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삼걸
서한삼걸(西漢三杰). 한삼걸(漢三杰), 한초삼걸(漢初三傑), 건한삼걸(建漢三傑)등으로도 불린다.[1] 위에 언급된 용어로 위키 내에서 검색해도 이 항목에 들어올 수 있다.
1. 개요
중국 진말한초(秦未漢初) 시대, 전한(西漢)을 건국할 수 있게 고조 유방(劉邦)을 도운 세 명의 명신인 소하, 장량, 한신을 일컫는 말. 한나라 건국에 있어서 최고의 공적을 세운 공신들이자, 기나긴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불세출의 영웅으로 평가받는 인물들이다. 이들을 이끈 유방도 위의 기록처럼 자신을 세운 최고의 공신들로 뽑았다. 이들 셋은 오늘날까지도 '''개국공신의 대명사'''로 불린다.
이들이 얼마나 능력이 뛰어났냐면, 각각 '''"중국사를 대표하는 책략가"''',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재상"''',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꼽힐 정도이다. 이들의 포스가 워낙 대단해서, 훗날 여러 왕조의 공신들의 활약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보통 이 세 명이 같이 있었던 전한의 개국 공신들을 최고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 세명은 단순히 능력자 세명이 모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각자 '대책략가', '명재상', '천하명장'같이 역할 분담이 확연하게 나뉘는 부분이 묘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능력뿐만 아니라 이 세 명이 뿜어내는 개성 역시 대단히 다채로운데, '''멸망한 조국의 원한을 갚으려는, 귀족 출신이자 미녀 같이 고운 외모의 천재 참모'''라든가, '''일개 고을의 아전으로 마을 잔치의 축의금을 셈하기나 하면서 지내다가 천하의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는 대재상'''이라거나, '''남의 가랑이를 기어가고 밥을 빌어먹고 살던 동네 한량에서 수십만 대군 위에 서게 되는 대원수'''라든가, 웬만한 소설의 등장인물보다도 강렬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로 그들의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수없이 회자되었다.
한명만 있어도 사기 소리가 나오게 하는 인물들을 휘하에 둔 군주 유방에 대해서 '희대의 행운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그들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만약 유방이 한신을 재상 자리에 올려 내정을 담당하게 하고, 소하를 대장군에 임명해 북벌을 지시했더다면 유방이 항우를 누르고 천하를 통일할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유방 역시 자신이 천하를 쥘 수 있게 된 것은 ''''그들 세 사람을 쓸 줄 알았기 때문' '''이라고 말했으며, 반면에 유방의 적이었던 항우는 범증 한 사람조차 제대로 부리지 못했다. 본래 장량은 한나라의 사람이었고, 심지어 한신은 항우의 사람이었다가 유방에게 왔다. 유방이 처음부터 휘하에 둘 수 있던 이는 같은 패현 사람이었던 소하 뿐, 나머지 둘은 자신에게 오도록 만든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최고의 능력자는 '''이들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기용하여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조율한 유방'''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2. 간략 소개
2.1. 소하
진(통일왕조)(秦) 시대에도 관직에 있었으며, 이후 유방(劉邦)의 막료(幕僚)로 그의 천하통일에 공헌했다.
이 과정에서 '''개국 공신 서열 1위'''에 인정받은 인물. 즉 공식적으로 한나라에서 한제국의 통일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인정했다는 말이다. 이때 찬후(酇侯)로 봉해지고 식읍 7,000호를 하사받았다. 상국에 임명되고 "구석"을 수여받아 한나라 역사에서도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시호인 문종(文終)과 합칭해 찬문종후(酇文終侯)라고도 한다.
전쟁 중에 자주 얼굴을 내보이는 장량, 한신과는 달리 소하는 전쟁이 벌어지는 내내 후방에 머물러 있어 언급이 적다. 그러나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전쟁의 핵심인 보급에 주력한 소하의 공 역시 어마어마하다. 비록 관중은 과거 진나라의 중심지로서 타지역에 비해 우수한 생산력을 발휘했다곤 하나 전쟁 중 기근이 돈 적도 있었으며, 병사가 부족해 어린 청년들과 노인들도 징발했기 때문에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하여 정상적으로 농사를 지을 상황이 아니었다. 때문에 지도자는 징발할 군량의 양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식량을 정확히 계산해 병사들과 백성들 양측에서 터져나올 수 있는 불만을 최소화해야 하고, 민심이 나빠지면 각종 제도를 통해 백성들을 다독여야 하며, 행여나 흑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이 나타나지 않도록 귀족들을 확실히 통제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유방은 전쟁기간 내내 항우와 정신없이 치고받느라 관중을 내내 비워놓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즉 2인자인 소하에게 모든 책임이 걸려 있었다는 뜻이다.
소하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영웅들의 화려한 전설 뒷편에서 그 영웅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묵묵히 마련해주었다. 삼진을 평정한 한신의 공에는 파와 촉에서 물자를 끌어올린 소하의 공훈이 있었다. 유방은 팽성의 싸움에서 유례없는 대패를 당했으나 소하의 보급에 힘입어 궤멸적인 패배를 극복해 내었다. 유방과 항우 광무 대치 당시, 유방의 군량은 그래도 여유가 있었지만 항우의 초군은 빈곤에 시달렸다. 항우는 그 이전까지 유방을 수차례 격파했지만, 소하의 보급이 이어지면서 결코 유방에게 결정타를 먹이지 못했다.[2] 한번 항우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자. 분명 상대방을 몇번이나 반실신상태로 관광 보내놓는데 그때마다 회복해서 좀비마냥 다시 돌아오니.(...)
또한, 전쟁 중 본거지를 맡고 있는 그 막대한 역할 때문에 군주 유방에게 여러 차례 의심받기도 했지만, 뛰어난 처세술로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후손들도 매우 대우받았는데, 사기 소상국세가에서는 소하가 죽고 난 후에도 황실이 소하의 후손을 찾아 작위를 잇게 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소하가 이룩한 공훈은 다른 공신들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고 컸기 때문이었다.'''
2.2. 장량
본래 한(韓)의 귀족 출신으로, 유방의 막료로 활약하며 그의 천하통일에 공헌했다. 이 공으로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다른 한삼걸 중 소하(蕭何)가 행정업무에 주력하고, 한신(韓信)이 전쟁에 주력할 때, 장량은 '''유방의 브레인'''으로 활약했다. 즉 초한전쟁 중에 가장 유방과 오랜 시간 같이 있으면서 그의 결정 하나하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장량이라는 것. 때문에 어떤 조직보스의 가장 믿음직한 측근을 "(그 사람의)장자방"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 '''한삼걸 중 유방에게 가장 신임 받았던 인물'''이 바로 장량이다. 한신은 그야말로 당해버렸고 소하는 여러 차례 의심도 받았지만 장량은 그런 것도 없었다. '''유후세나 사기의 여러 언급에서 장량의 제안을 유방이 거절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3] 거절은커녕 심지어 장량의 말을 듣고 고민했다는 식의 기록도 거의 없다. 이처럼 장량에 대한 유방의 신뢰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유방은 장량에게 무려 '''3만 호'''의 식읍을 주려고 했으나, 장량은 이를 거절했다.[4]
정치가와 군인이라는 비교적 현실감 있는 모양의 다른 두 명에 비해 장량은 신선을 만났다거나, 벽곡하며 생활했다는 등 묘한 구석이 많다.
2.3. 한신
과하지욕(胯下之辱)의 고사를 만들었고,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표현을 받았으며, 전한 건국 이후 최초에 봉해진 7명의 이성왕(異姓王) 중에 한 명이었다.
중국의 역사는 기나긴 수천 년에 달하며, 무수하게 많은 나라와 수많은 영웅호걸이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신은 그런 중국 역사상 최고 중의 최고로 손꼽히는 명장이다.''' 모든 지휘관들은 각자 상황이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니 일괄적인 비교는 어렵더라도, 적어도 가장 뛰어난 명장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수없이 손꼽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실제로 한신은 단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시작하여 여섯 나라를[6] 무너뜨렸으며, 두 명의 왕을 사로잡았고, 한 명의 왕을 참살했다. 그 기간은 불과 몇년에 불과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기동전, 배수진, 우회공격, 전면전 등 온갖 방식의 전투 방법을 총동원 했고, '''다 이겼다.'''
그러나 장량과 소하와는 달리, 전쟁터에서의 귀신 같은 면모에 비해 처세술은 '''빵점'''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유방과는 여러 차례 대립하는 면모를 보였지만, 결정적일 때마다 머뭇거린다든가 혹은 유방에게 선수를 먼저 빼앗기면서 끌려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그 엄청난 공적에도 불구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고,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가 널리 퍼졌으며[7] '토사구팽'이라는 고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되어버렸다.[8]
3. 한삼걸이 등장하는 미디어믹스
워낙 역동적인 인물들이었고 일단 초한쟁패기 자체가 매력적인 시대이기에 각종 미디어믹스에서 자주 나왔다. 그러나 보통 항우와 유방이라는 양대주인공의 대립이 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기에, 의외로 한삼걸의 비중이 모두 강하게 묘사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몇몇 작품들 중에서는 거의 진주인공 비중을 가지고 있는 한신은 제외.
3.1. 영상 매체(사극, 영화)
3.2. 만화, 게임
- 고우영 초한지: 소하는 단역 정도의 비중. 장량 같은 경우는 한왕 신과 한신의 일을 고우영 작가가 혼동하는 바람에 한나라의 복수를 위한 장면 대부분이 한신에게 몰려갔으며, 한신 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진주인공의 포스를 뿜어내고 있다. 본작에서 유방은 거의 인간 쓰레기로 나오고, 항우의 경우 동정할 만은 하지만 결점 많은 인간으로 묘사되는 데 비해, 한신은 거의 초인급 인물로 묘사된다.
- 항유기: 장량은 범증도 씹어먹은 게임 내 최강의 군사. 한신의 경우 빵빵한 능력치를 자랑하지만 시나리오 1을 빼면 아예 독자세력이 되어 고를 수도 없다. 반면에 소하는 상대적으로 안습한 능력치를 보여준다.
- 적룡왕: 전체적으로 유방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만화라 한신의 비중도 다른 초한지 관련 컨텐츠에 비해 적고, 소하 같은 경우 아무래도 만화다 보니 후반에는 거의 공기 수준의 비중으로 전락한다. 반면 장량은 직접 칼을 들고 항장과 검무를 추는 장면이 나온다.
- 삼국지 시리즈: 이쪽은 고대무장으로 등장.[9] 한신은 통솔이 제일 높고, 장량은 지력이 제일 높고, 소하는 정치가 제일 높다.[10] 무력이 제일 높은 장수가 항우인 점과 매력본좌는 이분인 점을 감안하면 소하를 제외하고 각 분야별 능력치 100을 마크하는 최강자가 모두 초한지에서 나오는 셈.
- 시바 료타로의 항우와 유방: 소하가 후반 비중이 약해지긴 하지만 대체로 한초삼걸에게도 상당 부분 비중이 배당된다. 또한 작가만의 인물에 대한 해석도 색다른 편이다. 소하의 경우는 행정, 민치가 삶의 도락이고 장량의 전략은 뛰어나지만 너무 현란해 소하의 행정업무가 마비된다든지 한신은 본래 겁쟁이로 겁나는 상황과 긴장감을 즐겨 그것을 토대로 다양한 군략을 전개한다는 신선한 캐릭터성을 선보인다.
-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항우와 유방: 기존 특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소하가 오리지널 생김새인 데 반해 장량은 전작 삼국지의 제갈량, 한신은 조조, 유방은 유비라는 의미심장한 외형을 띄고 있다.
[1] 그냥 '''삼걸(三傑)'''이라고만 해도 이 세 사람을 의미한다고 봐도 된다. 중국사가 기본소양이었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그냥 삼걸이라고만 해도 한삼걸임을 다들 알아들었다. (단, 일본에서 삼걸은 전국 3영걸을 의미하므로 주의.) 현대 국어사전에도 삼걸의 의미로 소하/장량/한신 (또는 촉한의 관우/장비/제갈량)을 묶어 부르는 말임이 명시되어 있다.[2] 이렇게 된 것은 소하가 유방의 함양 점령시 과거 진이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모아 놓은, 아방궁의 서고에 있던 천하의 정보를 적어 놓은 책들을 죄 쓸어갔기 때문이다. 소하가 한 일 중에서도 가장 큰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다 후방에서는 팽월이 초군의 보급로를 습격하며 초군의 보급망을 교란시키기까지 했다.[3] 정확히 말하면 유방이 장량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라고 볼 수 있는 기록은 딱 하나 있긴 하다. 사기 유후 세가에서 '漢十二年, 上従撃破布軍帰, 疾益甚, 愈欲易太子. 留侯諫, 不聴, 因疾不視事. 叔孫太傅称説引古今, 以死争太子. 上詳許之, 猶欲易之.' '한 12년에 주상이 경포의 군사를 격파하고 돌아왔는데 부상이 더욱 심해지자 태자를 더 바꾸려고 했다. 유후가 간했으니 듣지 않았다. 유후는 병을 핑계로 일을 돌보지 않았다. 숙손통이 고금의 사례를 들어가며 설득하는 등 죽음으로 태자를 위해 맞섰다. 주상이 짐짓 거짓으로 들어주는 척 했으나 여전히 태자를 바꾸려 했다.' 이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나 본래부터 장량은 태자 문제에 적극적으로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상산사호를 초빙하라고 여후에게 말한 것도 여씨 일족이 워낙 적극적으로 부탁을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랬을 뿐이었다. 이 기록은 여택이 간절하게 부탁하자 장량이 어쩔 수 없이 계책을 내준 이후의 기록인데, 본래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던 장량이 태자 문제를 유방에게 이야기한 뒤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이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은 여씨 일족에게 "부탁한 대로 반대는 했다."는 표시를 보여준 뒤 "나 이제 아프니까 뭘 더 할 수 없다." 제스처를 보여줬다고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태자 문제를 유방에게 이야기 했다고 해도 그렇게 애를 써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장량의 본심이 강하게 들어갔다고 보기도 어려울테고.[4] 참고로 1등공신 소하가 7000호다. 흠좀무.[5] 진말 당시는 동해군(東海郡)에 속했다.[6] 대, 위, 조, 연, 제, 초[7] 이 고사의 유래 자체는 범려(范蠡)의 일이다. 다만 워낙 이쪽이 임팩트가 강하여 한신과 유방의 일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8] 다만 한신을 직접 살해한 것은 유방이 아니라 그 아내인 여후가 한 일이라는게 중론이다. 또, 한신이 아무 잘못 없는데도 숙청당한 것도 아니고 분명 한신은 숙청당할 명분을 내내 쌓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역이기를 죽도록 만든 것과 해하 전투에서 미적거리다가 늦게 참전한 것은 기군망상의 죄로 당장 처형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9] 삼국지 인터넷에서 처음 나왔다. 단 소하는 삼국지 9콘솔판부터 나왔다. 근데 콘솔판은 별로 한 사람들이 없어서 삼국지 11부터 나왔다고 알려져있다.[10] 다만 정치 100은 진시황, 관중이다. 소하는 최소한 정치가 순욱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