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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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해방군 공군의 J-7G.[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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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공군의 F-7P
1. 제원
2. 개요
소련으로부터 MiG-21의 라이센스를 받아 개량생산한 중국의 제트 전투기. 제작사는 청두 항공기 공업 그룹(成都飛機工業集団 Chengdu Aircraft Industries (Group) Corporation) J-7은 섬격(殲擊)-7형이라는 뜻이다.
3. 개발 배경
중국과 소련은 건국 직후부터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었다. 1950년대 초부터 중국은 소련과 거액의 계약을 맺고 전투기를 비롯한 각종 군함, 전차, 화포, 개인화기 (AK-47, SKS) 까지 많은 부문의 소련제 무기를 라이센스 생산하게 된다. 하지만 1959년말 마오쩌둥과 흐루쇼프의 정치적 결별인 중소결렬로 파국을 맞는다.
중국은 MiG-19를 J-6으로 라이센스 생산하고 있었는데 1959년 이후로는 소련이 모든 기술진들을 철수하여 기술도입선이 막혀버린다. 그러다가 1962년 흐루쇼프는 갑자기 화해의 제스처[3] 로 마오쩌둥에 편지를 보내서 자국의 최신예기 MiG-21의 라이센스 생산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1962년 3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중소결렬 이후 처음으로 라이센스 협정이 맺어진다. 라이센스 협정은 선양시에 있는 선양 항공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소련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선양은 소련 공군의 폭격가능범위에 있었기 때문에 양산형 생산은 내륙의 청두시에 있는 청두 항공이 맡게 된다. 그래서 청두 J-7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MiG-21의 설계도 및 소련 파일럿이 직접 몰고 온 시제기, 샘플용 미조립 기체와 녹다운 생산 키트를 소련으로 부터 받게 되었다. 중국이 예상한대로 도면과 키트만 가지고 알 수 없는 기술적 난제는 수백가지였지만, 흐루쇼프의 화해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중소관계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측은 제대로 이런 문제점을 알려주지 않았다. 특히 항공기 제어의 핵심인 유압장치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기술을 거의 전수하지 않았고, 여기에 MiG-21의 치명적인 단점이었던 무게중심 문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아서 중국이 생산한 J-7의 프로토타입들은 대부분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측은 이전에 J-6 생산 경험을 가지고 소련의 기술진이 달랑 준 도면과 부품을 가지고 연구해가면서 독자적인 개량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니까 J-6은 MiG-19와 완전 동일한 카피형으로 볼 수 있지만, J-7은 어느 정도 중국의 기술이 들어간 기종이다. 소련측이 MiG-21의 여러 기술적 문제점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아서, 자체적인 개발을 통하여 완성하다보니 하나 하나 기술을 습득하면서 개발하였기에 시간이 오래 걸렸고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한동안 기술개발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기체형상은 초기형 MiG-21F13을 본떴기 때문에 일반적인 MIG-21에 비해 기수가 더 가늘고 조종석 뒤에서 수직미익까지 이어지는 도설 스파인도 더 가늘어보인다. 첫 비행은 1966년 1월17일에 성공하였고 1년 반간의 시험 비행을 거쳐 1967년 6월에 대량생산이 결정되었다. 소련과의 관계 악화로 여전히 MiG-19가 주력인 중국 공군은 마하 2급의 전투기가 절실히 필요하였기에 생산은 서둘러 추진되어 1967년 3월부터 일선부대에 배치되었고 미국의 U-2 정찰기 요격에 사용하기도 하였고 1967년 6월에 U-2를 격추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시기에 등장한 J-7은 MiG-21F-13의 복사본으로 주로 중국 공군이 사용하였고 수출형 일부가 알바니아, 이집트, 탄자니아에 판매되었다.
개발을 통해 축척된 기술을 기반으로 1975년부터 J-7의 독자적인 개량형 개발을 실시하게 된다. 개량 부분은 엔진의 추력 향상, 사출좌석 개량, 신형 캐노피 채용, 연료 탱크 추가장착 등이 실시되었고 1978년 12월에 첫비행을 실시하였다. 1980년부터 생산한 이 기체는 J-7Ⅱ로 불리고 수출형은 F-7B이다.
중국은 지속적으로 개량을 실시하여 주익을 이중 델타익으로 개량한 J-7E, 서방제 장비 탑재한 F-7M(1979년 5월 개발 시작, 1984년 11월 개발 종료 후 1985년부터 수출시작), J-7의 주요 고객인 파키스탄군의 요구로 AIM-9 사이드 와이더 장착과 미제 사출좌석을 장비한 F-7P, F-9MP형이 있다.
중국 공군의 내부 수요를 위해 F-7M에 적용된 기술을 활용하고 신형 대형 레이더를 장착하여 MiG-21MF급으로 성능을 끌어올린 전천후 요격기인 J-7Ⅲ을 개발하였다. 1984년에 첫 비행에 성공후 1985년부터 배치되었으며 현재 배치되어 있는 J-7G는 이 III형을 두번에 걸쳐 더 개량한 사양이다.
중국은 1980년대부터 해외 판매가 부진해지자 J-7의 후속기 개발로 슈퍼 F-7을 계획하게 되는데 그것이 FC-1으로 이어진다.
4. 기타 국가
-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파키스탄군의 J-7은 여러번 인도군의 원판 MiG-21과 맞붙었다. 중국은 파키스탄처럼 인도와 사이가 나쁜 인도 주변국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미얀마) 등에도 J-7을 뿌렸다. J-7은 중국에서 1990년대 말부터 퇴역하기 시작했지만, 이런 우방국 원조용으로 2013년까지 생산되었다.
- 북한도 소련과 중국에서 각각 공급받은 MiG-21과 J-7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 이란과 이라크는 모두 중국에서 구입한 J-7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를 이란-이라크 전쟁에 투입하였다. 이란은 아직도 보유하고 있으나, 이라크의 J-7은 걸프 전쟁 및 이라크 전쟁 와중에서 모두 파괴-퇴역했다.
- 이외에도 중국과 우호적인 여러 아프리카국가 (이집트, 수단, 나미비아, 모잠비크 짐바브웨)에도 무상 또는 판매로 공급되었다.
5. 현황
1990년대 후반까지 주력기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2000년대부터 퇴역하기 시작했고, 2010년에 현역으로 남아있는 대수는 연습형까지 합해서 300여 대 정도이다. 현재 중국 공군의 주력은 J-7이 아니라 Su-27의 중국 버전인 J-11과 J-10이며, J-8은 J-7과 J-10을 이어주는 역할을 2000년대 잠깐 했다.
수출형은 F-7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는데 중국의 외교 전략에 이용되어 제3세계의 나라들에 여러 대 수출되거나 원조되었다. 수출 대수는 약 1,700~1,800기.
F-7을 도입한 나라 중에 재미있는 곳이 이집트인데, 현재는 F-16에 M1 에이브람스, AH-64 아파치 같은 최신형 미제 무기를 운용하는 나라이지만 이스라엘과 수교하기 전에는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아 MiG-21과 F-7을 모두 운용했었다. 이집트는 F-7 이외에도 IL-28의 중국 버전인 H-5도 도입했었다.
파키스탄은 MiG-19의 중국 버전인 F-6을 도입해 운용해본 결과 꽤 만족하고 F-7도 도입했다. 파키스탄이 도입한 F-7P/PG의 경우에는 윈드실드 프레임을 없애 시야가 좋아지고 미제 사이드와인더 운용능력을 갖추고 있다. 파키스탄의 F-7은 2015년까지 운용하고 JF-17로 대체될 예정에 있다.
북한도 40여 대 보유하고 있지만 북한이 도입한 F-7은 파키스탄의 것처럼 현대적인 개량을 거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MiG-21이 대부분 J-7이라고 생각하나 사실은 북한이 보유한 MiG-21 피쉬베드 계열 전투기 중 1/3에 불과하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후에는 중국이 전투기를 안 팔아서 1990년대 카자흐스탄에서 중고 MiG-21 30여 대를 대당 100만 달러의 헐값으로 구매했다.
미국 공군도 어그레서(적기 모의훈련) 용으로 80년대 몇대 수입해서 써먹었다. 이 전투기를 MiG-21 대역으로 사용한 것이다.
중국 내에서는 수가 많다보니 여러 가지 실험용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J-8, J-10 등을 개발할 때 J-7을 이용해서 에어 인테이크나 항공전자장비를 달아서 실험해봤다고 한다.
1983년 8월 7일 중국 인민해방공군이 해군항공대와 공동으로 진행중이던 신형 공대공 미사일 테스트를 하던 테스트 파일럿 손천근(孫天勤)이 J-7을 몰고 랴오닝성의 대련 비행장에서 이륙 후 한국의 K-16 비행장에 착륙했다. 당시 대한뉴스 내용에 따르면 이날 '''휴전후 최초로 서울, 인천, 경기지역에 실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다. 이후 손천근(쑨톈진)은 같은해 8월 20일 대만으로 망명했고 기체는 어그레서 용으로 잠시 사용되다 전시품으로 퇴역했다.[4] MiG-21은 그 당시에도 이미 한세대 전의 전투기였으나 문화대혁명이 끝난지 몇년밖에 안된 상태에서 J-7은 중국 공군의 현역 최강 전투기였으며, 손천근은 J-7로 유일하게 망명한 사례이다. 그밖의 중공 망명기들은 대부분 MiG-19를 카피한 J-6이었다.
중국 국내/해외를 통틀어 실제로 생산 및 배치된 J-7 중 가장 발전한 형태는 F-7BGI로 방글라데시에 수출된 형태이다. 기존 BG형은 J-7G의 다운그레이드형이지만 I(Improved)가 붙은 BGI형은 중국공군이 쓰는 J-7G보다 더 성능이 뛰어난 기체이다. 중국공군에게도 똑같은 개량형이 J7G2라는 이름으로 제안되었지만 J-10과 같은 더 좋은 기체들이 이미 개발된 2010년대였기에 채용되지는 않았다. BGI형은 생김새만 봐도 기존의 J-7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날렵하게 생겼다.
[image] 방글라데시 공군의 F-7BGI
퇴역한 J-7의 일부는 J-6와 함께 무인기로 개조 되었다.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J-7계열기중에서 1980년대 나온 최신형이다. 초기형은 MiG-21과 똑같은 단순 델타익이지만 후기형은 그림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주익에 각이 져 있다.[2] 4개소는 날개 하부, 1개소는 동체하부, 최대 무장량 2,000kg, 각각 최대 500kg[3] 당시 소련이 쿠바 위기 직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에 맞서기 위해서는 중국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4] 손천근(1937년생)은 문화대혁명시에 아버지가 강제수용소 끌려갔다가 그곳에서 자살하였는데, 후에 복권은 되었으나, 중공체제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테스트 파일럿을 했을 정도로 비행실력이 뛰어났고, 원래 조종사가 탈추하면 추격해 격추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고 한다. 망명전 대륙에 처자식(18세와 13세) 자녀를 두고 있었으나, 대만에서 거액의 보상금을 받고 재혼(...)까지 하고, 대령까지 올랐고 퇴역 이후 캐나다에 이민을 갔다가 2008년 다시 대만으로 돌아왔다가 2017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