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역사

 



1. 개요
4. 고려
5. 조선
6. 제주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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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복식을 복원한 것을 보고 싶다면 이 링크를 참조하자
한복이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구려의 벽화에서였다. 기본적인 형태는 상의와 끈, 하의, 그리고 모자에 두건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이후 차츰 변화하여 상의가 짧아지고 허리에 매는 끈이 고름으로 간소화되었으며 두건이 다른 형태의 모자로 대체되었다. 이후 만주족의 복식에 영향을 받은 마고자와 서양 복식에 영향을 받은 조끼가 추가되어 현대의 한복 형태가 완성되었다. 여기에 한복을 크게 간소화한 생활한복은 고름이 단추로 대체되고 소매가 줄어들어 일상생활에도 입기 편하게 만든 형태이다.
여성용 저고리는 짧아지고, 치마는 반대로 길어져서 가슴 바로 아래까지 치고 올라갔다.
평복은 고유의 형태를, 관복 및 공복은 중국의 복식을 받아들인 이분적 복식제도였으나 상류층도 일상에서는 고유의 한복을 입었다.

2. 선사시대고조선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선사시대 및 고조선의 한복
구석기 시대에는 가죽을 이용한 옷을 입었을 것이라 추측되며, 신석기 시대에는 실이 발명되어 옷감을 짜 입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가락바퀴는 실을 짜는데 이용되었다.
고조선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자리 잡은 국가로서 남방계 복식인 한푸와 달리 북방계 호복 복식을 근간으로 발전했다. 국내 학계에서는 스키타이의 강한 영향을 받거나, 혹은 스키타이의 복식이 전래되어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1] 유목민족 복식의 특징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남방계의 상의하상 (上衣下裳)의 치마보다 북방계의 상유하고(上襦下袴)의 바지 위주로 발전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저고리가 왼쪽 여밈이다. 남녀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바지와 그 위에 긴 포를 입고, 허리띠를 매는 형식이다. 대신 여자는 바지를 입은 후 치마를 입었다.

3. 삼국 시대


삼국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의 복식문화가 수입되고, 일본으로 수출 또는 수입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동북아 모두 유사한 형태의 복식 문화를 보인다. 그런데도 한복은 일본과 중국보다 확연하게 북방계 복식문화의 영향이 나타난다. 또한, 고조선의 한복 형식인 하의 위에 긴 포를 입고 허리띠를 매는 형식은 기본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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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직공도 속 삼국의 사신. 왼쪽부터 순서대로 신라, 고구려, 백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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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시대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복식들의 도식화 출처는 천손의 시대. 데포르메가 되긴 했지만, 현존하는 자료들 중에는 삼국시대 복식과 악세서리를 한눈에 보기에 가장 좋다. 의복은 저고리, 두루마기, 바지, 치마, 가늘거나 넓은 허리띠(조대, 대대)를 기조로 하며, 관모(절풍, 조우관, 조미관, 갓, 책 등) 신발(짚신, 갖신, 나막신) 등의 완전한 구성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남녀노소 귀고리를 필수적으로 착용한다.
  • 주 LA 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한 한복 패션쇼에 오른 삼국시대 한복

3.1. 고구려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고구려의 한복
고구려는 중국의 오른쪽 여밈 문화를 수입하기 이전에는 고조선의 왼쪽 여밈 문화가 나타난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남방계 복식, 중국 복식의 영향을 받은 듯한 복식이 그려져 있다. 특이점으로는 옷에 점무늬가 있다는 것, 문신했다는 것, 연지를 발랐다는 점 등이 있다.
수산리 고분에 나오는 귀족 여성이 입은 색동치마는 중국과 일본의 복식에서도 나오는 형태이다. 이를 보아 문화적 교류가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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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총 무용도
  • 고구려 고분 벽화 속 한복들을 보면 고구려의 화장 방식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화장은 당나라의 홍장분식(紅粧粉飾)[2]과 다른 연지 화장을 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3.2. 백제가야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백제와 가야의 한복
백제는 고구려와 달리 왼쪽 여밈보다 오른쪽 여밈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백제는 외국인에 대해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여러 국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 때문에 화려한 귀족적 미의식이 발달하여 삼국 중 가장 여성적인 특징이 많이 나타난다.
또한, 반비나 배자 등은 통일 신라 시대 때부터 생겼다고는 하지만, 벽화나 유물들을 추측해 보았을 때 이미 겉옷을 입는 복식문화가 등장했음을 할 수 있다.
백제의 갑옷은 일본의 갑옷과 큰 차이가 없는데 이것을 보아 두 국가의 무역 상태를 알 수 있다.
천수국만다라수장에서 발견된 백제의 여성 복식을 보면 층층이 단을 이루는 치마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치마는 다른 어느 국가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백제의 특징으로 보인다.
백제의 신발 중에는 일본의 게다와 같은 나막신이 있다.
백제의 여성들은 고구려의 여성들과 달리 연지를 바르진 않았지만, 백제의 화장품 제조 기술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가야는 백제, 신라의 복식문화와 유사성을 띤다. 두 국가보다 소박하지만, 섬세한 면이 강하다.

3.3. 신라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신라와 발해의 한복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보다 좀 더 토착적인 복식이 발전하였다. 다른 두 국가보다 화려했으며 금세공이 발달하였다. 김춘추의 복식 개혁으로 중국 당나라의 복식이 대거로 수입되었고, 통일신라후에는 귀족들의 복식에선 당나라풍이 유행해 수입해서 입고다니어서 당나라 한푸와 같은 형식을 보인다. 그러나 평민들의 복장에는 그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통일신라 시대부터 반비나 배자가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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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귀족 여성의 한복. 상의로 소매가 넓은 포를 입었고, 그 위에 반소매 끝에 장식선이 달린 반비를 입었다. 상의가 땅에 끌릴 정도로 긴 경우도 있다. 마무리로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숄이나 목도리에 해당하는 표를 둘렀는데, 이 역시 보온보다는 장식성이 강하다. 또 가슴 아래에서 끈을 묶고 그 끝을 길게 아래로 늘어뜨렸다. 당의 문물을 들여온 후에는 당나라의 영향으로 귀족 여성들 사이에는 저고리를 먼저 입고 치마를 저고리 위에 입는 방식이 유행했다. 다만 귀족 여성과 달리 서민 여성은 여전히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입었고, 예복으로는 포를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4. 발해


고구려의 복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하며, 당나라의 복식을 수입하였기 때문에 당나라의 한푸와 유사점을 띤다.

4. 고려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고려의 한복
고려 초중반의 남성 복식은 중국 송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왕비의 복식과 관료의 복식에서 그 영향이 가장 많이 나타난다. 여성 복식은 저고리 위에 치마를 입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복식들이 유행한 흔적이 있다.
고려 시대에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평상복으로 백저포(白紵袍)를 애용하였다. 백저포는 [고려도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흰색의 모시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고려의 여성들은 노란 치마를 즐겨 입었다고 한다. 원 간섭기에 들어서 고려에 몽골풍이 유행하며 몽골식 복식이 유행하였다.
이때부터 저고리가 짧아지고, 고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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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려시대의 여성용 한복. 고대의 한복과 기본 형태는 비슷하다. 고려 여성들은 노란색 치마를 즐겨 입었으며 치마가 길고 풍성할수록 좋게 여겼다고 한다. 중국풍 의상일 경우 치마는 저고리 위에다 입으며(참조자료)[3][4] 가장 위에는 포를 둘렀다.(참조자료) 허리에는 금방울이나 향낭을 차 장식하기도 하였다. 머리에는 몽수라는 일종의 베일을 썼는데(#) 이 역시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로 저고리 길이가 점차 짧아짐에 따라 허리띠 대신 옷고름의 원형이 되는 여밈끈을 달기도 했다. 고려 복식은 불화 덕분에 이전 시대에 비해 복식 재현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이다. 문화컨텐츠닷컴에서는 고려 복식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어 그래픽 재현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복식은 고려 초는 삼국시대와 유사하며, 원 간섭기에는 상류층(관리나 귀족)은 원의 복식을 따르게 된다. 옷에 고름이 생기고 저고리와 치마를 연결하여 철릭이 만들어졌다. 고려 말의 복식은 조선 초기 복식을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기존 통일신라시대 말에 전통 한복은 평민의 옷이자 귀족의 일상복으로, 중국 복식은 공복이자 예복으로 쓰였다면, 고려는 여기에서 상류층 예복조차 시대에 따라 중국의 장복과 적의, 혹은 몽골 복식으로 나뉜다. 왕조차 일상에선 평민들과 같은 저고리와 바지 차림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포가 변형되었다는 백저포를 신분과 성별을 막론하고 즐겨 입었다.
고려도경에는 상류층 부녀자들의 의복이 서민과 다를 바 없었으며, 어떤 사람에게 '왕이 올 때에야 비로소 왕족들이 비단 옷을 입는다'고 들었다 언급된다. 출처

5.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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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 전후 때까지 약 200년 간 입었던 치마저고리로, 저고리가 무척 크고 길었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부터 기존의 크고 긴 저고리를 조금씩 줄여입기 시작하는 동시에 이때부터 노리개가 애용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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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월향 초상에서 묘사되는 18세기의 저고리. 계월향 본인은 조선초기의 인물이지만 초상화는 먼 훗날에 들어서야 그려졌다. 이때 들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저고리의 길이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가슴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슴가리개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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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체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18세기 양식의 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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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창의
16세기 후에는 남자 바지의 형태가 지금의 사폭바지로 달라졌다. 이전에는 여자 속바지와 같은 형태였다. 위의 조선 이전 한복들을 봐도 사폭바지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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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한말~현대의 여성용 한복. 구한말에 이르러 오늘날 한복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근접하게 되었고 옷고름이 부각된다.


6. 제주도


제주도(탐라국) 지역은 육지와 떨어진 섬이라는 지형적 특색으로 인해 상당히 오랫동안 독자적이고 원시적인 복식문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후한서》동이열전과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서해에 있는 큰 섬에 주호국(제주의 옛 명칭)이 있는데, 가죽옷을 입은 사람들은 윗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입지 않으며 소와 돼지를 기르며 배를 타고 한(韓)과 교역한다"는 기록이 있으며, 제주 전통 모피·피혁류 복식 연구라는 논문에서는 '제주 중간 산간지역에서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1900년대 출생 제주도민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 상당히 최근까지도 가죽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이전 등의 기록을 통해 남방계의 영향이 짙었음을 알 수 있다. 4세기 한반도에서 북방계 복식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일본 복식과도 유사성이 있으며, 일각에서는 호복, 한푸의 영향을 받기 이전 한국의 원시 복식의 형태를 제주도 복식을 통해 추론하기도 한다.
[1] 고대한국복식의 원류에 관한 연구 : 스키타이계 복식문화를 중심으로, 스키타이 복식 유형 및 형태에 관한 연구- 고대 한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 (pdf)[2] 백분을 바르고 붉게 화장한다는 뜻으로, 검은 눈썹 화장인 미대(眉黛)(눈썹 화장을 중시해서 십미도(十眉圖)도 있었다.), 이마 가운데에 그림 그리는 화전(花鈿),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 부분을 황색으로 염색하는 액황(額黃), 볼을 붉게 칠하는 홍장(紅粧), 보조개가 있는 것처럼 그리는 면엽(面靨), 볼에 피가 흐르는 것처럼 그리는 사홍(斜紅), 이마, 콧등, 턱을 하얗게 칠하는 삼백(三白) 등이 있었다. 사진 사진2 사진3 중국 시대별 입술 중국 시대별 눈썹 당나라 시대별 눈썹1 당나라 시대별 눈썹2(앞과 이어짐) 당나라 눈썹 화전 화장 순서 홍장 재현 [3] 고려는 중국의 영향으로 왕족의 복식도 몽골풍과 고려풍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이는 귀족들도 마찬가지라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분적 복식제를 유지하면서도 귀족복식 내부에서는 고려식과 몽골식 등으로 나뉘었다.[4] 또한 통일신라의 영향일 가능성도 있다. 고려는 이름은 고구려에서 따왔지만 정작 신라를 계승하는 국가였다. 통일신라는 김춘추가 당의 복식, 제도 등을 긁어오다시피 들여온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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