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슈레이더
1. 소개
미국의 영화 평론가 출신 각본가, 영화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 <레이징 불>,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등의 각본가로 유명하다.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조지 루카스, 브라이언 드 팔마 등의 유명감독들[1] 을 배출한 미국 영화 학교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2. 생애
상당히 특이한 경력으로 영화계에 입성한 사람이다. 지독하게 엄격한 칼뱅파 개혁교회 집안 출신으로 열일곱 살 때까지 영화 한 편 보지 못한 채 자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로스앤젤레스의 UCLA에서 평론가 폴린 카엘을 스승 삼아 평론가를 거쳐 영화 감독이 되었다고. 이 폴린 카엘이라는 인물이 박학다식하면서도 독설로 유명한 평론가였는데[2] , 제자인 슈레이더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평론가로 유명하며, 미국 영화 평론/연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6살에 <영화의 초월적 스타일: 오즈, 브레송, 드레이어>라는 뛰어난 영화연구서를 펴내, 미국 현지에서는 오즈 야스지로, 로베르 브레송,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소개한 평론가로 유명하다. 종종 비판을 받긴 했지만, 그 감식안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시기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3번째로 쓴 시나리오 <야쿠자>가 워너 브라더스에 35만 달러라는 고가로 팔려나가 시드니 폴락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1976년작 <택시 드라이버>의 각본을 맡으면서였다. 이후 1978년에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의 타락한 노동조합을 다룬 <블루 컬러>라는 범죄 코미디 영화로 감독 데뷔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자신만의 좀 더 과격한 버전으로 택시 드라이버를 찍어서 만든 <하드코어>, 리처드 기어가 남창으로 등장한 <아메리칸 지골로>, 표범인간의 근친상간을 다룬 <캣 피플> 같은 영화들을 통해 느리고 집요한 심리 연출 솜씨를 높이 평가받았으며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일본의 탐미주의 극우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정신세계를 탐구한 1985년작 전기영화 미시마는 슈레이더의 왕성한 지적 탐구욕과 실험정신이 극에 달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라이트 오브 데이>, <베니스의 열정>, <라이트 슬리퍼> 등의 작품 목록을 이어오다 1998년작 <어플릭션>에서 또 한번 대대적인 비평적 찬사를 얻었다.
다만 1990년대 이후부터는 영화 감독일이 잘 안 풀려서 꽤 힘들게 만드는 편이었는데 2017년에 감독, 각본을 맡은 퍼스트 리폼드로 재기에 성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3. 작품 특징
지독할 정도로 결벽증적인 종교적인 윤리관과 반대로 죄악과 쾌락으로 넘쳐나는 세속 간의 갈등이 주요 테마이며, 과격하고 기괴한 표현을 쓰는 경향이 있다. 전반적으로 영화가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꾸준하게 탐구하는 탓에 불편해서 몇몇 영화를 제외하면 흥행은 잘 안되었지만, 평단에서는 높은 지지를 받는 감독이다.
4. 장편 서사 영화
5. 다큐멘터리 영화
6. 단편 영화
7. 기타
- 형 레너드 슈레이더도 각본가 겸 감독이었는데, 일본 여성과 결혼해 사내는 괴롭다네 같은 일본 영화 각본을 쓰기도 했다. 와패니즘 성향이 있던 형제라, 함께 미시마 유키오 전기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2006년 동생보다 먼저 병으로 타계했다.
- 이 형제가 시드니 폴락의 야쿠자 각본 쓸 당시 일화가 상당히 유명하다. 아직 무명이던 시절 레너드 슈레이더는 일본으로 시간 강사로 갔다고 한다. [6] 하지만 당시 전공투 운동으로 대학이 휴교하는 바람에 술집에서 죽치다가 야쿠자랑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때 타카쿠라 켄의 임협물에 감명 받았다. 레너드는 비자 문제로 미국으로 돌아와서 동생에게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각본을 쓰자고 설득했고 결국 둘은 야쿠자 각본을 쓰기 시작했다. 그 과정이 엄청난 기행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각본 마무리 단계에서는 '죄악감이 부족하다!'며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탕진을 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오기도 했다고. 그리고 이렇게 쓴 "브루스 리와 사무라이, 야쿠자물이 섞인 영화 각본"라고 팔려고 했다가, 결국 파는데 성공했다. (출처: 피터 비스킨드의 Easy Riders, Raging Bulls)
- 제 37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은 적 있다.
[1] 여담으로, 이 5명의 감독은 사적으로도 매우 친한 사이이다. 5명이서 같이 찍힌 사진도 종종 찾아볼 수 있고,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디파티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할 때도 이들이 시상자로 나왔을 정도.[2]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존경의 뜻을 표하기도 했을정도로 영향력이 큰 비평가였고, 시민 케인의 명성은 감독 오슨 웰스가 아닌 각본가 허먼 J. 맨키비츠에게 공이 있다는 '허먼 J. 맨키비츠' 라는 두꺼운 책을 저술한 바 있다.[3] 국내 제목은 암흑가의 결투.[4] 국내에는 vhs를 통해 금지구역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했다.[5] 국내에는 사랑의 락밴드라는 제목으로 수입.[6] 슈레이더 집안이 워낙 엄격해서 도피성에 가까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