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코니글리아로
1. 개요
미국의 前 야구선수.
2. 선수경력
1964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데뷔해 첫 타수에서 홈런을 기록했다. 그 해에 0.290/0.354/0.530 24홈런 52타점을 기록했다. 8월에 팔과 발 부상을 당해 111경기밖에 나가지 못했고 32홈런에 타율 0.323을 기록했던 미네소타 트윈스의 토니 올리바에게 신인왕을 넘겨줬다. 그래도 브라이스 하퍼가 2012년 데뷔해서 20홈런을 치기 전까지 유일한 10대 20홈런 기록 보유자였다. 지금은 후안 소토까지 총 3명이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쳐서 10대 최다 홈런 기록을 가지고 있다.[1]
1965년에는 32홈런으로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에 올랐다. 당시 아메리칸 리그 최연소 홈런왕이다.
1967년에는 올스타에도 나가고 아메리칸리그 최연소 100홈런의 기록도 세웠다.[2] 이때까지만 해도 워낙 어려서 데뷔했기에 부상 없이 페이스만 유지해도 500홈런과 명예의 전당은 무난해 보였다.
그해 8월 18일에 잭 해밀턴이 던진공에 왼쪽 광대뼈를 맞았고 이게 왼 눈의 시력저하로 이어졌다. 혐짤주의 맨위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야구 헬멧은 말 그대로 헬멧에 가까운 물건이라 귀와 광대뼈 쪽을 보호해줄 어떤 장치도 없었다. 그가 실려나가기까지 10여분간 펜웨이 파크는 적막이 흘렀다고 한다. 당시 선수들은 '''호박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고 회고했으며 약 90여미터에서 좌익수 수비를 보던 에인절스의 좌익수 릭 레이처트가 몸을 움찔거릴만큼 소리가 매우 컸다고 한다.
1년 넘게 쉬고 1969년 복귀해서 20홈런, 1970년 36홈런으로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살아나는 것처럼 보였지만[3] 줄어든 시야 탓에 선수생활에 어려움을 겪었고 1970년 11월,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트레이드 된 이후 1971년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났다. 이후 선수생활에 미련이 남았던 코니글리아로는 레드삭스 소속으로 1975년에 다시 복귀했지만 21게임을 뛰는데 그쳤고 완전히 은퇴했다. 500홈런은 가볍게 넘길 것 같았던 그의 홈런은 166개가 전부였다.
3. 은퇴 이후
1982년 레드삭스 중계 팀 합류를 위한 오디션을 보고 동생인 빌리와 함께 차를 타고 귀가하던 중 심장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이후 8년여간의 투병생활 끝에 1990년 2월 24일에 만 45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보스턴 레드삭스 측은 2007년 4월 4일에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포지션이 우익수였던걸 감안, 외야 오른쪽 관중석 일부(200석)를 "코니글리아로 코너"로 명명했다.
4. 토니 코니글리아로 상
그의 이름을 딴 토니 코니글리아로 상이 있다. 단순히 성적이 나아진 것을 넘어서 역경을 넘은 선수들에게 수상하기에 올해의 재기상과는 다르다.
[1] 그는 매우 끼가 넘쳐서 데뷔 시즌인 1964년 시즌 후에는 RCA와 25,000$에 계약해 음반도 냈었다고 한다. 또한 여자 꼬시는데도 타고났었다고.[2] 메이저리그 기록은 멜 오트[3] 여담으로 이 해에 자신의 어깨를 맞춘 투수와 난투극을 벌였었다. 그에게 몸쪽 공이 얼마나 큰 트라우마가 됐는지 알 수 있는 대목.[4] 이 골절로 인한 재활 도중 골절되었던 팔이 다시 골절되는 바람에 2000년에 26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다. 2005년에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다시 재도전했지만 결국 메이저리그에는 콜업되지 못하고 다시 은퇴.[5] 발이 골프 클럽처럼 구부러진 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