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왕국

 



'''하와이 왕국'''
'''Aupuni Mōʻī o Hawaiʻ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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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1795년 ~ 1893년
표어
Ua Mau ke Ea o ka ʻĀina i ka Pono
(대지의 생명은 정의 가운데 영원히 존재한다.)
수도
와이키키(1795년-1796년)
힐로(1796년-1802년)
라하이나(1802년-1812년, 1820년-1845년)
칼리우아코나(1812년-1820년)
호놀룰루(1845년-1893년)
언어
하와이어, 영어
종교
하와이 신화하와이 가톨릭 개혁교회[1]
민족
하와이인
정치체제
전제군주제(-1840년), 입헌군주제(1840년-)
국가원수
국왕
통화
하와이 달러
이전 국가
하와이 원주민 부족국가
이후
하와이 공화국
1. 개요
2. 역사
3. 멸망
4.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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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메하메하 1세하와이의 부족국가들을 모두 정복하고 세운 나라. 1893년 미국에 의해 멸망당한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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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하메하 1세(Kamehameha I) 대왕.
하와이 왕국은 카메하메하 1세 대왕이 하와이 제도의 다른 부족 국가들을 모두 정복하고 세운 나라이다. 1778년에 제임스 쿡 선장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카메하메하 1세는 당시 그가 속해있던 부족의 추장이던 할아버지 칼라니오프의 명을 받아 쿡 선장을 만났고, 그에게서 영어를 배우고 영국의 많은 유용한 기술을 익혔다. 제임스 쿡의 부하와 원주민 간 분쟁으로 인해 제임스 쿡 선장이 전사하고, 영국인 선원들이 패퇴했지만, 카메하메하는 그의 장례를 하와이 전통방식에 따라 정중히 치르고 그리고 포로로 붙잡힌 영국 선원들을 군사 고문으로 임명해 유럽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추장이 되자마자 유럽에서 사온 무기로 정복사업에 나서 하와이 전역을 통일한다.
카메하메하 1세는 부족 국가들을 정복하고 하와이의 관습법과 영국의 성문법을 결합한 법을 제정하였다.
카메하메하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카메하메하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치세에 첫 기독교 선교사가 도래하였으며, 이 때 카메하메하 2세는 영어 로마자를 받아들여 하와이어 로마자를 만들고 교육하였다. 그는 왕비와 함께 영국을 방문해 조지 4세와 회견하여 동맹을 맺고자 하였으나 영국에서 홍역에 걸려 얼마 못 가 죽었다. 1824년에 그의 왕위는 동생 카메하메하 3세가 계승했다.
1840년에는 카메하메하 3세의 주도 하에 헌법이 제정되어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1843년에는 미국, 프랑스, 영국 등으로부터 독립국으로 승인되었다.
1873년에는 카메하메하 5세가 아들 없이 죽자 국왕 선거를 통해 루날릴로(Lunalilo)가 왕이 되었으나 얼마 못 가 죽었고, 다시 선거를 통해 1874년에 칼라카우아(Kalākaua)가 즉위했다. 이 때 경쟁자였던 카메하메하 4세의 부인 엠마(Emma)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미국영국의 힘을 빌려 진압했다.

3. 멸망


하와이는 태평양 한가운데 있어서 당시 태평양을 항해하던 서구 국가들과 많이 접촉했는데, 앞서 영국의 간섭도 있었고, 러시아 제국도 1814년부터 1817년까지 엘리자베스 포트항구를 소유했다.[2] 미국에서도 많은 이민자가 와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3], 이들의 힘이 점점 커져서 하와이의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자 위기를 느낀 역대 하와이 왕들은 영국, 일본 등 열강에게 미국을 견제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그 중에서 일본에게는 '''보호령 편입'''을 청하였다. 실현되었다면 태평양 절반이 일본령이 되는 일이 일어났을 터이지만 당시 자기 몸 건사하기 힘든 일본은 영미에게 오가사와라 제도 영유만 승인받고 무시했다.
1887년에는 샌퍼드 밸러드 돌(Sanford Ballard Dole)[4]을 비롯한 미국계 이민자들이 무력으로 들고 일어나 칼라카우아 국왕을 협박해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는데 이 헌법은 미국계 이민자의 참정권을 허용했고, 이는 칼라카우아의 권력 누수로 이어졌다. 이후 칼라카우아는 아무런 실권이 없는 왕이 되었고, 1891년에 사망했다.
칼라카우아의 뒤를 이어 그 여동생 릴리우오칼라니(Liliʻuokalani)가 즉위하였다. 그는 미국계 이민자들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나라가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고 1892년에 새 헌법을 제정해 이들의 참정권을 대폭 제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는 각료회의에서 부결되었고 이에 릴리우오칼라니는 미국인 농장 국영화 조치로 대응했다.
그러자 미국인들은 근처 미 해군 선박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그 즉시 수병 '''150명'''으로 릴리우오칼라니를 추방했다. 이로서 하와이 왕국은 멸망했다.
미국계 이민자들은 하와이의 미국 편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반제국주의자였던 그로버 클리블랜드였기에 보류되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미국 자체가 영국의 식민지로 시작한 국가라 미국이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여론도 다른 서구열강에 비하면 어느 정도는 있었다.[5]
결국 왕정을 무너트린 하와이 거주 백인[6]들은 자신들끼리 샌퍼드 밸러드 돌(Sanford Ballard Dole)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해서 임시로 하와이 공화국(Lepupalika ʻo Hawaiʻi)을 수립하고 준비과정을 거쳐 1897년 합병조약을 체결한 뒤 하와이를 미국령으로 편입해버렸다. 그 뒤로 하와이는 하와이 준주(Territory of Hawaii)로서 한동안 현재의 과 비슷한 지위의 자치령이 되었다가 나중에 본토와 대등한 정식 주로 편입되어 하와이 주가 되었다.
하와이 왕족의 후손들(직계는 끊기고 방계들만 많다)은 아직도 하와이 전체에 적지 않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백인과 혼혈되어 백인 상류층과 비슷한 외모를 가졌는데 이들은 여전히 하와이 전역에 상당한 토지를 보유하고 재정적 기반과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를 간접적으로 다룬 영화로 디센던트가 있다.

4. 국왕


  • 1대: 카메하메하 1세 (Kamehameha I, 1795-1819)
  • 2대: 카메하메하 2세 (Kamehameha II, 1819-1824)
  • 3대: 카메하메하 3세 (Kamehameha III, 1825-1854)
  • 4대: 카메하메하 4세 (Kamehameha IV, 1855-1863)
  • 5대: 카메하메하 5세 (Kamehameha V, 1863-1872)
  • 6대: 루날릴로 (Lunalilo, 1873-1874)
  • 7대: 칼라카우아 (David Kalākaua, 1874-1891)
  • 8대: 릴리우오칼라니 (Liliʻuokalani, 1891-1893)
루날릴로 이후의 왕들은 카메하메하의 직계 자손이 아니다. 카메하메하의 자손은 5대에 끊겼고, 루날릴로는 카메하메하의 형제의 손자이며, 칼라카우아와 그 여동생 릴리우오칼라니는 카메하메하의 증조부 때에 갈려 나온 집안 출신이다. 6, 7, 8대 왕 모두 자녀가 없어서, 하와이 왕가와 깨알만한 연관이라도 있으면 모두 왕위 요구자가 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1] 이름과 달리 가톨릭이 아니라 성공회다. 카메하메하 4세가 잉글랜드 방문시 성공회의 전례에 감명받아 국교로 채택. 미국에 합병 후 마찬가지로 미국 성공회에 합병된다.[2] 당시는 미서부 많은 지역이 러시아령 아메리카였기에 러시아가 하와이에서 굉장히 가까웠다.[3] 우습게도 이들은 거의 대부분 반세기 전에 하와이로 선교를 온 성직자들의 자손이었다.[4] 파인애플로 유명한 식품 회사인 그 맞다. 정확히 말하면 샌퍼드 돌이 하와이에서 권력을 잡고 자신의 사촌인 제임스 돌에게 막대한 파인애플 농장 이권을 줘서 생긴 회사다.[5] 미국은 이후 필리핀, 등을 식민지로 삼지만 거기서도 일단은 의회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모양을 내거나 장기적으로 독립을 준비하는 등 반제국주의 유권자 여론도 신경쓰는 척은 해야 했다. 쿠바를 식민지로 만들지 않은 이유 중 하나도 이것이다.[6] 백인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하울리(Haule)라고 부르는데, 원래 하와이어로서의 뜻은 이방인이라는 뜻이지만, 당시 이방인들은 모두 백인이었기 때문에 현재 백인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나쁜 단어는 아니지만, 백인들 앞에서는 하울리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