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

 

'''Sophie von Preußen'''
'''이름'''
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
(Sophie Dorothea Ulrike Alice)
'''출생'''
1870년 6월 14일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신궁전
'''사망'''
1932년 1월 13일 (61세)
바이마르 공화국 프로이센 자유주 헤센나사우 프랑크푸르트
'''배우자'''
콘스탄티노스 1세 (1889년 결혼 / 1922년 사망)
'''자녀'''
요르요스 2세, 알렉산드로스, 엘레니, 파블로스, 일레네, 에카테리니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형제'''
빌헬름 2세, 샤를로테, 하인리히, 지기스문트, 빅토리아, 발데마르, 마르가라테
1. 소개
2. 작위
3. 생애
3.2. 그리스 왕국의 왕세자비
3.3. 왕비: 1차 재임
3.4. 망명
3.5. 말년과 사망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1. 소개


그리스 왕국 콘스탄티노스 1세의 왕비이자 요르요스 2세, 알렉산드로스, 파블로스루마니아 왕국의 엘레니 왕대비[1]의 어머니이다. 아버지는 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이며,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이다.

2. 작위


  •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Sophie of Prussia(1870년 6월 14일 ~ 1889년 10월 27일)
  • 그리스의 소피아 왕세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Crown Princess Sophia of Greece(1889년 10월 27일 ~ 1913년 3월 18일)
  • 그리스의 소피아 왕비 폐하 Her Majesty Queen Sophia of Greece (1913년 3월 18일 ~ 1922년 9월 27일)
  • 그리스의 소피아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Queen Mother Sophia of Greece(1922년 9월 27일 ~ 1932년 1월 13일)

3. 생애



3.1. 프로이센독일 제국의 공주


조피는 1870년 6월 14일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신궁전에서 프리드리히 왕세자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4남 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조피가 태어났을 때 위로 이미 5명의 오빠와 언니들이 있었고[2], 큰 오빠 빌헬름 왕자와는 11살 차이가 났다. 부모님 프리드리히 왕세자빅토리아 왕세자비는 금슬이 좋았으며 둘 다 자유주의 성향이 강했다. 조피가 태어난 지 몇 주 뒤에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로 인해 조피의 세례식은 우울한 분위기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다행이 전쟁은 프로이센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할아버지 빌헬름 1세독일 제국의 황제가 된다.
조피의 어릴적 애칭은 소시(Sossy)였다. 조부모인 빌헬름 1세 부부는 아이들 중 나이가 많은 빌헬름 황세손, 샤를로트, 하인리히를 예뻐했는데 이 때문에 찬밥 신세였던 세 딸 빅토리아, 조피, 마르가레테는 어머니 빅토리아 황태자비와 더 친밀한 관계였다고 한다.[3] 영국 출신인 어머니 빅토리아 황태자비의 영향으로 조피는 어린 시절부터 친영국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을 자주 찾아갔으며, 영국에 오랜 기간동안 머물기도 했다. 특히 친가 쪽에서 조피에게 애정이 없었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조피 또한 여왕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884년 즈음 그리스 왕국콘스탄티노스 왕세자독일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프로이센의 근위대로 근무하고 있었다. 조피는 빅토리아 여왕의 골든 주빌리 행사에 참석하느라 영국에서 오랫동안 머무른 후 1887년에 콘스탄티노스와 더 잘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눈에 띄게 발전하였고 빅토리아 여왕과 빅토리아 황태자비 또한 콘스탄티노스를 훌륭한 신랑감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중 1888년 3월 1일 빌헬름 1세의 장례식에서 그리스 대표로 참석한 콘스탄티노스는 조피에게 완전히 사랑에 빠져 버렸고, 1888년 9월 3일 약혼을 발표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이 온전히 환영받지는 못했는데, 빌헬름 2세 부부와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의 어머니 올가 왕비가 결혼을 탐탁치 않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혼식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1889년 10월 아테네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후두암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조피의 생일 다음날인 1888년 6월 15일 사망했다. 새 황제가 된 오빠 빌헬름 2세는 자유주의적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고 큰 아들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빅토리아 황태후는 슬픈 마음으로 결혼식에 참석했다. 빅토리아 황태후는 이후 딸들에게 더욱 의지하였으며, 사망할 때까지 조피와 20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3.2. 그리스 왕국의 왕세자비


1889년 10월 27일, 조피는 콘스탄티노스아테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두번 거행되었는데 한번은 그리스 정교회식으로, 한번은 개신교식으로 진행되었다. 왕세자의 결혼식은 국민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었고, 특히 두 사람의 이름은 콘스탄티노스 왕과 소피아 왕비가 왕위에 오르면 콘스탄티노플하기아 소피아가 그리스의 것이 된다는 전설을 연상시켰다. 이렇듯 두 사람의 결혼식은 그리스 국민들에게는 매우 환영받았으나 대외적으로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프랑스에서는 그리스삼국 동맹에서 독일 편에 설까봐 우려했고, 독일에서는 그리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오스만 제국과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를 도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신혼을 아테네에서 소박하게 보냈다. 소피아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어 하기도 했지만, 현대 그리스어를 몇년 안에 완벽하게 구사하며 차차 새 삶에 적응해 나갔다. 결혼식을 올린 지 9개월 후인 1890년 7월 19일, 소피아는 첫 아들 요르요스 왕세손을 낳았다. 출생 당시 탯줄이 아기의 목을 감아 자칫 위험할 뻔 했으나 다행히 무사히 출산할 수 있었다.
첫 아이를 낳은 후 소피아는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녀의 개종 소식에 그리스 왕족들은 모두 환영하였지만, 소피아는 프로이센 연합 교회의 수장이자 무엇보다 불복종을 가장 싫어했던 큰오빠 빌헬름 2세의 반응을 두려워했다.
1890년 11월, 소피아는 언니 빅토리아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빌헬름 2세에게 개종의 뜻을 밝혔는데, 예상했던 대로 빌헬름 2세는 크게 반대했고 특히 새언니 아우구스타 빅토리아는 개종을 만류하다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을 빚기도 했다.[4] 빌헬름 2세 또한 분개해서 소피아를 프로이센 왕족에서 빼버리기까지 했다. 어머니 빅토리아 황태후는 화해하도록 권유했고 소피아는 결국 자신의 개종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썼지만 빌헬름 2세는 3년동안 소피아의 독일 입국을 막아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1891년 5월 2일 소피아는 루터교회에서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했다. 하지만 독일 황실 측에서는 개종을 인정하지 않았고 빌헬름 2세는 동생이 자신에게 불복종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압박을 가했다.
소피아는 시어머니 올가 왕비를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병원을 설립하는 등 자선사업가로서 활동했다.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그리스에는 많은 전쟁이 있었는데, 소피아는 적십자에서 부상당한 군인을 치료하였고 간호사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그녀와 올가 왕비의 선행은 다른 여러 나라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스-터키 전쟁(1897)이 패배로 끝난 후 그리스 내에는 왕정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항상 여동생을 압박했던 빌헬름 2세는 공개적으로 오스만 제국을 지지했고 동생과 어머니, 할머니가 간청을 한 후에야 오스만 제국에 중재를 제의했다. 그는 전쟁에 개입한 대가로 그리스에 굴욕적인 조건에 응할 것을 요구했는데 사람들은 그가 여동생의 동의를 얻어 그렇게 했다고 믿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스 왕세자도 전쟁에 진 책임을 지기 위해 국가 재판에 넘겨져야 하고, 요르요스 1세 또한 오토 1세처럼 폐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실에 대한 반감이 심해지자 요르요스 1세는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와 소피아는 그리스를 떠나 독일에서 지내다 1899년에 귀국했다.
그리스에 돌아온 이후 소피아는 자선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이 즈음 유방암을 앓고 있던 어머니 빅토리아 황태후와 여든이 넘은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건강이 모두 좋지 못했다. 당시 영국보어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여왕의 건강이 악화될까 우려하였다.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뇌출혈로 사망했다. 소피아는 자신이 사랑하던 외할머니가 사망하자 매우 슬퍼하였고 영국에 방문하여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몇달 후에는 건강이 악화된 어머니를 찾아 독일을 방문했는데 그녀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당시 임신 5개월이었던 소피아는 빅토리아 황태후가 사망할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켰다.
1909년을 기점으로 그리스에는 쿠데타가 일어나 요르요스 1세의 아들들은 군대에서 사임되었다. 소피아도 이때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그리스를 떠나 독일에 정착했다. 그 동안 그리스에서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거나, 왕정을 유지하되 오토 1세의 서자나 요르요스 왕세손을 왕위에 올리는 것에 대해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후 권력을 잡은 베니젤로스는 다행히 왕권을 약회시키면 안된다고 생각하였고, 1년간의 망명 끝에 1910년 10월 21일 그리스 왕족들은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피아는 새 정부를 의심스러워했고 베니젤로스를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스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와 다른 왕자들이 군대를 이끄는 동안, 소피아와 동서들[5]은 부상당한 군인들을 간호했다. 소피아는 올가 왕비와 함께 새 병원을 짓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한편 소피아는 신혼 초에는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와 사이가 좋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그는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에 충격을 받았지만 시어머니 올가 왕비가 그랬듯 조피는 그저 묵살해야만 했다. 1912년 경 부터는 두 사람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고 콘스탄티노스 왕세자는 사망할 때까지 여러 정부를 두었다. 심지어 소피아가 1913년에 여섯째 아이인 에카테리니 공주를 낳았을 때 다른 남자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공식적으로는 콘스탄티노스의 자식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3.3. 왕비: 1차 재임


1913년 제1차 발칸 전쟁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고, 그리스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이후 그리스와 불가리아 사이에서 테살로니키에 대한 영토분쟁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요르요스 1세는 주권을 주장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를 방문했는데, 아무 경호원 없이 산책을 하다 그만 아나키스트인 알렉산드로스 시나스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시아버지 요르요스 1세가 암살당했을 때 소피아는 아테네에 있었다. 그리스의 새 왕비가 된 소피아는 이 사실을 올가 왕대비에게 전해야 했다. 다음 날 모든 그리스 왕족들은 테살로니키로 이동하여 요르요스 1세가 암살된 현장을 보고, 그의 시신을 그리스로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르요스 1세의 죽음으로 인해 테살로니키는 그리스의 영토가 되는듯 했지만, 마케도니아에 대한 분단을 둘러싸고 제2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왕비가 된 후 소피아는 왕세자비 시절에도 그랬듯 소박한 생활을 이어갔다. 특히 국왕 부부는 남동생인 니콜라오스 왕자 부부와 매우 친해서, 매주 한번씩은 식사를 같이 했다고 한다. 또 소피아와 콘스탄티노스 1세는 모두 원예를 좋아해서 자유시간을 정원을 가꾸는데 보내기도 했다.
1914년 8월 4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에 아이들과 머무르고 있었던 소피아는 급히 귀국한다. 그리스는 처음에 중립국을 선언했으나 대중들은 전쟁에 참가하길 바랐고, 베니젤로스 또한 오스만 제국을 패배시키기 위해 연합국으로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친독 성향이 강했던 콘스탄티노스 1세는 끝까지 참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베니젤로스는 국왕의 허락 없이 참전하려 했으나 결국 3월 6일 사임되었다.
연속된 전쟁과 베니젤로스와의 갈등으로 콘스탄티노스 1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폐렴으로 인한 늑막염을 앓던 그는 몇 주 동안 누워 있다가 거의 죽을 뻔했는데, 이때 항간에는 소피아가 빌헬름 2세와 함께 참전하도록 국왕을 강요하다가 칼로 찔렀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처럼 소피아는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
1915년 6월, 베니젤로스 파는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곧 베니젤로스는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불가리아가 그리스의 국경인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그는 콘스탄티노스 1세에게 끊임없이 참전하라고 종용했고, 결국 국왕은 방어를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이후 그리스에서는 동맹국에 유리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고, 국왕 부부는 연합국으로부터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1916년에는 타토이 궁전을 둘러싼 숲에 원인 모를 불이 나서 막내 에카테리니 공주를 간신히 구한 적도 있었다. 이 일이 일어난 이후 그리스 왕실은 독일과 더욱 가까워졌으며, 소피아 또한 연합국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암살 위협으로 인해 독일 제국의 황제인 오빠 빌헬름 2세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다.
1916년 10월 베니젤로스테살로니키에 대립 정부를 세우고 연합국의 지원을 받게 된다.[6] 한편 프랑스-영국 군대가 아테네를 압박하자 식량의 공급이 어려워졌고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였다. 소피아는 자선 활동에 더욱 전념하며 식량과 약, 옷 등을 배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프랑스 군대는 궁전을 폭격하기 시작했고 소피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실로 피신했다.

3.4. 망명


1917년 니콜라이 2세가 폐위당하자 콘스탄티노스 1세 또한 지지 세력을 잃었다. 연합국의 위원장이었던 찰스 조나트는 그리스 정부에 콘스탄티노스 1세를 폐위시키고 요르요스 왕세자가 아닌 다른 왕자를 왕위에 세울 것을 건의했다.[7] 연합국의 침략이 두려웠던 콘스탄티노스 1세는 차남 알렉산드로스 왕자에게 왕위를 내주고 궁전을 떠났다.[8] 콘스탄티노스 1세와 소피아, 그리고 다섯 아이들은 스위스에 정착했다. 하지만 악화된 왕실의 재정상태와 망명 등으로 콘스탄티노스 1세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고, 1918년에는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을 뻔하였다.
한편 그리스에 홀로 남겨진 알렉산드로스는 정부의 방해로 망명한 가족들과 전혀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알렉산드로스가 외국의 공주가 아닌 그리스의 귀족 아시파시아 마노스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국왕 부부와 정부는 모두 심히 실망했다. 소피아는 아스파시아의 신분이 높지 않은 것을 언짢아 했던 반면 정부 측에서는 영국과 가까워질 기회를 잃게 되어 아쉬워 했다.

3.5. 말년과 사망


1919년 그리스-터키 전쟁이 발발하고 알렉산드로스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베니젤로스의 권력이 약화되어 그리스 왕족은 잠시 아테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패하자 혁명파들은 콘스탄티노스 1세에게 장남 요르요스 2세에게 양위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스 왕족들은 다시 망명길에 올라 이탈리아에 정착했다. 1년 후 남편 콘스탄티노스 1세가 사망했고, 조피는 여생을 독일에서 보내다 1932년 으로 사망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로이센의 공주 조피
(Princess Sophia
of Prussia)

프리드리히 3세
(Frederick III)
빌헬름 1세
(Wilhelm II)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ederick William III)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여공작 루이제
(Duchess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작센바이마르아이젠나흐의 공녀 아우구스타
(Princess Augusta
of Saxe-Weimar-Eisenach)

작센바이마르아이젠나흐 대공
칼 프리드리히
(Charles Frederick,
Grand Duke of Saxe-Weimar-Eisenach)

러시아 제국의 여대공 마리야 파블로브나
(Grand Duchess Maria Pavlovna of Russia)[9]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Victoria,
Princess Royal)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공녀 루이즈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10]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 빅토리아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 and Saalfeld)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요르요스 2세
(George II)
1890년 7월 19일
1947년 4월 1일

2남
알렉산드로스
(Alexander)
1893년 8월 1일
1920년 10월 25일
아스파시아 마노스
슬하 1녀[11]
1녀
루마니아의 왕대비 엘레니
(Helen, Queen Mother of Romania)
1896년 5월 2일
1982년 11월 28일

슬하 1남[12]
3남
파블로스
(Paul)
1901년 12월 14일
1964년 3월 6일
하노버의 프리데리케[13]
슬하 1남 2녀[14]
2녀
아오스타 공작부인 일레네 공주
(Princess Irene, Duchess of Aosta)
1904년 2월 13일
1974년 4월 15일
아오스타 공작 아이모네 왕자[15]
슬하 1남
3녀
에카테리니 공주
(Princess Katherine)
1913년 5월 4일
2007년 10월 2일
리처드 브랜드램
슬하 1남

[1] 미하이 1세의 어머니이다.[2] 지기스문트 왕자는 조피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다.[3] 특히 4남 발데마르 왕자가 디프테리아로 사망한 이후 사이가 더욱 돈독해졌다고.[4] 훗날 아우구스타 황후는 이 일 때문에 여섯째 아이인 요아힘 왕자를 조산했다고 주장했다.[5] 마리 보나파르트, 엘레나 블라디미로브나, 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6] 이를 국론 분열이라 한다.[7] 요르요스 왕세자 또한 친독이었기 때문이었다.[8] 소피아는 이 때 알렉산드로스 왕자를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한다.[9] 파벨 1세의 3녀이다.[10] 조지 3세의 4남이다.[11] 유고슬라비아의 왕비 알렉산드라(페타르 2세의 부인)[12] 미하이 1세[13] 빌헬름 2세의 외손녀이다.[14] 스페인의 왕비 소피아, 콘스탄티노스 2세[15] 아마데오 1세의 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