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오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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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오케(Filióque)는 ‘그리고 아들’이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이다. 즉, ‘필리오케 논쟁'을 우리말로 하면 ‘그리고 아들 논쟁’이 된다. 이는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발하는지, 아니면 성자에게서도 발하는지에 대한 논쟁이다. 이 문제는 지금껏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정교회에서는 전자의 입장을, 가톨릭과 개신교에서는 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2. 정교회의 시각
요한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하였다.
정교회에서는 위의 요한의 복음서 15장 26절 말씀을 필리오케를 반대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다.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요한의 복음서 15:26
3. 가톨릭의 시각
'Propter hanc unitatem Pater est totus in Filio, totus in Spiritu Sancto; Filius totus est in Patre, totus in Spiritu Sancto; Spiritus Sanctus totus est in Patre, totus in Filio. Nullus alium aut praecedit aeternitate aut excedit magnitudine, aut superat potestate. Aeternum quippe et sine initio est, quod Filius de Patre exstitit; et aeternum ac sine initio est, quod Spiritus Sanctus de Patre Filioque procedit.' Pater quidquid est aut habet, non habet ab alio, sed ex se; et est principium sine principio. Filius quidquid est aut habet, habet a Patre, et est principium de principio. Spiritus Sanctus quidquid est aut habet, habet a Patre simul et Filio. Sed Pater et Filius non duo principia Spiritus Sancti, sed unum principium: sicut Pater et Filius et Spiritus Sanctus non tria principia creaturae, sed unum principium.
"성자께서 성부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영원하시고 시작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신다는 것은 영원하며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1]
성부의 모든 것이나 성부께서 가지신 모든 것을 그분께서는 다른 누구로부터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가지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근원이 없는 근원이시다. 성자이신 모든 것이나 성자께서 가지신 모든 것을 그분께서는 성부에게서 가지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근원에서 나온 근원이시다. 성령이신 모든 것이나 성령께서 가지신 모든 것을 그분께서는 동시에 성부와 성자에게서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창조의 세 근원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이시듯이,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의 두 근원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이시다.
- 피렌체 공의회 칙서: "Cantate Dominio" 야고보파를 위한 칙서[2]
Spiritum quoque Paracletum (Paraclituml esse, qui nec Pater sit ipse, nec Filius, sed a Patre (Filioque) procedat (procedens). Est ergo ingenitus Pater, genitus Filius, non genitus Paracletus, sed a Patre (Filioque) procedens.
한 분의 (성)령께서는, 성부 자신도 성자도 아니라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신 보호자이시나이다. 따라서 성부께서는 나지 않으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며, 보호자께서는 나지 않으시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나이다.
447년 톨레도 교회회의[3]
Et tamen non frustra in hac trinitate non dicitur uerbum dei nisi filius, nec donum dei nisi spiritus sanctus, nec de quo genitum est uerbum et de quo procedit principaliter spiritus sanctus nisi deus pater. Ideo autem addidi, principaliter, quia et de filio spiritus sanctus procedere reperitur.
하지만 이 삼위일체에서 성자만 '하느님의 말씀'이라 일컫고, 성령만 '하느님의 선물'이라 일컬으며, 말씀이 태어나고 성령이 주로 발하는 대상이 성부 하느님이라고 일컬음도 부질없이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주로'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성령은 성자로부터도 발출함이 드러나는 까닭이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De Trinitate) 제15권 17.29.[4]
Spiritus Sanctus a Patre et Filio: non factus, nec creatus, nec genitus, sed procedens.
성령께서는 생겨나지도 창조되지도 나지도 않으셨으며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나이다.[5]
- 퀴쿰퀘(Quicumque) 신경.[6]
4. 역사
그렇다면 이 논쟁은 언제, 어떻게 촉발되었는가?
589년 서방 교회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본디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고(τό εκ τού Πατρός εκπορευόμενον)”였던 구절을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qui ex Patre Filióque procédit)”로 수정하였다. 당시 횡행하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아리우스파를 견제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 수정은 프랑크 왕국의 미사에서 암송되기 시작한 800년경까지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튼 800년 경부터 이 수정이 널리 알려졌는데, 847년에 ‘필리오케’ 신경이 프랑크 왕국 수도자들에 의해 예루살렘에 전해지자, 예루살렘의 동방 교회 수도자들은 그에 대해서 크게 반발하였다.
로마의 반응을 보자면, 교황 레오 3세는 신경에 필리오케를 첨가하는 것은 막으려고 하였고, ‘필리오케’가 없는 신경을 코이네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각각 성 베드로의 묘에 봉헌된 은탁자 두 개에 새겨 넣도록 지시하기까지 한다. 다만 교의적인 문제에서는 필리오케에 동의하였다.
이후 9세기에 들어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영향력 증대를 위해 ‘필리오케’ 교리를 불가리아 제1제국에 퍼뜨리려고 하였다. 이에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였던 포티오스는 867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의회를 열어 니콜라오 1세를 파문하였다. 이 사건을 ‘포티오스 분열’이라고 한다.
1054년 서방 교회는 동방 교회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세계 총대주교’ 칭호를 버릴 것과, 또한 ‘필리오케’ 신경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동방 교회는 이러한 서방 교회의 주장은 억지스러운 요구라 여겼으며, 끝내 세계 총대주교는 당시 교황 레오 9세의 특사였던 훔베르트 추기경을, 추기경은 세계 총대주교를 파문한다.
4.1. 정교의 관점에서
정교의 관점에서 서방의 필리오케 삽입은 독단적 행위이며 그 이면에는 로마 교회의 결정에 모든 교회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즉 교황 수위권의 주장이 있는 것으로 본다.
살라미스의 성 에피파니오스의 「정박자」에서의 서술을 근거로 신경의 변개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어불성설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에피파니오스의 서술과 본래의 신경이 "원본 신경과 '필리오케'" 정도로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가 이고, 둘째로 에피파니오스의 의도가 "교리 교육 때나 이단자들을 위한 세례 신앙 고백" 정도 때에만 사용하기 위하여 작성한 일종의 주석 혹은 설명문일 따름이지 예배 때마다 외워지는 바로 그 신경을 변형하기 위함은 아니었지 않겠는가 이다. 결정적으로, 공의회와는 다르게 성 에피파니오스 또한 한명의 무결하지 않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설령 그가 의도한 것이 신경의 직접적인 변형이었다고 한들 동방교회는 그 변형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한 주교의 저작을 근거로 전체 교회와의 상의 없이 신경의 변형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4.2. 가톨릭의 관점에서
포티오스의 주장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번째는 신경을 변경했다는 것이고, 두번째로는 신학적으로 그릇되었다는 것이다.그것은 "성자로부터도(라틴어로는 Filioque)"라는 구절을 추가한 것이다. 즉 "성부로부터 발하는 ...... 성령을 믿나이다."라는 구절에 서방 교회가 "성자로부터도"라는 구절을 추가함으로써,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와 똑같이 성자로부터도 발하게 되었다. 이 구절은 589년 스페인의 제3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처음으로 추가되었고, 8세기 후반 이후 전 프랑크 제국에 급속히 전파되었는데, 부분적으로는 신성에 있어 성자-성부의 동등성을 강조하면서 거기에 잔존하는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교황들은 처음에 이 구절을 추가하는 것에 반대했다가 수용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동방 교회는, 특히 포시우스(Photius)가 9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로 재임하는 동안에, 신학적인 근거와 더불어 신경에 어떤 변경도 금지한 에페소 공의회의 결정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이 첨가를 강하게 반대했다. 이는 11세기 동·서방 교회의 대분열의 주원인이 되었고, 이후 재일치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 노만 P. 탄너, 《간추린 보편 공의회사》, 김영식·최용감 옮김 (서울: 가톨릭출판사, 2010), 55-56쪽
가톨릭의 관점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는 다음과 같이 반박된다.
첫번째 주장에서 포티오스는 기초적인 사실 관계를 잘못 파악하였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왜곡하였다. 포티오스의 전제와는 달리 에페소 공의회(431년)가 변경을 금지한 신경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381년)이 아니라 니케아 신경(325년)이다.
즉 에페소 공의회(431년)가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381년)을 변경 금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381년 공의회[7]
의 그 신경은 오로지 칼케돈 공의회가 열린 451년부터 비로소 공식적으로 알려지고 확증되었으며 "보편 공의회"로 명명되었다.
- 안젤로 아마토, 《예수 그리스도》, 김관희 옮김 (화성: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2014), 445쪽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문서실에서 "졸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칼케돈 공의회 이전 시기에는 동방에서도 그저 드물게만 알려지고 사용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니케아 신경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지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수용에 방해가 되었다. 그러다가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 신경이 황제의 관리들에 의해 교부들에게 정식으로 강권되었고, 그리하여 거기서 이 381년 공의회가 추인받아 보편성을 획득했다.
(중략)
로마에서는 ··· 500년경까지만 해도 니케아와 에페소와 칼케돈 공의회 셋만 보편공의회로 인정했다.
-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59-60쪽
에페소 공의회가 겨냥하는 신경이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381년)이 아니라 니케아 신경(325년)인 것은 언뜻 보면 매우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왜 직전 세계 공의회가 아니라, 훨씬 전의 세계 공의회 신경을 겨냥한다는 말인가?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세계 공의회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이해 때문이다.이 교회회의는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 지역 교회회의(382년)가 교황 다마소에게 보낸 서한에서(키루스의 테오도레투스, 「교회사」''Historia ecclesiae'') "세계 공의회"로 불린다. 그렇지만 이 교회회의가 일반적으로 "세계 공의회"로 인정받은 것은 훨씬 나중 일이다.
- 덴칭거,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소개
도대체 어떤 공의회들이 "보편적"ōkumenisch인가라는 물음은 가장 까다로운 물음 가운데 하나다. 역사학자로서 교회론적으로 먼저 결단하지 않고는 결코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다. "보편적"(즉, "전반적"allgemein) 시노드와 지역적(부분교회적) 시노드의 명확한 구별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제쳐놓더라도, "보편적"이라고 주장했던 많은 시노드의 보편성이 오랫동안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오늘날까지도 논란되거나 부인되는 반면, 보편성 주장을 하지 않았고 실제로 전혀 보편적이 아니었으나 나중에 전체교회가 받아들인 시노드들도 있다. 후자의 대표 사례로는 그 신경이 오늘날 모든 중요한 그리스도 교파의 구속력있는 교리문서들 속에 들어 있는 저 공의회, 곧 381년에 개최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들 수 있다.
-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15쪽
사실 세계 공의회(혹은 보편 공의회)라는 말은 엄밀하지 않았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의 경우 이전의 지역 시노드들과 비교할 때 양적으로는 우위성을 지닐 수 있어도, 질적이고 본질적인 우위성을 지니지는 못했다. "공의회 신경이 당시의 현실적 동기와 구체적 상황을 뛰어넘어, 전체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정통신앙의 시금석이 되리라고는 처음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령 갈리아 주교들 대부분은 360년경에도 니케아 신경(325년)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니케아 공의회는 일차적으로 이전 공의회들도 했던 일 외에 다른 것을 하지 않았다. 공의회는 이단을 단죄하고 그것에 맞서 신경을 확정했다. 이전의 지역 시노드들과 비교해 보건대 니케아 공의회는 아직 질적이고 본질적인 우위성을 지니지는 못했고, 단지 양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렸을 따름이다. 공의회 신경이 당시의 현실적 동기와 구체적 상황을 뛰어넘어, 전체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정통신앙의 시금석이 되리라고는 처음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것은 예를 들어 갈리아 지방에서 아리우스설에 앞장서 대항한 걸출한 전사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가 니케아 신경을 공의회 후 3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고, 갈리아 주교들 대부분 역시 360년경에도 이 신경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 공의회들은 뭐라 해도 시대와 상황에 메인 기구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니케아 이후의 공의회들이 니케아 신경의 정식들을 간과하고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정식을 만들어냈다 하더라도, 후대의 관점에 터해 거기서 전체 교회의 "교의"에 대한 침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 사실은 그 반대이니, 이 "새로운" 정식들의 실패를 통해 비로소 전체교회의 구속력있는 신앙규범으로서의 니케아 신경에 대한 의식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사실 새로운 상황에서 전승되어 온 신앙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식화를 모색하는 것은 뭐라 해도 수긍이 가는 일이다.
-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45쪽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의 경우는, 보편성 주장을 하지 않았고 실제로 보편적이지도 않았지만 나중에 전체 교회가 받아들인 시노드에 해당한다.
게다가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공식 문헌이 있었는지도 의심되며, 현대에는 참석자들의 단편적인 기록들로만 그 과정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경우도 비슷하게, "문서들은 남아 있지 않다."공식 문서들이 전해 오는 에페소나 칼케돈 공의회와는 달리, 이 첫 보편 공의회는 회의록과 공식 문서가 없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는 니케아 공의회에 관해 단지 결실, 측 카논(법규)들과 신경만 가지고 있을 뿐, 토의 과정과 내용은 모른다. 공의회의 진행과정에 관해서는 아타나시우스 같은 참석자들의 단편적 메모들과 하나 하나 매우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할 교회사가들의 기록들(예컨대 에우세비우스의 「콘스탄티누스의 생애」나 1백 년 뒤 소크라테스의 저술) 약간만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공식 문서가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필경 고대 공의회들은 국가적 회합들의 관례를 넘겨받아 재판 기록들을 작성했지만 일반적으로 그밖의 자문회의들에 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것 같다.
-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39-40쪽
물론 "무슨 시노드가 세계 공의회인가?"가 엄밀하지는 못했더라도 역사적으로 니케아 공의회와 신경은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으로 점점 지위를 확립해나간 것은 맞기는 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또 있다. 바로, 옛 사람들에게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후대의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에페소 공의회에 비해서 '매우' 우월하게 인식되었다는 것이다.당시 동방 제국만 통치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 공의회를 소집했다. 당시 서방의 황제는 그라티아누스(375~383 재위)와 발렌티아누스 2세(375~392 재위)였다.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 150여 명 가운데(소크라테스 『교회사』 5,8), 서방 사람들은 없었고, 로마의 주교 다마수스는 사절을 파견하지도 않았다. 이런 까닭에 공의회의 영향력은 처음엔 보잘것없었다. (중략)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문서들은 남아 있지 않다. 신경도 공의회 기록으로 보존되어 있지 않다. 공의회에서 결정된 법규들만 여러 교회법 모음집에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II/2》,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16), 98쪽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칼케돈 공의회(451년) 시대에 이르러서야 오늘날과 비슷하게 변화한다.그리하여 거의 기정사실화한 다음과 같은 가정이 생겨났는데, 칼케돈 공의회에서야 비로소 거기서 벗어나게 될 터였다: 공의회들은 니케아 공의회의 손바닥 안에, 높디높은 니케아 공의회의 넓디넓은 그늘 아래 있다. 공의회들은 니케아 공의회와 대등하게 병렬하지 못하며, 비록 엄밀하게 예속적인 의미에서는 아닐지라도, 아무튼 근본적으로 "니케아 공의회의 현실화"일 따름이다. 여타 공의회들은 무엇보다도 이런저런 진술들이 니케아 신경에 부합하는지 아니면 상치되는지를 규명해야 하며, 전자는 승인하고 후자는 단죄해야 한다. 모든 것을 판단하는 척도는 니케아 신경이다. 여기서 니케아 공의회는 일련의 공의회 중 첫 공의회가 아니라, "슈퍼(超) 공의회", 후대의 모든 공의회를 규정하는 규범이 된다. 바로 이런 공의회관에 터해 1차 에페소 공의회(431)가 개최되었고, 2차 에페소 공의회(449) ―이른바 "강도 공의회" ―에서는 이 공의회관이 더 극단화됐다.
-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52쪽
즉 제1차 니케아 공의회와 동급인 공의회가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은 칼케돈 공의회(451년) 때에나 생겨난 개념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어쨌든 칼케돈 공의회의 수용을 통해 공의회 이념의 발전과정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새로운 단계의 본질은 이 수용에서 니케아 공의회 후 결정적인 둘째 걸음이 내디뎌졌다는 데 있다. 과연 칼케돈 공의회의 수용과정에서 니케아 공의회의 독점적 지위가 점차 와해되었고, 니케아 공의회의 권위는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 ― 새로운 이단들과 새로운 역사적 상황들에 대응하여 언제나 새로운 신앙정식들이 요구되고, 또한 모든 참된 공의회는 동일한 권위를 보유하기 때문에 ― 반복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의식이 뚜렷이 대두했다. 이런 의식은 458년 황제가 칼케돈 공의회의 유효성에 관해 문의한데 대한 주교들의 답변 「코덱스 엔키클리우스」''Codex Encyclius''로 처음 나타났다. 여기서 모든 주교들은 원칙적으로 칼케돈 공의회의 니케아 및 그때까지의 모든 공의회와의 연속성과 일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어떤 주교들에게는 여전히 오직 니케아 공의회만이 이 일치의 척도요 준거점이었다. 그들은 강조하기를, 칼케돈 공의회는 니케아 공의회와 일치하기 때문에 유효하고 정통적이라 했다. 그러나 다른 주교들은 동등성을 강조했는데, 특히 크레타 주교들의 한 서간은 그때까지 네 차례의 구속력있는 보편공의회를 서로 일치하는 동등한 공의회로 열거했다.[8]
―이런 맥락에서 이제 처음으로 그때까지의 보편공의회들이 확정·명기되었고, 또한 낮은 등급의 공의회들과 명확히 구별되었다. 이제 "네 공의회"는 고정된 상투어가 되었다.
(중략)
―더 나아가 6세기부터는 "네 거룩한 시노드"라 하여 네 복음서에 견주기 시작했으니, 이 공의회들은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지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다른 한편, 이제 넷이라는 고정된 숫자는 그것에 뒤이어 일련의 숫자를 꼽을 수 있게 했다. 과연 이 숫자는 뒤이은 보편공의회마다 고정된 서수序數를 부여했다: "다섯째", "여섯째", "일곱쨰" ··· 보편공의회. 이 줄은 원칙적으로 완결되지 않고 계속 추가될 수 있었으나 "가운데 끼어들기"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이름 붙이기는 피상적인 셈하기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한 공의회의 자기이해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으니, 공의회를 앞선 공의회들과 결합시키고 그 연속성에 편입시켰다.
어떤 공의회가 몇째 보편 시노드로 지칭됨으로써, 그 공의회는 자신의 권위를 공시하고 동시에 다른 공의회들과의 연속성과 한 계열 안에 정렬하게 되었다. 칼케돈 공의회 때까지는 없었던 일이다. 한 공의회의 고유한 권리 주장을 위해 꼭 필요한 이런 셈하기는 통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바로 그런 일을 통해서 예컨대 381년 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그 연속선상에 "끼어들" 수 있었다.
-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88-88쪽
결국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 세계 공의회에 대한 인식은 역사적으로 발전한 것이지,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가 시작되는 순간에 오늘날의 형태로 갑자기 완성되고 출발한게 아니다.
- 칼케돈 공의회(451년) 시기까지,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와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는 세계 공의회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에페소 공의회(431년)의 신경 변경 금지는 니케아 신경(325년)을 겨냥한 것이지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381년)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즉 역사적 맥락에서 보든 문장 자체로 보든, 에페소 공의회가 겨냥하는 것은 "니케아에 모인 거룩한 교부들이 확정한" 신앙 고백이다. 다시 말해 니케아 신경(325년)이지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381년)이 아니다. 그렇기에 에페소 공의회의 신경 변경 금지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선 안되고, 다소 느슨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엄격한 의미로 이해해버린다면, 훗날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381년)을 수용한 것 부터가 에페소 공의회를 위반한 것이라는 이상한 결론이 나올 것이다.···Statuit sancta Synodus, alteram fidem nemini licere proferre aut conscribere aut componere, praeter definitam a sanctis Patribus, qui in Nicaea cum Spiritu Sancto congregati fuerunt. ···
···거룩한 공의회는 성령과 함께 니케아에 모인 거룩한 교부들이 확정한 것과 다른 신앙 고백을 제시하거나 작성하거나 편찬하는 것이 어느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확정하였다. ···
그리고 칼케돈 공의회(451년)의 교부들이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381년)을 수용한 논리도 주목할 만 하다. 그들은 381년의 신경이 "325년의 신경과 본질적으로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 단언하였다."니케아 공의회의 신경은 유명한 설교가이자 알렉산드리아의 한 본당 신부였던 아리우스(?~336)의 가르침에 관한 논쟁을 통해 생겨났다. 이 논쟁은 삼위일체의 제2위격인 하느님 아들의 신성에 관한 문제였다. 니케아 공의회의 구성원들은 이 신경을 자신들의 믿음이 가장 잘 표현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비록 아리우스라는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 다소 부족한 신성을 가졌다는 그의 주장을 단죄하였다. 엄밀히 말해서 어떻게 이 신경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는 공의회의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분명하다.
(중략)
431년에 열린 에페소 공의회는 이 신경에 어떤 것을 첨가하거나 변경하는 것도 파문의 형벌로 금지시켰다(COD, p.65). 한편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특히 더 이상 어떤 것도 추가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결정한 에페소 공의회의 맥락에서 공의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니케아 신경을 넘어서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니케아 신경은 새로운 상황에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특히 325년 이후 발생한 수많은 논쟁들을 고려할 때,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부제(archdeacon)는 381년 자기 도시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선포되었던 신경을 해결책으로 제안했다. 하지만 이 신경은 선포된 이후 명백하게 교회 전반으로부터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칼케돈 공의회는 이 381년 신경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에페소 공의회의 금지령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이것이 325년의 신경과 본질적으로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 단언하였다. 이로써 합법적인 개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 노만 P. 탄너, 《간추린 보편 공의회사》, 김영식·최용감 옮김 (서울: 가톨릭출판사, 2010), 48-51쪽
따라서 니케아 신앙을 고수한다는 것은, 신경의 텍스트 모든 글자를 엄밀한 의미에서 보존하자는 말이 아니다.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놀랍게도 칼케돈 공의회의 제 2회기인 451년 10월 10일 콘스탄티노플의 대부제大副祭인 아에티우스Aetius가 공의회에 모인 교부들을 향해서 큰 소리로 "150명의 주교들의 신앙"[10]
에 대해서 읽을 때였다. 그 후 이 신앙고백문은 칼케돈 공의회의 신앙정식이 만들어지기 전에 니케아 신경과 통합되었다. 니케아 신경의 교정본과 콘스탄티노플 신경의 교정본을 감수한 바 있는 도세티Dossetti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한 모든 희랍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이 칼케돈 공의회 제2회기나 아니면 칼케돈의 신앙정식을 만들때쯤에 다음과 같이 이구동성으로 재확인했다고 전한다.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 신경처럼 오로지 칼케돈 공의회에서 알려지고 승인되었음을 시인한다.[11]
콘스탄티노플 신경이 70년이 넘도록 침묵을 지킨 이유[12]
에 대해서 아직 완전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는 잠시 접어 두고 그 신경의 출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칼케돈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이단규정을 간단하게 덧붙여서 니케아 신경을 본질적으로 추인하는 성격의 신경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니케아 신경과 콘스탄티노플 신경의 구조를 객관적으로 비교했을 때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니케아 신경의 개정판 정도로 볼 수 없게 하는 어떤 편차가 보인다. "사실 이 두 텍스트는 전적으로 다르다."[13] 여기서 학자들의 의견은 양편으로 갈린다. 폰 하르낙과 같은 부류(F. J. A. Hort)는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이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는 무관하고 독립적이라고 한다. 반면 칼케돈 공의회의 회의록을 수집-편찬한 슈바르츠 등은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자체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지만, 이 두 주장 모두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니케아 신경의 재확인이라는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을 소홀히 하고 있다.[14] 그렇다면 부인할 수 없는 이 상이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해결책은 1936년 프랑스 신학자 르봉[15]
에 의해서, 그리고 이어서 켈리,[16] 리터,[17] 도세티[18] 등에 의해서 제시되었다. 이들에 의하면 "니케아의 신앙"이라든가 "신경" 또는 "318명의 교부들의 해설(''ékthesis'')" 등과 같은 표현은 성문화된 어떤 텍스트를 구체적으로 지칭하기보다는 신경의 신학적 내용, 무엇보다 "동일본질" 같은 니케아 공의회의 키워드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경"이라든지 "니케아 신앙"이라는 호칭은 니케아에서 결정된 신앙내용을 근본적으로 수용하고 숭앙하는 어떤 특정한 신경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교의사적 추이에서 볼 때 "니케아 신앙"이란 말은 "동일본질"이란 말로 결정된 확고부동한 내용을 다양한 언어로 표현하는 신앙고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너무나 다양한 나머지 그들 사이에서도 종종 확연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 안에서도 신앙고백의 내용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니케아 신경을 약간 각색해서 세례 때의 신앙고백정식으로 사용한다든지, 신경의 말미에 이단에 대한 경고문구 등을 삽입한다든지 하지만, 이 정식들은 그래도 여전히 "니케아 신경"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19]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본질에 있어서는 "니케아적인" 어느 한 지역의 신경을 선택해서 아폴리나리스 이단과 마체도니오 이단을 반박하기 위한 초석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공의회는 새로운 신경을 따로 채택하지 않고 단순히 반-이단적인 명문을 삽입하여 니케아 공의회의 교의적 결정을 재확인한다. 그러니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새로운 신앙개조를 창작하지도 아니하고 니케아 신경과는 별개의 독립적인 신경을 보유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도세티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신경들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단순히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20]
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통성이 검증된 하나의 반-이단적 명문화를 삽입한 신경, 즉 니케아신경을 자구적으로 재생한 것은 아니더라도 본질적으로 재확인하는 신경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 안젤로 아마토, 《예수 그리스도》, 김관희 옮김 (화성: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2014), 428-431쪽
더군다나, 교회의 역사에서 볼 때 오직 세계 공의회만이 신경을 변경할 수 있다고 여겨지지도 않았다.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은 "사도"신경과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 모든 그리스도 교회의 정통교리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니체아 공의회 신경을 넘겨받고 보완하였다는 가정은 (오늘날까지 신경의 출전에 관한 상황 연구가 어렵다 할지라도) 맞지 않는 것 같다. 공의회 문서들은 남아 있지 않으며 공의회 신경은 공식적인 형태로 칼체돈 공의회 문서에서 처음 전해지나, 그 이전에 이미 콘스탄티아(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가 자신의 작품 「정박자」[21]
(374년)에서 이 고백을 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른트 마누엘 바이숴Bernd Manuel Weischer는 후대에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이 「정박자」에 삽입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신경을 공식적으로 결정하지 않았지만, 칼체돈 공의회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본문을 협의하거나 작성하였다는[22] 것이 오늘날[23]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 H. R. 드롭너, 《교부학》,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1), 407쪽
살라미스의 주교 성 에피파니오의 저작 「정박자」(Ancoratus)에서는 두 개의 신앙고백을 전한다. 이 중 짧은 것은 후대의 가필이니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긴 것은 덴칭거의 소개문에서 보듯 "에피파니오 자신이 니케아 신경을 확대시킨 양식으로" 여겨진다. 즉 로마도 알렉산드리아도 콘스탄티노폴리스도 아닌, 살라미스의 주교 역시도 니케아 신경의 텍스트를 수정한게 교회사의 현실이다.살라미스의 주교 에피파니우스: 「정박자」(Ancoratus), 374년
이 작품에는 두 양식의 신앙 고백이 들어 있다. 짧은 양식(118,9-13)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150)과 매우 유사하며, 에피파니우스가 본래 니케아 신경을 인용한 자리에 후대 어느 필경사가 끼워넣은 것이다. B. M. Weischer, ''Qerellos IV 2: Traktate des Epiphanius von Zypern und des Proklos von Kyzikos''(Äthiopistische Forschungen 6; Wiesbaden 1979) 49-51. 긴 양식(119,3-12)은 에피파니우스 자신이 니케아 신경을 확대시킨 양식으로, 교리 교육 때나 이단자들을 위한 세례 신앙 고백으로 쓰인 것이다.
(중략)
(ㄴ) 긴 양식
한 분이신 하느님, 전능하신 아버지,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저희는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곧 성부의 본질에서 나신 외아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본질이 같으시며 그분을 통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유형무형한 만물이 생겨났으며,
저희 인간 때문에, 저희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어 육이 되셨으며, 곧 성령을 통하여 거룩하고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에게서 완전하게 태어나시어 사람이 되셨으니, 곧 성자께서는 죄 말고는 영혼과 몸과 정신과 인간의 모든 요소를 지닌 완전한 인간을 취하셨으며, 남자의 씨로도 아니고 인간 안에서도 아니라, 자신 안에서 유일하고 거룩한 일치로 육신을 이루셨으며, 예언자들 안에서 숨 쉬시고 말씀하시며 행하신 방법이 아니라 완전하게 인간이 되셨으며("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니," 그때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분의 신성도 인성으로 바뀌지 않았나이다.), 〈육신을〉 자신의 거룩한 완전함과 유일한 신성에 합치시켰으며(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오니, 바로 그분이 하느님이시고, 바로 그분이 주님이시며, 바로 그분이 임금님이시옵니다.), 바로 그분이 육신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셨으며, 바로 그 몸으로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영광 속에 성부 오른편에 앚으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바로 그 몸으로 영광 속에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 믿나이다.
또한 율법 안에서 말씀하시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하시고 요르단 강에 내려오셨으며, 사도들 안에서 말씀하시고 성도들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을 저희는 믿나이다. 바로 거룩한 영, 하느님의 영, 완전한 영, 보호자이신 영이시며, 창조되지 않으시고 성부에게서 발하시며, 성자께서 받아들이고 믿으신 분을 저희는 믿나이다. 하나이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를 저희는 믿으며, 회개의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혼과 몸에 관한 공정한 심판을 믿으며, 하늘 나라를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그러나 성자나 성령이 없던 때가 있었다거나, 무에서 생겨났다거나, 또는 하느님의 아들이나 성령이 다른 실체(히포스타시스)나 본질에서[24]
나왔다거나, 바뀌거나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여러분과 우리의 어미니인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파문한다. 또한 우리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고백하지 않는 자들과 이 올바른 믿음을 따르지 않는 모든 이단을 파문한다.
- 덴칭거 42-45항
에피파니오의 사례를 가볍거나 사소한 사안으로 여기고 넘어갈 수는 없다. "세례 신앙 고백"은 결코 가볍거나 사소한 사안이 아니며, 에피파니오의 수정판이 서방의 수정(필리오케 삽입)보다 분량상으로는 분명히 더 많다. 정교 측의 논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필리오케 삽입'이 분량으로는 에피파니오의 수정보다 소량이지만 신학적으로 그릇되었다는 주장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애초부터 논쟁의 대상은 '신학적 합당성'이지 '수정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정교 측은 589년의 톨레도 시노드를 지나치게 낮춰서 다루고 있다. 비록 오늘날 589년 톨레도 시노드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는 달리 세계 공의회로 여겨지지 않지만,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경우도 공의회 당시에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와 동급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물론 니케아급이 아니었다고 해서 381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4세기 기준 히스파니아의 지역 시노드와 완전히 동급으로 취급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으나, "589년 톨레도 시노드는 해당 시대에는 니케아 신경을 바꿀 권한이 없었고 381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노드는 해당 시대에는 니케아 신경을 바꿀 권한이 있었다"는 식으로 정교 측이 당연시하는 전제부터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말해서, "니케아 신경은 바꿀 수 없고, 예외적으로 세계 공의회에서만 바꿀 수 있다"는 명제부터가 문헌상의 근거가 없다.
결국, 서방 교회가 에페소 공의회의 신경 변경 금지를 위반했다는 것은 에페소 공의회 문헌 그 자체에서[25] 보든 역사적 맥락에서 보든 부적절하며, 에페소 공의회의 신경 변경 금지는 '텍스트'를 글자 그대로 보존하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없다. 만약 서방 교회에 대한 그 비판이 타당하다면, 똑같은 원리로 칼케돈 공의회 교부들을 단죄해야 할 것이다. 칼케돈 공의회의 정신에서 볼 때,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325년의 신경과 본질적으로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면, 신경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그리고 서방 교회 측의 필리오케 삽입을 독단으로 여길 필요도 없다. 니케아 신경은 살라미스의 성 에피파니오에 의해서도 수정된 바 있으며, 589년의 톨레도 교회회의의 권위가 살라미스의 주교 '미만'인 건 당연히 아니며, 비록 교황 레오 3세가 필리오케 삽입에 부정적이였다고는 하나 로마의 주교가 살라미스의 주교 '미만'인 것도 아니다.
5. 신경의 차이
우선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아래와 같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며’ 라고 확실히 명시하고 있다.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전능하시고,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나이다.
그리고 또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로부터 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요,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 만물이 다 이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믿나이다.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성령으로 또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으며,
본티오 빌라도 시대에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심을 믿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리고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인,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세례를 알고 믿나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과 후세의 영생을 굳게 믿고 기다리나이다.
아멘.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신경은 아래와 같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고 분명하게 적어 놓았다.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성공회는 계보상 서방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현재의 성공회는 서방 교회 안에서 징검다리 교회(Bridge Church) 역할을 하며 각 교파들의 주장을 유연히 받아들일 뿐 아니라, 동방 교회로부터 이어져내려온 그리스도교 전통도 소중히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에 있다. 성공회의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다음과 같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며’라고 표기해 놓았다. 신자 개인의 성향에 따라 ‘[와 성자]’는 외우지 않아도 상관 없다. 자신이 필리오케에 동의하지 않으면, 신자들과 함께 니케아 신경을 봉독할 때 다른 신자들이 '와 성자' 부분을 읽는 잠시 동안만 기다려주면 되는 것이다.[26][27] 즉, ‘필리오케’ 문제로 교회에서 신자에게 따로 간섭하는 것은 없다.우리는 믿나이다.
한 분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모든 세계에 앞서 성부께 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요, 빛에서 나신 빛이시요,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시며, 만물이 다 이 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으며,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며,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같은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교회와, 죄를 용서하는 하나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후세의 영생을 믿고 기다리나이다.
아멘.
6. 여담
- 교황 니콜라오 1세를 파문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포티오스는 이후 정교에서 시성되었다.
- 대체역사 소설인 비잔티움의 첩자에서도 가톨릭을 믿는 게르만인들에 의해 언급된다. 작중 주인공인 바실 아르길로스가 화약 기술을 정탐하기 위해 스위스 지역 가톨릭 수도원에 잡입했다가 새벽기도 중에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하시고’라고 조용히 읊조리는데 이것 때문에 그를 의심하던 한 수도사에 의해 정교회 신자임이 발각되는 장치로 등장한다.
[
1968]
714 / PL 65,674AB) 참조.[2] 번역 출처: 덴칭거 한국어판 1331항[3] 번역 출처: 덴칭거 188항. 필리오케가 삽입된 589년의 톨레도 교회회의와는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4] 번역 출처: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 성염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15), 1261쪽[5] 번역 출처: 덴칭거 한국어판 75항[6] 아타나시오 신경이라고도 불린다. 오늘날에는 부정되지만, 옛날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오가 저자로 알려져 있었다. 추정 연대는 덴칭거에 의하면 430-500년.[7]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8] (책 속 주석)E. Schawartz 등 편 ''Acta Conciliorum Oecumenicorum'' (1914~) II, 5:97, 6-13.[9] 번역 출처: 덴칭거 265항.[10] (책 속 주석) 참조: ACO II,I,2, pp. 79s. 도세티는 칼케돈 공의회의 제2회기에서 낭독된 그리스어 텍스트는 "정통성이 확실하게 보존된" 텍스트임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G. L. Dossetti, ''II simbolo di Nicea e di Constantinopoli. Edizione critica'', Herder, Roma 1967, p. 269). 아에티우스는 황제의 문서고에서 이 텍스트를 찾아내어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상동, pp. 171, 269.) 이 텍스트는 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도세티에 의하면 슈바르츠(E. Schwartz)는 칼케돈 공의회의 제2회기에서 낭독된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텍스트는 "원본"(allo stato puro)이었던 반면에, 칼케돈 공의회 제5회기와 제6회기에서 작성되어 451년의 신앙정식에 삽입된 텍스트는 공의회 교부들에 의해서 "잘 손질된"(armonizzati) 텍스트였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슈바르츠는 칼케돈 공외희의 신앙정식에 대한 교정본에(ACO II,I,2, pp. 127s.) 전해진 것과는 확연히 다른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텍스트 원본을 수록하게 했다는 것이다.(참조: G. L. Dossetti, ''Il simbolo di Nicea...'', p. 269.) 그러나 도세티는 Lebon, Kelly, Ritter 등과 함께 이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다.(상동, pp. 269-284.)[11] (책 속 주석)G. L. Dossetti, ''Il simbolo di Nicea...'', p. 264.[12] (책 속 주석) 참조: A. De Halleux, "La réception du symbole oecuménique, de Nicée à Chalcédoine", in ''Ephemerides Theologicae Lovanienses'' 61(1985), pp. 5-47.[13] (책 속 주석) J. N. D. Kelly, ''I simboli di fede della chiesa antica. Nascita, evoluzione, uso del credo'', Dehoniane, Napoli 1987, p.300.[14] (책 속 주석) 참조: J. N. D. Kelly, ''I simboli...'', pp. 298-301.[15] (책 속 주석)J. Lebon, "Les anciens symboles dans la définition de Chalcédoine", in ''Revue d'Histoire Ecclésiastique'' 32(1936), pp. 809-876.[16] (책 속 주석) 참조: J. N. D. Kelly, ''I simboli...'', pp. 318-327.[17] (책 속 주석)A. M. Ritter, ''Das Konzil von Konstantinopel und sein Symbol, Vandenhoeck & Ruprecht, Göttingen'' 1965.[18] (책 속 주석) 참조: G. L. Dossetti, ''Il simbolo di Nicea..'', pp. 24, 277-284.[19] (책 속 주석) 참조: ''위의 책'', p. 278.[20] (책 속 주석)참조: G. L. Dossetti, ''Il simbolo di Nicea..'', p.284.[21] 《Ancoratus》[22] (책 속 주석) 이와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Kannengiesser: EECh(Encyclopedia of the Early Church, 2 vol., Cambridge 1992 Église et Théologie, Paris.) I, 195-6쪽과 DH(H. Denzinger, ''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Quod emendavit, auxit in linguam germanicam transtulit et adiuvante H. Hoping edidit'' P. Hünermann, Freiburg/Br.$${ }^{37}$$1991.), 150쪽 참조. 칸네기서는 바위서(Weischer)의 결과를 알지 못한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이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아브라모브스키(L. Abramowski)와 리터(A.M. Ritter)의 최근의 토론 참조.[23] 이 책의 한국어판은 1994년판을 바탕으로 함.[24] 니케아 신경의 파문조항에서는 히포스타시스와 우시아가 동일시된다.[25] "거룩한 공의회는 성령과 함께 니케아에 모인 거룩한 교부들이 확정한 것과 다른 신앙 고백을 제시하거나 작성하거나 편찬하는 것이 어느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확정하였다."(Statuit sancta Synodus, alteram fidem nemini licere proferre aut conscribere aut componere, praeter definitam a sanctis Patribus, qui in Nicaea cum Spiritu Sancto congregati fuerunt.)[26] 성공회 신자들은 다양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습들을 관용하고 포용하는 데에 꽤 익숙하다.[27] 현실적으로 필리오케에 대해 신학적으로 깊게 고찰하여 자신의 입장을 취하는 신자는 많지 않고, 대부분 그냥 '와 성자' 부분을 읽고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