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프린츠 추 자인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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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알렉산더 루트비히 페터 프린츠 추자인비트겐슈타인[1]
Heinrich Alexander Ludwig Peter Prinz zu Sayn-Wittgenstein
1916. 8. 14 - 1944.1.21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야간 전투기 에이스. 격추수는 83기로 하인츠 볼프강 슈나우퍼와 헬무트 렌트에 이어 3위.[2] 전사할 무렵 그는 모든 야간 전투기 조종사 중에서 1위의 스코어를 기록하고 있었다. 최종 계급은 소령. 귀족 중에서도 준 왕족 취급받던 슈탄데스헤어출신이다.
2. 생애
2.1. 청소년기
덴마크에서 자인비트겐슈타인 가[3] 의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코펜하겐 주재 외교관이었다. 자인비트겐슈타인은 어린 시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랐다. 1932년에 프라이부르크에서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하고 1935년에는 김나지움을 졸업한다.
귀족 집안 아들이다 보니 광활한 영지에서 사냥하는 걸 즐겼는데, 이러한 취미가 전투조종사가 되는 것에 영향을 미쳤던 듯. 사냥하듯 적기 때려잡아 스코어 올리는 데 꽤 집착했던 것 같다.
2.2. 경력
1937년 자인비트겐슈타인은 육군에 입대하나 몇달 후 공군으로 옯긴다. 1938년 소위로 임관한 그는 Ju 88과 하인켈 He 111에 탑승했는데, 이 당시만 해도 항법사였던듯 하다. 이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자인비트겐슈타인은 야간 전투기 조종 훈련을 받고 1941년 제2야간전투항공단의 제9중대장이 되었다. 1942년 10월 22기 격추를 달성에 대해 기사철십자 훈장을 받는다.
1943년 자인비트겐슈타인 대위는 제5야간전투항공단의 제4대대장이 되어 동부전선으로 파견된다. 여기에서도 격추를 거듭하여 1943년 9월 54기 격추 달성에 대해 곡엽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는다. 이 훈장은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수여했다.
이후로도 격추를 거듭하여 그해 말 68기 격추 후 제2야간전투항공단의 단장으로 승진한다.
2.3. 죽음
1944년 1월 21일 자인비트겐슈타인은 밤 10시경 아브로 랭커스터 한 대를 격추, 40여분간 총 네 대를 격추했다. 다섯번 째 격추를 노리던 중, 폭격기를 호위하던 영국 전투기들이 공격해왔다. 그 와중에 자인비트겐슈타인의 탑승기 왼쪽 날개에 불이 붙었다. 그는 승무원들에게 탈출할 것을 명령했고 다른 승무원들은 무사히 탈출했지만 그는 탈출하지 못했다.
다음날 그의 시신은 숲 지역에 추락한 Ju 88의 잔해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낙하산은 펼쳐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탈출 시도 중 비행기의 꼬리날개에 머리를 부딪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4] 그는 사후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320여회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격추수는 83기로 당시 야간 전투기 조종사 중 톱을 달리고 있었다. 이 중 23기는 동부전선, 60기는 서부전선에서 달성했다. 자인비트겐슈타인이 누구에게 격추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3. 성격과 일화
매우 엄격하고 고지식한 귀족 자제분이셨던듯 하다. 동료의 회고에 따르면 "미친 놈이라고 생각했다." 일 정도. 자인비트겐슈타인의 승무원에 따르면 한 푼커(후방석의 라디오 오퍼레이터)를 임무 중 레이더에서 적기를 놓쳤다는 이유로 본부에 사흘 동안이나 대기시켰다고 한다.
한 두번 날아보고 못한다 싶으면 곧바로 승무원들을 갈아치웠는데, 유난히 오래 함께했던 푼커였던 큄메리츠는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계급과 위치를 최상의 격추 기회를 잡기 위해 이용했다고 회고한다. 종종 비행장에서 레이더에 좋은 기회가 포착될 때까지 대기했는데, 심지어 그가 도착하기 전에 다른 전투기가 이미 적과 교전하고 있으면 비트겐슈타인은 되려 무선으로 아군더러 비키라고 했다고 한다.
야간 전투기 조종사인 팔크의 회고에 따르면 자인비트겐슈타인은 장교를 할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머니인 공작 부인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하인리히는 무척이나 실망해 있었다. 1943년 그는 히틀러를 암살할 생각을 품었었다." "그것은 하인리히가 싸우는 이유인 명예와 임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 당시 하인리히는 헬무트 렌트 소령의 격추수를 따라잡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였던 타티아나 폰 메테르니히는 그가 1943년 훈장을 받을 때의 히틀러를 암살할 생각에 대해 털어놓았다고 했다. "나는 결혼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어. 히틀러는 나를 개인적으로 만날 것이고, 우리 중 나 외에 누가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있겠어?"" 리더 타입은 아니었다. 교육자도, 교관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전투기 조종사였다. 무슨 제6감 같은걸 가지고 있어서 어디에 적기가 있는지 느끼는 것 같았다. 마치 인간 레이더 같았다. 그는 완벽한 공대공 무기였다."
1943년 6월 네덜란드에 주둔해 있을 때 소속 부대가 Bf110으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자인비트겐슈타인은 Ju 88을 선호하였고, 그가 타던 Bf 110이 기술적 결함을 일으킨 뒤 곧바로 Ju 88으로 갈아타고 격추수를 올린 후에는 아예 Bf 110을 타지 않았다고 한다.
4. 여담
스트라이크 위치스의 하인리케 프린체신 추 자인 뷔트겐슈타인이 이 사람의 모에화 버전.
동생 알렉산더도 1945년 독소전쟁에서 전사했다. 그나마 형 루트비히[5] 가 2남 3녀를 낳으며 자손이 번성한 편.(참조)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2] 야간 공중전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야간 격추 1기가 주간 격추 3기 이상의 평가를 받았다.[3] 정확히는 자인비트겐슈타인자인(Sayn-Wittgenstein-Sayn) 가문. 자인 가 홈페이지(독일어) 참조 [4] 사출좌석이 발명되기 전까지 이런 사고는 상당히 자주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서방 전투기 최다 격추수를 기록한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유 역시 기체결함을 일으킨 자신의 Bf109에서 탈출하다가 꼬리날개에 머리를 부딪히는 바람에 즉사했다.[5] 1958년에 큰아버지로부터 자인비트겐슈타인자인 가문 당주 자리를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