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피어스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
1978년 데뷔한 이래 1980~90년대 잉글랜드 최고의 레프트백으로서 명성을 날렸다. 현역 시절 별명은 '''"싸이코"'''. 레프트백임에도 탁월한 득점력을 갖췄고 수비력도 최고 수준이었다. 심지어 아스날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백 중 하나로 평가받는 나이젤 윈터번이 이 선수 때문에 국가대표로 나오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감독으로서의 그는 역대 최악의 감독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좋지 않았고,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을 망친 자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영국 올림픽 국가대표 축구 단일팀 감독을 맡아 금메달을 노렸다가 현역 시절에 악연이 있었던 승부차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밀려 탈락한 감독으로 유명하다.
2. 선수 커리어
2.1. 초창기
북런던 헤머스미스에 태어났다. 킹스버리의 Fryent Primary School에 입학하였고 이내 진로를 축구로 정해 아마추어 팀에 소속되어 축구 기술을 익혔다. 이후 피어스는 QPR에서 트라이얼을 받았지만 탈락했고 헐 시티에 입단을 신청했으나 거절됐다. 이에 피어스는 할 수 없이 논 리그에 속한 윌드 스톤에 입단했다. 피어스는 5년간 그 팀의 레프트백으로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고 그런 그를 주목한 코벤트리 시티에서 1983년에 3만 파운드를 지불하고 피어스를 영입했다.
2.2. 코벤트리 시티
[image]
당시 코벤트리의 감독이었던 바비 굴드는 친히 윌드스톤에 가서 피어스의 활약상을 살펴보고는 그의 투지와 전투적인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영입을 전격 진행했다. 피어스는 코벤트리에 입단한 직후 바로 다음 경기에 출전했고 2년간 52경기 4골을 기록하며 팀의 핵심 멤버로 자리잡았다.그런 그를 주목한 이가 있었으니, 당시 노팅엄 포레스트의 전설적인 감독 브라이언 클러프였다. 클러프는 얼마 후 30만 파운드를 지불하고 피어스를 영입했다.
2.3. 노팅엄 포레스트
[image]
피어스는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얼마 안가 주장이 되었고 12년간 포레스트의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선수로 자리잡았다. 그는 2개의 리그컵과 Full Members Cup을 확보했고 1991년 FA컵 결승전에서 환상적인 프리킥 골을 작렬했지만 아쉽게도 토트넘에게 패하고 말았다. 한편 피어스는 1989년 4월 15일 FA컵 준결승전에서 리버풀과 경기를 치르다가 힐스버러 참사를 목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노팅엄 포레스트는 유로피언컵을 2번 연속 우승한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채 쇠락해가고 있었고 결국 1993년에 강등되고 말았다. 하지만 피어스는 팀에 남기로 결심했고 포레스트가 다음 시즌에 바로 EPL에 승격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피어스는 1994-95 시즌에 노팅엄 포레스트를 3위로 올리고 유로파 대회에 진출시켰으며 다음 해에는 유로파 4강전까지 진출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피어스는 1996년 12월 포레스트의 선수 겸 감독의 형식으로 임시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프랭크 클락 감독은 노팅엄 포레스트를 리그 꼴찌로 인도하는 바람에 경질되었고 보드진은 오랫동안 팀을 위해 헌신했기에 팀원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피어스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피어스의 첫번째 경기는 아스날과의 홈경기였다.
이때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경기가 코앞에 닥칠 무렵, 피어스는 선수 명단을 자택에서 작성하고 이를 막 경기 진행요원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다. 그때 그의 아내가 다급하게 외쳤다.
마크 크로슬리는 다름 아닌 '''노팅엄 포레스트의 주전 골키퍼였다.'''(...)"당신, 마크 크로슬리 선수를 빼먹었어요!"
이렇듯 얼빠진 모습을 보인 피어스였지만 경기는 포레스트의 2:1 승리로 끝났다. 이후 피어스는 1997년 1월에 '이 달의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분전했지만 3월에 데이브 바셋 감독이 정식 부임하며 다시 선수로 전념했고 노팅엄 포레스트는 꼴찌로 강등되고 말았다. 이후 피어스는 노팅엄을 떠났다.
피어스는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1985년부터 1997년까지 12년간 레프트백으로 활약하며 401경기 63골을 기록했다.
2.4. 이후 커리어
피어스는 1997년 여름 뉴캐슬에 입단하였고 케니 달글리시 감독의 지휘하에 1998년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달글리시가 물러나고 루드 굴리트가 부임하면서 그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고 결국 그는 1998-99 시즌 내내 벤치에 박혀 있어야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피어스는 1999년 웨스트햄으로 이적했다. 훗날 피어스는 훈련을 받을 때 굴리트를 걷어찼더니 선수들이 낄낄 웃더라고 증언하며(...) 자신과 굴리트 간에 심각한 불화가 있었고 선수들 또한 굴리트의 형편없는 선수 관리에 불만이 많았다고 밝혔다. 피어스는 1999년 웨스트햄으로 이적한 후 그곳에서 2년간 42경기 2골을 기록했다.
1999년 신년 서훈명단(1999 New Year Honours)에 올라 5등급 대영제국 훈장(MBE)을 받았다. 관보링크
그후 2001년 맨시티를 이끌고 있던 케빈 키건감독의 부름을 받고 맨시티로 향했고 그곳에서 38경기 3골을 기록하며 마지막 불꽃을 불태운 후 은퇴를 선언했다.
2.5. 국가대표
[image]
피어스는 1987년 5월 19일 웸블리에서 열린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에서 국가대표로서 데뷔했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 이후 그는 케니 샌섬을 제치고 잉글랜드의 주전 레프트백이 되어 A매치에 꾸준히 출전했다. 이윽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차출된 그는 카메룬과의 16강전에서 데이비드 플랫에게 절묘한 패스를 찔러서 그의 골을 유도해냄으로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당시 피어스는 기존의 레프트백에서 한층 더 올라간 '공격형 레프트백'으로서 공격 전개를 주도하는 역할을 깔끔하게 소화해냈다. 이후 잉글랜드는 4강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서독과의 4강전에서 1:1 무승부 후 승부차기에서 분패하고 말았다. 이때 피어스는 승부차기에서 실축을 범한 뒤 눈물을 흘리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1991년 6월 8일, 그는 뉴질랜드와의 원정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이 경기가 그의 국가대표로서 40번째 경기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테리 베너블스는 그를 배제하고 그레이엄 르 소를 기용했다. 하지만 르 소가 1995년 12월에 무릎이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자, 베너블스는 피어스를 주전으로 재기용했다. 피어스는 자국에서 열린 1996 유로에도 참가하였고, 유로 본선에서도 좋은 경기력을 꾸준히 보여줬고 대표팀은 다시 한번 4강에 진출했다. 준결승전의 상대는 독일. 1990년에 이어 다시 한 번 경기는 1-1 스코어로 120분이 종료된 후 승부차기에 돌입. 피어스는 3번 키커로 나섰는데, 이번에는 골키퍼를 완전히 속이면서 성공. 성공하고 나서는 씨익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을 관중들에게 들어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6번 키커로 나선 가레스 사우스게이트가 실축하면서 승부차기 스코어 6-5로 독일에게 패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1996 유로 대회가 끝난 뒤, 피어스는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자 잉글랜드의 새 감독으로 부임한 글렌 호들이 좀 더 있어달라고 부탁했고 피어스는 심사숙고 끝에 경력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피어스는 1998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되지는 않았지만 유로 2000 지역 예선을 치르는 대표팀에 차출되어 케빈 키건 감독의 지휘하에서 베테랑으로서 어린 선수들을 다독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99년 9월 8일 폴란드와의 경기에 출전했고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0:0 무승부를 거두었다. 이것이 피어스의 마지막 대표팀 출전이었다. 이후 그는 무릎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고 말았고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피어스는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78경기에 출전하여 5골을 기록했다.
3. 감독 커리어
3.1. 맨체스터 시티
[image]
2002년 맨시티에서 은퇴한 뒤, 피어스는 케빈 키건 감독의 밑에서 코치로 일했다. 그러던 2005년 3월 키건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자, 피어스는 임시 감독으로 부임하여 남은 경기를 치르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2005년 4월 9일 리버풀과의 경기를 승리로 가져가면서 감독으로서 첫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맨시티는 피어스 부임 이래 성적이 좋아졌고 유로파 진출권에 들어갈 뻔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미들즈브러와의 단두대매치에서 1:1 무승부를 거두면서 결국 유로파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이 경기에서 경기 막판 역전골을 얻기 위해 서브 골키퍼인 니키 위버를 넣고 기존 골키퍼인 데이비드 제임스 골키퍼를 공격으로 내보내는 독특한 작전을 펼쳤는데 이게 먹히며 제임스가 추가시간에 페널티킥을 얻어냈으나 키커로 나선 로비 파울러가 페널티킥을 놓치며 유럽대항전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후 정식 감독이 된 피어스는 2005-06 시즌에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지만 이내 성적이 떨어지더니 마지막 10경기에서 9경기를 패하는 참사를 겪으며 15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또한 리그 컵에서는 3부리그 팀인 돈케스터 로버스에게 패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피어스는 심판들의 실수에 대해 비판 한마디 하지 않고 그들을 존중하는 면모를 보여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호감을 샀고 당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스벤예란 에릭손 이후 차기 감독으로 선임하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피어스는 2006-07 시즌에 맨시티를 한층 더 악화시켰고 급기야 강등권에 인접한 성적까지 덜구고 말았다. 또한 리그 컵에서 3부리그 팀인 체스터필드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이 양반은 눈치도 없는 건지 팀이 곤경에 처하고 있던 2007년 2월에 뜬금없이 잉글랜드 U-21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연히 팀을 엉망으로 이끌고 있는 주제에 청소년 대표팀 감독이 되어 소속팀에 집중하지 못하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급기야 피어스는 이 시기 대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그가 맡은 맨시티는 2006-07 시즌에서 홈에서 겨우 10골만 기록했고 2007년이 시작된 이래 '''홈에서 단 한 골도 못 넣은 거'''다. 결국 맨시티는 강등권과 불과 4점 차이인 14위로 강등을 간신히 모면했고 피어스는 팀을 이 지경으로 이끈 책임을 지고 2007년 5월, 경질되었다.
3.2. 잉글랜드 U-21 대표팀
[image]
피어스는 비록 맨시티에서 경질되었지만 잉글랜드 U-21 대표팀 감독직은 계속 맡을 수 있엇다. 그는 팀을 이끌고 2007 유로파 U-21 챔피언십 4강에 진출했지만 네덜란드에게 승부차기에서 패해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2008년 1월에 재계약을 체결함으로써 계속해서 U-21 대표팀을 이끌었다. 그는 2009년 6월에 대표팀을 이끌고 2009 UEFA U-21 챔피언십 결승전에 진출햇지만 이번엔 독일에게 4:0으로 패했다.
한편, 피어스는 2012년 2월 파비오 카펠로가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직을 사임하자 잠시 감독을 맡아 네덜란드와 친선전을 치뤘지만 3-2로 패했다. 그는 스티븐 제라드의 자서전에 따르면 유능한 감독은 아니었다고 한다. 잉글랜드 대표팀에는 스티븐 제라드라는 걸출한 미드필더이자 주장이었던 선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로 스콧 파커를 주장으로 뽑았다. 게다가 이전 주장이었던 제라드에게는 화장실로 데려가서 고작 10초만에 주장직 해임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고 한다. 스콧 파커가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의 주장이기는 했으나 당시 팀은 2부리그에 있었고, 제라드가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긴 했지만 얼굴 보고 이야기한답시고 화장실로 데려가 일방적 주장 해임 통보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팀 내에서 감독이라는 역할의 권위를 확실히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는 예상이 대부분. 이후 제라드는 '선수 피어스'를 향한 존경심은 남아있지만, '인간 피어스'를 향한 존경심은 그날 거의 없어져버렸다고 한다.이후 로이 호지슨이 부임하면서 다시 청소년 대표팀 감독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2013 U-21 챔피언십 조별 예선에서 이스라엘에게 밀려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한 후 계약이 만료되자 대표팀을 떠났다.
3.3. 영국 올림픽 단일 팀 감독
[image]
2011년 10월, 피어스는 아직 U-21 대표팀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안방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대비하기 위해 결성된 영국 단일 축구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피어스는 자신이 원하는 스쿼드를 작성하여 FA에 전달했고, FA는 이를 승인하고 피어스에게 뽑힌 선수들에게 통보했다. 이때 피어스는 "통보받은 이들 중 영국 단일팀에 들어가길 싫어하는 이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자신에게 알려 달라"고 밝혔다. 그는 총 191명에 달하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선수들과 접촉하여 영국 단일 팀에서 뛸 것인지를 물었는데, 7명은 이를 거부하고 나머지는 승낙했다.
이후 영국은 우루과이, UAE, 세네갈과 한 조를 이루게 되었고, 피어스는 2012년 7월 2일 최종적으로 18인 로스터를 확정지었다. 그는 올림픽 대회가 있기 며칠 전인 7월 20일에 미들즈브러의 리버사이드 스타디움에서 브라질과 평가전을 치뤘고, 결과는 2:0 승리였다. 당시 영국 언론은 "브라질을 격파한 것을 보니 우리 단일 팀이 올림픽에서 우승할 것이 틀림없다"며 설레발을 쳤다.
영국은 7월 26일 올림픽 축구 대회 첫 경기인 세네갈과의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거뒀다. 이후 영국은 UAE를 3:1로 격파하고 뒤이어 우루과이를 1:0으로 격파, 2승 1무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 진출한 영국 단일 팀은 웨일스 카디프에서 대한민국과 8강전을 치르게 되었다. 자기네 홈에서 맞붙는데다 상대는 두 수는 아래로 평가받던 대한민국이었으니 모두가 영국의 승리를 예상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선수들의 예상치 못한 선전과 잉글랜드 공격수들의 난사질 로 인해 결국 승부는 1:1로 결판이 나지 않았고, 승부차기로 넘어갔다. 이후 승부차기는 4:4로 진행되었고, 다니엘 스터리지가 5번째 키커로 나와서... '''이범영에게 막혀 버렸다!''' 결국 영국 단일 팀은 대한민국에 패해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접어야 했다. 덤으로 피어스는 승부차기의 악몽에 또 울어야 했다. 이후 피어스는 영국 단일 팀에서 물러나 U-21 대표팀 감독으로 돌아갔다.
3.4. 노팅엄 포레스트
[image]
청소년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난 피어스는 한동안 휴식을 취하다가 2014년 7월 1일 선수 시절 오랫동안 활동했던 노팅엄 포레스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피어스는 시즌 개막 후 5경기에서 4승 1무를 거둬 승점 13점을 확보함으로서 8월 이달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울버햄튼 원더러스에게 패배한 후, 노팅엄 포레스트는 DTD 행보를 보이고 말았다.(...) 결국 2015년 2월 1일, 포레스트는 12위로 추락하고 말았고 피어스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되었다.
3.5. 사상 최악의 팀에 입단하다
[image]
2016년 1월 28일, 피어스는 논리그의 롱포드 AFC의 선수 겸 코치로 부임했다. 근데 이 팀은 "영국 최악의 축구팀"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안 좋은 곳이라고 한다. 어느 정도냐면 이들은 2015-16시즌에 피어스가 입단할 때까지 1골을 득점하고 179실점(...)을 기록했다고 한다. 당연히 그들의 성적은 영국 축구 13부 리그(...)인 북글로스터셔 시니어 리그 2부에서 압도적인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근자에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피어스는 이 구단에 입단한 후 2016년 3월 12일에 우튼 로버스와의 경기에서 교체 출전했지만 팀은 1:0으로 패했다고 한다. 그리고 롱포드는 강등을 확정짓고 14부리그인 스트라우드 앤드 디스트릭트 풋볼 리그 디비전1으로 추락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