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 뱅크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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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축구인.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골키퍼이다.
FIFA 월드컵 통산 89.1%의 선방률을 기록한 월드컵 역대 최고 선방률 보유자이며, 1966년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며 활약한 전설적인 골키퍼이다. FIFA 월드컵에서 통산 9경기에 출전해 4실점만을 기록했으며, 특히 1966년 월드컵에서는 443분 연속 무실점이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레스터 시티 FC와 스토크 시티 FC에서 커리어의 전성기를 보냈으며, 1972년 10월에 비운의 교통사고로 한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면서 전성기를 마무리지었다.
2. 선수 생활
2.1. 클럽
뱅크스는 석탄 광부 또는 벽돌공 등으로 일했는데, 어느 아마추어 경기에서 결원을 메우기 위해 대신 뛰게 되었다. 이 기회를 통해 그는 지역 팀에서 뛰게 되었으며 1955년에는 체스터필드에서 파트 타임 프로 선수로 계약을 맺게 되었다. 뱅크스는 팀은 FA 유스 컵 결승에 올랐는데 보비 찰튼이 군림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유스 팀에게 4-3으로 아깝게 패하고 말았다.
첫 시즌부터 대활약을 한 뱅크스는 바로 한 시즌만에 레스터 시티로 이적한다. 레스터시티에는 존 안데르손과 데이브 맥라렌이라는 이름있는 골키퍼들이 있었지만 뱅크스는 그들을 제치고 그 시즌에 바로 주전을 차지해버린다.[2]
그 이후부터 이적 전까지 계속해서 주전으로 뛴다. 그 다음시즌인 1960-61 시즌에 레스터 시티를 FA 컵 결승까지 이끌었으나, 리그 챔피언이었던 토트넘 홋스퍼 FC에게 패배하면서 더블 우승을 헌납하고 말았다.
그 다다음시즌에도 다시 한번 FA컵 결승에 오르지만 이번엔 맨유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다. 또 다음 시즌 63-64시즌에는 리그컵을 스토크 시티에게 밀려 준우승... 또 다음시즌에도 첼시 FC에게 패배하며 또 준우승을 했다. 레스터에서만 4번의 컵대회 준우승을 한 그는 폭풍저그 선수생활에 슬럼프가 올만했으나 그 해 월드컵 우승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뱅크스는 1966-67시즌에 스토크 시티 FC로 이적하게 된다.
첫 시즌을 제외하고는 계속 주전을 차지했고 30줄을 타기 시작한 뱅크스는 노련함이 묻어나는 안정적인 세이브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대망의 71-72시즌, 우승타이틀과는 거리가 멀것같던 뱅크스는 리그컵 결승에서 첼시를 2-1로 꺾으며 자신의 클럽 커리어의 유일한 우승컵을 들어올리고 본인은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다.
이렇게 승승장구했지만 1972년 10월 22일, 어깨 부상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운전하던 차량이 전복되는 교통사고로 오른쪽 눈을 잃어버리게 된다.[3] 이렇게 모두가 끝난 줄 알았던 그의 축구 인생이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1977년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축구를 하게 된다. 팬들은 이런 그에게 많은 찬사를 보냈으며 1978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한쪽 눈은 잃어도 축구만은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눈을 하나 잃었으니 당연하겠지만 예전과 같은 기량은 보여주지 못했다. 근데 그런 상태에서도 최우수 골키퍼를 수상했으니, 천재도 이런 천재가 없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
2.2. 국가대표
1963년에 알프 램지가 잉글랜드 대표팀의 감독이 된 후, 뱅크스는 전임자인 론 스프링겟을 밀어내고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로 발탁된다.
뱅크스는 이내 완전히 주전 자리를 꿰찼고, 다른 골키퍼들은 찬밥 신세가 되었다. 1965년까지도 이 흐름은 계속되었고 뱅크스는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준비하게 된다.
특히나 월드컵이 시작된 후, 준결승전에서 포르투갈의 에이스 에우제비우에게 페널티킥 실점을 내주기 전까지 443분 동안 단 한 골도 허용하지 않았다. 페널티킥도 좀 어처구니 없이 내주었는데, 당시 팀의 최고참이던 잭 찰튼이 경기 막판에 저지른 어이없는 핸드볼 반칙 때문이었다. 여튼 이 443분 무실점 기록은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발테르 쳉가(517분)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무려 24년 동안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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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는 포르투갈을 상대로도 2:1승리를 거두었다. 결승전에서 떠오르는 신예 베켄바워가 있는 서독을 상대해야 했지만, 이 역시 문제없었다. 절정의 폼을 맞고 있던 바비 무어와 마틴 피터스, 제프 허스트 통칭 '웨스트햄 트리오'가 각 2어시스트, 1골, 해트트릭으로 맹활약하며 4:2승리를 거두었다. 뱅크스는 쥘 리메 컵을 만져본 유럽 국적의 마지막 골키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UEFA 유로 1968에서도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며 잉글랜드가 최종 3위를 기록하는 데에 기여했다.
전 대회 우승팀 자격으로 예선 없이 바로 참가한 1970년 월드컵에서도 당연히 주전 골키퍼였다. 뱅크스는 바비 찰튼과 함께 팀의 최고참이었고 1966년 월드컵 우승 덕에 라커룸에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선수였다. 조별리그 1차전 루마니아전에서 잉글랜드의 빈공에도 불구하고 뱅크스와 무어 등 철통 수비진의 훌륭한 활약 덕에 1:0승리를 거두었다.
특히나 조별 리그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누가 봐도 구석으로 들어가 아름다운 골이 될 만한 펠레의 헤더를 세이브한 장면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4][5]
아쉽게도 0:1로 잉글랜드가 지고 말았으나, 1970년 브라질 대표팀은 '''펠레와 자이르지뉴, 토스탕, 호베르투 히벨리누, 제르송이 군림한 세계 최고의 팀'''이었고 축구 역사상 최강팀을 뽑을 때 1위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팀이다. 본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제외하면 만나는 팀마다 3:1, 4:1 정도로 승리를 거뒀으며 '''예선 포함 12전 12승으로 우승'''하는 정신 나간 기록을 세웠다.
잉글랜드는 조별리그 3차전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3전 2승 0무 1패 2득점 1실점으로 브라질에 이어 조 2위를 기록하며 8강에 무난하게 진출했다. 그러나 이후 뱅크스는 식중독으로 인해 다음 경기에 결장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고 8강 상대였던 서독에게 3:2로 패하여 탈락하게 된다. 특히 실점한 세 골 모두 뱅크스 대신 출전한 피터 보네티의 아쉬운 경기력 때문에 나온 실점이었기에 잉글랜드로서는 정말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1972년에는 유로 예선을 6전 5승 1무 0패로 손쉽게 통과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팀 서독을 만나게 되면서 탈락했다. 어느덧 35세가 되었음에도 뱅크스의 활약은 여전히 빛났는데, 결승골이 된 귄터 네처의 페널티 킥을 완전히 읽어냈고 날아오는 공을 손에 맞히기까지 했으나 슈팅의 파워가 워낙 강력해 바로 옆그물로 들어갔다. 이후 고군분투했지만 게르트 뮐러에게도 추가골을 실점하며 3:1로 패했다. 그리고 2차전에서는 양 팀 모두 무득점을 기록했고, 따라서 총합 3:1로 서독이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1972년 10월에 교통사고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으면서 국가대표팀에서 피터 쉴튼&레이 클레멘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3. 플레이 스타일
그의 이름과 그의 선방능력으로 '잉글랜드의 은행'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당시로써는 꽤 괜찮은 키를 가지고 그 키를 잘 이용했다. 공중볼에서도 강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안정적인 키핑과 펀칭을 보여줬다. 반사신경과 다이빙능력까지 겹쳐지며 깜짝스러운 슛팅을 잘 막아내고 역동작에서도 잘 대처했다. 그런 모습이 잘 나온 장면이 위에서 말한 펠레의 헤딩을 막는 장면이다. 상황판단 역시 뛰어나 때를 잘보고 나와 그전에 커팅하거나 잡아내는 모습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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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볼을 잡았을 때 던지는 쓰로잉능력 또한 발군이었다. 센터서클을 넘겨서까지 공을 던질 수 있었다. 양발을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았고, 들고 차는 킥의 경우 상황에 따라 발을 바꿔서 찼다. 그래도 주로 쓰던 발은 오른발.
만약 눈을 잃는 사고가 아니었다면 국대에서도 그 위상을 계속 이어나가 어떤 기록을 써내려갔을지는 모른다. 뱅크스의 커리어를 보면 그리 높이 평가할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수 있다. 하지만 그의 소속팀이 레스터나 스토크같이 리그 최하위권을 맴돌던 팀이었으며 뱅크스가 들어올린 트로피는 그들 클럽의 역사에서 몇 안 되는 트로피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진정한 활약은 클럽이 아니라 잉글랜드를 세계 최고로 만든 것이다. 뱅크스의 국가대표팀 기록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 총 73경기에서 0.78실점률을 기록했고 35경기는 무실점으로 지켜냈다. 그리고 뱅크스가 나온 73경기에서 잉글랜드는 단 9번만 패했다.
4. 사망
2019년 2월 12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이후 스토크 시티의 홈구장 앞에 놓인 그의 동상에는 구단을 가릴것 없이 많은 팬들이 머플러를 두고 가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장례식에서는 골키퍼 잭 버틀랜드, 카스퍼 슈마이켈, 조 하트, 조 아년이 관을 들었다. 바비 찰튼, 제프 허스트, 데이비드 시먼, 팻 제닝스, 레이 클레멘스 등도 모습을 보였다.
5. 축구 황제 펠레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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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와 고든 뱅크스의 어깨동무. 정겨워 보인다.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최고의 세이브.
ㅡ 펠레(자신의 헤더를 막은 고든 뱅크스에 대한 칭찬)
지금도 세계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그 순간에 대해 물어온다. 월드컵을 대표하는 장면이라며! 물론 과정이 너무 아름다워서라는 사실을 잘 안다. 자이르지뉴의 굉장한 드리블과 크로스, 이어진 헤딩이 멋졌다. 솔직히 말하면 내 선수 생활을 통틀어 그렇게 잘 맞은 헤딩도 없었다. 나는 결코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ㅡ 펠레
잉글랜드의 골 문은 은행 문만큼이나 문턱이 높더군요.
ㅡ 펠레(1970년 멕시코 월드컵이 끝난 후 고든 뱅크스에 대한 평가)
펠레는 공보다 높이 점프하여 구석을 향해 강하게 내리찍었다. 그것은 완벽한 헤딩이었다. 나는 오른쪽을 향해 몸을 날렸으며 공이 골라인 바로 앞에서 땅에 닿은 후 튕겨 올라가는 순간 오른손으로 공을 살짝 건드렸다.
ㅡ 고든 뱅크스(자신의 자서전에 서술)
6. 여담
- 1937년 셰필드에서 태어난 뱅크스는 어려서부터 골키퍼에 매력을 느끼고 학교에서 골키퍼로 뛰었지만 당시엔 축구를 직업으로 할 생각까지는 없었다고 한다.
- 그가 사고로 눈을 잃어버리자 한 열혈 팬이 뱅크스에게 자신의 눈을 기증하겠다고 했지만 뱅크스는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사랑받는 선수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눈을 잃고 한 동안 스토크 시티와 포트 베일에서 스카우트와 코치로 일하다가 5년 뒤 북미 축구 리그의 포트 러더데일 스트라이커스에서 선수로 뛰게 된다. 위에 서술했듯이 그는 시력 장애에도 불구하고 리그 최고의 골키퍼로 선정되기도 한다.
- 2001년에는 자신의 월드컵 메달을 경매에 붙여 124,750파운드에 팔기도 했다. 이유는 자식들이 그의 사망 후에 메달을 놓고 고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대표팀에서 쌓은 입지와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가 레스터 시티 시절에는 피터 쉴튼[6] 이라는 강력한 경쟁자에게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다. 뱅크스가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음에도 실턴은 주전 자리를 보장해주지 않으면 프로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했고, 결국 1967년 레스터 시티는 뱅크스를 스토크 시티로 이적시켰다. 이러한 결과는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는데, 하루는 뱅크스가 리차드 3세 초등학교에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다가 당시 13세였던 피터 쉴튼을 보고 구단의 코치인 조지 데위스에게 "저 아이는 정말 잘하는군."이라고 말하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피터 실턴을 직접 본 데위스는 "저 아이가 곧 너를 1군에서 밀어내겠는 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실제로 3년 후 실턴은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주전 자리에 오르며 불과 몇 개월 전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던 고든 뱅크스를 이적하게 만들었다.
- 덴마크와 맨유의 전설적인 골키퍼인 페테르 슈마이켈의 우상이라고 한다. 페테르 슈마이켈은 뱅크스의 칭찬을 듣고 그저 예의바른 칭찬일 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것만 해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로 환상적이라고 표현했다.
- 같은 팀이었던 스탠리 매튜스에 대해 '잉글랜드 축구사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언급했다.
- 에버튼 FC의 레전드인 앨런 볼은 뱅크스에 대해 "우리가 아무리 슛을 날려도 그는 모두 막아내곤 했다. 결국 우리는 그에게 '이러다가는 골을 넣을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잃을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 2002년에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공인구인 자블라니에 대해서 "공이 너무 가벼워서 공기 중에서 좌충우돌 움직인다. 골키퍼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
- 2010년 1월 영국의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잉글랜드 대표팀의 골키퍼들은 기복이 너무 심하다."라며 대표팀에 마땅한 주전 골키퍼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뱅크스는 이렇게 된 원인을 자국 프로 리그에서 찾았다. "프리미어 리그는 전부 외국인 골키퍼들이 장악했다. 감독이 뽑을 선수가 없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7] 지금의 상황에 대해 "시즌이 끝날 때까지 결론을 짓기 어려울 것 같다. 마지막까지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골키퍼가 선택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의 골키퍼 기용에 대해 "경험이 없는 조 하트보다 폴 로빈슨을 기용하는게 나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고, 조 하트 또한 "뱅크스와 같은 사람들의 말을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그는 전설적인 선수이다. 나에게도 영웅인 선수이다"라며 큰 존경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는 이어 "비록 그를 존경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의견을 마음 속에 담고 있지 않는다. 월드컵 대표팀에 소집되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의미를 준다. 이제 나가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때."라며 자신이 월드컵 대표팀에 속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때 카펠로가 주전으로 선택한 키퍼는 다름 아닌 로버트 그린.[8]
- 2013-2014 시즌, FC 바르셀로나 소속 선수였던 빅토르 발데스의 레알 베티스전에서 나온 세이브가 고든 뱅크스의 펠레의 헤딩 슛을 막은 것과 비교되자 “매우 기쁘다. 그러나 고든 뱅크스의 선방이 더 의미 깊었다.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비교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 매우 영광으로 생각한다”란 의견을 밝혔다.
[1] 1970년 수훈, 4등급 대영제국 훈장 Offic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2] 골키퍼가 첫 시즌에 주전으로 뛴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3] 얼굴을 '''200바늘''', 안와는 미세하게 100바늘을 꿰매야 할 정도의 중상이었다.[4] 굉장히 막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당시 뱅크스는 펠레와 반대방향에 있다가 크로스를 따라 올라온 상황이라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거기다 펠레의 헤딩은 골대 2야드 앞에서 바운드 되어 궤적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뱅크스는 서있던 자리에서 오른쪽 뒤로 대각선 방향으로 몸을 날려야 했고, 그런 자세에서 옆으로 걷어내거나 잡아내는 건 불가능했기에 손가락으로 위쪽으로 튕겨보내 공을 크로스바 위로 걷어내는 것만 가능했다. 뱅크스 스스로도 이건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직후 펠레의 반응을 보고 막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괜히 세기의 선방으로 불리는게 아니다.[5] 막아낸 이후 고든 뱅크스는 "앞으로 사람들은 저를 월드컵 우승이 아니라 그 선방으로 기억할 겁니다. 그건 그럴만한 것이었어요."라고 회상했다.[6] 쉴튼 또한 잉글랜드의 레전드 골리 중 하나이다.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공식 경기를 소화한 선수인데(1374경기), 보통 축구 팬들에게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농락당한(...) 골키퍼라고 하면 알 것이다.[7] 지금 현재도 EPL은 자국인 슈퍼 스타 플레이어보다 외국인 슈퍼 스타 플레이어가 많다는 평가가 우세하다는 것을 본다면 어느 정도는 맞는 얘기인 듯하다. 그런데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드디어 조던 픽포드라는 훌륭한 골키퍼가 나왔다.[8] 물론 그린은 당시 리그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여줬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는 듯 했으나 본선에서 너무 큰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