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의 수의

 

Shroud of Tu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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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에 보관 중인, 예수 그리스도의 수의라고 전하는 물건. 성의(聖衣)라고도 한다. 그 진위 여부를 놓고 지금까지도 논쟁 중이다.
1. 예수의 수의?
2. 논란의 시작
3. 가능성
4. 과학적인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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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의 수의?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아리마태아의 요셉본시오 빌라도에게 청하여 그 시체를 받아온 뒤 자신의 매장지로 미리 준비해둔 동굴 무덤에 안장했다고 한다. 보통 유태인들은 시신을 세마포로 둘둘 말아서 매장하기 때문에, 예수의 시신도 그렇게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흘 후에 여인들이 예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러 찾아가보니 동굴 무덤의 문은 활짝 열려있고 예수의 시신을 덮은 세마포만 접혀져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 주장하기로는 이 세마포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것이 바로 토리노의 수의라는 것.
예수 시대 이후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수의는 1353년 프랑스 리레이의 성당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수의가 어디서 어떻게 등장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수의의 소유권은 사보이 공국으로 넘어갔고, 사보이 공국이 수의를 1578년에 토리노의 대성당에 안치하여 수백 년 동안 그곳에서 보관 중이다.
수의에 묻은 혈흔을 유전자 검사한 결과 보통 사람이라면 46개여야 할 예수염색체가 23개고 혈액형AB형이라고 한다. 이는 본래 부모로부터 23개씩 물려받아 46개여야 할 염색체가 절반이니,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난 것이 확실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다. 매우 의도가 노골적인데다 상식적으로 허황되어 믿을 만한 주장은 아니다. 실제로 단성 생식을 하는 생물들도 당연히 세대가 지날 때마다 염색체가 절반으로 줄어들지는 않는다. 참고로 현실에 진짜로 염색체가 23개인 생물은 벼메뚜기가 있다. 물론 염색체가 많다고 고등 생물인 것은 아니다.

2. 논란의 시작


19세기에 이탈리아의 사진작가인 세쿤도 피아라는 사람이 "토리노 수의를 촬영하고 싶다"고 신청했고, 이에 허가를 받아 수의를 촬영했다. 겉보기에는 수의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으나, 수의를 네거티브 촬영하자 '''수의 안에서 놀라운 형상이 나타났다.''' 수염이 난 남성의 얼굴이 드러난 것이다.
이 때문에 토리노의 수의가 예수의 몸을 감싼 진짜 세마포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수의의 진위를 놓고 격론이 일기 시작했다.
교황청이 수의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극도로 제한한 탓에 명백한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으나 1988년 옥스퍼드 대학, 애리조나 대학, 스위스 연방 공과대학의 3개 대학이 공동으로 토리노 수의의 미세 샘플을 입수해 방사성 탄소동위 연대측정을 실시한 결과 수의의 옷감은 '''1260년부터 1390년 사이에 만들어진 직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이 결과는 수의가 가짜이며 중세에 만들어진 '''조작된''' 성유물이라는 데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찬성론자들은 이에 반발했다. 이들은 1973년 스위스 연방경찰 범죄과학반의 프라이 박사가 직물에서 채취한 꽃가루의 조사를 근거로 들었다. 이 꽃가루 조사에서 레바논삼을 포함한 58종의 꽃가루가 채취되었는데 이중 45종은 예루살렘 근처에만 자생하는 꽃가루였고, 6개는 중동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꽃가루였다. 찬성론자들은 "토리노 수의가 조작이라면 왜 사해 근처에서 자생하는 꽃가루가 묻을 수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또한 "1988년 연도조사는 수의 자체가 아니라, 수의를 수리하려고 기워놓은 중세의 천조각을 연도조사한 결과"라고 맞섰다.[1] 또 수의를 분석하면 십자가형의 상처자국으로 보이는 형상이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에 나 있는데, 중세 때는 십자가형이 손바닥에 못을 박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중세에 만들어진 위작이라면 당연히 상처자국이 손바닥에 나 있어야 옳은데 그렇지 않으므로 최소한 중세의 위작은 아니다"라는 말도 나왔다.

3. 가능성


그러나 찬성론자들의 주장은 빈약해보인다. 프라이 박사의 조사결과는 엄밀하게 말하면 수의의 직물이 '''이스라엘 쪽에 있었을''' 가능성은 증명했지만 꽃가루의 연대를 밝힌 것은 아니다. 1200년대는 십자군 전쟁의 막바지로서, 이 무렵은 '예루살렘 산'의 성유물은 굉장히 많이 만들어지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성지순례자들은 너도 나도 성유물을 가지고 싶어했고 예수가 활동했던 지역이니 성유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1000년 전의 유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리가 없으니, 온갖 사기와 날조가 벌어졌던 때이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예수 시대부터 토리노 수의가 처음 등장한 1353년 사이 수의의 행방이 명확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일부에서는 4세기 시리아 사본에 에뎃사왕이 이 수의를 만지고 한센병이 나았으며, 4세기 이후로 예수를 수염이 난 것으로 묘사한 것이 수의가 진짜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뎃사왕의 사례는 역사적으로 교차검증이 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19세기에 '''네거티브 촬영으로 드러난 형상을''' 4세기에 어떻게 알아보았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힘들다.
더 재미있는 점은 토리노 수의를 토리노 대성당으로 옮겨오던 시기와 비슷한 무렵에 재위했던 교황 클레멘스 7세(1523~1534 재위)는 이 수의를 '''성유물이 아니며 물감으로 그려낸 그림'''이라고 규정했다는 점이다. 클레멘스 7세가 보기에 토리노 수의는 신빙성이 의심스러웠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클레멘스 7세는 토리노 대성당 측에 수의를 전시하는 것은 허락하되 수의 앞에 촛불을 켜지 않고 향을 피우지 않는다는 엄격한 조건을 내걸었다. 이는 적어도 클레멘스 7세 시대에는 '''토리노 수의는 성유물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클레멘스 7세의 판단과는 별개로 현재 가톨릭은 토리노 수의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더 진행하고 있지 않다. 가톨릭의 공식적인 입장은 '누구나 그 천이 예수의 몸을 감았던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며 수의는 '''진위와 상관없이 신앙을 위한 중요한 도구'''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지금도 토리노 수의를 친견하러 신자들이 많이 방문하는 형편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는 여러 방법으로 가짜 수의를 만들어가며(..) 토리노의 수의가 실제 예수의 몸을 쌌던 천이 아니라 돋을새김 조각에 대고 찍어 만든[2] 이콘과 같은 '성물' 일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성유물이 아니라 묵주성상 혹은 이콘과 같은 '성물'이라면 가톨릭에서 신앙을 위한 도구라고 규정한 것이 납득이 간다.
2015년 6월 21일, 성 요한 보스코 탄생 200주년을 맞아 이틀 일정으로 이탈리아 토리노를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는 성 요한 세례자 대성당에 보관된 수의를 보고 기도를 올렸다.
명동성당에서도 전시한다.

4. 과학적인 접근


이탈리아 법의학자 마테오 보리니와 파비아대학의 화학자 루이지 가를라스켈리 박사 등이 법의학적 기법을 사용해 토리노 예수 성의(聖衣) 속 핏자국의 형성 과정을 재구성한 결과, 수의 속 핏자국이 가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연구팀은 성의 속 얼룩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모양과 재질의 십자가를 준비한 뒤 해당 십자가에 T자형, Y자형 등 다양한 형태로 못박힌 인체 모형이 피를 흘리는 양상을 시뮬레이션하는 수법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은 그 결과 토리노 성의 속 핏자국의 절반가량은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죽은 뒤 시신을 감쌀 경우 형성될 수 있는 얼룩의 위치와 도저히 연관지을 수 없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수의 속 몸통 부분과 팔뚝 부분의 핏자국은 팔을 45도 각도로 높이 든 채 못박힌 사람이 흘렸을 법한 혈흔과 일치하지만, 수의 속 손목과 요추 자리의 핏자국은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사망 후 시신을 감싼 어느 경우에도 형성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그러면서 "토리노 수의 속의 핏자국과 같은 양식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서서 피를 흘렸거나, 손가락 등을 사용해 인위적으로 일부 자국을 만들어낸 것으로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1] 수의를 보관하고 있던 성당에 화재가 발생하여 약간의 피해를 입었고, 이에 수리한 적이 있다.[2] 동전을 종이 위에 놓고 색을 칠하면 동전의 모양이 찍히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