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커 모터스
1940년대에 미국에서 창립됐던 자동차 기업. 터커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의 자동차 관련 기술을 20년 이상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라는 정설이 전해질 정도로 신기술 도입 및 개발에 열성적인 기업이었으나, 이미 당대 자동차 시장을 호령하고 있었던 세 회사의 모함에 의해 처참히 무너져버린 비운의 기업이다.거대한 조직이 개인의 아이디어와 자유를 짓누르는 것은 이 나라의 미래를 말살시키는 행위이며, 내가 태어난 조국이 나에게 준 고통과 슬픔입니다. 언제 어떻게 미국의 자동차가 위협을 받을지 그 누가 알 수 있나요? 한때는 적국이었던 나라에서 자동차나 라디오를 사들여야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조국의 건전한 양심을 믿으며 아메리카의 꿈 또한 영원하리라 믿습니다.'''
- 마지막 재판 최종 변론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출처
1. 회사 창립 초기
터커 모터스의 설립자이자 사장이었던 프레스턴 터커는 어린 시절부터 레이싱을 좋아하던 호남아였고, 실제로 청년 시절에는 맥주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받은 급여를 몽땅 모아서 인디 500에도 나갔을 정도로 자동차를 매우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터지면서 대부분의 공장들이 군수품 생산에 뛰어들었는데, 터커도 이에 가세해서 '터커 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를 창립, 네덜란드의 요청에 따라 자신들이 개발한 회전 포탑을 장착한 장갑차, 일명 '터커 티거'를 납품하기도 했었다.[2] 이후 회사를 미시간 주의 입실렌티로 옮겨 그곳에서 군용으로 쓰일 부품이나 장비들을 제작해서 납품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 터커는 전쟁이 끝나면 회사가 구상할 자동차에 대해 여러 동료들과 함께 연구를 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6년 간의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미국 정부는 그동안 군수품 생산으로 이용했던 공장 부지를 임대하거나 아예 팔아버리고 있었는데, 터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지들 중 하나를 인수받아 터커 모터스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함께했던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오랫동안 연구와 디자인을 거듭한 결과, 터커 최초의 자동차인 '''터커 48 톨피도'''의 시제차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시제차를 만들긴 했으나 이를 공장에서 생산하기엔 터커 사는 돈이 매우 부족했고, 결국 신문 광고를 시작으로 채권 발매, 차량 구입 대금을 받는 조건으로 당시 환율로 1200만 달러를 모아들였다.
2. 완벽 그 자체였던 터커 사의 신차
그렇게 1948년, 마침내 터커 모터스는 이 자금원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만든 신차인 터커 48의 양산형 모델을 대중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언론들은 터커 48을 '''"시대를 앞서 나간 자동차"''' 라며 극찬했는데, 당시에는 매우 생소했던 디스크 브레이크와 반자동 변속기, 그리고 엔진 열을 식힐 수 있는 공기 흡입구는 물론 운전자와 동승자의 안전을 생각한 '''안전 벨트'''마저 달려 있었다.[3]
게다가 앞에서도 소개했던 시속 180km 장갑차라는 똘끼에 걸맞게 이번 터커 48 역시 시속 196km로 주행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캐딜락에서 만들었던 대부분의 세단 모델들이 시속 130km/h까지 도달하는 데 1분이나 걸렸지만 터커 48은 15초면 가능했다. 또한 연비도 좋아 당시 기준으로 리터당 10km 정도의 거리를 갈 수 있었다.
프레스턴 터커는 매년 이 차를 1000대씩 찍어내겠다고 호언장담했고, 대당 가격은 2450 달러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이런 차의 등장은 기존의 자동차 회사들에게 있어선 매우 불편한 부스럼일 수 밖에 없었다.
3. 세 회사들의 무차별적인 모함, 그리고 터커 본인의 말년
수천 명을 초대해 선을 보인 터커 48의 첫 판매용 모델은 1948년 3월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미 터커 모터스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공장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은행이 돌연 대출 계좌를 닫아버렸고, 터커 사에 관심을 보이던 언론들도 비판적인 논조로 방향이 급선회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하지만 이 모든 일들을 뒤에서 조종했다고 의심받는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당대 미국의 3대 자동차 회사인 GM, 포드, 크라이슬러였다.''' 물론 물증적으로는 이들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없었지만, 터커 사를 붕괴시키려 했다는 이들이 누구였는지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터커 모터스는 결국 상황이 악화되자 만들어지지 않은 차로 계약을 시도했고, 결국 공장 폐업은 물론이고 직원들을 무더기로 해고해야 했다. 게다가 엄청난 금액을 투자한 투자자들은 그를 사기죄로 고소했다. 터커를 공식적으로 기소한 곳은 미국증권감독위원회(SED)였지만 증권감독위원회는 표면적인 기구였을 뿐, 이들을 움직인 것이 누구들이었는지는 뻔히 알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언론과 은행을 움직이고 미시간 상원의원까지 동원해 터커를 압박했다. 결국 1950년 터커는 '''벌금 15만 달러 + 징역 115년'''이라는 판결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싸웠고,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그의 법정 다툼은 놀랍게도 1월 23일,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모두가 터커를 등지고 돌아선 상황에서 자신의 무죄를 극적으로 입증해낸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미 프레스턴 터커 자신의 꿈과 희망, 그리고 열정 그 자체였던 터커 모터스는 그가 다시 일으켜 세우기엔 너무나 많이 무너져버렸다.
결국 터커는 1956년, 폐암 합병증과 스트레스로 인해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 의의
터커 모터스는 그렇게 사라졌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와 그가 만든 자동차를 잊지 않았다. 50대 가까이 되는 대부분의 차량들이 경매로 넘겨졌지만, 그 중 몇 대는 살아남아 박물관에 전시되거나[4] 개인이 소장하기도 했다.[5]
이후 1988년에는 프레스턴 터커의 생애를 다룬 전기영화인 '''"터커 - 한 남자의 꿈"'''이 개봉되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감독, 제프 브리지스가 주연을 맡았으며, 루카스필름에서 배급을 했다. 흥행 성적은 쪽박이었지만 작품성은 최고였다는 평을 받는다.
5. 출처
[1] 현재 기아 타이거즈에서 뛰고 있는 프레스턴 터커와 동명이인이다. 다만 저 쪽은 프레스턴 '마이클' 터커, 이 쪽은 프레스턴 '토마스' 터커.[2] 다만 이 장갑차는 실제로 쓰이진 않았지만 회전 포탑만은 폭격기인 B-18에 장착되어서 요긴하게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장갑차마저 패커드 사에서 생산한 12기통 엔진을 달았는데, 카탈로그에 따르면 '''잘 포장된 도로 기준으로 시속 180km 주행 가능''' 이었다고(...). [3]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자동차 안전벨트는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고 있었다. 의무적으로 장착해야 하는 게 아니었기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터커는 자신의 자동차에 안전벨트를 달아 안전에 대한 적극성을 보였다.[4] 이 중 1대는 포드 자동차 박물관에서 가지고 있다고(...). 자신들이 박살낸 회사의 작품을 자신들이 갖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할 뿐.[5] 영화 스타워즈의 감독인 조지 루카스도 1대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