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애덤스

 

'''토니 애덤스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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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데이비드 플래트
(1993~1994)

'''토니 애덤스'''
'''(1994~1996)'''

앨런 시어러
(1996~2000)

'''아스날 FC 역대 주장'''
케니 샌섬
(1986~1988)

'''토니 애덤스'''
'''(1988~2002)'''

파트리크 비에이라
(2002~2005)


''' 잉글랜드의 축구감독 '''
<colbgcolor=#eeeeee> '''이름'''
'''토니 애덤스 MBE
Tony Adams MBE[1]'''
'''본명'''
토니 알렉산더 애덤스
Tony Alexander Adams
'''출생'''
1966년 10월 10일 (57세)
잉글랜드 그레이터 런던 롬포드
'''국적'''
잉글랜드 [image]
'''신체'''
191cm, 90kg
'''직업'''
축구선수(센터백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colbgcolor=#eeeeee> ''' 선수 '''
'''아스날 FC (1980~1983/유스)'''
'''아스날 FC (1983~2002)'''
''' 감독 '''
위컴 원더러스 FC (2003~2004)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2005/유스 코치)
아스날 FC(2005/스카우트)
FC 위트레흐트 (2006/코치)
포츠머스 FC (2006~2008 / 수석코치)
포츠머스 FC (2008~2009)
가바라 FK (2010~2011)
가바라 FK (2012~2017/단장)
그라나다 CF (2017)
'''국가대표'''
66경기 5골(잉글랜드 / 1987~2000)
1. 소개
2. 우승
3. 유년 시절
4. 축구선수 경력
4.1. 클럽 경력
4.2. 국가대표 경력
5. 스태프 경력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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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잉글랜드축구인. 축구선수 인생을 전부 아스날 FC에서 보냈고[2] 주장도 오랫동안 역임했던 원 클럽 맨이자 레전드. 아스날뿐만 아니라 국대에서도 맹활약을 보이고 주장도 맡았다. 이같은 활약 덕에 아스날과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을 꼽을 때 항상 언급된다.

2. 우승


  • 아스날 FC (1983 ~ 2002)
    • 프리미어리그 : 1988-89 , 1990-91 , 1997-98 , 2001-02
    • FA컵 : 1992-93 , 1997-98 , 2001-02
    • 리그컵 : 1992-93 , 86-87
    • 커뮤니티 실드 : 1991 , 1998 , 1999
    • UEFA 컵 위너스컵 : 1993-94

3. 유년 시절


영국의 롬포드에서 태어난 그는 다겐햄에서 자라 1971년부터 78년까지 헌터스 홀 초등학교에 다닌 후 1978년부터 1983년까지 이스트브룩 종합학교에 다녔다. 이 기간 중 1980년부터 1983년까지는 아스날에서 유스 선수로 활동했으며, 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아스날에 데뷔했다.

4. 축구선수 경력



4.1. 클럽 경력


[image]
'''아르센 벵거와 함께 우승을 자축하는 애덤스'''
유소년 클럽부터 성인 클럽까지 총 '''23년의''' 커리어 전부를 아스날에서 보냈다. 말 그대로 진짜 로컬 유스. 아스날의 수비 라인을 든든히 지키면서 구너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었으며, 선수생활 말년에는 아르센 벵거 감독과 콤비를 맞추기도 했다.
아스날 소속으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504경기'''에 출전했다. 이는 데이비드 오리어리의 뒤를 잇는 아스날 역사상 2위.
아스날에 있으면서 네 번의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우승, 세 번의 FA컵 우승, 두 번의 풋볼 리그 컵 우승, 세 번의 커뮤니티 실드 우승, 그리고 한 번의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을 경험했다. 이중엔 두 번의 '''리그&FA컵 더블'''과 한 번의 '''리그컵&FA컵 더블'''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2002년에 은퇴해 무패 우승[3] 멤버는 되지 못하였다.
[image]
'''자신의 동상 앞에서 즐거워하는 애덤스'''
2011년 12월 9일,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앞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앞에 동상이 세워진 인물은 '''티에리 앙리''', '''데니스 베르캄프''', 허버트 채프먼[4], 켄 프라이어[5] 그리고 애덤스 뿐이다. 이는 그가 아스날의 역사에서 어떤 지위에 있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4.1.1. 1980년대


1983년 11월 5일에 프리미어 리그의 전신인 잉글리시 풋볼 리그 디비전 1에서 선더랜드 AFC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뤘다.
그후 85-86 시즌부터 조지 그레이엄 감독[6]의 지휘 하에 주전으로서의 입지를 다졌으며, 1987년풋볼 리그 컵 결승전에서 리버풀 FC를 이기고 그의 커리어 첫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1988년 1월 1일, 그는 겨우 만 21세의 나이로 주장 완장을 달았다. 그리고 그는 은퇴할 때까지 '''14년간''' 주장을 맡았다.
88-89 시즌에도 주장 완장을 달며 아스날의 '''18년만의''' 리그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4.1.2. 1990년대 & 2000년대


90-91 시즌, 그는 또다시 아스날의 리그 우승, 그것도 '''1패''' 우승을 지휘했으며, 바로 다음 시즌인 92-93 시즌엔 리그 컵&FA컵 더블을 경험했다. 그리고 다음 해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
그러나 애덤스는 1980년대 중반부터 알코올 중독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취한 상태에서 나이트클럽에서 싸우기도 했으며, 1990년 5월 6일엔 '''법정 허용치 4배 이상의''' 혈중 알코올 농도에서 음주운전을 해 벽에 차를 들이박는 사고를 쳐 징역을 살고 나오기도 했다.
감방을 갔다 온 후인 93-94 시즌엔 '''취한 상태에서''' 경기를 한 것이 들통나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으며, 취한 상태에서 계단에서 넘어져 머리에 29바늘을 꿰맸던 적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구너들이 그를 응원했으며, 1996년에 마침내 알코올 중독을 떨쳐냈다. 이는 새롭게 부임한 아르센 벵거 감독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그의 부활에 힘입어 97-98 시즌 아스날은 '''리그&FA컵 더블'''을 달성하였다. 이는 아스날 역사상 두 번째.
01-02 시즌, 그는 또 한 번 '''리그&FA컵 더블'''의 공신이 되었으나, 그 시즌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애덤스는 홈에서 에버튼 FC와의 리그 마지막 경기[7]를 끝으로 은퇴했다.

4.2. 국가대표 경력


그의 국대 데뷔는 1987년 스페인전에서 이루어졌다.
유로 1988에 참가해 1골을 넣기도 했으나, 나라가 전패로 조별리그 광탈. 참고로 이때 잉글랜드의 총 득점이 '''2득점'''이었다. 반면 4강까지 진출한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선 스쿼드에 들지도 못했다. 유로 1992엔 부상을 이유로 불참.
이렇게 점점 국대와 인연이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잉글랜드 수비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기존에 주장 완장을 달던 게리 리네커가 은퇴하자마자 그와 데이비드 플랫에게 완장이 간 적이 대표적인 증거. 그러나 토너먼트 운은 지독히도 없는지 1994 FIFA 월드컵 미국은 아예 예선 탈락. 그래도 유로 1996에 주장으로서 참가해 4강까지 오르면서, 그동안의 국대 토너먼트 설움은 나름대로 털어냈다. 하지만 이것도 당시 잉글랜드가 강력한 우승후보였으니 좀 아쉬울 수도 있다. 이후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유로 2000에 참가했다.
2000년, 스벤 예란 에릭손이 감독으로 부임하자, 애덤스는 에릭손이 첫 스쿼드를 짜기 전에 은퇴를 선언하고 파란만장했던 국대 커리어를 마감했다.

5. 스태프 경력


은퇴 후 2003년 11월 풋볼 리그 1(3부리그)의 위컴 원더러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며 팀의 풋볼 리그 2(4부리그) 강등을 막지 못했다. 강등을 당했지만 계속 감독직 유임이 되었고 2004/05 시즌 초반에는 선두를 달릴 정도로 팀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하지만 리그가 진행될수록 성적이 점점 하락하여 2004년 11월 1년여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위컴 원더러스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 2005년 7월 페예노르트 유소년팀의 특별 코치로 부임하여 11월까지 4개월간 활동 하였고 동시에 아스날의 파트 타임 스카우트로 활동하며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지역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 후 2006년 1월과 2월에 네덜란드의 FC 위트레흐트의 코치로 단기간 활동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2006년 6월에는 포츠머스 FC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해리 레드냅 감독을 2년간 보좌하며 팀의 FA 컵 우승을 이끌었다. 2008년 6월 해리 레드납 감독이 팀을 떠나자 포츠머스 FC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2009년 2월 팀의 성적 부진으로 해고 당하게 된다.
그 후 2010년 5월 아제르바이젠의 가바라 FK에서 감독을 역임했으며, 2011-2012 시즌이 끝나기 전에 가바라 FK 감독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2012년 10월 가바라 FK의 단장으로 복귀하였고 2017년 4월 10일에 그라나다의 감독에 부임하였다.

6. 여담


  • 구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마지막으로 골을 넣은 잉글랜드 선수이기도 하다. 2000년 5월 31일 우크라이나와의 친선전에서의 두번째 골이 바로 그 골.
  • 1999년대영제국 훈장 5등급을 받았다. 고로 이름 뒤에 'MBE'가 붙는다.관보링크 참고로 아르센 벵거 감독이 4등급 OBE.[8]
  • 로랑 코시엘니의 국내 팬들이 붙인 별명인 코담스는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현지에서는 씨알도 안먹히는 소리 중 하나다. 코시엘니가 아담스의 등번호인 6번을 이어받았고 이적 초기와 달리 점점 활약이 좋아지면서 코듣보에서 코담스로 업그레이드되었다고 붙여준 별명이다.
  • 루크 쇼는 토니 아담스를 몰랐다고 한다. 이때문에 프랭크 램파드는 세월의 흐름을 느끼고 은퇴를 생각했다고. 자세한 내용은 루크 쇼 문서를 참조.
  • 엄청난 애주가이다.
  • 2017년 초부터 벵거 감독을 계속 디스하고 있는 중이다. 벵거가 왔을때 아담스는 이미 아스날의 중심이었고, 그리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기에 디스를 하는데 거리낌이 없는듯. 그런데 문제는 본인도 감독으로서 여러 클럽 말아먹었다는 점(..)
  • 에릭 칸토나가 상대하기 힘든 수비수라고 밝힌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칸토나가 말하길 아담스 빼고 다른 수비수는 다 갖고 놀 수 있었다고...
  • 상술한대로 술 문제로 고생을 굉장히 많이 했었다. 음주운전 사고는 물론 이 때문에 아내와 이혼까지 해야 했다. 오죽했으면 자서전 제목도 ‘중독(Addicted)’ 이었고 자살을 생각 했던적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후 본인의 경험을 살려 ‘스포팅 찬스 클리닉’ 이라는 중독 치료 전문 클리닉을 설립하기도 했다.
  • 90년대 초중반 잉글랜드 최강팀인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가장 원했던 수비수로 알려져있었고 수차례 이적제안을 했지만 끝내 아스날에 남았다. 또한 AC 밀란 에서도 프랭코 바레시의 은퇴시기가 다가오자 대체자원으로 영입 제안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스로 남은것으로 알려져있다.
  • 경기 시작 전, 국가 제창을 할 때 God Save the Queen을 정말 야무지게 부른다. 옆에서 부르는 시먼과 비교해 보면, 애덤스가 국가(사실 국가는 아니지만)를 얼마나 열심히 부르는지 알 수 있다. 사우스게이트피어스도 상당히 열심히 부른다.

[1] 1999년 수훈, 5등급 대영제국 훈장 Memb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2] 총 670경기 48골[3]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2003-2004 시즌[4] 1925년부터 1934년까지 아스날을 지휘하며 아스날의 초기 전성기를 이끌었던 명장이다. 아스날 최고의 감독을 뽑을 때 전문가들 사이에서 항상 아르센 벵거와 같이 언급된다.[5] 12세에 티켓 매표소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한것을 시작으로 1973년부터 클럽 총무직을, 1983년부터는 디렉터도 겸해서 2000년까지 맡았다. 이후 클럽의 보드진에 있어왔으며 2015년 현재 아스날에서 무려 '''64년째''' 일하고 있다.[6] 나름대로 아스날을 잘 이끌었었으나, 부정 스카우트의 대가로 뇌물을 받은 것이 들통나 쫓겨난 아스날의 흑역사이다.[7] 특이하게도, 2002년엔 리그 마지막 경기를 FA컵 결승전보다 나중에 했다.[8] 본래 영국인에게만 주는 훈장이지만, 명예 훈장의 개념으로 외국인에게 주기도 한다. 이렇게 외국인이 받는 명예 훈장은 정원 외로 주어지고, 그 등급이 4등급이 아니라 기사작위급인 1~2등급이라도 이름 앞에 'Sir'가 붙지 않는다. 외국인이 영국의 군주에게 기사로 서임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