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S 정책

 

'''역대 정부의 주요 정책'''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
'''3S 정책'''
범죄와의 전쟁
북방정책
1. 개요
2. 내용
3. 평가
3.1. 옹호
3.2. 비판
4.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
5. 이야깃거리
6. 관련 문서
7. 관련 문헌


1. 개요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집권하던 시절, 즉 제5공화국 때 시행되었다고 주장하는 우민화 정책을 빗댄 표현으로 많이 쓰이는 단어.
원래는 미국의 일본 점령기 당시 일본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탈피를 위해 GHQ가 의도적으로 실시한 정책에서 유래했다.
3S는 S로 시작하는 세 단어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고, '''삼에스 정책''' 또는 '''쓰리에스 정책'''이라고 읽는다.
사실 독재정권이 정치적인 이유로 스포츠를 장려했던것은 매우 흔한일이다. 비단 올림픽을 체제선전용으로 활용했던 나치 독일이나 월드컵을 체제선전용으로 써먹었던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프랑코 치하의 스페인뿐 아니라, 중남미에서 독재정권이 축구리그나 야구리그를 활성화시켜서 사람들의 눈을 돌리게 만든다거나 하는일이 비일비재했다. 공산정권 시절의 동유럽에서 아예 트레이닝 시스템을 선진화, 체계화시켜서 애초부터 인구 세계3위를 차지했던 소련이나 나름대로 인구수가 많았던 폴란드뿐만 아니라 당대 기준으로도 인구가 많은 나라로 분류되지 않았던 동독, 헝가리,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이 줄줄히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하는 모습을 보였다.[1] 따지고 보면 5공화국도 이러한 사례를 참고해서 이러한 기조에 발을 맞춘 것었다.
정통성 없이 집권한 5공이 전임 정부의 여러 제한을 풀고 정부 차원에서 3S정책을 장려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취한 대표적인 조치 중 하나가 컬러 방송 시행이었고,[2][3] 이외에도 두발자유화교복 폐지 등 당시로선 상당히 획기적인 조치들도 여럿 시행되었다.[4] 물론 정치적 검열을 완화시키는 일은 없어서 만화 검열제나 노래 검열은 이때에도 잔존했고, 방송계나 출판계, 문학계에서도 검열이 여전히 진행되었으며 특정한 이유로 방송출연이 금지되거나 한수산 필화사건처럼 소설이나 시를 썼다가 고문당하는 사건들도 당연히 있었다.[5]
이 때 어떤 식으로 검열이 진행되었는가 하면 대머리주걱턱을 개그 소재로 삼는 것이 금지되었으며,[6] 순자라는 여자 이름을 가진 배역이 비천하거나 웃기는 역할을 하는 것도 안 되는 식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김성환고바우 영감김수정의 아담과 이브가 대머리를 묘사했다는 이유로 연재가 중단되었던 적이 있으며, 탤런트 박용식이 전두환과 외모가 흡사하다는 이유로 출연금지를 당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7] 그리고 노동문제를 다루는 것도 어김없이 검열대상이었다.
그리고 당시 뉴스 프로그램과 신문들도 평일 메인뉴스의 경우에는 전두환과 이순자의 동정소식을 맨 앞에 다루는 것이 당연시 되었으며 신문들도 보도지침이란 명분 하에 검열당해야 했다. 당연히 시사 프로그램들도 국내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소재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이나 사회 문제를 정부에 불리한 쪽이거나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도 암묵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래서 당시 MBC 리포트나 레이다 11, 추적 60분같은 시사프로그램들을 보면 사회 비판적인 내용은 있기는 하지만 전두환 정권에 비판적인 내용은 일절 찾아볼수 없거나 찾아보기 힘들다. 노태우 정권기의 뉴스비전 동서남북, MBC 리포트와는 비교해보면 내용면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

2. 내용


1981년 영화 상영의 규제에 대한 검열이 과거보다 파격적으로 완화되었으며, 이에 따른 무분별한 저예산 에로영화가 영화관에서 집중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도색영화 범람의 물꼬를 튼 것은 그 유명한 애마부인(1982년 2월)으로, 82년 극장개봉작 56편 중 무려 35편이 에로 영화였다.[8] 아래의 세번째 S와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컬러 TV가 이 때 들어오기 시작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제5공화국의 정당성을 세계적으로 입증하기 위하여 1981년 10월 19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 모든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시기에 국가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논리로 모든 반독재민주화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9] 그리고 정권이 주도해서 1982년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 슈퍼리그, 민속씨름 같은 프로스포츠를 급조했다.[10] 세미프로리그였던 농구대잔치도 1983년에 출범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11]
1982년 1월 5일 야간통행금지가 폐지되어 그에 따른 여러가지 성 관련 산업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술집, 모텔, 유흥업소, 성매매 업소 같은 산업. 상술한 도색영화의 범람도 이 S의 범주에서 다룰 수 있다. 더불어 유흥가의 급팽창으로 기생충처럼 따라붙는 조폭도 엄청나게 성장한다. 지금도 회자되는 3대 조직폭력배 OB 동재파(이동재), 양은이파(조양은), 서방파(김태촌)가 이 시절 이야기다.[12] 또한 애마부인 시리즈를 시작으로 에로영화가 범람하게 만들었다. 다만 에로까지만 인정하고 포르노 합법화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두환 정권이 끝난 이후인 1992년에도 마광수 교수가 소설 '즐거운 사라'를 발표했다가 음란물이란 이유로 검찰에 구속되었다.

3. 평가



3.1. 옹호


3S 정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우민화 정책이라는 마땅한 실증적 근거가 없고, 사회자유화의 일부분으로 사회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긍정적인 효과를 줬다고 평가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현대 한국 문화 사업을 만드는 것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 정책들이다. 196~70년대, 이승만박정희 정권들을 이어가면서 극도로 경직된 한국 문화와 사회 분위기를 유화[13], 시키는 것에 일조하였으며, 지나치게 억압되며 불문율로써 여겨지던 성문화 역시, 3S 정책이 행해질 당시 해방되면서 더 개방적으로 변했다. 특히 컬러수상기가 도입되고 보급률도 빠르게 상승하여 TV문화가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풍부해졌다.
또한 KBO 리그를 비롯한 프로 스포츠 역시 3S 정책의 일부로써 만들어지며, 실업 리그와 아마추어 리그만 있던 체육계의 상업화를 가속화시켰으며, 이로 인해 실업 리그, 대학 리그와 프로 리그 간의 관계로써, 인력 시장과 공급하는 하부 리그들의 연계 기틀이 점점 등장하였다.
그리고 문화 사업 협회같은 것들이 이때 등장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가요를 비롯한 여러가지 대중 문화 사업들이 더욱 거대해질 수 있었다. 대학가요제 같은 행사나 그런 곳에서 발굴된 신인 가수들 역시 거대 문화 사업과 연계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3S에 속하는 셋 모두가, 빈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일본이 1940년대에서 1950년대로 넘어오며 그랬듯이, 한국의 1980년대 역시 급격한 경제성장과 국민소득 향상으로 대중의 생활수준이 올라가며 문화소비욕구가 넘쳐났다. 3S정책의 아이디어가 누구의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프로 스포츠산업 육성, 그리고 컬러TV의 확산에 마춘 영상물, 음악 정책의 자유화 시작은 그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마지막 S에 대해서는, 그동안 금욕적으로 묶었던 것을 자유롭게 풀어준 것에 불과했고, 조폭은 그 과정에 큰 기생충이어서[14] 이후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3.2. 비판


3S 정책은 우민화 정책으로써나, 경제 부흥 정책으로써나 부작용이 있었던 정책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 직후, 한국의 경제는 미국과의 지나친 반목,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한 경제 개혁의 시한부화, 2차 석유 파동, 이상기후로 인한 식량 공급 불안 등의 사건들로 인해서 유신 말기인 1978년부터 경기가 하강하고 있었고, 1980년 기준, 경제 성장율은 -1% 가량의 마이너스 성장이 이어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한강 유역, 강남 등지에 대한 개발 정책들을 펼쳤고, 3S 정책 역시 이 중 일부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 개발 정책들과는 달리, 도리어 갑작스럽게 풀려버린 에로 영화, 유흥 업소 등의 성문화 산업들은 조폭같은 온갖 조직 범죄들의 손에 관리되는 모습을 가져왔으며, 이는 범죄율 증가와 치안 악화등의 악영향들을 불러왔다. 그리고 이로 인해 비대해진 조폭들을 비롯한 여러 조직화 범죄들은 노태우 정부 당시 범죄와의 전쟁 정책을 만들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문화 사업을 비롯한 여러 방송계들의 육성 역시 기만적인 태도로 나왔었다. 언론 통폐합을 통해서 반정부 혹은 친좌익 성향을 보이거나, 반정부 성향의 인물이 있는 여러 방송국과 언론사들을 폐쇄시켰고, 또한 연예계 역시 어느 정도 발전하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건전가요금지곡들은 1987년, 서울의 봄을 통한 민주화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4.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


3S 정책은 실은 실존하지 않는 것을 마치 진짜로 실행되었던 정책인양 둔갑했다는 지적도 있다. 포르투갈 독재정권의 3F정책을 전두환 정권에 대입해 전두환을 비판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이다.
특히 독재정권이 그러지만 여느 정권이나 정도와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 여론이 정치에 모아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국민의 관심을 돌리는 유도책을 쓴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국민 관심 회피용으로 이용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음으로 우민화 정책을 만들어냈다고 확신한다면 내용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정책의 입안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15] 하지만 5공화국 정부의 정책에서 3S 정책으로 대변되는 우민화정책을 추진한다는 정책 문서는 발견된 적이 없으며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처럼 장관(당시 조윤선)이 인정한 증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두환 정권이 그런 방식을 정권 유지에 이용한 것은 맞으나,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음모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선 스포츠는 당시 집권자인 전두환이 좋아해서 장려한 것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정부는 재벌 기업들에게 정치 자금과 각종 인허가권을 교환하며, 동시에 스포츠단 창단을 압박하고 종용하였다. 또한 프로 스포츠가 지역감정을 유도해 오히려 김대중의 정계 복귀를 빠르게 한 점을 생각해 보자는 주장도 있으나,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당시 김대중의 귀국과 정계 복귀는 미국 정계와 국제 엠네스티 등의 정치적 압력 때문이었으며, 프로 스포츠의 부흥과는 무관했다. 당시 김대중이 귀국했을 때, 미국 정계는 국내에서의 암살을 두려워하여 미국의 유력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김대중이 타는 비행기에 동행시켰다. 이 때 동행했던 사람이 에드 페이건, 로마스 폴리에타 등의 미 하원 의원과 카터 정부 때 국무성 인권담당차관이었던 패트리시아 데리안, 국무성 인권담당차관보 등의 관료들, 그리고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의 지식인이었다. 당시 미국의 레이건 정권이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전두환의 미국 공식 방문과 거래했다는 증언이 있으며, 실제 이후 이 협상의 미국쪽 파트너였던 CIA의 도널드 그레그가 1989년에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한다. 또한 야당이었던 미국 민주당의 에드워드 케네디, 앨 고어 상원의원 등도 당시에 김대중의 신변 보장과 무사귀국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오히려 국민 관심 회피용 혐의가 짙은 것은 프로 스포츠가 아니라 84 LA 올림픽, 86 멕시코 월드컵,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이었다[16]고 하지만, 그것은 3S정책의 일환 중 하나로 평가될 수 있는 사안이지 부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스크린에서 야한 영화의 창궐은 단지 영화계의 흐름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반론 측에선 야한 영화만 만들라는 지침이 정부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증거는커녕 영화인들의 증언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시대상과 적은 제작비를 투자해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영화계의 상술이 맞몰린걸 정부의 지침인 양 음모론이 만들어졌다는 것. 실제 저예산 영화의 창궐은 당시 우리나라 영화계의 흐름이다. 70년대에는 한달만에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일이 흔했고 80년대에는 그나마 석달 정도의 제작기간인 영화가 많았는데 그런 영화에는 이같은 에로 소재가 적합했다.[17] 그리고 정부의 선정성 검열은 엄청났다. 미성년자 관람가 영화에서는 젖가슴은 커녕 베드씬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 국내 영화보다 노출도가 심했던 외산 영화의 경우 대부분의 선정적 장면은 삭제됐다. 현실은 정치적 검열이 심한 나머지 그런 것에 걸릴 건덕지가 없는 오락/에로영화들이 번성하는 풍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3S정책이 실존했다는 방증이 되기도 한다. 군부 독재정권이 정치적 검열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거세게 하면서 상대적으로 섹스나 스포츠 등의 검열만 풀어주어 이른바 불만의 가스 빼기를 한다는 것이 3S정책의 주요 비판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섹스 부분에 있어서는 일단 스크린과 동일한 내용이다. 영화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선정적인 부분을 찾기 어려웠다. 플레이보이나 펜트하우스 등도 세운상가에 가서나 몰래 구입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런 제한이 풀린 것은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뤄진 다음 전두환 정권이 레임덕에 걸리면서 자유화 바람이 불었던 87년 하반기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른데, 유흥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권력과 서서히 결탁하기 시작했던 것이 80년대였다. 실제 지방의 유흥업이나 관광호텔의 경우에는 서울의 안기부에서 대놓고 허가권을 휘두르며 관리를 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가장 선정적인 문화가 심했던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0년대 중반 연예인들이 누드사진을 대놓고 찍을 때 였다.[18] 그리고 이는 적절한 반론이 될 수 없는데, 3S 정책에 대한 비판은 그 이름대로 영상, 섹스, 스포츠 등의 자극적인 문화로 정치탄압에 대한 현실에서 국민의 눈을 돌리려 한다는 데 있는 것이지, 결코 그 정도가 심했다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밖에 일부에서는 3S 정책은 당시 386 운동권들이 만들어낸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80년대 대학가의 운동권들은 75년 베트남의 공산화에 고무되어 1980년이 되면 대한민국 역시 자본주의 모순이 극대화 되어 사회주의 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며 민주화 투쟁에 전력을 쏟았다. 하지만 80년대 전두환이 집권하며 오히려 경제는 점점 안정화되어 갔고 고대하던 결정적 시기는 멀어져만 가는 상황이었다. 이런 소득 성장에 따라 대중의 자유화 요구를 수용한 정책들을 3S 정책이란 이름으로 전두환의 우민화 정책이라는 프레임으로 유포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서구 자유 민주주의 선진국일수록 영화와 스포츠 문화는 더욱 발전해 있었고 성문화에 개방적이었다. 그래서 자유진영에서는 오히려 이런 자유진영의 문화들이 퍼지면 자유에 대한 대중의 갈망을 증폭시켜 서구식 민주주의를 촉진한다고 봤으며 지금까지 일종의 상식이다. 따라서 3S정책을 시행해 국민들을 우민화하고 관심을 돌린다는 논리는 자유진영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맞지 않는 논리이며 자유진영 문화가 퍼지는 것을 우려하는 공산진영 국가들에서 통용되던 논리였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과는 다르다. 여러 형태의 프로파간다는 공산진영이나 자유진영을 막론하고 수행되어 왔으며, 시민들을 스포츠나 오락물 등의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려 정치적 무관심을 증폭시키는 정책은 어느 곳에서나 관심을 두었다. 다만 미국에서는 어디까지나 거대 산업의 시각에서 관리되어 왔을 뿐이다. 일례로 미국의 문화 정책을 입안하는 행정부처는 지금도 미국 상무부이다. 또한 공산 국가들 역시 3S정책같은 형태의 정책들을 행한 국가들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80년대 386운동권들이 추구하던 민주주의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소련 공산주의식 민주주의이나 북한식 인민민주주의 혹은 민중민주주의이 주류였다면 이런 주장에 무게가 더 실릴 수 있다. 그러나 386 세대의 운동권들을 마치 공산권 하수인 수준으로 서술하는 서술 형태 또한 사실과 다른 점이 있다. 당시 운동권에도 다양한 분파가 있었고, 김대중이나 김영삼 등의 민주 세력은 어디가지나 선거를 통한 집권을 목표로 했다, 사회주의나 민중주의 형태의 운동권 세력은 분명히 존재했으나 명백히 주류는 아니었다. 특히 6월 항쟁 당시에 참여한 대다수 시민들의 통일된 구호는 '대통령 직선제 쟁취'였을 뿐이다.
이런 측면을 종합해 볼 때 3S정책이 실존하지 않았다는 반론은 모든 걸 존재론적 증명의 차원으로 끌고가 비판점을 호도하려는 시도로 볼 여지가 존재한다. 당연히 군부 독재정권에서 3S정책이란 표어를 내걸고 정책을 추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3S정책에 대한 비판도 권위주의 체제 정부가 명시적으로 우민화 정책을 추진했다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성향의 독재정권이 3S를 통해 국민의 눈을 돌리려 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가령 일제시대 때도 중추원이 존재해 조선인들을 정치에 참여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 시대에는 문관 총독 임명을 제도화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일제시대 때 진정 조선인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일제시대 중추원은 그야말로 이름뿐인 형식적인 기구로서 조선인의 정치참여는 거의 불가능했으며, 문화통치 이후에도 일제시대 때 실제로 문관이 조선총독에 임명된 적은 없으며, 보통 경찰제에서의 경찰인원과 비용은 오히려 증가했다. 즉, 일제시대 때 중추원이나 문화통치가 그저 조선인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기만적인 조치에 불과했던 것처럼, 군부독재정권 시대의 일부 문화검열 완화나 문화 장려 등도 그러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위에서도 적은 것처럼 실제로 독재정치를 하며 정치적인 소재의 검열은 철저히 하는 와중에 일부 성적인 것이나 스포츠만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즐길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이 바로 3S정책인 것이며 비판 받을 만한 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3S정책이 명시적으로 추진되지 않았다거나, 문민정부에서 검열이 더 완화되었기에 3S정책이 실존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적절하지 않은 반론이다. 요는 군부 정권 하에서의 문화 정책이 3S정책과 유사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정책에 특정한 이름을 붙이고 추진했느냐의 여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이 생기는 이유는 '정책'이란 단어가 가지는 다의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한데, 꼭 명시적인 특정 정책만이 아닌 한 정부나 정치인이 가지는 포괄적인 행동지침 등도 정책이라 표현한다. 3S정책을 비판하는 측도 꼭 전두환 정부가 국민들을 가축으로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비밀스러운 계획을 세워 실행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전두환 정부가 내세우는 문화성과란 것들이 단지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차원에서 실시된 주먹구구식 정책들에 불과하지, 설령 일정한 성과를 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민이나 국익을 위해 대승적 차원에서 실시한 업적이 아니었다고, 즉 군사정권을 전혀 떠받들 이유가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설령 일제시대 때 일부 조선인들의 생활이 개선된 부분이 있다 해도 그것이 진정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비판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3S정책이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측도 아예 전두환 정부가 잘못이 없다고 전적으로 두둔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국민 관심 회피용으로 이용했다'는 것에 동의하는 시점에서 이미 3S정책을 비판하는 측과 의견을 같이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5. 이야깃거리


우스개로 (酒, spirit/sake 혹은 SUL/SOOL) 아니면 스파이(간첩 혹은 무장공비, Spy)를 가해서 4S라고도 한다[19]. 희석식 소주는 주정으로 값싸게 만들어낸 술이라 빨리 먹고 빨리 취해서 빨리 토해버릴 수 있었기 때문. 물론 몸에는 매우 좋지 않다. 그리고 간첩은 언제나 '''훌륭한''' 떡밥이었다.
'''Sorrow'''(슬픔, 한)를 주제로 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 또한 있다. KBS에서 1983년 방송했던 특집 프로그램인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두고 하는 이야기. 실제로 해당 항목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당시 5공 정권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대북 심리전에 이용하려는 전략이 어느정도 있었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독재자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이와 거의 비슷한 정책으로 3F 정책을 썼다. 축구(Futebol : 포르투갈어로 축구), 종교(Fatima: 파티마의 성모 사건 참조), 파두(Fado :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역시 국민들의 관심을 스포츠, 종교, 음악으로 돌리려는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다만 아이러니한건, 정작 파두 가수들이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다는 것.1974년 일어난 카네이션 혁명 당시 라디오 방송에서 금지곡이었던 주제 아폰수의 곡이 흘러나왔는데 이것이 혁명의 신호탄이었다.
문명 시리즈를 하다보면 시민들의 만족 상태를 나타내는 수치인 행복도가 나오는데 이걸 올리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극장, 영화관, 콜로세움 등을 도시에 지어주는 것이다. 아무래도 전연령 게임이다 보니 '''맨 마지막 S'''까지 도입하진 못한 듯 싶지만 '''Screen'''과 '''Sports'''는 확실히 포함하고 있다. 스핀오프인 알파 센타우리에서는 먼 미래답게 Screen과 Sports(그리고 해석에 따라서 마지막 S까지)를 '''가상현실로 한방에 해결'''해버리는 무시무시한 연출을 보여준다.[20] 행복도가 떨어졌을 때 각종 반란과 생산성 감소가 일어난다.
혹은 마이카 시대가 신군부때부터 서서히 시작된 것에 착안하여 '''S'''peed를 넣어 4S라 하기도 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등장하는 두 원로원 의원들의 대화는 3S정책의 본질을 보여준다

GAIUS: Games! 150 days of games!

무려 150일 동안의 경기라니!

GRACCHUS: He's cleverer than I thought.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황제가 똑똑하군.

GAIUS: Clever? The whole of Rome would be laughing at him if they weren't in fear of his Praetorian.

똑똑하다고? 근위병이 두렵지만 않다면 모든 로마인들이 황제를 비웃을 것이네.

GRACCHUS: Fear and wonder. A powerful combination.

두려움과 호기심. 강력한 결합이야.

GAIUS: Will the people really be seduced by that?

사람들이 정말로 저런 것에 넘어갈까?

GRACCHUS: I think he knows what Rome is. Rome is the mob.

He will conjure magic for them and they will be distracted.

He will take away their freedom, and still they will roar.

The beating heart of Rome is not the marble of the Senate, it is the sand of the Colosseum.

He will give them death, and they will love him for it.

나는 황제가 로마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네. 로마는 오합지졸의 군중이야.

황제는 군중에게 마법을 부릴 것이고, 그들은 현혹될 것이네.

황제는 군중에게서 자유를 빼앗을 것이고, 여전히 그들은 즐겁게 외칠 것이네.

로마인들의 고동치는 심장은 원로원의 대리석이 아니야, 바로 콜로세움의 모래이네.

황제는 군중에게 죽음의 경기를 보여주고, 그들은 그것 때문에 황제를 사랑하게 될 것이네

[21]
국내 프로 스포츠 중 3S정책으로 생긴 리그만 '''연고지 몰빵 문제에서 자유롭다.''' 야구야 워낙 지역에 잘 녹아들었고, 축구도 전국에 잘 퍼져 있다. 농구는 수도권과 부울경 2점 집중이,[22] 배구는 수도권 집중이[23] 매우 심하다.

6. 관련 문서



7. 관련 문헌


  • 스포츠와 정치 - 고광헌 저. 푸른나무. 1988.

[1] 다만 이렇게 얻은 성과 상당수는 도핑으로 이루워졌다는 문제점이 있었고, 체제전환 이후로 경제문제로 예산이 대대적으로 삭감되면서 줄줄히 스포츠 강국에서 나가 떨어지는 안습함을 보여주었다.[2] 컬러 방송 시행 계획 자체는 당시 웬만한 강대국이었던 소련프랑스, 영국에 비해서도 조금 늦게 시행하는 셈이 되는 1960년대 말부터 있어 왔다. 하지만 컬러 방송을 시행하려 할 때마다 윗선에서 사회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딴지를 걸어서 결국 10년씩이나 늦춰지게 되었다.[3] 참고로 이날은 하필이면 언론통폐합 다음 날이었는데, TBC는 컬러 방송 한 번 못하고 폐국하였다.[4] 그러나 교복 폐지는 브랜드 선호로 인해 가계 부담과 학생 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며 학교 재량으로 바뀌었으며 두발 제한도 아직 몇몇 학교에 잔재해있다.[5] 만화 검열이 실질적으로 완화된 것은 80년대 후반이 되어서부터였고, 가요 검열도 마찬가지로 80년대 후반, 서울의 봄이 있던 1987년에 들어서야 어느정도 완화되었고 1996년이 되어서야 없어졌다.[6] 왜 대머리나 주걱턱이 문제였나 하면, 전두환이 대머리였고 이순자는 특유의 주걱턱이 웃음거리가 되었기 때문.[7] 정작 전두환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한참 후에 박용식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사과했다고 한다.[8] 정치적 검열은 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영화가 개봉한다고 해도 엄격한 검열에 의해 통삭제 되는 일이 빈번하였기 때문에 제작자들은 반강제적으로 성인영화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9] 5공정권은 정말 서울올림픽을 전가의 보도로 활용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권에 도움이 되라고 개최했던 올림픽이 오히려 정권의 명줄을 끊어놓았다. 자세한 건 1988 서울올림픽 문서 참조.[10] 구매력기준 1인당 GDP가 3만불이 넘어가는 현재도 KBO리그 구단들이 간신히 자생이 가능할랑 말랑한 정도의 수준인걸 감안한다면, 당시 경제 수준에 프로스포츠는 확실히 무리수였다. 이 때문에 기업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여러가지 면세 혜택들을 부여했고, 한국 프로스포츠는 수익을 내기 위한 독립적인 스포츠 산업이 아니라, 회장님의 취미생활, 즉 펫 스포츠(Pet Sports)의 모습을 띄게 된다.[11] KBL은 15년 뒤인 1997년에 출범했다.[12] 다만 조양은은 80년에 체포돼서 15년을 썩었고, 김태촌 역시 80년에 체포되어 86년에서야 풀려났다. 그나마 80년대에 활약한 이동재도 양은이파 계열 순천시민파의 칼에 맞고 일찍 은퇴한다. 물론 두목이 빵에 있는 동안 부하들이 활동은 했으므로 활동 자체가 아예 없었던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신상사나 조창조 같은 진정한 전국구 두목들의 하수인에 가까운 자들이었으며 3대 패밀리라는 것 역시 언론이 만들어낸 과장에 가깝다.[13] 장발단속 폐지, 교복폐지, 미니스커트 단속 폐지, 야간통행금지 폐지 등등[14] 어느 나라 군사정부라도 정권을 확고하게 잡은 다음에 조폭을 일부러 키워주지는 않는다.[15] 하지만 차후 서술되는 것처럼 애당초 3S정책에 대한 비판은 그 경향성에 대한 비판이지, 결코 우민화 정책을 명시적으로 추진했느냐에 있지 않다. 국민관심 회피용으로 이용하는 정도가 이미 3S정책에 해당하는 것이다[16]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에 대한 성공적 개최에 대한 압력은 그야말로 전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했으며, 언론과 권력은 이를 이용했고, 이를 통해 모든 반대 세력을 무력화 시키는 명분으로 삼았다.[17] 물론 정부가 간접적으로 장려했다는 주장이 있을 순 있겠다. 다른 모든 장르와 주제를 검열한 뒤에 일부 주제만 허용하면, 당연히 그 방향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18] 다만 이런 누드 사진들도 미국이나 유럽에서처럼 성기를 완전히 드러내는 수준은 못되었고, 그저 세미 누드에 불과했다. 현대 한국에서 포르노 그 자체가 완전히 합법이 된 일은 없었다.[19] 실제로 3S의 원산지인 일본에서 술은 사케다.[20] 동영상의 나레이터가 등장 지도자 중에서 가장 독재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인용구는 개인의 관점에서는 극기를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국가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디어 차원을 넘어서 모든 개인이 '''5감이 받아들이는 신호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이야기하고 있다.[21] 권용만옛날에 부른 노래에서 나온 입담.[22] 비 부울경, 수도권 구단은 강원도 연고인 원주 DB 프로미, 전북 연고인 전주 KCC 이지스.[23] 남자부 기준으로 비수도권은 충청남도권에 있는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