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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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1b> '''포르투갈 공화국의 총리'''
'''본명'''
안토니우 드올리베이라 살라자르[1]
(António de Oliveira Salazar)
'''출생'''
1889년 4월 28일, 포르투갈 왕국 산타콩바당
'''사망'''
1970년 7월 27일(향년 81세), 포르투갈 공화국 리스본
'''학력'''
코임브라 대학 박사
'''신체'''
187cm
'''국적'''
포르투갈 [image]
'''배우자'''
없음(독신)
'''정당'''
포르투갈 가톨릭 중앙당[2](-1930년)
국민연합(1930년-)
'''재임기간'''
총리: 1932년 7월 5일 ~ 1968년 9월 25일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집권
3. 정책
3.1. 우민 저개발 독재
3.2. 반공, 반파시즘
3.3. 외교 정책
4. 사망
5. 평가
6. 기타
7.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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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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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제2공화국독재자.
처음에는 가톨릭 신학대학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나, 마음을 바꾸어 코임브라 대학에서 법학을 배우고 1916년 동 대학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1926년 장군 카르모나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재무장관으로 기용된 후 1932년 총리가 되었고[3], 국민연합을 조직하여 일당독재를 추진하였다. <Estado Novo(이스타두 노부, 새로운 국가)> 운동을 <Deus, Pátria e Familia(하느님, 조국, 그리고 가족)>이란 슬로건으로 진행했다.

2. 집권


경제학 교수라는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적인 독재자와는 달리 경제학자 출신으로 군사정권의 재무장관이 된 인물이었다. 재임기간 동안 세계 대공황의 파도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포르투갈의 경제를 되살리면서 엄청난 명성을 얻었고, 드높아지는 권세 앞에 1930년대 후반 쯤 되면 군사정권의 실력자들조차 꼭두각시로 전락, 사실상 포르투갈을 한손에 쥐었다.

3. 정책



3.1. 우민 저개발 독재


자신의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통치를 했으며 3F 정책이라 불리는 우민화 정책을 펼쳤다.[4]
게다가 경제학 교수라는 이력과 어울리지 않게 산업화근대화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 포르투갈의 경제 발전을 가로막았다. 20세기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낭만적 목가주의자의 감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을 제조업 중심의 강력한 패권국가로 만드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근대산업혁명의 광풍으로부터 벗어난 안전한 농촌국가로 만드는 것을 추구하였다. 그것이 30여 년 장기 집권의 비결이었다.
산업화와 근대화, 특히 20세기 초반 포르투갈 같은 남유럽 국가들이 초기 단계에서는 자본가들에겐 국가, 교회, 군대 등 기존 사회의 권위구조를 형성하는 집단에서 벗어나 부를 축적할 기회를 주고, 대중은 반면 산업화 과정에서 전통 사회의 해체로 인해 갑자기 구조적 생계 불안정에 시달리며 도시로 몰려든 실업 예비군을 양산한다. 이런 근대 자본주의적 성장이 그나마 제대로 이루어지면 이건 나름대로 국민들이 정부에 경제적으로 의존할 이유가 없게 되고, 반대로 불균형한 분배와 과도한 양극화,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 갈등을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노조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성향의 급진 반체제 세력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혁명을 주장하게 된다. 적어도 살라자르 같은 20세기 초반 유럽 대륙식 초보수주의자, 가톨릭 교권주의자의 관점에서 약간 과장 섞어 말하자면 잘되면 국민들이 '근본없는' 자유주의 성향의 국민이 아닌 소비자들이 되버리고, 잘못되면 소위 빨갱이가 되는게 산업화와 도시화였다.[5] 이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대부분 국가들은 전쟁과 주변국의 위협이란 현실에서 새로운 총력전이란 극단적인 형태의 전쟁의 근간이 되는 과학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이란 과제를 피할수 없었기 때문에 산업화,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그 이행 과정에선 극심한 불안정을 야기한다는걸 뻔히 알면서도 추진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20세기 초중반의 시점에서 포르투갈은 총력전의 경험, 상호불신, 무한 군비경쟁이란 현실에 처했던 나머지 유럽 국가들과 입지가 확연히 달랐다. 여전히 펄펄하며 탐욕스런 혈기가 왕성했던 현역 대영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신흥 일본 제국이나 미국과 패권경쟁할 열강으로서의 국력은 사라진 지 한창이었고[6], 남아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모잠비크와 앙골라, 기니비사우 같은 식민지들 또한 포르투갈이 통치한지 적어도 400, 500년된 땅들이라 집적거릴 명분이 없었다.[7] 육로로 처들어올 만한 적은 스페인 밖에 없는데, 그 스페인은 당장 자국부터가 처참하게 실패한 식민지 개발시도와[8] 이념분쟁, 정치적 불안정으로 휘청거리다 내전으로 꼬구라져 있는 상태였다. 바다로는 전통적인 우방 영국이 지켜주며, 당시만해도 아직 식민지인들이 '감히'(?!) 직접 무기잡고 제국주의 상전들을 몰아낼 거란 발상은 잘 안 들었던 시절이다.
정적들에게조차 당대 최고의 교육 수준과 학식을 인정받은 살라자르 '''교수님'''은 보다 일찍 계급, 이념 대립을 경험했던 나머지 서유럽, 자국의 현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이란 파국으로 끝난 옆나라의 사례를 주도면밀하게 알고 있었고, 상술한 포르투갈이 예외적으로 느긋할 수 있었던 국제 지정학적 현실은 20세기 왠만한 나라는 결행할 현실도, 발상도 잘 못했던 '''산업화 포기, 농촌 목가 경제 위주의 사회적 안정을 택했다.''' 특히 당시나 지금이나 이베리아 반도는 비교적 늦고 지역적으로 불균등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대량의 국내 도시 이주민들이 발생했고, 이런 알렌테주, 알가르브,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같은 지방에서 리스보아, 포르투, 바르셀로나 등 산업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노조와 라틴 문화권 특유의 도시 동네 (bairro/barrio) 문화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아예 직접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조직적인 국민국가 자체를 배격하는 아나키즘 성향으로 빠지기 쉬웠다.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른 인민 전선 정책 이후 적어도 1930년대 넘어서는 나름 필요에 따라선 기존의 소위 '반동 부르주아' 정당들과도 교섭하고 공존할 처세술에 적응한 각국 공산당들과 달리 바로 옆동네만 하더라도 정규 조직원 백만, 방계조직 백오십만 운운하며 정당 정치인들이 뭘 하던 총폭탄, 총파업, 프로파간다, 대안 사회 인프라 운영 등을 통해 CNT 계열 아나키스트 급진 좌파들이 성장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본 살라자르 입장에선 메리트는 딱히 없으면서 온갖 정치, 사회적 불안정 요소는 다 가지고올게 뻔했던 산업화와 이를 수반한 도시화를 추구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바로 그 먹물중 먹물인 문과 교수님 살라자르는 먹물들이 많아지면 정권 유지가 힘들다면서''' 노골적인 우민화 정책을 실시했다. 옆나라 프랑코만 해도 지식인, 문화인사 가리지 않고 잘만 신나게 공식적, 비공식적 사형을 남발했지만 살라자르는 나라의 절반을 작살낸 내전을 통해 집권한 것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포르투갈의 핵심적인 전통적 동맹이자 비호 열강이면서도 자유주의 국가였던 영국의 눈치를 봐야 했다. 지식인들을 노골적으로 처형하면 이웃나라처럼 안좋은 국제적 주목만 끌걸 뻔히 알고, 비폭력적 수단을 선호했던 살라자르는 이런 골치아픈 반체제 지식인 계급의 성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한 것이다. 다만 초등교육은 보편화시켰는데 글을 쓰거나 기본적인 셈은 할 줄 알아야 제대로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7-14세 아동의 문해율은 1930년에 33%였던 것이 살라자르 통치 하에서는 1940년 56%, 1960년에는 97%를 달성했다.[9] 하지만 중등교육이나 고등 교육에 대해서는 냉담했다.[10]
본국의 교육사정이 이러하니 당연히 식민지에서의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어서 앙골라는 '''전체 인구의 98% 가량'''이 문맹이었고 모잠비크도 마찬가지로 문맹률이 90% 이상이었다. 또 내수 산업 개발보다는 해외 식민지 경영에 집중해 포르투갈의 산업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비록 2차 대전 당시 전 유럽이 쑥대밭이 되어가는 와중에 중립을 지키면서 추축국연합국 모두에 군수물자를 수출하면서 어느 정도의 경제 발전을 이루는 듯 했으나, 2차 대전 이후 탈식민화의 바람이 불어 많은 식민지 국가들이 식민통치에서 벗어날 때, 포르투갈은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은 영구한 포르투갈 영토라는 논리 하에 해외 식민지에 집착하여 오랫동안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을 벌였고, 이는 국가 재정과 경제 전체에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11]
더딘 산업화로 인해 6, 70년대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전후 호황을 누리고 있던 다른 유럽 국가들로 유출되었으며, 덕분에 포르투갈의 최대 수출품은 '''포르투갈인'''이라는 말까지 나왔다.[12] 대항해시대에 신이 포르투갈인들에게 요람으로 작은 포르투갈을 주고, 무덤으로 세계를 주었다는 말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3.2. 반공, 반파시즘


살라자르 정권은 우파 반공 가톨릭 교권주의 독재체제였지만 살라자르 본인은 파시즘의 열광적 대중동원이나 대외적 팽창주의를 혐오하며 안빈낙도(...)를 추구했다. 가톨릭교회를 통한 사회 통제란 면에선 부분적으로 전체주의적인 면도 있었고, 스페인 내전때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 동지였던 프랑코 진영으로 만명 규모의 고대 루시타니아의 반로마 지도자의 이름을 딴 비리아투스 군단 의용병을 파병하기도 했다. 프란시스쿠 홀랑 프레투가 이끌던 포르투갈 파시즘 운동과도 한동안 제휴했으나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깔끔하게 권력의 중심에서 내쳐버렸다.
일종의 우민화 정책과도 유사하게 연결되는데 살라자르 본인은 국민들이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나 정치 운동의 영향을 받는것 자체를 원치 않았다. 따라서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흔했던 거대한 대중동원과 정부-파시스트 정당 체제 일치는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나치의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는 살라자르 개인이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공개적으로 혐오하는 입장이었고 포르투갈은 2차대전때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지켰지만 거의 백만에 가까운 유럽 유대인들이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 등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하했다. 대전 중반에는 확실히 연합국 쪽으로 기울어진 행보를 보였다.

3.3. 외교 정책


독재 체제임에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 측에 호의적이었고 아소르스 제도 등의 군사기지를 영국미국에 제공하기도 했다. 2차 대전 이후에는 냉전기 미국,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해 나가면서 OECD, NATO 등 국제기구 창설에도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바로 옆의 스페인이 내전의 기억을 통해 전후 유럽 외교가에서 동서방을 초월한 천민으로 추락하고, UN을 비롯한 각종 국제 기구도 '파시스트와 야합하는 서방'에 대한 동구권의 가열찬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유럽 동맹국들을 겨우 겨우 어르면서 참여시키는 등[13] 악명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을 겪은 것과 대조적이다.

4. 사망


말년인 1968년에는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누워 있던 해먹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뇌출혈로 쓰러졌다. 당시 포르투갈의 대통령직은 의례적인 존재일 뿐이었고 그가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 다른 정치가들의 모략으로 총리직에서 해임,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살라자르는 몇 달 뒤 의식을 되찾았으나 이미 권력을 잃고 완전히 무력한 존재가 된 다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측근들은 건강이 나빠진 살라자르가 이 사실에 충격을 받기를 바라지 않았고, 조작된 신문과 가짜 서류들을 바쳐서 여전히 살라자르가 권력을 잡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살라자르는 마지막까지 진실을 모른 채 아무 의미도 없는 명령서에 사인이나 하면서 살다가 얼마 가지 못하고 사저의 침대에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시신은 고향인 산타콩바당의 묘기에 묻힌다.
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살라자르가 결혼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가족도 없었으며, 사저에만 틀어박힌 채 기자회견도 안 하고 해외순방도 안 한 덕에 가능했던 것. 의식을 회복한 뒤로 총리로서의 대외활동은 있었지만 (국내 지역 방문 등) 당연히 모두 사전에 조율되어 있는 연극이었다. 아무리 살라자르가 포르투갈의 근대화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보여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포르투갈에서 라디오 방송이 1935년에 시작되었고 TV방송이 시작되었을 때가 1956년도이고 살라자르가 권력을 상실했을 무렵에는 TV가 부유층이나 중산층들을 대상으로 어느 정도 보급되었을 시점이었는데, 이러한 간단한 사실도 모르고 있던 것을 보면 그가 평소에 굉장히 폐쇄적인 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잘 나가는 선진국들이 어떤 정책을 펼치고 어떻게 국가를 이끌었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공부조차 안 했던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를 40년간 시중들었던 가정부는 의식 회복 이후 그에게 건강이 나쁘다며 총리직을 사임할 것을 부탁했지만 자신 외에 포르투갈을 이끌 사람은 없다며 죽을 때까지 사임을 거부했다고.[14]출처. 다만 이와 별개로 그의 장례식때는 수만명이 와서 애도했다.
그가 죽은 뒤 1974년 일어난 카네이션 혁명으로 포르투갈은 결국 식민지였던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상투메 프린시페의 독립을 승인하는 등 그때까지 보유하고 있던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중국 정부가 반환을 미룬 마카오만 제외하고 모조리 포기한다.
살라자르 사후 포르투갈의 민주화는 젊은 장교들이 주축이 된 군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살라자르 생전에 열악한 경제상황 때문에 장교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자 그 해법으로 젊은 장교들에게 부르주아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라고 권한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귀결인 듯.

5. 평가


파시즘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독재자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고도 살아 남았다는 점에서 이웃나라 스페인프란시스코 프랑코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프랑코와 살라자르는 꽤 친했다고 한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 살라자르가 프랑코를 지지했던 것도 있고, 내전이 끝나고 2차대전이 벌어지자마자 추축국 편을 드는 듯 안 드는 듯 간보는 프랑코와 마찬가지로 중립을 고수하였으며 중남미의 콘도르 작전을 지원해 망명 온 중남미인들을 송환시켰던 것도...
그러나 내전기와 내전 이후에도 자국민 수십 만명을 처형하였으며 탈출한 사람들을 체포하여 처형시켜 탈출을 법으로 금지하고 연좌제를 시행하는 등 스페인 전역을 피로 물들인 프랑코와는 달리, 살라자르의 독재정은 권위주의적이고 고압적이긴 했지만 프랑코에 비해 온건했다. 실제로 반 살라자르 야권의 거두였던 포르투갈 공산당 당수 알바루 쿠냘만 하더라도 콩밥은 오래 먹었지만 사형은 당하지 않았고[15], 한때 손을 잡았지만 사이가 틀어진 프란시스쿠 홀랑 프레투는 국외추방되었지만 파시즘 사상을 버리는 조건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2차대전 이후에는 해빙 무드를 타 비록 손발은 꽁꽁 묶어 두었지만 제대로 된 야당의 형성 또한 몇 년간 허가한 적이 있다. 물론 몇 년 뒤에 다시 금지했지만. 스페인은 실제로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사형을 프랑코 정권 말엽까지 지속했지만, 포르투갈의 경우 대대적으로 처형하지는 않았다.
스페인의 프랑코 같은 강력한 억압 통치를 한 것도 아니면서 반세기 가까이 장기 집권을 해온 것, 그리고 미국의 지지 등도 어느 정도의 광범위한 지지기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심지어 2007년 포르투갈 국영방송사 RTP가 시행한 '''위대한 포르투갈인''' 설문조사에서 항해왕자 엔히크, 바르톨로뮤 디아스, 바스쿠 다 가마대항해시대를 연 세계사적 위인들이 포함된 20명의 최종 후보들 중 41%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을 정도.[16] 그리고 이 때 2등을 한 인물은 살라자르 정권 내내 반정부 인사 중 최대 거물이었던 포르투갈 공산당 당수 알바루 쿠냘이었다. 그리고 라이벌 민간 방송사 SIC의 '''최악의 포르투갈인''' 설문조사에서도 여전히 둘은 사이좋게 나란히 1, 2위를 차지한다(...). 살라자르 정권에서 수혜자였던 가톨릭 교회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경제 문제로 프랑코를 살라자르보다 고평가하는 일각의 의견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엉망이던 시절이라도 나름 열강으로 인정해 줬고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도 상당했기에 2류 국가라는 비아냥은 들어도 실제 국력은 그렇지 않았던 스페인과 달리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가 끝나자마자 진짜 3류 국가, 후진국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스페인은 바스크 지방의 조선업아스투리아스의 철광업, 바르셀로나금융업은 그 스페인이 삼류 국가 소리 듣던 20세기 초반에도 유럽에서 알아 주었을 정도였다. 스페인은 원래 잠재력은 충분했는데 정치적인 문제로 워낙 늦게, 그리고 급격하게 발휘된 것이다. 오히려 장기적인 성장률은 1차 산업으로 살라자르 치하 포르투갈이 프랑코의 스페인보다는 그나마 나았다.
그러나 살라자르의 경제정책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어서 워낙 1, 3차 산업에 치중하다 보니까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물론 살라자르도 바보는 아니니 철강, 기계 제조업 분야에서 기업들을 육성하긴 했지만, 상당수가 국영기업이었던 이 기업들이 1980년대 민영화되면서 상당수 외국계 다국적 회사에 팔려나갔고, 오래 지나지 않아 글로벌 생산 차원에서 비중이 미미하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포르투갈 내 생산시설을 폐쇄하면서 제조업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게 유로화 사태 당시 포르투갈에 치명타를 입혔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 비해서도 회복이 지지부진한 결과를 낳았으니 틀린 주장은 아니다. 다만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회복되기는 해서, 청년실업률에서나 경제적인 수치에서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그리스보다는 사정이 훨씬 낫기는 하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스의 청년실업률이 30-50%대를 넘나들 때 포르투갈은 프랑스와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이고 급기야 1980년대 이후 재정적자가 가장 적을 정도라서 브라질이나 앙골라가 원자재값 하락으로 다시 침체에 빠지면서 빠져나갔던 인재들이 되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다만 포르투갈의 청년실업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건 일자리 구하기가 힘든 국내보다는 같은 유럽연합 안에서 일자리가 있는 영국, 독일, 룩셈부르크 등지나, 말도 통하고 한참 고도성장 중인 과거 식민지인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등지의 해외로 나간 결과다보니 실제 경제 상황과는 괴리가 있다. 고급인력이 부족한[17] 앙골라 같은 곳으로의 이주민은 불과 10년 전 몇백 명 수준이었던 게 최근에는 만 단위를 넘고 있는 상황일 정도.
동시대의 다른 독재자들에 비해선 여러모로 온건했지만, 엄연한 독재자였던만큼 포르투갈 현지의 옹호자들처럼 일방적인 고평가도 곤란하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18]페드루 코스타용암의 집, 행진하는 청춘, 호스 머니를 보면 그 시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프랑코 수준으로 반대세력을 당장 공개처형하지 않아도 인생 조지는 방법은 참 다양했다는 걸 알 수 있다.[19] 다만 옆동네 프랑코가 하도 피비린내 나게 굴어서(...) 주목을 덜 받는 것뿐이다. 오늘날 포르투갈이 겪고 있는 개고생의 대부분은 이 사람이 뿌려놓은 씨앗에서 시작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소위 '지도상으로만 서유럽이지 사회 인프라, 경제 발전은 동유럽' 소리 듣는 이베리아 반도의 현재를 초래했다는 점에서는 프랑코와 별반 차이 없다. 다만 굳이 좋게 평가한다면 프랑코 정권에 비하면 그나마 확실하게 폭력적인 탄압은 하지 않아서 장기적인 국론 분열의 정도는 덜했으며, 근현대 정치사상 몇 안되는 군사 정권의 힘으로 집권해 오히려 그 국가의 강제력을 총괄하는 군인들을 팽하며 민간 독재를 형성했을 만큼 개인적인 정치적 수완은 뛰어났다는 점이다.

6. 기타


  • 결벽증적인 검약을 실천했던 독재자로 알려져 있다. 재무장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고 권력을 잡게된 계기가 바로 혹독한 긴축재정으로 통화를 안정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킨 것이었는데 그 영향인지 독재자가 된 이후에도 재정지출 억제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이는 본인과 관련된 지출에도 적용되었는데 사저만 해도 방 세개 짜리에 불과했고 관리인, 가정부 둘만 두거나 직접 석탄을 나르고 땠다거나(..) 하는 일화가 있다.
  • 재무장관 시절에는 뇌물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로 호주머니를 모두 꿰맨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 위에서 말한대로 굉장히 폐쇄적인 성격이었는데 집에 있는것을 좋아했고 사저 밖으로는 반드시 나가야 하는 일이 있을때를 제외하고는 집밖으로 나가는것을 매우 싫어했다. 일처리도 사저에서 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외국순방이나 기자회견 등 대중에 노출되는 행사를 극도로 싫어했다. 해외 식민지에 집착했으면서도 정작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 형식적으로나마 의회를 유지하고 공화정인 척 하는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리 '애들이나 마찬가지인 포르투갈인들에게 그런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라며 대놓고 의회정치를 디스했다.
  • 의외로 대통령 직접 선거가 1950년까지도 유지되었는데 국민투표로 당선된 (그러나 명목뿐이고 인기도 실권도 없는) 대통령이 살라자르를 총리로 계속 지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심복이었던 델가도 장군이 194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자 바로 간선제로 바꾸어 버렸다 (..)

7. 대중매체


한때 포르투갈에 살았던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J. K. 롤링은 이 사람의 성을 따서 "악명높은 기숙사" 슬리데린의 창립자 살라자르 슬리데린만들었다.
캡콤의 바이오하자드 4에 등장하는 라몬 살라자르의 이름이 그의 이름에서 따왔을 것이라 추측된다. 독재자/사이코 영주 기믹이라는 것과 라틴 계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게 공통점.
안토니오 타부키의 페레이라가 주장하다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Centro Católico Português[3] 뇌출혈로 쓰러질 때까지 실권을 가진 총리였다. 대통령들은 살라자르의 바지사장이었을 뿐.[4] 축구(Futebol), 종교(가톨릭, Fatima), 파두(Fado -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민속 음악).[5] 자본가들도, 공산주의자들도 전부 유대인이랍시고 거품물던 전간기 유럽의 파시스트들과 여전히 18세기적 전근대 사회로 복귀를 추구하던 초보수주의자들은 상당한 부분에서 시각을 공유했다. 보수혁명론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이렇기 때문에 파시즘을 다루는 학술 서적 등에선 의례적으로 나치 독일, 파쇼 이탈리아의 사례 이후 스페인프랑코 정권과 함께 부록으로 살라자르 정권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 무솔리니 같은 파시스트들과는 달리 살라자르는 기존 식민지의 유지를 넘은 군국주의, 팽창주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나름 뒤틀린 의미에서 과학기술이 상징하는 근대성을 긍정하며 개발주의를 추진하지도 않았으며, 가톨릭 정체성을 강조한 것 이상으론 전체주의적 대중동원을 오히려 혐오했고, 심지어 늘 따라다니는 프랑코와 비교해서도 정권의 폭력성이나 억압성이 확연하게 차이났다. 그래서 '파시즘 아닌 그냥 권위주의적 우파 군사독재자다' vs '정권의 차원에선 학술적으로 파시즘 맞다'고 의견 대립이 팽팽한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의 평가와 달리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포르투갈 제2공화국은 '''확실히 파시즘은 아닌 단순한 권위주의 우파 독재였다는게 학계의 통설이다.'''[6] 19세기 후반 앙골라, 모잠비크에 있었던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를 육로로 연결하려고 한번 시도했으나 남아프리카 일대에 막대한 관심을 가졌던 전통적인 우방 영국의 견제로 깨갱한 이후 포르투갈 식민제국은 열강의 식민지 확장 경쟁에서 실질적으로 탈락했다.[7] 또 포르투갈이 자체적인 국력은 쇠퇴했어도 유럽 내 각종 분쟁에서 유력한 우방국이 될수 있는 나라이긴 했다.[8] 스페인령 모로코는 사실 자체적으론 20년대 아누알 전투에서 장성급 사망자를 비롯해 아틀라스 산맥 근처 베르베르 유목민들 상대로 5천명 가량 손실하는 대패를 겪다가 이러다간 프랑스령 모로코도 위험하겠다 우려한 프랑스가 직접개입하여 무능한 스페인군의 엉덩이를 질질 끌며 겨우 '승리'를 떠먹여주면서 설립되었다. 이 시절 스페인군이 북아프리카에서 겪은 수모와 민간 사회, 언론에게 받은 손가락질, 그리고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복수의식은 군의 우경화와 훗날 스페인 내전 발발에 큰 영향을 끼쳤다[9] 출처 : Candeias, António; Simoes, Eduarda (1999). "Alfabetização e escola em Portugal no século XX: Censos Nacionais e estudos de caso". Análise Psicológica[10] 다만 1960년대 들어서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에 대학교도 세워주는 등 어느 정도 완화시켰다.[11] 그래도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는 포르투갈군이 백인지배 체제 유지를 노리던 인접국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디지아의 지원을 받으며 전선에서 독립군 세력들을 몰아내는 등 승전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남아공, 로디지아와 붙어있지 않았던 기니비사우에서는 남아공조차도 자국과 이해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포르투갈을 도와주지 않아 현지 독립군 세력들이 수도 비사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니비사우 영토들을 점령하며 전선에서 우위를 차지했다.[12] 그리고 현재도 이러한 경향은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단지 다른 유럽 국가들도 독일이나 영국 등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면 경기가 침체되어 있다보니 이민 대상이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등 빠르게 발전하는 옛 식민지로 바뀐 정도다. 카네이션 혁명 직후 앙골라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상투메 프린시페 등이 독립했을 때 그 곳에 이미 살고 있던 포르투갈인들이 대거 본토로 돌아오면서 헬게이트가 열렸고 이들을 본토에서조차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바람에 달동네마냥 귀환자들로 구성된 빈민촌이 생긴 적도 있었다.(출처: 이원복 교수의 진짜 유럽이야기) 그래도 독립 이후의 앙골라와 모잠비크는 독립의 기쁨을 만끽할 여유도 없이 다시 전쟁상태에 돌입하는 바람에 안정화 된 것이 2000년대 와서였고 브라질은 외채난과 초인플레이션으로 한 동안 고통을 겪었던 헬게이트 시절을 보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나마 포르투갈이 사정이 나았기 때문에 돈이 없더라도 포르투갈에 있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기는 했다. 나중에 포르투갈의 경제가 급속히 어려워지면서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이나 앙골라, 모잠비크로 다시 재이주했지만 2015년 이후로 상황이 다시금 역전되면서 포르투갈인들이 차츰차츰 되돌아오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경제위기 이후 다시 그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단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아이러니의 반복이 따로 없는 셈. 이 빈민촌 중 폰타야나스는 페드루 코스타의 영화들에서 자세히 다뤄진다. 폰타야나스는 2000년대 이후 철거되었다.[13] 그나마 나토는 프랑코가 살아있는한 끼워주지도 못하다가 프랑코가 사망하고,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집권한 직후인 1982년에야 가입했다.[14] 이 부분은 2017년 12월 31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15] 포르투갈은 1867년부터 사형제도를 폐지한 상태였다. 1차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군법에 한해 사형을 부활시켰지만 일반 범죄에 대한 사형제 폐지는 그대로 유지했고 독재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완전 폐지는 1976년) 반면 비슷한 시기 스페인 공산당의 당수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프랑코를 피해서 소련에 망명해 있었다.[16] 이를 두고 조작 논란이 일었다. 이로 인해 RTP 이미지가 나빠졌다.[17] 앙골라 같은 경우 식민지 시절부터 포르투갈 본토보다 나았던 적도 있었지만 독립 직후 오랜 내전과 쿠데타로 인해 각종 산업시설들과 현지 자체 인력들이 거진 갈려나간 적이 있었다. 물론 앙골라도 독립 직후 백인이라면 이유 불문하고 반강제적으로 추방한 것도 크다.[18] 영화로도 만들어졌다.[19] 일례로 마노엘 드올리베이라는 살라자르 때문에 그나마 움트려고 하던 경력이 단절될 뻔했다. 당시 포르투갈 뉴웨이브 감독들이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는 말 안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