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판바스턴

 


'''마르코 판바스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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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아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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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판바스턴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1988 · 1989 · 1992
1988 · 1992
1988 · 1989
1983-84 · 1984-85 · 1985-86 · 1986-87
1989-90 · 1991-92



'''베스트팀'''
1989 · 1990 · 1992
'''UEFA 유로 역대 베스트 XI'''[32]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88'''

''' 이름 '''
<color=black,#e5e5e5> '''마르코 판바스턴'''
'''Marco van Basten'''
''' 본명 '''
<color=black,#e5e5e5>마르셀 판바스턴
Marcel van Basten
''' 출생 '''
<color=black,#e5e5e5>1964년 10월 31일 (59세) /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주 위트레흐트시
''' 국적 '''
<color=black,#e5e5e5>네덜란드
''' 신체 '''
<color=black,#e5e5e5> 188cm|체중 93kg[1]
''' 직업 '''
<color=black,#e5e5e5>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감독
축구행정가
''' 소속 '''
<colbgcolor=#12183a> ''' 선수 '''
<color=black,#e5e5e5>'''AFC 아약스 (1981~1987)'''
'''AC 밀란 (1987~1995)'''
''' 감독 '''
<color=black,#e5e5e5>용 아약스 (2003~2004)[2]
네덜란드 대표팀 (2004~2008)
AFC 아약스 (2008~2009)
SC 헤이렌베인 (2012~2014)
알크마르 잔스트레이크 (2014)
네덜란드 대표팀 (2015~2016 / 수석코치)
''' 기타 '''
<color=black,#e5e5e5>국제축구연맹 (2016~ / 기술위원장)
''' 국가대표 '''
<color=black,#e5e5e5>58경기 24골 (네덜란드 / 1983~1992)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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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2183a> ''' 종교 '''
가톨릭
''' 별명 '''
위트레흐트의 백조[33]
''' SNS '''


1. 소개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2.1. 1993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평가
5. 지도자 경력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6.3. 출전 기록
7. 판바스턴에 대한 말말말
8. 여담
9. 논란 및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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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마르코 판바스턴은 네덜란드축구 선수 출신 축구 행정가이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이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았고, 2016년부터 FIFA 기술위원장을 맡고 있다.
비교적 짧은 활동기간에도 불구 발롱도르를 3번 수상한 전설적인 선수로, 스트라이커의 교과서라 불린다.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더불어 1980년대 중후반~1990년대 초반 네덜란드AC 밀란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오렌지 삼총사'''의 일원이다.
티에리 앙리, 안드리 셰브첸코, 필리포 인자기, 뤼트 판니스텔로이, 디디에 드록바 등 1970년대생 스트라이커들의 한결같은 우상은 바로 판바스턴이었다.
별명은 Il cigno di Utrecht(위트레흐트의 백조)이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AFC 아약스


[image]
축구선수 아버지와 체조선수 어머니를 둔 운동 선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여섯 살 때부터 위트레흐트 유소년 팀에서 뛰게 된다. 이리도 어린 선수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것이야말로 네덜란드 축구의 전통이자 저력이기도 하며, 현재도 학교를 못 들어간 소년들 중 특출난 소년들은 몇 살 위의 형들과 같이 어울려 공을 차기도 한다. 그의 재능은 개중에서도 특출난 것으로, 15세 때 명문 아약스로 팀을 옮기게 되고, 16세인 1982년 시즌 토탈 사커의 아이콘 요한 크루이프와 교체되며 데뷔, 골을 넣으며 커리어를 시작한다. 시대와 시대, 토탈과 압박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당시 유럽무대에서 다크호스 역할쯤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아약스에서 16세의 나이로 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 시즌 리그 1경기, 컵 경기 1경기를 뛰고 마무리하게 된다.
하지만 17세의 그에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즌 그는 컵 경기 포함 25경기에 13골을 맹폭했고, 전설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하늘이 내려준 재능도 엄청나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아약스에서 뛴 6시즌 동안 133경기 128득점을 기록하며 4시즌 연속 득점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85-86 시즌에는 유럽리그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린 선수에게 주는 유러피언 골든부트를 수상한다. 얼핏 경기당 한 골에서 모자라 보이는 기록이지만, 시간으로 환산해 보면 그는 90분 당 1.5골 가까이 상대편의 골대에 공을 집어넣었다. 여기에 정점을 찍듯 판바스턴은 컵 위너스 컵에서 아약스를 우승시키며 22살의 나이에 네덜란드 에레디비시를 평정하고 거액의 이적료와 함께 AC 밀란으로의 이적, 세리에 A에 첫 발을 내딛는다.
이렇게 좋게 마무리한 시즌이었으나, FC 흐로닝언과의 경기에서 입은 오른쪽 발목 부상은 이후 다른 부상 친구들을 불러들이며 판바스턴을 괴롭히게 된다.[3]

2.1.2. AC 밀란


[image]
이 때의 밀란이 바로 그 유명한 밀란 제너레이션으로 전 세계 축구사를 통틀어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꼽힌다.[4] 특히 이 시기의 밀란은 토탈 풋볼을 한층 발전시킨 압박 축구를 창시하며 전술적 혁신으로도 명성을 높였다. 이는 여러 팀과 축구인들이 그 단초를 마련하기도 햇지만, 무엇보다도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밀란 선수들과 명감독 아리고 사키의 공로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판바스턴은 이 위대한 팀의 오렌지 삼총사 중에서도 에이스였다.
판바스턴이 데뷔때부터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데뷔 시즌부터 문제는 있었는데, 첫 경기는 페널티 킥 골로 장식하며 데뷔를 하지만 잠깐 무실점 경기가 이어지다 왼발목 부상으로 데뷔 시즌을 거의 소득 없이 보낸다. 그러나 다음 시즌부터는 득점포를 퍼부으며 은퇴하기 전까지 147경기 90득점을 기록, 2번의 득점왕을 차지했다. 무릎 부상에 시달린 기간이 길고 심장마저 말썽을 부려 슬럼프에 빠진 기간이 있었음에도 실제 경기 시간으론 90분당 한 골 이상을 퍼부어대는 미친 득점 생산능력을 지니고 있었다.[5]
명성을 고려했을 때 세리에 A에서의 그의 활약은 좀 아쉬운 감이 있다. 공격수로서의 역할은 완수했지만, 명성에 비해 기여한 바가 미묘하기 때문이다. 우승한 시즌은 첫 시즌과 31경기 25골로 득점왕에 오른 1991-92 시즌, 사살상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2-93 시즌이었는데, 6시즌 동안 3회 우승이라면 충분히 훌륭한 기록이나 당시 축구계에 '''압박'''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며 클럽 대항전을 독식하던 밀란 제너레이션의 에이스로써는 조금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첫 시즌과 마지막 시즌은 부상으로 신음하며 결장이 잦았기에 우승에 있어 공은 있으나 주축이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가지 감안해야 될 점은 이 시기 세리에 A는 세계 최고의 리그이면서 결코 한 팀이 독주를 하는 법이 없었고, 동시대 밀란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UC 삼프도리아 등도 강했으나 역시 가장 컸던 장벽은 '''마라도나SSC 나폴리.'''
허나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등 공신이었다. 사실상의 데뷔 시즌인 88-89 시즌 네덜란드UEFA 유로 1988 우승을 이끌고 돌아온 판바스턴은 1경기를 제외한 밀란의 전경기를 풀타임 출장했으며, 유러피언컵에선 10골을 때려박았으니 우승을 진두지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6] 특히 이 시즌 그가 기록한 33골 중에 12골이 결승골이나 만회골이었으니 소위 영양면에서도 1급이라 할 수 있다. 이 활약에 힘입어 판바스턴은 1988년 발롱도르를 수상하기에 이른다.
1989-90 시즌의 판바스턴은 지난해의 혹사 탓에 부상을 입으며 고생하나 그럼에도 리그에서는 득점왕을 차지하는 활약을 보였고 밀란의 유러피언컵 2연패에 기여했다. 특히 이 시즌은 밀란 선수들의 부상과 노쇠화 문제로 어수선했다는 점, 12번의 결승골 혹은 만회골을 기록하는 영양 만점 활약으로 발롱도르 2연패를 달성한다.
하지만 90-91 시즌 밀란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 막혀 챔스 3연패에 실패했고,[7] 공교롭게도 그 해 판바스턴은 월드컵 후유증, 부상, 심장 트러블 등으로 최악의 슬럼프에 시달린 해였고(코파 이탈리아 4강 자책골, 밀란 패배.) 체력에 문제가 있었기에 챔피언스 리그는 출장도 적었다. 밀란 역시도 최악의 난조를 보였는데 월드컵이 시시하게 끝나고 오프사이드 룰을 공격적으로 개편하고 백패스를 손으로 잡지 못하게 하자 오프사이드 트랩을 즐겨 사용하던 밀란 전체가 심대한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1991-92 시즌은 판바스턴이 정말 오래간만에 아무 대회 없이 휴식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고의 프리 시즌을 맞이한 해였다. 거기다 마르세유 조명 땡깡 사건의 여파로 밀란이 1년 동안 유럽 대회 출전권을 박탈당했기에 나갈 대회가 없기도 했다. 원기왕성한 판바스턴은 리그에서는 최고의 활약을 선보이며 우승을 이끌었으며 17번의 결승골과 만회골을 기록하며 1급 영양사 자격증을 과시, 통산 3번째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된다. 당시로써는 요한 크루이프, 미셸 플라티니와 함께 최다 수상 기록.[8]
마지막이었던 1992-93 시즌은 부상으로 신음했으나 실력과 활약은 더욱 원숙해진 시즌이었다. 대회를 가리지 않고 거의 신들린 듯한 활약을 보이던 판바스턴이었으나 1월에 당한 부상은 6개월짜리였다. 밀란은 마르세유에서 야심차게 영입한 파팽이 판바스턴의 공백을 잘 메우며 결승까지 진출한다. 판바스턴은 오른쪽 발목이 완치되지 않았음에도 무리한 출장을 감행하나 밀란은 또다시 마르세유에게 가로막혀 준우승에 머무르고 만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부상이 재발한 판바스턴은 선수생명 연장을 위해 당시로서는 생소샜던 연골 이식 수술까지 받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수술결과는 좋지 못했고 결국 그의 커리어는 완전히 끝장나게 된다. 한편 그가 이 시즌 1월까지 챔피언스 리그에서 기록한 6골은 그 시즌 챔피언스 리그 득점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1993-94 시즌 판바스턴은 없었지만 AC 밀란은 크루이프의 드림팀 바르셀로나를 4:0으로 격파하고 빅 이어를 되찾는다.
결국 1995년 재활을 포기한 판바스턴은 불과 31살의 이른 나이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93년 부상이후 사실상 출장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30살이 되기도 전에 은퇴해야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선수 시절 기록은 클럽 통산 373경기 277득점, 리그 280경기 218득점.

2.1.2.1. 1993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사족이지만 이 결승전은 여러모로 논란거리가 많은 경기였다.
당시 마르세유리그앙 5연패를 하던 거대 명문으로 선수단도 파비앵 바르테즈아베디 펠레, 루디 푈러, 마르셀 드사이, 디디에 데샹 등 화려한 멤버를 보유한 강 팀이긴 했다. 어쩌면 그런 만큼, 그들은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던 챔피언스 리그에 심하게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이 갈증은 상술됐던 시즌 결승전에서 베오그라드에 승부차기 패배를 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마르세유는 밀란과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앞두고 있었지만 리그 우승의 향방을 결정할 중요한 경기인 발렝시엔과의 리그 마지막 경기도 앞두고 있었다. 마르세유는 고민 끝에 특단의 결정을 내리고, 발렝시엔의 선수단 일부에게 현금을 건냈고, 손쉽게 리그 우승을 차지함과 동시에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약물 복용도 논란 거리다. 이는 당시 주전 멤버였던 장 자크 에들리가 자서전에서 '''결승전 경기 전에 루디 푈러를 제외한 선수단 전원이 약물을 복용했다'''고 증언했기 때문.[9] 하지만 유에파는 이 증언이 너무나도 때늦은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 별다른 조사에 들어가지 않아 이는 프랑스 축구 협회에 의해 공식화된 승부조작과는 달리 비공식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음모론을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유에파와 프랑스를 연관지어 쑥덕거리기도 한다.[10] 마르세유뿐 아니라 프랑스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기도 하기에 말이다.[11][12]
이듬해 밀란은 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함으로 설욕하게 된다. 당시 밀란은 세리에 A를 3연패하고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자주 올라가는 최강팀이었으니...

2.2. 국가대표 경력


[image]
그의 위상에 비하면 국가대표 커리어는 뭔가 미묘한 편이다. UEFA 유로 1988에서의 엄청난 활약과는 반대로 월드컵은 딱 한 번 나갔을 뿐이고 그나마도 무득점이라는 것.
UEFA 유로 1984에선 별로 뛰지도 못하긴 했지만,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승점은 물론 골득실마저 동일했으나 다득점에서 밀려 조별예선 탈락했다. 1986 멕시코 월드컵네덜란드벨기에와의 플레이오프 끝에 역시 예선탈락하게 된다.
[image]
20대 중반 전성기 시절에 참가한 UEFA 유로 1988에서 5경기 5골[13] 1어시스트로 맹활약하며 네덜란드를 사상 최초의 메이저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소련과의 결승전에서 리나트 다사예프를 상대로 꽃아넣은 발리슛은 UEFA 유로 역대 최고의 골로 회자된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선 감독 교체 등으로 팀 전체가 지지부진한 경기력을 보였다. 유러피언 컵 2연패를 달성하고 바로 월드컵에 임했는데 우승을 노릴 것이라던 기대와 달리 조별예선에서 3무를 거두게 된다. 조별예선에서 죽을 쓴 탓에 16강 부터 서독을 만나게 되었고, 결국은 서독에게 1-2로 패퇴하고 만다. 판바스턴의 월드컵 경험은 이것이 끝이다. 이후 UEFA 유로 1992에도 참가했으나 괜찮은 경기력에 비해 득점은 올리지 못했고, 네덜란드도 덴마크와의 4강전 승부차기에서 5:4로 패하며 탈락했는데 이 승부차기의 유일한 실축자가 바로 판바스턴이었다. 그 뒤로는 설욕의 기회도 없이 92-93 시즌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선수생명이 끝나면서 유로 1992가 그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가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난 10개의 평범한 골과 9개의 아름다운 골 중 10개의 평범한 골이 좋다. 공격수는 골이 모든 것이니까.'''[14]

판바스턴은 볼을 컨트롤하는데 있어서 특출난 강점을 보였다. 이상하게 튕기는 공, 바운드 되는 공, 하늘에서 날아드는 공, 괴이한 스핀이 걸린 공을 시저스킥, 오버헤드킥, 슬라이딩 슛팅 등의 발리슛으로 잡아내는 기술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판바스턴은 매우 우아한 공격수로 회자되곤 하는데, 그의 킥이나 트래핑이 몹시 빠르고 간결했기 때문이다. 골대를 등지다가 트래핑도 하지 않고 발리슛을 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동작이나 정확한 트래핑을 수비가 막아내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달인의 경지에 달한 오른발은 물론 왼발 역시 남들 하는만큼 찰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렇게 킥 능력이 뛰어났던 만큼 공이 어려워 보이는 위치에 오더라도 시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남이 보기에는 아주 어려운 각도라도 슛하거나, 아니면 약간이라도 각도를 살려낸 후 재빠르게 슛으로 연결하곤 했다. 이러한 능력 덕분에 슛이 예측되지 않는 각도에서 심지어 수비수도 붙어 있는데 엄청 빠른 타이밍에 시도한 슛이 성공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킥의 정확성도 발군이었고, 킥이 정확한 만큼 프리킥도 당연히 잘 찼다.
판바스턴은 킥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헤딩도 슈팅과 연계 둘 다 훌륭했으니 무리하게 돌파하기보단 크로스를 기다리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전형적인 타겟 스트라이커는 공이 공급되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만큼 존재감이 사라진다는 약점이 있으나, 그가 몸담았던 팀들 중 판바스턴에게 공을 공급해 주지 못할 만한 팀은 없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15] 이러한 장점으로 인해 '''스트라이커의 교과서'''라는 별명이 붙는게 이상하지 않은 것.
판바스턴은 앞서 언급된 호나우두와 같이 강력한 돌파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공중전과 연계가 가능한 데다 킥력 및 슛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범위가 정말로 탁월했다. 또한 지능적이고 이기적이지 않은 스트라이커의 능력 중 하나인 오프 더 볼 상황에서의 움직임으로 인한 수비수 몰이에도 뛰어났다. 요즘 선수로 따지면 카림 벤제마에게 프리킥을 장착시킨 후 거의 모든 능력치를 대폭 상향 조정했다 할 수 있다.[16]
그의 플레이는 그야말로 명료한 스트라이커의 교본과도 같은 것이어서 당대 최고의 선수면 으레 그렇듯 많은 꿈나무들을 매료시켰고 그들을 세계적인의 플레이어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이후 세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라 할 수 있는 앙리와 셰브첸코는 판바스턴이 자신들의 우상이었음을 공공연히 밝히곤 한다.
그러나 그는 너무 긴 시간 동안 부상과 싸워야만 했다. 22살 때인 1986년에 당한 발목 부상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고, 장기 부상을 너무 많이 당했다. 선수 생명이 끝난 92-93 시즌 그의 나이는 겨우 29살이었다. 이 시기 그는 과감히, 당시로서는 최첨단 수술로 거의 전례가 없던 연골 이식 수술을 받는 결단을 내리지만, 수술은 대실패로 끝났고 그는 커리어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축구 선수로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할 나이이고 실제로도 기량 또한 원숙해져서 마지막 시즌에는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괴물처럼 골을 집어넣었기에 현재의 의학 기술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 평가


2013년, 월드 사커 매거진에서 73명의 패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진행했을 때 공격수 부문에서 5표를 받았으며[17], 2017년 각국 언론에서 발표한 역대 축구 선수 랭킹에서 네덜란드 '부트발 인터내셔널' 10위, 폴란드 '다리우쉬 쿠로프스키' 10위, 영국 '포포투' 13위에 랭크되었다. 평가하는 매체마다 차이가 큰편인데, 보통 20위 안에는 무조건 들어오나 한 자릿수까지 랭크되지는 못하는 편.[18]
기본 포지션은 중앙 공격수였지만,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수행했던 요한 크루이프는 일반적인 스트라이커보단 플메형 공격수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판바스텐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AC 밀란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꼽힌다. 비록 호나우두AC 밀란을 잠시 거쳐갔다고 하나 밀란 내에서의 두 선수의 위상과 업적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판바스턴의 특징이라면 타 레전드급 선수들에 비해 훨씬 짧은 현역기간에도 그들에게 전혀 꿇리지 않는 업적을 쌓았다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28세에 발롱도르 3회 수상'''을 달성하고 31세의 한창 나이에 은퇴했다. 체감이 잘 안 온다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29세[19], 미셸 플라티니가 만 30세에 발롱도르 3회 수상을 달성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만약 조금 더 그라운드를 누빌 수 있었다면 어쩌면 지금의 호날두, 메시처럼 발롱도르를 4,5번까지도 수상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20]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건 없고, 발롱도르가 축구 선수 평가의 절대기준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짧은 기간에 보여준 활약이 대단했다는 방증도 된다.
주로 호나우두, 게르트 뮐러, 푸스카스, 호마리우 등과 함께 축구사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반열에 꼽힌다. 사실 역대 최상위 반열의 스트라이커는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려운데, 판바스턴은 특히 다른 스트라이커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거나 하지는 않아서 VS놀이 자체가 흔하지 않은 편이다. 다만 굳이 서술을 하자면, 판바스턴은 호나우두처럼 경기장을 찢는 느낌의 압도적인 지배력을 보여주거나 뮐러나 호마리우처럼 어마어마한 득점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애시당초 현역기간 자체가 짧기에 비교자체에서 불리한 점도 있다. 다만, 판바스턴의 경우 뮐러나 호나우두처럼 직접 공을 몰고 질주해서 넣기보다는 레알마드리드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 가까운 타겟멘를 주로 수행해서 그렇지 그의 득점력 이외의 다른 능력 또한 충분히 훌륭하였고, 득점 자체에 있어서는 단순히 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우아하게 득점하는 신기한 장면을 많이 만들어내기도 하였다.'''그라운드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이후의 별칭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판바스턴이 축구사에 남긴 커리어는 그리 길지 못했지만, 그 짧은 시간내에 유로피안컵 2연패[21], 리그 무패우승[22], 자국 최초의 메이저대회 우승[23]에 발롱도르 3회 수상[24]까지 '''축구선수로서 일생 하나 이루기 힘든 업적들을 모조리 단기간내에 이루며 임팩트를 남기고 그라운드를 떠났다는 것''' 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선수였던 것이다.
위에서도 몇차례 서술되지만, 판바스턴이 이끌던 AC 밀란은 100년이 훨씬 넘는 축구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팀 중 하나로 평가된다. 2007년 월드 사커 매거진 평가에 의하면, 이때의 밀란 제너레이션펠레산토스 FC,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이룬 요한 크루이프AFC 아약스프란츠 베켄바워FC 바이에른 뮌헨[25], 밥 페이즐리가 이끌던 리버풀 FC의 붉은제국 시절, 더 나아가 유러피언 컵 5연패를 달성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레알 마드리드 CF를 모조리 제치고[26] '''클럽팀으로는 역대 1위''', 국가대표팀을 포함하여 4위에 선정되었으며 '''이 최강의 클럽팀을 이끌던 에이스가 바로 판바스턴이였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밀란은 디에고 마라도나SSC 나폴리 마냥 판바스턴의 원맨팀은 아니였고 오렌지 삼총사를 포함하여 막강한 동료들이 함께하였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분명 판바스턴이라는 불세출의 스트라이커가 있었고, 팀 스쿼드가 화려하고 어느정도 성과를 낸다고 무작정 역대급 팀으로 칭송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은 레알 마드리드의 갈락티코 1기, 혹은 호나우두의 인테르, 바르사 시절을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물론 득점수가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 의해 인플레이션 된 현대 축구와 비교시 판바스턴의 AC 밀란이 잘 와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도 평론가 혹은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역대 최고의 반열로 평가받는 펩 과르디올라바르샤 시절과 비교해서도 위상이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시 밀란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다만, 최강의 밀란 제너레이션 시절 이후 또다시 밀란이 새롭게 부흥하면서, 축구를 즐기는 젊은 나이대는 오히려 카카에르난 크레스포, 안드리 솁첸코를 주축으로 하는 2000년대의 밀란이 더 와닿아 저평가 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게르트 뮐러도 마찬가지인데, 적어도 19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부터 축구를 즐기던 사람들, 즉 20-30대들에게는 호나우두라는 전설적인 스트라이커가 강렬하게 남았고, 당시 축구판은 지금과 달리 춘추전국시대였기에 그 이전에의 축구 선수들이 대체적으로 인식자체가 적고 평가도 박한 편이다.
결국 사람들이 기억하는 스트라이커 마르코 판바스턴의 추억은...
...이 거의 전부인 셈이다. 그 기껏해야 3년 정도의 기간이 판바스턴의 화양연화였다.
짧아도 너무 짧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야말로 '''하늘마저 시기한 선수'''.
그가 은퇴하던 날, 아드리아노 갈리아니 AC 밀란 부회장은 '''축구계는 이제 그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잃었다'''라는 말로 그 괴로움을 토로했다.

5.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 9년 만인 2004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한다. 조 1위로 지역 예선을 뚫고 2006 독일 월드컵 본선에 오르며 감독으로서는 다소 젊은 40살에 이전까지 감독 경험이 전무한 그가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불식시킨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16강에서 만난 포르투갈에게 패하며 탈락하고 말았다.[27]
UEFA 유로 2008에서도 판바스턴은 네덜란드 대표팀을 지휘했고, 조별리그에서 2006 월드컵 우승국, 준우승국인 이탈리아프랑스를 각각 3-0, 4-1로 완파하면서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오른다. 하지만 8강전에서 만난 '''히딩크''' 감독의 러시아에게 1-3 충격패를 당하며 탈락했고, 결국 대회가 끝난 후 사퇴한다.[28]
사실 판바스턴은 네덜란드 팀의 감독을 맡는 동안 전술적인 측면에서는 꽤나 괜찮은 족적을 남겼지만, 지도 성향 면에 있어서는 위계 질서[29]와 조직력을 지나치게 중시한지라 몇몇 선수들과는 불화가 있기도 해서 네덜란드 국대 감독으로써는 그렇게까지 평판이 좋은 편은 아니다. 특히 마르크 판보멀은 이로 인해 판바스턴과 심각한 불화를 일으키며 대표팀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판보멀 또한 한 성깔 하는 선수였던지라 불화가 일어날 만 했다.
2008-09 시즌 아약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한편, 첼시카를로 안첼로티의 후임으로 판바스턴을 생각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었다. 이후 2012년부터 2014년까지 SC 헤이렌베인을 맡았고, 2014년 AZ 알크마르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9월 12일 건강문제로 자진 사퇴하였다. 선수시절부터 그를 괴롭힌 심장질환으로 인한 것이라 많은 축구팬들이 그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판바스턴은 AZ에 자문으로 계속 활동할 예정이다. 2015년 7월 8일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로 선임되어 네덜란드 대표팀의 수석코치로 활동하다가 2016년 9월, 사임하였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88, 1989, 1992
  • FIFA 올해의 선수: 1992
  • UEFA 유로 골든부츠: 1988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88, 1992
  • UEFA 유로 올타임 XI: 2016
  • 에레디비시 득점왕: 1983-84, 1984-85, 1985-86, 1986-87
  •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 1985
  • 세리에 A 득점왕: 1989-90, 1991-92
  • 유러피언 골든부츠: 1985-86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88-89
  • 브라보 상: 1987
  • FIFA 100: 2004
  • FIFA 20세기 유럽팀: 1998
  • 옹즈도르: 1988, 1989
  • 옹즈 드 옹즈: 1987, 1988, 1989, 1991, 1992
  • IFFHS[30] 세계 최우수 선수: 1988, 1989, 1990
  • IFFHS 레전드: 2016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988, 1992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89, 1990, 1992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2
  • AC 밀란 명예의 전당

6.3.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81-82
아약스
에레디비시
1
1
1
0
-
-
1982-83
아약스
에레디비시
20
9
5
4
-
-
1983-84
아약스
에레디비시
26
28
4
1
2
0
1984-85
아약스
에레디비시
33
22
4
2
4
5
1985-86
아약스
에레디비시
26
37
1
0
2
0
1986-87
아약스
에레디비시
27
31
7
6
9
6
1987-88
AC 밀란
세리에 A
11
3
5
5
3
0
1988-89
AC 밀란
세리에 A
33
19
4
3
9
10
1989-90
AC 밀란
세리에 A
26
19
4
1
9
4
1990-91
AC 밀란
세리에 A
31
11
1
0
2
0
1991-92
AC 밀란
세리에 A
31
25
7
4
-
-
1992-93
AC 밀란
세리에 A
15
13
1
0
5
6

7. 판바스턴에 대한 말말말


[image]

'''자, 이 녀석이 바로 새로운 크루이프네.'''

요한 크루이프, 마촐라에게 판바스턴을 소개하며

'''크루이프는 우리에게 마르코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운 선수가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을 즉시 이해했다.'''

산드로 마촐라

'''내가 본 최고의 선수? 판바스턴이나 호마리우 중 하나겠지.'''

디에고 마라도나

'''정말 우아했지. 그는 땀조차 흘리지 않는듯 했는데 견고하기까지 했어. 양발로 골을 넣을 수 있었고 헤딩에도 능했지. 축구사에 있어 그의 족적은 너무나 분명해. 유로 1988 결승전의 골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프랑코 바레시

'''난 언제나 판바스턴이 내가 본 최고의 선수라고 말해왔다. 그 같은 재능을 펼칠 수 있던 기간이 그렇게 짧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발롱도르를 3번이나 수상했지. 31살에 은퇴했는데 말이야.'''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판바스턴은 모든 공격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에게 조차도 그랬고 모두가 그와 닮기를 원할 정도였다.'''

조지 웨아

'''그는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스트라이커였다. 그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그는 공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마우로 타소티

'''현역 시절의 그와 비교될 실력을 갖춘 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유로 1988에서 넣었던 그의 골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뤼트 판니스텔로이

'''그는 골만 넣는 선수가 아니었어요. 민첩했고 1:1에 강했고 공중에서도 강했고 양발에도 능했어요. 그가 못하는 걸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죠.'''

필리포 갈리

'''부상은 그가 커리어 최상의 폼에 있을 때 그를 갉아먹었다. 카펠로의 새롭고 회춘한 밀란의 선봉에 있었을 때 말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이미 그는 역대 최고의 9번이라 평가될만한 것들을 이루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유로 1988 결승전에서 소련을 상대로 터진 그의 발리를 이야기하지만, 물론 그 골은 엄청난 골이지. 마르코는 아약스와 밀란에서는 더 멋진 골들을 득점했었다.'''

로날드 쿠만

'''우리는 그가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줄 알고 좋아했죠.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생각해야 했어요. 판바스턴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선수였어요. 완벽한 선수였죠.'''

존 반스, 유로 1988에서 판바스턴에게 해트트릭 폭격을 맞은 후

'''판바스턴은 플라티니보다도 한 수 위이다.'''

로타어 마테우스

'''난 절대 선수에게 10점 만점에 10점을 주지 않아. 하지만 판바스턴이라면 9.5점은 가져야지.'''

파비오 카펠로

'''축구계는 이제 그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잃었다.'''

아드리아노 갈리아니, 판바스턴의 너무 이른 은퇴를 슬퍼하며

'''판바스턴, 그 신성이란!'''

지아니 브레라

'''우리가 판바스턴을 다시 보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할지 느껴지지 조차 않는다.'''

아리고 사키

'''스트라이커가 갖춰야 할 모든 자질을 갖췄고, 페널티 지역 안에서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기술을 지녔다. 수비수들에게는 악몽 같은 존재였다.'''

게오르게 하지

'''마르코가 뽑힌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데니스 베르캄프 자신의 베스트 11에 판바스턴을 뽑으면서

'''80~90년대 밀란은 세계 최강의 팀이였다. 그 곳에는 파올로 말디니, 프랑코 바레시, 루드 굴리트 등과 같이 역사에서 손에 꼽힐만한 선수들이 많이 있었고, 나는 그들과 함께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마르코 판바스턴과는 더...'''

카를레스 푸욜

'''어렷을 적 나는 밀란으로의 이적을 꿈꿨었다. 그리고 판바스턴은 밀란으로 가고 싶었던 이유였다.'''

라울 곤살레스

'''내가 뢰블레에서 12번을 단 이유는 그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티에리 앙리


8. 여담


  • 어린 시절 타 포지션 전향 제의를 받은 적 있다고 한다. 이유는 공격수가 수비수들의 집중 견제를 받기 때문에 부상 당할 확률이 높아서...[31] 그리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 이탈리아 진출 이전 먼저 관심을 나타낸 쪽은 인테르였다고 한다. 그러나 더 적극적인 구애를 했던 밀란으로 이적.
  • 현역 시절 트래쉬 토크에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라이벌 인테르베르고미를 못 생겼다는 이유로 심하게 놀렸다고 한다.


  • 은퇴한 지 10년이 넘은 시점의 영상
  •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자서전인 '나는 즐라탄이다'에 코치로서 등장한다. 당시 루이 판할 단장과 로날드 쿠만 감독의 코칭에 대해 언급하면서 얘기를 풀어나간다. 당시 전술에 대해 지적이 많았던 판 할 단장이 "내려와서 수비에 가담해야 한다."라고 말하자 그것에 대해 판바스턴에게 물어보았고, 판바스턴은 "공격에 쓸 체력을 수비에 쓸 필요는 없다."라고 하며 즐라탄을 지지해준다. 이 때문에 판 할 단장에게 대들게 되고, 서로 껄끄러워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즐라탄이 2번째 시즌에 이탈리아로 진출하고 싶다고 하자 '아직은 네덜란드에 머물러라'라고 하며 조언을 해준다.
  • 2017년 1월, FIFA 기술위원장을 맡고있던 판바스턴이 오프사이드 폐지를 제안해 축구계에 충격과 공포를 몰고 왔다. 이후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지자 "당장 시행하자는 뜻은 아니었다"며 한 발 물러섰다. 판 바스텐 "오프사이드 폐지 검토? 과장된 이야기"
  • Pes2020 모바일에서도 역시나 명성대로 개사기이다. 이전의 레전드 스트라이커들인 호마리우바티스투타를 능가하는 성능을 보인다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80년대 공격수들 중 1위에 이름을 올렸다.
[image]

9. 논란 및 사건사고


생방송 진행 중에 다른 진행자에게 나치식 인사를 한것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1] 유소년 81kg, 선수 87kg[2] AFC 아약스 2군 팀.[3] 훗날 크루이프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에 대해 회상하는데, 그말은 즉슨 흐로닝언 전에 판바스턴의 발목이 불안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내보내서 커리어를 망쳤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한것, 그래서 자신을 싫어했거나 혹은 자신의 조언을 무시한 것 같다고 술회했다.[4] 비슷하게 시대를 풍미한 팀으로 프란츠 베켄바워가 이끌었던 FC 바이에른 뮌헨, 2010년대 6관왕을 이룬 FC 바르셀로나, 추가로 개편 이후 최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3연패를 이룬 레알 마드리드 CF 정도가 꼽힌다. 거기에 챔피언스리그 5연패를 이룬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레알 마드리드, 1970-80년대의 최강자인 ‘붉은 제국’ 리버풀 등도 있다.[5] 특히 이 시기의 세리에 A는 두말할 나위 없는 세계 최고의 리그였으며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수비는 자물쇠같이 견고하고 1:0의 미학을 아는 리그라는 점 또한 판바스턴의 평가에 있어 플러스 요인이 되면 되었지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6] 당시엔 경기 수가 적었기 때문에 요즘과 달리 정말로 빛나는 기록으로, 그 전후로 15년 가량 득점왕은 대개 6, 7골 선에서 정리되는 게 상식이었다.[7] 이 때 밀란은 홈에서 1:1로 비기고, 원정에서 1:0으로 지고 있다 인저리 타임에 마르세유 홈 구장의 조명이 망가져 경기가 중단된 이후 경기를 뛸 수 없고 재경기를 해야 한다며 땡깡을 피운다. 이는 밀란이 유러피언컵 경기 중 영국의 끝내주는 안개 때문에 재경기를 통해 진출하게 된 경험이 있기에 해 볼만한 땡깡으로 간주되었을지 모르나, 이번에는 유에파가 밀란에게 닥치라고 대갈하며 3:0 몰수패를 선고하는 것으로 끝났다. 마르세유는 이후 준우승.[8] 이 기록은 훗날 리오넬 메시2009년부터 2012년까지 4회 연속 수상하면서 깨지게 된다.[9] 물론 그 당시에도 도핑 테스트는 있었다. 당연히 음성 반응이라 도핑 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10] 당연히 많은 밀란팬들이 이렇게 생각하며 이스탄불의 기적과 싸잡아 2번 우승을 도둑맞았다고도 한다. 그래봐야 인저리 타임에 조명 나갔으니 재경기해야 된다는 식의 땡깡이지만 말이다. 특히 이스탄불은, 뭐 다이빙에나 오심에 자유로운 구단은 어디에도 없으니까.[11] 어쨌거나 승부조작이 사실로 드러난 이후의 마르세유는 챔스 우승은 보존했지만 그 해의 리그 우승과 더불어 다음 해의 챔스출전권이 박탈되고 2부 리그로 강등당하게 된다. 1970년대 초, 특히 1980년대 후반은 유럽과 프랑스를 호령하던 거대 명문구단 마르세유는 이후 기나긴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 뭐 암흑기라 해도 1990년대 후반부터 다시 대체로 좋은 성적을 내주었으나, 비틀거릴 때도 가끔 있었으니 프랑스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관중동원력-약소팀은 평관 10,000명 언저리에 리옹 등 다른 거대 클럽조차 40,000을 달성하지 못해 쩔쩔매는데 40,000은 가볍게 넘고 50,000을 넘보는 평관과 폭풍 5연패 시절의 위엄을 고려한다면 09-10에 와서야 간신히 우승하게 된 것은 너무나도 길고도 긴 기다림이었다. 거기다 비참하게도 승부조작이 판명난 이후 몇 시즌 간은 경기장을 찾는 팬들의 발길이 처절하리만치 뚝 끊어지기도 했다. 이후 서서히 예전과 같은 모습을 회복하긴 했지만 말이다.[12] 리그앙 전체의 수준이 떨어지는 계기라 할 수 있다. 이 거대구단의 몰락 이후 리그앙의 여러 구단이 챔피언스 리그에 도전했지만 오직 모나코만이 결승에 한 번 올라갈 수 있었을 뿐이다. 그나마 199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진 낭트, 파리, 모나코 정도가 4강을 가는 등 꾸준했으나 그 이후로는 리옹을 제외하곤 조별 리그를 넘기도 버겁게 되었다. 그 이후는 기름부자들이 등장하기도 했고, 현재는 어마어마한 자본으로 리그앙을 독주하는 PSG와 그 뒤를 쫓는 리옹, 렌, 모나코, 마르세유, 릴 등의 구성으로 변해버렸다.[13] 이 중 3골을 잉글랜드와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득점했다.[14] 그런데 정작 판바스턴은 발리슈팅이나 시저스 킥 같이 아크로바틱한 골을 생산하는 능력에서 역대 최고로 손꼽히는 게 아이러니다. 한편 동시대의 다른 레전드 로베르토 바조는 저 말과 정확히 반대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돈을 내고 경기를 보러온 관중들 앞에서 평범한 골만 넣으면 실례가 아니겠냐는 말을 덧붙였다.[15] 그럴 필요가 없어서 잘 그러지 않았을 뿐이지, 어떤 특정한 이유로 2선에서의 작업이 원활치 못하다면 판바스턴은 얼마든지 2선에서의 작업도 해결할 수 있었고 종종 하프라인까지 내려와서 작업을 풀어나가기도 했다. 다만 그가 몸담았던 팀들도 팀들이고, 밀란 시절 아리고 감독이 개인기량에 의한 플레이를 극단적으로 자제하게 지시하는 바람에 이런 플레이가 화려하게 드러나진 않았다. 대신 그 탓에 감독과 많이 싸웠다고 한다. 다만 커리어가 끝난 지금으로서는 그의 광휘를 가리는 차폐막이 되는 면도 있다.[16]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주 못 막는 선수인 건 아니다. 당대 유벤투스의 독일인 센터백 위르겐 콜러는 강철 같은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맨 마킹 능력으로 판바스턴을 괴롭히던 대표적인 선수이다.[17] 호나우두 9표, 뮐러 6표 획득.[18] 보통 펠레, 마라도나, 메시, 요한 크루이프, 호날두, 베켄바우어, 디 스테파노가 고정이고, 남은 자리는 매체마다 차이가 크나 지단, 푸스카스, 플라티니, 호나우두, 가린샤, 에우제비오 등이 번갈아 선정된다.[19] 물론 동시대 메시와의 경쟁을 감안해야 한다. 왜냐면 메시가 없었을 경우 2위를 차지한 09, 11,12년도 발롱도르는 필시 호날두가 수상했을 것이기 때문.[20] 이 기록을 넘어서는 것은 만 25세에 4회 수상을 달성한 리오넬 메시와 만 27세에 3회 수상한 요한 크루이프 뿐이다.[21] 현 챔피언스리그. 호나우두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달성하지 못했다.[22] 대부분의 레전드급 선수들도 가지지 못한 업적이다.[23] 리오넬 메시조차 메이저 우승컵을 들지 못했다.[24] 게르트 뮐러는 발롱도르 1회, 호나우두는 2회 수상하였다.[25] 이때 뮌헨에는 게르트 뮐러라는 전설적인 스트라이커가 있었다.[26] 심지어 리오넬 메시와 사비, 이니에스타가 이끌던 6관왕시절 바르샤는 이 순위에 들지도 못했다. 당대 밀란이 얼마나 강한팀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27] 이 경기는 양팀 도합 4명이 퇴장당하고 16명이 경고를 받을 정도로 상당히 더티한 경기였으며, '''뉘른베르크의 전투'''이란 이명으로 더 유명하다.[28] 이 날 러시아의 3번째 골을 기록한 안드레이 아르샤빈은 경기 직후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 활약에 힘입어 아스날로 이적하게 된다.[29] 스포츠계에 흔히 만연한 똥군기를 의미한다기보단, 선수단과 코칭 스태프 간의 위계 의식.[30] 세계 축구 역사 통계 연맹.[31] 특히 재능이 뛰어난 공격수는 더욱 심한 견제를 받는다. 현재 세계 최고의 선수인 메시조차 집중 견제 앞에서는 제 기량을 뽐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