 파업 현장에 총질(...)을 해서 2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치는 러들로 학살 사태를 일으킨다. 이때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이 미 연방군을 파견해 이를 해결하려 했으며, 이때 7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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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후 전미광부노조가 세운 러들로 학살 위령비
이런저런 여파로 우울증이 심해지던 록펠러는 프레드릭 테일러 게이츠라는 교회 목사에게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지요.' 라는 말을 듣게 되고[20] 남은 1년 동안 모은 재산을 의미 있게 쓰고 죽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가는 곳마다 고아원을 세우고 도서관을 세우고 연약한 자를 돕는 일을 하게 된다.[21]
다만 자선사업에서도 효율성을 중시했는지 '입지가 나쁘고 비효율적인 학교를 지원하는 것은 낭비'라고 봤고, 연장선상인지 록펠러 재단도 의학과학 등 인류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분야의 연구를 지원하는 데 집중해왔다. 자선사업이라고 해서 마냥 기부만 했던 건 아니었던 셈.
그러다 97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시대로 치면 굉장히 장수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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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의 레이크 뷰 묘지에 위치한 록펠러의 묘
이후 록펠러의 기업과 재산은 그의 아들 존 D. 록펠러 주니어에게 상속되었고[22] 그의 가문은 미국의 부유한 정치 유력가로 거듭나게 된다.[23] 뉴욕 주지사에 4번 당선되고 제럴드 포드 대통령 때 부통령이 된 손자 넬슨 록펠러[24] 대표적. 현재 록펠러 가문의 당주는 '''1915년생'''인 데이비드 록펠러며 그는 2017년 3월 20일 10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뒤를 이을 당주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데이비드 록펠러의 장남이자 록펠러 재단 이사회 일원인 '''1941년생''' 데이비드 록펠러 주니어(David Rockefeller Junior)가 유력하다.

4. 음모론


유대인 배후자본설 관련 음모론에서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엮이고 마치 그가 유대인인 것처럼 나오는데, 존 록펠러는 유대인을 싫어했다. 그러나 록펠러의 모계쪽은 유대계이다. 즉 본인이 유대인이라는 자각은 없었지만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였다. 록펠러 가문은 일단 독일계 미국인이었으며 독실한 기독교(개신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고, 그것도 종파가 엄격한 침례회[25]라 평생 술도 마시지 않았다. 카네기가 록펠러를 놀릴 때 일부러 술병을 선물했을 정도. 유대인은 수천년 간에 걸쳐 혼혈화가 진행됐기 때문에 인종이나 혈통은 큰 의미가 없으며 풍습과 유대교로 유대인의 여부를 가리는게 크다. 그러니 록펠러가 유대인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맞는 말이지만 실질적으론 맞지 않다. 당장 그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제법 흔하던 반유태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비슷한 점이라면 엄청난 부자라는 것과 존 록펠러와 로스차일드의 조상이 같은 독일 출신이라는 것밖에 없다. 근데 그렇게 엮으려면 미국 백인중에 40%가 넘는 사람들도 독일계[26]이므로 로스차일드 가문과 엮여야 한다.
그 외에도 그나마 설득력있는 음모론 중에 아직 록펠러 집안이 엑슨모빌과 셰브론을 실질적으로 지배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석유업계를 지배하던 집안이 하루아침에 홀라당 넘겨줬을 리도 없으니 심증이야 충분히 있지만, 물증은 없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모건 가문에도 이러한 음모론이 있다. 그쪽은 둘 다 아직 세계 금융은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모건 가문이 지배한다는 내용이고, 역시나 심증이야 충분히 있지만 물증은 없다. 단, 이는 적어도 20세기 중반 이전 이야기로 지금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27] 물론 넬슨 록펠러까지만 하더라도 재단 소유의 기업에서 일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현재의 록펠러 가문은 재단을 통해 기업집단을 지휘하는 기업가 가문이 아닌 정치를 비롯, 사회 다방면에 영향을 끼치는 유력가 가문으로 체제전환이 끝난 상황이다. 또 록펠러가의 거대한 재산들도 계속 후손들이 분할상속해서 현재는 많이 쪼개진 상태다.

5. 후손


록펠러만큼은 아니더라도 후손들 역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후손은 3조 원을 보유하여 세계부자 500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4세대로 교체된 가문 사람들 전체를 통틀어 20조 원 가량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록펠러는 자신의 재산을 록펠러 재단으로 간접 상속시켰다.[28] 그래서 가문의 부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20조 원은 가문 사람들의 순수한 개인 재산을 모은 것이다. 하지만 꾸준한 기부 활동의 결과로 록펠러 재단의 자산은 2013년 3월 기준으로 41억 달러에 불과하여, 미국 15위의 재단에 랭크되어 있다. 다만 1970년대 정치적 야망이 컸던 3대 넬슨 록펠러가 포드 정부의 부통령을 지내기 위한 인준청문회로 불려가 록펠러 재단의 재산과 탈세 의혹을 증언하면서 록펠러 재단의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후에야 제대로 된 기부활동을 했지만 재단으로 간접 상속되었던 재산을 또 다른 곳으로 빼돌렸으리란 의심이 가시지는 않아 음모론이 횡행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4대째들은 뿔뿔이 흩어졌네 어쩌네 해도 현 가치로 3천억 달러가 넘는 석유왕 당대의 재산을 3대까지 재단을 통해 반 세기 가까이 거의 고스란히 유지해왔었으니 말이다.

6. 사업 방식


사업 경쟁자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박살냈던 걸로 유명하다. 덕분에 그는 당대 90%의 석유 산업을 독점하는 이른바 '독점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사실상 이 사람 한명으로 인해 미국에서 반독점법이 제정되었을 정도니 뭐... 덕분에 지금 독점으로 욕 먹는 기업들은 사실 이 당시 록펠러 기업의 독점에 비하면 나름 귀여운 수준이긴 하다. 다만 상기했듯 본인도 이런저런 경쟁에 스트레스를 달고 살아 꽤 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모양.
사업적으론 무자비했지만, 한편 이런 경쟁 속에서 나타났던 치킨 게임 양상은 소비자들에겐 일견 이득이 되기도 했다. 실제 그가 이끈 스탠다드 오일은 갤런당 30센트 하던 석유 가격을 갤런당 6센트, 1/5로 줄여버리고 독점하고 있는 동안 이 가격을 절대 올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사회 환원의 효과도 있었지만 동시에 경쟁 기업의 시장 진입을 원천봉쇄하는 효과도 있었다. 물론 공정한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 역시 일종의 독과점 폐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7. 록펠러에 관한 오해와 진실


  • 록펠러가 석유를 독점한 이후 가격을 올려서 폭리를 취했다?
아니다. 유가를 떨어뜨린 후 올리지 않았고 오히려 유가를 떨어뜨린 덕분에 석유를 기초로 한 사업들의 대발달이 있었다. 사실 유가 상승은 1973년 1차 석유 파동으로 비롯된 것이다. 이 부분은 오히려 록펠러가 석유를 독점한 뒤 계속해서 싼 가격으로 공급한 것이 진실로[29] 대기업의 가격 혁신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도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와 별개로 독과점의 문제는 여전히 지적되어야 하는게, 이 케이스도 록펠러 개인의 의지가 작용해서 그렇게 되었다는거지 맘만 먹으면 어떤 사회적 견제 장치 없이 단숨에 석유값 올릴 수 있다는 소리기도 하다. 당장 록펠러가 덤핑 행위를 한 것은 경제적 해자 형성이 목적이었지만 사회 환원이라는 부수적 결과가 따라왔다.
  • 록펠러는 평생 무지막지한 철인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덤핑, 독점, 소송 등 경쟁자를 쓰러뜨리는 등 사업상에서는 잔혹함 그 자체였지만, 가정에서는 경건주의적 인물로 도망온 흑인 노예들을 숨겨주는 등 박애적인 면모도 보인 인물이었다. 아내가 노예 해방 운동 같은 것에 종사하는 것을 알면서도 은근슬쩍 이를 도우는 등의 인도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기본적으로 자신 역시 노예제 폐지론자였다.[30][31] 그야말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 그는 독실한 침례회 교인이었으며,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처음 취직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수입의 일부를 꾸준하게 기부해 왔던 기록도 남아있다.

8. 기타


  • 마치 기계와 같은 침착함으로 유명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흥분하지 않았는데 실제로 남들보다 심장 박동수가 낮았다고 한다.
  • 합법적으로 돈 주고 남북전쟁 때 군대에 가질 않았다. 노년의 록펠러는 이 기부금의 숫자를 점점 늘려서 얘기하곤 했다는데, 그 숫자는 5명분에서 점점 10명, 20명까지 불어났다고.
  • 토머스 에디슨J. P. 모건, 니콜라 테슬라조지 웨스팅하우스가 선도한 전기산업을 엄청나게 견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석유산업의 주축은 등유와 그 조명이었기 때문. 허나 결국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은 거역할 수 없는지 전기가 조명의 대세가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후 석유산업은 내연기관플라스틱이라는 대박을 잡아서 세계 산업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는다. 또한 원자력이 대두되기 이전에는 전기 또한 상당부분 석유로 생산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 맨큐의 경제학에서는 이 사람조차도 현대 미국 중산층보다 가난하다는 표현을 하였다. 20세기 초 세계 최고의 부자조차도 누릴 수 없었던 현대 문명의 산물(컴퓨터, 인터넷, 컬러 텔레비전 등)을 너무나 쉽게 누리고 있다는 의미로, 그만큼 현대 기술의 발전 수준이 매우 빠르다는 일종의 비유법이다. 물론 실제론 기술 수준의 문제일 뿐 의식주는 현재 중산층보다도 훨씬 잘 먹고 살았다. 애초에 낭비벽이 있는 스타일도 아니긴 했지만.
  • 허쉬의 창업주였던 밀튼 스네이블리 허쉬하고는 상당히 사이가 나빴다. 왜냐면 밀튼 스네이블리 허쉬의 선량한 성격상 록펠러의 노동 탄압을 고깝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1] Cleveland's Central High School. 당시 클리블랜드 지역에 처음으로 생긴 공립고등학교였다고 한다.[2] 현재는 사라진 대학교. 록펠러 회장이 재학시에는 상과대학교였다.[3] 1937년 사망일 당시의 기준으로 2020년 현재 가치로 환산한 액수이다. 물론 환산 기준에 대해선 사람마다 좀 차이는 있겠지만, 이 기준으론 2020년 현재 기준 '''인류 역사상 최고 부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4] 물론 이 양반 등의 업적(?)으로 반독점법이 만들어져서 현재는 한 기업이 산업을 저 정도 독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5] 다만 환산 기준도 자료마다 좀 다르긴 하다. 애초에 정확한 환산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게 맞다.[6] 참고로 대한민국 정부 1년 예산이 2020년 기준 512조다.[7] 당시보다 훨씬 경제규모가 커진 2020년 현재 전세계 최고 부자 순위 1위인 제프 베조스 아마존 회장의 재산이 1900억 달러로 이것의 '''1/3''' 수준이다. 물론 환산했을 때 그렇다는걸로 절대치로 따지면 당연히 제프 베조스가 훨씬 많다.[8] 자수성가를 참고해보면 의외로 조건이 괜찮았던 사람들이 상당하다. 물론 중산층 이상의 환경에서 자란 다수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겠지만.[9] 1856년이었으니 장녀만이 성인이었고, 그나마 존 록펠러와 바로 손아랫동생인 윌리엄 록펠러가 17세와 15세로 그나마 장성한 청소년이었다.[10] 시중에 돌아다니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탈무드 서적에도 이 얘기를 토대로 한 내용이 실려있다.[11] 대신 링컨처럼 나중에라도 배운 사람들은 꽤 있었고 상당한 수준의 정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도 은근 있기는 했다.[12] 남북전쟁때 북군 화약을 비롯한 각종 군수물자를 독점생산했다.[13] 석유는 1860년대에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나 전략자원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미국이 선박용 석유 보일러를 개발한 이후이다. 그 이전까지 배의 동력은 석탄이었으나 석유를 사용할 경우 액체라 공간도 덜 차지하고 에너지 효율도 더 높았기 때문이다. 이는 텍사스에 거대 유전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이 부상하고, 영국이 자국의 석탄 산업을 포기하고 당시 영국의 괴뢰국이었던 이란에서 석유를 가져오게 되어 중동 지역을 최초로 주목하게 되는 나비효과를 낳게 된다.[14] 단순 석유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고, 석유에서 등유를 정제할 기술이 있어야 한다. 등유는 전기 없던 시절 밤을 밝혀주는데 유용했기에 그 수요는 대단했다. 물론 등유만 유일한 연료는 아니었고 고래 기름 같이 동물성 기름도 쓰였으나 단가가 비쌌다.[15] 참고로 윌리엄도 사기나 여러 편법에 굉장히 능해서(...) 비도덕적인 꼼수로도 돈을 많이 벌었다. 1890년대에 유령회사를 이용해서 4천만 불이나 되는 돈을 꽁으로 얻은 사건도 있었다. 역시 그 아버지의 교육을 받은 난형난제.[16] 참조.[17] 리베이트 시스템이란, 한 드럼 배송 이용이 만 원이면 나만 다시 나중에 이천 원 돌려받는 방식을 말한다. 겉보기에는 다른 회사랑 같은 배송비를 내지만 알고보면 왕창 할인 받기 떄문에 다른 회사는 곧 망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게임"의 결과는 1870년대의 밴더빌트-톰스콧 동맹에 의한 운송비 담합으로 인한 또 다른 기업전쟁을 불러일으키지만, 결국 승리자는 송유관이라는 새로운 시스템과 인프라를 날로 먹는데 성공한 록펠러가 된다.[18] 다만,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하나만 사주고 공유토록 한 것은 록펠러가 아니라 그의 부인 세티의 결정이었다. 그는 아이들 모두에게 자전거를 사주고 싶어했으나 세티는 자전거를 공유해야 아이들이 양보 정신을 배울 수 있다고 반대했다. 세티는 남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검소한 인물이었다.[19] 당시 기부 사업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이대로 축재를 내버려 두다간 회장님이 본인의 돈에 깔려 죽을 수 있다고까지 경고할 정도.[20] 이때 그는 대중들을 위한 기초 교육과 기초 의료 시설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설명해주었고, 이는 나중에 록펠러가 기부를 시작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21] 말년의 이미지 개선 작업일 뿐이었다고 평가절하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록펠러는 청교도로서 20대부터 이미 기부 등을 해오던 사람이긴 했다. 그리고 은퇴 이후 평온한 삶은 록펠러가 평생 품었던 숙원이었다.[22] 그의 가문은 상속세 때문에 그 많은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관련 법안의 입안 논의가 늦어졌더라면 상속이 늦어졌을 거라는 예측은 있지만 실제로 당시 상속법은 굉장히 느슨했기 때문에 록펠러 2대째가 가문의 힘을 이어받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23] 유력 정치가문과 결혼한 덕이 컸다. 록펠러의 사돈집안은 당시 유명한 상원의원이었다.[24] 공화당내 리버럴 컨셉으로 온건파 혹은 자유주의 공화당 시절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민주당 행정부에서 국무 차관 등을 지내기도 했다.) 20세기 중반 미국 정계에 큰 영향력을 끼쳐 1970년대 '록펠러 공화당'이라는 명칭까지 나돌 정도였으나, 80년대 이후 보수 세력이 장악한 공화당에서 비주류가 되었다.[25] 미국침례회(ABCUSA)의 전신인 북침례회(Northern Baptist Convention)에 속한 교회를 다녔다.[26] 저 40%도 그나마 최소 추산이다. 실제로는 60% 정도로 추산될 정도로 미국 백인들 중에 독일계의 숫자는 영국계나 아일랜드계의 비율을 압도한다는 소리도 있다.[27] 실제 이땐 록펠러 가문의 힘이 최전성기에 달했을 시절이다. 손대는 기업마다 알짜기업으로 성장시키고 미국의 동아시아권 진출의 첨병 역할 또한 수행했으며 성장에 박차를 가하던 맨해튼 금융가의 실권자로 군림하는 등 그 힘을 미국 내외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음모론이 아니라 실제 그 정도 영향력이 있었던 것.[28] 록펠러 재단의 1975년도 기금은 당시 금액으로 약 300억 달러(현재 한화 가치로 약 373조 원)에 이른다.[29] 독점을 눈감아주는 대신 미국 사회에 석유를 싸게 공급한다는 암묵의 협정이 있었다는 말도 있다.[30] 이는 록펠러가 사업을 키운 계기를 보면 어찌보면 당연한 행보다. 그는 남북전쟁 당시 북군을 도우며 사업을 키웠는데, 당시 북부군을 주도하던 공화당은 공화당 급진파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지금과 달리 소수인종을 대변하는 정당이었다.[31] 다만 당시 자본가들은 인도주의를 떠나 능력주의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경우도 상당했다. 귀족들과 달리 피보다 능력을 중시하여 자유만 있으면 그 우월성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노예제를 인정하긴 어려웠던 것. 역으로 말하면 우생학을 신봉하는 일부 사람들조차 너희가 하찮게 사는 이유는 타고난 신분 때문이 아닌 열등한 능력(유전적 원인만이 아니라 환경적 원인까지 포함해서 상속은 당연하게 여겼다) 때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노예제를 반대하기도 했다. 물론 록펠러가 이 경우였는지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