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관계

 

1. 개요
4. 소련 붕괴 후


1. 개요


Советско-китайские отношения(사볘츠카-키타이스키예 아트나셰니야)
中蘇關係(정체자) / 中苏关系(간화자) / Zhōng sū guānxì(한어병음)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1992년부터 현재까지의 양국 관계는 중러관계를 참조
소련중화인민공화국냉전 시대때부터 공산권의 맹주 자리를 두고 다투었던 나라이다.[1]

2. 소련 -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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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1913년 중화민국과 러시아 제국이 최초로 수교를 맺었다.
소련블라디미르 레닌은 제3세계의 민족주의를 지원함으로서 고립을 벗어나려고 했고, 이는 쑨원국공합작 노선과 일치했다. 이에 소련은 군사고문 등을 내전상황의 중국에 파견했으며, 이 관계는 장개석 때까지 지속된다.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로 국공합작을 깨고 국민당내 공산당원을 숙청하면서 소련과의 관계는 냉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과의 관계는 깨지 않았다. 소련은 국공 양당이 치열하게 싸우는 1920-30년대에 국민당에게는 국가 대 국가의 지원을 해 주었고, 중국공산당에게는 코민테른을 통한 당대당의 지원을 했다.
소련블라디미르 레닌 이후 일국사회주의론을 펼쳤기에 실리적으로 쑨원 사후 중국 국민당의 주도권을 쥐게 된 장개석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오히려 스탈린마오쩌둥을 경계했다.[2] 소련의 국공 양당에 대한 양다리 관계는 1940년대말의 제2차 국공내전때까지도 계속 되며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정부가 수립되고 중화민국이 대부분 대륙의 영토를 잃은 1949년 11월에야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다.
중화민국은 중공의 주요 정치인들을 소련의 앞잡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또한 중화민국봉소전쟁[3] 1944년과 1949년 사이에 일어난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개박살난 전적이 있다.

3. 소련 - 중화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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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중소밀월을 찬미한 소련 노래 <모스크바-베이징(Москва–Пекин)>. 모스크바 방송국(후에 러시아의 소리) 중국어 방송에서도 이 노래의 후렴구가 인트로였다. 하지만...
냉전 시대에는 같은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미국이라는 적 앞에 단합을 꾀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국공내전까지는 소련이 물주인 동시에 은근한 견제세력이었다. 북한에게 (6.25 전쟁 이전) 간도와 요동을 떼어주려고 하질 않나, 장개석중국 국민당 편을 들지를 않나.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집권으로 소련이 수정주의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이념적인 대립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념상의 문제로 중소결렬이 일어났다. 1960년대 말까지는 이런 노선 싸움이 그저 양국의 선전기관들에 의한 말다툼에 그쳤지만, 문화대혁명 이후에 1969년 3월, 중국-소련 국경분쟁으로 노선대립이 무력충돌로 악화되었다. 이후 중국제3세계와 연대하고, 소련의 영향력을 제3세계에서 배제하는데 주력했다.[4] 그리하여 칠레에서 아옌데 정권을 무너트린 쿠데타로 피노체트가 집권하자, 아옌데 정권을 지지했던 소련은 이를 규탄했지만, 중국은 이를 환영했다.(...) 마찬가지로 친중이었던 당시 쿠바 경제장관이었던 체 게바라에 대해 소련은 싸늘한 태도로 일관,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의 산중에서 처형되는 것을 수수방관했다.
이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이 방중, 한국전쟁 이래 계속적으로 중국을 적대시 했던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을 지지했다. 1979년, 미국은 결국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하고 여러가지 군사교류를 시작했다. 하지만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한다며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했고, 모든 군사교류를 취소했다. 이러자 중국은 소련에 다시 접근, 1989년 극적으로 중소는 화해하였다.
어떻게보면 '''지금의 한일관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각 관계가 같은 이념 진영에 소속되었으나 국경을 맞대어 역사적 지정학적 문제로 서로 대립하면서 교류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5][6]
1956년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을 당시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의 최고위 보좌관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찾아가 북한 김일성의 정적인 연안파(친중파)와 친소파에 대한 김일성의 무자비한 숙청극을 중단시키는 문제를 놓고 서로 자신들은 영향력이 없다며 상대에게 해결책임을 떠넘기는 일도 있었는데, 당시 중국과 소련의 대북 개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이후 김일성은 도전자 없는 유일 지배 체제를 확립했다. 이 대화 기록은 미국의 우드로 윌슨 센터가 러시아 기록보관소에서 새로 비밀해제된 문건들을 2017년 7월 초 공개한 것에 들어있다. 기사
친소
친중
중립
베트남[7]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헝가리
라오스[8]
아프가니스탄[9]
남예멘
니카라과[10]
에티오피아[11]
앙골라
알바니아
캄보디아[12]
모잠비크
소말리아[13]
루마니아[14]
쿠바[15]
유고슬라비아[16]
북한[17]

4. 소련 붕괴 후


이후 중국과 소련의 후신 러시아는 공통의 적 미국을 두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한편 초강대국의 패권을 위해 경합하고 있다.[18]
1992년 이후의 자세한 설명은 중러관계 문서를 참고.

[1] 물론 명목상으로는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니까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 명목상으로는 공산권의 맹주가 되긴 했지만 이미 공산권이 무너진 마당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엄밀히 말해 소련은 자멸(?)하여 해체되었고 중공은 명목상으로만 공산주의 국가고 실제로는 자본주의화되었다.[2] 그래도 1927년, 1929년 단교된 역사가 있다. 1927년은 국민당이 공산당이 일으킨 광저우 폭동을 소련의 사주라고 비난하면서 단교했고, 1929년에는 중동로 사건 때문이다. 1932년 다시 외교 관계를 재개하지만.[3] 다만 봉소전쟁은 중화민국이 아닌 봉천 군벌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전쟁이었다.[4] 대표적으로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빌미로 중국보이콧을 선언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의 올림픽 데뷔는 늦어지게 되었다.[5] 심지어는 중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손잡았듯이 한국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연대한것도 마찬가지이다.[6] '''한국-아르헨티나 vs 일본-브라질관계'''도 '''중국-파키스탄 vs 소련(or러시아)-인도'''도 유사하다.[7] 1975년까지는 중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중립을 유지했고, 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반중정책을 취한다.[8] 딱히 친소라기보다는 반중이기 때문이라고 보는게 더 맞다.[9] 다만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거치면서 지역 사회에서는 반소 감정이 컸다.[10] 산디니스타 혁명 이후에도 중국 대신 대만과의 관계를 유지할 정도로 친소였다.[11]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집권기[12] 크메르루주 집권기간 동안만. 이후 베트남 괴뢰정부 성립.[13] 본래 친소였으나 에티오피아와 전쟁이 나자 소련이 에티오피아를 지원하는 바람에 친중으로 변했다.[14] 바르샤바 조약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매우 가까웠다.[15] 마찬가지로 엄청난 친소국가였지만, 중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16] 반소노선을 취했지만, 딱히 중국편을 든 것도 아니다.[17] 오락가락했다. 1970년대는 친중, 1980년대는 친소.[18] 국제관계를 잘 모르는 일부 밀덕들이 냉전시의 중소결렬이 아직까지 이어진다고 중국과 러시아가 대립 관계라고 알고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는 나토의 확장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측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 더욱 기울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