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트니 휴스턴/생애
1. 데뷔 및 초기 경력
어머니가 가스펠 가수인 씨씨 휴스턴이며 사촌인 디온 워윅, [1] 등 사촌 형제들도 가수인 뮤지션 집안 혈통이다. 어머니 공연 때 코러스로 서다가 음반 기획자이자 프로듀서인 클라이브 데이비스 눈에 들어서 데뷔했다.
1985년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인 1집 《Whitney Houston》을 내게 된다. 이 앨범 장장 2년에 걸친 프로젝트로 제작비로 40만불을 쏟아부은 대형 프로젝트이다. 데뷔음반은 초반에는 부진했지만 싱글히트 (You Give Good Love 3위, Saving All My Love for You 1위, Greatest Love of All[2] 1위, How Will I Know [3] 1위)와 입소문으로 뒤늦게 빌보드 차트에서 14주동안이나 1위를 차지하고 미국 내 총판 1,300만장 및 월드와이드 2,500만장이 넘게 팔리면서 여자 가수 데뷔 음반 최고판매기록을 갱신했다.[4]
하지만 당시 그래미 어워드 신인상에는 후보에도 오르지 못하게 된다. 공식적인 이유는 과거 참여했던 듀엣곡 'Hold Me'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앨라니스 모리셋이나 에이미 와인하우스, 노라 존스 등의 예를 보면 그냥 '''당시 그래미가 지금보다 훨씬 흑인에게 매정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5] ''' 80년대는 흑인 여자 솔로가수의 존재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이다.[6][7] 반대로, 휘트니 휴스턴이 큰 성공을 거둠으로서 흑인 여자 솔로 가수의 유리 천장이 깨지기 시작했고, 이 시기부터 빼어난 가창력을 바탕으로 오페라의 주역 프리마돈나에게 쓰였던 호칭인 디바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1987년에 발매된 2집 《Whitney》로 소포모어 징크스는[8] 개나 줘버리고 대성공을 거두면서 '''마이클 잭슨의 뒤를 이어 프린스, 마돈나와 함께 대표 가수로 자리매김한다.''' 대중적 인기의 마돈나를 87년 AMA에서 떡실신시켜 버릴 정도로 대중성과 음악성을 모두 겸비했다. 2집 Whitney 앨범은 전작의 히트메이커였던 나라다 마이클 월던과 마이클 매서를 주축으로 전작의 히트 공식을 충실히 따라갔으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여성 최초로 빌보드 앨범차트 1위로 데뷔했고 총 11주간 정상에 머물렀으며 빌보드 1위곡 네 곡과 월드와이드 합산 2,20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 앨범은 특히 유럽 쪽에서 전작보다 히트하여 휘트니를 확고부동한 월드스타로 만들어준다.
1~2집 시절에는 백인 취향의 음악만 한다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백인 취향 어덜트 컨템포러리 팝을 소울 창법으로 부른 것에 불과하다는 평이었는데 실제로 백인 대중의 입맛을 잡기 위한 마케팅이기도 했다. 댄스곡인 How Will I Know나 I Wanna Dance with Somebody (Who Loves Me) 는 확실히 아이돌스러운 댄스 팝 음악이지 진지한 음악은 아니었다. 본인이 노래를 엄청나게 잘 해서 고급스러웠을뿐... 휘트니보다 조금 더 일찍 활동을 시작해서 80년대 리듬 앤 블루스계를 불태운 아니타 베이커에 비하면 확실히 덜 검은 음악인게 사실이다.
일례로 1989년, 대표적인 흑인 음악 시상식 소울 트레인 어워드에서 후보로 휘트니 휴스턴을 지명하자 관객들이 일제히 야유를 터트렸다고 한다. 흠좀무. 이런 비판에 스스로도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지만 한 인터뷰에서는 특정 집단의 취향에 맞춘 음악이 아닌 자신만의 음악을 하겠다는 당당한 답변으로 자신이 가진 생각을 나타냈다. 당시 잘나가던 바비 브라운[9] 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녀에게 흑인 가수로써 자부심을 심어줬다고 한다.
회사의 요구에 따르기만 했던 1~2집과 달리, 슈퍼스타가 돼버린 휘트니는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했다. 1990년 발매된 3집 《I'm Your Baby Tonight》에서는 기존 프로듀서진의 참여를 최소화시키고 베이비 페이스와 엘에이 레이드를 메인 프로듀서로 수혈했으며 자신도 프로듀싱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흑인 음악을 시도하게 된다. 결과는 전작들의 눈부신 성공에 비해 다소 초라한 성공으로 돌아왔다.
알앤비 소울에서 뉴잭스윙까지 당시 흑인 음악 트렌드를 충실히 반영했고 흑인 음악의 대부 스티비 원더와 R&B계의 신사 루서 밴드로스까지 참여한 이 앨범은 흑인 사회에 휘트니의 위상을 재정립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상업적으로는 2곡의 1위 곡을 배출했고 앨범 차트에서도 최고 3위에 판매량은 '''1,200만장의 판매량''' 에 그쳤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1위 곡을 배출하고 1,2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이 앨범을 망했다고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당시 휘트니의 엄청났던 인기와 비교해본다면 아쉬운 성적임을 알 수 있다.
2. 영화 보디가드
1992년, 휘트니는 바비 브라운과의 결혼과 보디가드#s-1라는 영화 출연을 통해 가수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전환점을 맞이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영화에 대해서는 보디가드 항목 참조. 영화는 비평적으로 처참했지만 흥행은 대성공했고 삽입된 OST는 4,5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공전의 히트 및 전 세계적으로 신드롬적인 인기를 누렸다.[10]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총 20주간 정상의 자리를 지켰으며 1곡의 1위 곡과 2곡의 Top 5곡을 배출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1994년 그래미 시상식에선 그래미 최고 알짜배기인 올해의 앨범상과 올해의 레코드, 그리고 최우수 여자가수상을 받으며 비평적으로 최고의 호평을 받는다.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상에는 'Run to You'와 ' I Have Nothing'이 노미네이트 되었으나[11] 알라딘의 A Whole New World에게 지고 말았다. 또한 보디가드 투어를 통해서 미국 유럽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돈을 쓸어 담았지만 한편으로는 목 상태도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12]
영화에서 휘트니 휴스턴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가수' 역으로 등장한 데서 알 수 있듯 OST 자체가 휘트니 휴스턴의 앨범과 다름없이 만들어졌으며 특히 OST 앨범의 리드 싱글인 'I Will Always Love You' 가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여가수 싱글 중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이 곡은 원래 1974년 컨트리 가수인 돌리 파튼이 작곡하고 불렀던 곡이었는데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가 매끈한 알앤비 곡으로 변모시킨다. 본래 《What Becomes of the Broken Hearted》를 메인 테마로 사용하려 했지만 다른 영화에서 이미 사용해서 케빈 코스트너의 추천으로 이 곡을 사용하게 된다. 돌리 파튼이 본래 작사해 두었지만 자신이 버전에 발표하지 않았던 곡의 3절 가사를 휘트니에게 선물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해당 OST 앨범에서만 네 곡의 빌보드 5위권 싱글이 나왔으며 20위권 내에 네 곡이 동시에 머무르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데이비드 포스터가 작곡에 참여한 'I Have Nothing'과 'Run to You'[13] , 샤카 칸의 원곡을 리메이크 한 'I'm Every Woman'[14] 은 이후 휘트니 휴스턴의 대표곡이 되기도 했다. 이 OST 앨범의 빌보드 싱글 차트 기록은 다음과 같다.
- I Have Nothing : 3위
- I’m Every Woman : 4위
- Run to You : 31위
이 앨범에서는 전작보다 훨씬 굵어진 목소리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음역은 조금 낮아진 듯하다[15] . 이후에는 마약 투여와 과다한 흡연, 살인적인 콘서트 투어로 성대 결절을 앓게 되고 1996년 브루나이 공연을 보면 보컬 파워가 확연히 떨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시기에 하나뿐인 딸 바비 크리스티나를 얻기도 한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임신을 하지만 모두 유산했다.
3. 전성기 이후
그 이후 정규앨범 없이 '사랑을 기다리며 (Waiting To Exhale, 1995)'와 '목사의 아내 (한국 개봉명: 프리쳐스 와이프, The Preacher's Wife, 1996)', '신데렐라 (Cinderella, 1997)' 같은 영화 출연을 병행하며 OST 정도만 발매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브로드웨이 뮤지컬 드림걸즈를 영화로 옮기는 작업이 시도되기도 했다. 과도한 투어와 마약으로 목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하였고 차트 성적도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다 1998년 4집 《My love is your love》로 8년 만에 정규 앨범을 발매하며 컴백한다. 이 앨범은 비평적으로 본인의 앨범 중 최고의 찬사를 받는다. 성숙해진 목소리와 완연한 리듬감으로 R&B 가수로도 인정받으며 그래미 최우수 R&B 보컬까지 수상하게 된다. 또한 유럽 차트에서 성공을 거두고 미국 내에서도 싱글로 발매한 3곡이 모두 싱글차트 Top 5에 오르며 식지 않은 인기를 증명한다. 와이클리프 장이 만든 이 앨범의 타이틀 싱글 'My Love Is Your Love'는 레게풍 팝으로 휘트니 휴스턴의 '마지막 히트곡'이다. 실제로 최후의 빌보드 싱글 10위 곡이다. 특히 레게로 된 원곡도 그렇지만 조나단 피터스가 한 댄스 버전 클럽 리믹스도 당시에 함께 풀려서 큰 인기를 얻었다. 월드 와이드 '''1,3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상업적으로도 괜찮은 성적을 거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수많은 루머에 시달리며 대중들과 점점 멀어졌다. 대표적으로 레즈비언설, 남편과의 불화설, 그리고 마약이었다. 2001년 마이클 잭슨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에서 보여준 해골같이 마른 모습은 그런 논란을 더더욱 가중시켰다. 특히 뉴 에디션 출신인 바비 브라운과 1992년에 결혼한 후로 휘트니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진다.[16] 본래는 백인 흉내내는 흑인 신데렐라 이미지에 가깝던[17] 것이 악동 남편을 만나면서 많이 변했고 흑인계들의 지지도 역시 엄청나게 올라갔다. 하지만 남편 바비 브라운의 가정 폭력, 외도 및 여러 돌발 행동으로 인해 끊임없이 뉴스에 오르내렸다. 신혼여행지에서 바비가 깨뜨린 유리잔으로 얼굴에 상처를 입어 흉터 제거 수술을 받기도 했고, 왼쪽 뺨이 멍든 상태로 법원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함께한다.' 라고 바비와 껴안으며 인터뷰를 해 남편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이후 술, 마약에 빠지면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이후 2009년 컴백과 함께 이루어진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비 브라운은 휘트니에 대한 질투와 자격지심에 휘트니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정신적 폭력도 가했고 그 때문에 휘트니의 음악 활동에 대한 의지가 거의 사라졌다. 다만 맨 위 단락에 나왔듯이 휘트니의 마약복용은 훨씬 전인 16살때부터 시작했다. 증거 링크 오히려 바비 브라운이 그녀와 그녀의 형제들에게 마약을 배운것이 다큐멘터리 영화 휘트니(영화)에서 휘트니의 친인척들을 통해 밝혀졌다. 하지만 바비 브라운은 자서전에서 코카인 판매책이었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코카인을 밀가루로 착각해 요리한 적이 있을 정도로 마약을 접하기 쉬운 환경에서 자랐으며, 휘트니와의 교제 이전 어린 시절부터 마약을 했다고 고백했다.
2002년 정규 5집 앨범인 《Just Whitney》를 발매하고 루머를 해명하겠다며 다이안 소어와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역효과만 불러일으키고 그나마 있던 긍정적인 이미지까지 망치게 된다. 이 인터뷰로 휘트니는 마약 사용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희대의 명언인 '''Crack is cheap. Crack is wack'''을 남긴다.[18] 번역하면 '(마약의 일종인) 크랙은 싸구려야. 최악이라고.' 이후 자신은 크랙을 쓰기엔 너무 부자라는 터무니없는 해명이 이어졌다. 틀린 말은 아닌 것이, 크랙 항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크랙은 하류 계급이 사용하는 싸구려 마약이 맞다. 그리고 휘트니 휴스턴과 바비 브라운은 코카인을 사용했다. 나름대로 진솔한 인터뷰였고 동정 여론도 있었지만 방송에서 가장 주목 받은건 'crack is wack'이라는 발언과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이어진 뻔뻔한 태도였다. 그 결과 5집 앨범은 첫 주 판매량에서는 휴스턴의 모든 앨범 중 가장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데뷔했지만 결과적으로는 190만장을 판매하며 상업적 실패를 기록했다. 2009 오프라 윈프리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보면 크랙 역시 복용했다고 한다. 이 인터뷰 말미를 보면 휘트니는 더이상 가수로서 욕심이 없음을 나타낸다.
명콤비였던 클라이브 데이비스와 결별하고 발매한 첫 앨범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앨범이었다. [19] 그러나 싱글 발매된 곡들 모두 빌보드 Top 50 진입에 실패했고, Hot Dance Club Play 차트에서의 소소한 성공만이 위안이 되었다. 특히 첫 타이틀이었던 《Whatchulookinat》은 자신을 공격하는 타블로이드 및 가십 언론계 전반을 비판하는 곡이었는데 이 곡 이후 휘트니의 라디오 방송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이는 에어플레이의 저조를 의미한다.
더구나 이 앨범은 프로모션을 거의 하지 않았고, 진행했던 프로모션조차 곡에 대한 홍보 효과보다 대중에게 목상태가 완전히 가버렸다는 사실을 각인시킬 뿐이었다.[20] 이후 2004년 러시아나 일부 아시아 지역 투어도 돌고[21] 세계 여성의 날 시상과 월드 뮤직 어워드에서 보여준 공연을 보면 어느 정도 상태가 회복되는 듯 했지만 이후 토리노 올림픽 축하 공연 등을 보면 목 상태는 회복 불능의 지경까지 가버린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사실상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를 보면 휘트니는 이미 'I Will Always Love You'를 부르던 시절부터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한 중독으로 치닫았음은 물론이다.
2004년 바비 브라운과 함께 출연한 리얼리티 쇼 'Being Bobby Brown'에서 팬들에게 보여준 모습은 더욱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당시 유행이던 셀러브리티들의 막장 생활을 보여주는 붐에 편승한 형식으로 시청률만 놓고보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 자신에게는 더 이상 떨어질 나락이 없는 현실을 방증했다. 이후 유일하게 잘한 일은 시즌 2 거절이었다. 클라이맥스로 2006년 충격과 공포의 주유소 파파라치로 완전히 망가진 모습을 보여줘 모두를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다.
2007년 남편 바비 브라운과 이혼하고,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파산에 이르는 등 어려움을 겪어왔다. 재기를 위해 심기일전해서 2009년 정규 음반 6집 《I Look to You》 를 발표했으며 오프라 윈프리 쇼 Season Premier, 굿모닝 아메리카 Summer Concert Series 참여와 같은 대중과의 재회는 여전히 수많은 팬들이 휘트니 휴스턴을 기억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런 지지에 기반하여 빌보드 앨범차트 1위로 데뷔했다.
그 후 'Nothing But Love World Tour'가 시작되었다.[22] 하지만 그 당시의 목 상태는 도저히 장기간 투어를 소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의 컴백에 팬들은 환호했지만, 동시에 전성기와 비교도 안 되는 가창력은 많은 실망도 안겨주었다. 유명 팝스타의 내한 공연에 항상 칭찬 일색이던 배철수조차 음악캠프 라디오에서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고 공개적으로 언급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한술 더 떠 호주에서는 티켓 환불 소동까지 일어났다.
4. 디바의 죽음과 그 후
2012년 2월 11일(현지 시각)에 숨을 거두었다. 이 때가 향년 48세. 사망 장소는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 있는 베벌리 힐튼 호텔. 이 날은 그래미 시상식 전날 축하 파티가 있던 날로 파티 도중에 발견되었다. 그래미 시상식 바로 전에 세상을 떠난 데다 시대를 풍미했던 디바의 씁쓸한 최후에 동료들은 물론 팬들도 큰 충격에 빠졌다. 흑인 최초의 '아메리칸 스윗하트'였던 그녀의 죽음에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는 슬픔으로 가득찼고, 그 해 구글 검색어 1위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 때와 비슷하게, '''인종 혐오가 느껴질 정도로 휘트니 휴스턴을 잔인하게 비난하던 타블로이드는 일제히 추모의 물결에 휩싸였다.'''
2012년 2월 22일에는 미국의 National Enquirer지에서 시체 사진을 공개해 논란이 되었다. 제목은 ''''Whitney : The Last Photo''''. 2012년 3월 22일에 정확한 사인이 밝혀졌다. 코카인 흡입 후 익사라고 한다.기사
2015년 2월 5일에는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22)이 마약 과다 복용으로 욕조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 후 뇌사 상태에 빠져 있다 퇴원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이 퇴원이 사실상 '포기'로서 치료 거부인지 '호전'으로 인한 이송이나 자택 복귀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더욱이 뇌사 상태 이후에 바비 브라운과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의 남편[23] 닉 고든은 진흙탕 싸움을 벌였고 와중에 딸이 유품으로 갖고 있던 2억 원 상당의 반지를 도난당하는 등 악재가 겹쳤다. 결국 7월 26일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은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뒤를 따라갔다. 기사
장례식은 뉴저지 주 뉴워크의 뉴 호프 침례교회에서 행하였다. 데뷔 전 휘트니 휴스턴이 성가대로 활동하면서 노래 실력을 쌓은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장례식에는 보디가드 때의 상대 배우였던 케빈 코스트너도 직접 참석하여 추도사를 하였다. 휘트니 휴스턴의 유가족들이 케빈 코스트너에게 참석을 요청했다고.
2020년 11월 18일 오후 의붓아들 바비 브라운 주니어(28)가 로스앤젤레스(LA)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으며 현장에서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기사
[1] 아레사 프랭클린은 씨씨 휴스턴이 그의 백보컬을 맡는 등으로 친분이 있었을 뿐, 휘트니 휴스턴이 어릴 적 아레사 프랭클린을 매우 동경하며 했던 말이 와전된 것이다. 그럼에도 디온 워윅이 휘트니 휴스턴의 장례식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을 휘트니 휴스턴의 대모로 소개했고, 이에 대해 프랭클린은 2017년 Associated Press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매우 화를 냈다.[2] 전설적인 재즈 기타/보컬리스트이자 팝으로도 성공한 조지 벤슨이 77년에 먼저 발매했다. 원곡에서는 'The' 가 앞에 들어간다. The Greatest Love of All[3] 원래 자넷 잭슨의 3집 앨범에 실릴 예정이었던 곡이다. 그러나 자넷이 거절했다고 한다.[4] 1995년 발매된 앨라니스 모리셋의 데뷔 앨범 'Jagged Little Pill' 이 3200만장이 판매되면서 기록 갱신. 사실 앨라니스 모리셋의 Jagged Little Pill은 데뷔음반이 아닌 세번째 앨범이지만, 1,2집은 캐나다 한정으로 발표한 앨범이고 세계무대에 들고나온 앨범은 3집이기 때문에 Jagged Little Pill을 1집 취급하기도 한다. 비요크의 데뷔앨범을 1977년에 내놓은 Bjork가 아닌 1993년에 내놓은 Debut로 여기는 것과 비슷한 케이스.[5]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1988년 그래미 어워드인데 당시 마이클 잭슨은 Bad 앨범에서 350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하고 빌보드 1위곡을 5곡이나 배출하며 Bad World Tour를 대성공으로 마무리했지만 6개 부문에 지명되기만하고 '''단 하나의 상도 받지 못했다.'''[6] 1980년대 메인스트림에서 성공을 거둔 흑인 여가수를 꼽으면 휘트니 휴스턴과 재닛 잭슨, 샤데이 정도 밖에 없을 정도다.[7] 2010년대에도 그래미는 흑인에게 박하긴 하다. 특히 현재도 흑인 여성은 그래미 본상을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단적인 예로 올해의 앨범상을 받은 마지막 흑인 여성은 로린 힐인데, 이것이 벌써 1999년이다. 그 이후로 올해의 앨범상을 받은 흑인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8] 소위 말하는 2년차 징크스. 1집은 엄청나게 흥했는데 2집은 폭망하는 그런 경우다.[9] 앨범의 5 싱글이 모두 top 10에 안착하고 싱글차트 1위곡 2곡 배출, 뉴 잭 스윙의 신성이자 당해년도 빌보드 종합 1위 가수였다.[10] 현재까지 가장 많이 팔린 여가수 앨범으로 올 타임 1위.[11] 왜 I Will Always Love You가 아닌가 싶지만 본래 아카데미 주제가상의 공식 영어 명칭이 'Academy Award for Best Original Song'인 만큼 'original'을 만족하지 못하는 리메이크 곡은 심사 대상이 아니다. 시상식에서 휘트니는 건강 문제로 참여 못하고 이 두 곡을 나탈리 콜이 부른다. (굉장히 안 어울린다, 나탈리 콜은 재즈 보컬에 적합하다.) 이로써 휘트니의 Run to you 라이브는 영영 볼 수 없게 됐다. 1994년 보디가드 투어에서의 Run to You 라이브가 영화 보디가드 OST 발매 25주년 앨범(I Wish You Love: More from 'The Bodyguard'(2017))에 수록되었다.[12] 하지만 서울은 오지 않았는데, 당시 공연이 성사 직전까지 갔지만 마지막 계약금 문제로 취소됐다고 한다.[13] 3옥 파샾을 넘는 고음역 곡으로 휘트니 자신도 버거워 하는지 I have nothing은 라이브에서 항상 키를 낮춰 불렀고 Run to You는 라이브를 한 적이 거의 없어 라이브 녹음본이 존재하는지 여부가 팬들의 관심사였다. 휘트니는 이 곡을 1993년-1994년에 진행된 The Bodyguard World Tour에서 부른 적이 있으며, 그 중 1994년에 부른 버전이 영화 보디가드 OST 발매 25주년 앨범(I Wish You Love: More from 'The Bodyguard'(2017))에 수록되어 팬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14] 원곡인 샤카 칸의 곡은 휘트니가 백업 보컬로 참여한 곡이다.[15] 라이트 팬들 중에는 휴스턴과 머라이어 캐리의 듀엣이나 이 곡, 압도적인 성량 때문에 여자치고 두꺼운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초창기 및 전성기 당시에는 성량이나 파워와는 별개로 목소리 자체가 곱고 예뻤다. 게다가 이 예쁜 목소리로 어마어마한 파워를 뽐내는 걸 보면... 실제로 (목소리가 변하기 전) 인터뷰할 때 장면을 보면 기본적으로 미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16] 뉴 에디션은 잭슨 파이브를 모델로 기획사에서 오디션을 통해서 외모와 춤, 노래 실력이 갖춰진 멤버들을 모아서 만든 팀. 데뷔 당시 평균 16세로 현재 K-POP의 주류인 기획형 댄스 아이돌의 시초로 평가된다. 이 팀의 백인 버전이 1990년 초반을 강타한 뉴 키즈 온 더 블락, 한국 버전은 H.O.T. 정도로 볼 수 있다.[17] TV용 영화 신데렐라에서 요정 대모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의 제작진은 등장인물들을 일부러 color-blind로 캐스팅했으며, 가수 Brandy는 영화에서 신데렐라 역을 맡은 최초의 유색인종 배우가 되었다.[18] 사실 이것은 앤디 워홀의 말이다.[19]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와의 결별 이후와는 대비된다.[20] 가장 유명한 공연이 2003 VH1의 Try It on My Own 공연이다.[21] 트랙리스트를 보면 5집 곡은 빠졌다. 상업적인 성패와 별개로 휘트니 자신조차 5집을 맘에 안들어 하는 듯하다.[22] 원래 일본에서 2010년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 주간에 시작하기로 된 투어는 현대카드의 과감한 투자로 인해서 2010년 2월 6일과 7일 한국에서 시작했다. 현대카드 측은 이틀 간의 공연에 대략 150만 달러를 제시한 것으로 추측된다.[23] 바비 브라운의 주장에 의하면 법적인 남편이 아니며, 뇌사 상태가 된 원인도 닉 고든이 욕조에서 밀쳤기 때문이라고.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이 사고 전 sns에 닉 고든과 결혼했다고 올린 적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