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노 가오루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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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의원 (도쿄 1구)'''
''선거제도 개편''

'''제41대
요사노 가오루'''

'''제42~43대'''
가이에다 반리
'''제42~43대'''
가이에다 반리

'''제44대
요사노 가오루'''

'''제45대'''
가이에다 반리
-

-


'''일본 제11대 재무대신
((((かおる
요사노 가오루
'''
'''출생'''
1938년 8월 22일
도쿄도 치요다구
'''사망'''
2017년 5월 21일 (향년 78세)
'''국적'''
[image] 일본국
'''학력'''
도쿄대학 법학부
'''직업'''
정치인
'''신체'''
169cm, 63kg
'''가족'''
아버지 요사노 시게루, 어머니 요사노 미치코
남동생 요사노 도루[1], 여동생 요사노 후미코[2]
장남 요사노 유[3], 차남 요사노 유즈루[4]
'''소속 정당'''

'''의원 선수'''
'''10''' (중)
'''지역구'''
도쿄 1구
'''약력'''
일본 원자력 발전 근무
나카소네 야스히로 중의원 의원 비서
중의원
문부대신
내각관방부장관
통상산업대신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내각관방장관
재무대신
1. 개요
2. 생애
3. 성향 및 주장
4. 에피소드
5. 소속 정당
6. 기타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도쿄도 제1구 중의원이었으며, 재무대신, 내각관방장관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현 도쿄도 치요다구)에서 외교관 요사노 시게루와 평론가 요사노 미치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시게루가 베이징으로 부임해서 베이징으로 이사했었다. 4살 때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아버지는 나치 독일 베를린의 일본 대사관에 근무하게 되었으나, 일본에 남겨진 가족의 생활은 정말이지 곤궁했다. 파출소에 끌려가기도 했고, 도쿄 대공습을 겪는 등 불우한 과거를 보냈다. 미나토구립 아자부 소학교와 아자부 중학교를 거쳐서 아자부 고등학교[5]에 입학했다. 이때 훗날 동료 의원이 되는 히라누마 다케오를 만났으며, 히라누마에 따르면 공부를 잘했단다
졸업 후 도쿄대학에 입학하며 대학 졸업 후 어머니의 지인인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소개로 일본 원자력 발전에 입사하나 1968년 퇴사하고 나카소네의 비서가 된다. 1972년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구 도쿄도 제1구에서 당선되었다. 
1979년의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의 소비세 정책 때문에 낙선했다. 하지만 다음 선거에서 당선된 뒤 통상산업성 정무차관, 자민당 상공부 회장을 역임한다. 이후 가지야마 세이로쿠[6]와 친분을 맺게 되면서 카지야마가 요사노를 등용하게 되고, 카지야마 덕분에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의 문부대신,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의 내각관방부장관, 오부치 게이조 내각의 통상산업대신을 역임한다.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도쿄도 제1구에서 당선되었지만,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 도쿄도 제1구에서 민주당가이에다 반리에 패배한데다가 비례대표 구원도 못 받는 굴욕을 받는다. 요사노는 수십 년 전부터 도쿄 1구가 지역구였는데도 비례 부활도 못 받은 건 자민당 내에서도 충격이었다.
하여튼 이러다가 가메이 시즈카에게 계파 내 싸움으로 밀리면서 자기가 소속되어 있던 지사회도 탈퇴했다.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가이에다에게 패배했지만 비례대표로 부활,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비례대표 부활도 허용하지 않고 가이에다를 박살내면서 승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으로 임명된다.
아베 신조 내각이 출범하면서 요사노를 내각관방장관으로 임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고이즈미가 반대해(...) 시오자키 야스히사가 관방장관이 되어 이루지 못했다. 더군다나 몇 달 후에 입 통증으로 잠시 요양했었다. 그래도 퇴원한 뒤 아베 개조 내각에서 드디어 내각관방장관으로 취임했다. 사실 이것도 꽤나 아슬아슬했던 게, 원래 아베는 스가 요시히데를 임명하려고 했으나 스가의 사무실 비용 문제 때문에 포기했고, 그 다음은 마치무라 노부타카였으나 그것도 기각되고 요사노가 관방장관이 되었다.[7] 즉 3순위였다(...).
그러나 아베가 스트레스 때문에 병실에 실려가는 바람에 요사노가 대신 일을 처리했고, 후쿠다 야스오 내각 출범으로 짧았던 관방장관 직에서 내려왔다. 후쿠다 내각에서는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이 되었고, 아소 다로 내각에서는 재무대신 겸 경제재정담당대신 겸 금융담당대신의 3관왕을 달성한다. 이후 경제재정담당대신에 하야시 요시마사가 임명되면서 3겸임은 사라졌다.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가이에다에게 패배했고 비례로 당선되고 나서, 이때부터 급격히 추해지기 시작한다(...).
2010년 2월의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헌금 문제를 추구하면서 하토야마 보고 "헤이세이의 탈세왕"이라고 불렀다. 하필이면 유키오 동생 하토야마 구니오가 "우리 형은 항상 어머니한테 부하한테 나눠줄 돈이랑, 부하 키우는 돈이 필요하다면서 돈 받고 있었다"(...)고 형한테 불리한 발언을 했고, 이걸 캐치해서 하토야마를 구석까지 몰아갔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자민당을 극딜하더니 4월 3일 다니가키 사다카즈와 직접 만나 탈당 신고서를 내놓고는 히라누마 다케오, 소노다 히로유키 등과 함께 일어나라 일본을 창당했으며, 당연히 반역 행위로 자민당에서 제명 처분을 당했다. 그런데 더 어이 없는 것은 얼마 안 가 12월에 '''민주당 정권으로부터 연정 참여 권유를 받으면서 일어나라 일본을 탈당한다.''' 자민당이나 민주당을 나와 차세대당, 일어나라 일본과 같은 극우 정당에 합류한 정치인은 많아도[8], '''극우 정당에서 민주당으로''' 이적하는 사례는 없었다는 점에서(...) 희대의 철새가 아닐 수 없다.[9]
결국 '''간 나오토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으로 임명되고 민주당 회파에도 가입해 다시 여당 의원이 되는 등''' 철새의 끝판왕을 보여주었다. 지역구에서 선거 때마다 격전을 펼쳤던 라이벌 가이에다 반리와 같은 당 동료 의원이 된 건 덤이다(...). 당연히 자민당에서 요사노를 극딜했고 요사노는 "나는 '타도 민주당'이라는 말을 쓴 기억이 없다"고 발뺌했지만, 이미 2010년 아사히 신문 기사에서 타도 민주당이라고 말해서 거짓말이 되었다.
결국 노다 요시히코 내각 출범으로 퇴임하고 민주당이 망하니까 회파에서도 탈퇴한다. 그러나 간 내각 당시 몸이 망가지면서 2개월 입원하다가 인두암에 걸리고, 그 후유증으로 목소리마저 잃게 된다. 결국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정계 은퇴했다. 당시 요사노는 자신의 뒤를 이어 도쿄 1구에 자민당 소속으로 출마하는 야마다 미키를 지원하고자 자민당에 복당을 신청했으나, 자민당은 요사노에게 “지조가 없다”라고 답하며 무시했다.
2013년 목소리 재활치료로 다시 목소리가 나오게 되고, 4년 후인 2017년 4월 30일 자민당으로의 복당에 성공하지만 한 달도 안 된 5월 21일 사망했다. 처음에는 유족의 요청으로 사망 날짜가 비공개였지만, 자민당 임원 회의에서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이 21일이라고 발설해버려서 알려졌다.

3. 성향 및 주장


외국인 참정권을 반대했고, 원자력 발전소 찬성론자였다. 다만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선 합사자 분사를 주장했다. 그리고 소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중선거구제 부활을 주장했다. 아마도 도쿄도 제1구가 소선거구로 전환된 뒤 본인이 가이에다에게 패배해버려서 2위라도 당선되는 중선거구를 주장했는 듯.

4. 에피소드


  • 본명은 특이하게도 구자체 與謝野馨였으며, 보도할 때는 신자체 与謝野馨로 병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 바둑 실력이 거의 7단이었으며, 2007년 오자와 이치로와 바둑 승부를 했는데 패배했었다. 근데 오자와는 6단 실력이어서 요사노가 봐줬다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진짜 졌다고 요사노가 말했다. 인터넷 바둑 사이트에서도 '가오루'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는데 가오루라는 이름은 남녀 공용이라서 여자로 오해받았다(...)
  • 법학부 출신이라 문과이지만, 컴퓨터오픈 소스 같은 정보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1999년부터 2013년까지 14년 간 컴퓨터 20개를 조립했으며 그 중에 Windows 2000Windows XP가 있다고 한다. 본인은 OS 조립 완성까지 2시간 걸린다고 말했다. 특히 아키하바라에서 부품을 사는 것이 취미였는데, 하필이면 옴진리교의 PC 회사 마하포샤였다. 이외에도 빅 카메라도 이용하고 있다.
  • 정보 기술에 빠삭한 덕분에 200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즈음 의원 회관에서 니코니코 동화 생방송에 출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다만 아쉽게도 니코동 생방송 당시에 요사노 본인은 부재였고 대신에 요사노의 비서가 나왔다.
  • 다나카 마키코 전 외무대신에게 "가발 쓴 아저씨"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 2011년 5월 국무회의 후 회견에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소행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도쿄전력의 대처는)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대처를 했다"고 발언해 도쿄전력에게 책임을 무는 건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냈다. 참고로 요사노는 원자력 발전 출신이며, 통상대신 시절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가 발생했음에도 원자력 발전소 찬성론자다.
  • 39살부터 병치레가 잦았다. 39살 때 림프종이 발병했고, 2000년 직장암으로 10cm나 자르고 2001년 전립선암에 걸려 방사선 치료를 받았었다. 그럼에도 2006년 인두암으로 림프절을 절제했고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방광염까지 앓았다. 게다가 인두암으로 체중도 줄고 목소리도 잃는 등 유난히 암에 많이 걸렸다. 아무래도 유리몸인 듯 하다.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에도 길거리 유세 도중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주저 앉는 등 건강이 안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해당 영상(35초부터)
  • 2011년 7월 19일 기자 회견에서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에서 일본 여자 축구 국가 대표팀이 우승한 것에 대해 "일본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우수하다."라는 여성 우월주의적인 발언을 했다. 하필이면 그 발언을 했을 때가 남녀공동참가 담당 특명담당대신 시기였다.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72 - 2010
정계 입문

201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10
창당

2010 - 2017
민주당 회파 참여로 탈당

2017
복당

6. 기타



[1] 경제평론가이다.[2] 미술평론가이다.[3] 도쿄 해상일동화재보험 주식회사라는 곳에서 근무하고 있다.[4] 미쓰비시 그룹에서 근무하고 있다.[5] 하시모토 류타로, 야마다 다로, 다니가키 사다카즈, 스즈키 슌이치, 후쿠다 야스오, 히라누마 다케오, 쓰무라 게이스케 등이 여기 고등학교 출신이다.[6] 가지야마 히로시의 아버지.[7] 이후 마치무라는 요사노가 관방장관에서 퇴임한 후 후임 관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8] 자민당을 나와 극우 정당에 합류한 정치인으로는 이시하라 신타로, 히라누마 다케오, 나카야마 나리아키 등 그 예시가 많으며(...), 민주당을 나와 극우 정당에 합류한 정치인으로는 니시무라 신고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민주당 출신 정치인들 중 극우 정당에 합류하진 않았어도 카와무라 타카시나가오 다카시와 같이 성향이 우경화되는 경우도 있다.[9] 그나마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이적한 사례로 다나카 마키코가 있다. 그리고 다나카 마키코의 경우에는 아버지 다나카 가쿠에이의 정치적 제자들이 대부분 민주당에 가 있었기에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