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이강석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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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이강석' 행세를 하고 다니다 붙잡힌 강성병이 재판장에 선 모습
1. 개요
2. 사건
3. 진짜 이강석
4. 미디어에서


1. 개요


1957년, 이승만 前 대통령의 입양한 양아들인 '''이강석'''을 사칭한 웃지 못할 사건으로, 한국판 가짜 드미트리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이 쪽은 왕자를 사칭하여 내전이라는 대형사고까지 일으킨 데 비해, 이강석 사건은 무전취식과 행패의 반복 정도로 그친 작은 소동이었다.
이강석은 원래 이기붕의 아들이었는데, 이기붕은 아들이 일찍 죽어 없던[1] 이승만 사후의 후계 구도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1957년 3월 26일, 이승만의 82번째 생일에 양자 선언이 이루어졌다.
사실 이것은 '장자는 다른 집 양자로 갈 수 없다'는 당시 민법을 어긴 것이었다.[2] 게다가 이승만은 양녕대군파였고, 이기붕은 효령대군파인데다가 항렬도 아들뻘이 아니라 손자뻘이라 족보까지 꼬이게 되는데, 이런 점들을 무시하고 추진한 것이었으며, 세간에서는 이기붕이 자식을 팔아 출세하려 한다고 말이 많았다.

2. 사건


1957년 8월 30일, 경주에 갑자기 자신을 이강석이라고 칭하는 청년이 나타났다. 이 청년은 경주경찰서에 들어와 "아버지의 밀명으로 풍수해 피해 상황과 공무원들의 기강을 알아보려 왔다"고 말했다. 절대 권력을 가졌던 대통령의 아들이 왔다는 소식에 이인갑 당시 경주경찰서장은 물론 연락을 받은 김교식 당시 경주시장까지 버선발로 뛰어와서 새파랗게 어린 자식 뻘 되는 청년에게 "'''귀하신 몸'''이 여기까지 왕림하시니 광영이옵니다"라면서 '''극존칭'''을 써가면서 극진히 대접했다.[3][4]
이인갑은 이 청년을 극진히 대접하고 경호차까지 내서 경주 일대를 둘러보게 했다. 그 다음날에는 경주 옆의 영천으로 갔고, 영천에서도 김정열 당시 영천경찰서장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이 극진하게 대접했다. 이어 안동으로 이동해서 지역 유지들을 만났는데, 지역 유지들에게 수재의연금 좀 내라고 눈치를 주자 알아서 갖다 바쳤다고 한다.
이 청년은 사흘째 되던 날, 경북도청 소재지인 대구에 도착했다. 경북도청 사찰과장이 직접 나와서 안내했고 경상북도지사 관사에서 머무르게 했다. 그러나 당시 경북도지사 이근직은 이강석과 얼핏 안면이 있던 사이라 이강석을 자칭하는 이 청년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어 자신의 아들을 불러 확인하게 했다. 이강석과 이근직의 아들이 서울대학교 동창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지사의 아들이 이강석이 아니라고 확인해주자 청년은 도지사 관사 뒤뜰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강석을 사칭하고 다닌 지 3일만의 일이었다.
경찰의 조사 결과 이 청년의 진짜 이름은 강성병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출해서 여기저기 방황하다가 자신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이강석과 닮았다고 하는데 자신감을 얻어서 이 같은 일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당초 경찰은 이 사건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조용히 덮으려고 했다.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이자, 국회의장 이기붕의 친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해프닝은 대한민국의 대통령국회의장의 위신이 걸린 문제. 그러나 매일신문의 기자가 대구경찰서에서 뭔가 묘한 일이 벌어진다는 걸 알고 뒤를 캔 끝에 이 사건을 알게 되어 만천하에 까발려 버렸다.
강씨의 재판에는 방청권을 나눠줘야 할 정도로 방청객이 몰려들었고, 강씨는 법정에서 "경찰서장들이 극진한 대접을 함에 대한민국 관리들의 부패성을 테스트할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또 "할리우드 같았으면 60만 달러 정도의 연기료를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나는 연기료 대신 벌을 받게 되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징역 10개월이 판결되어 복역한 뒤, 3년이 지난 1963년에 대구 시내 '유림옥'이라는 술집에서 극약을 먹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진짜 이강석이 마찬가지로 자살한지 3년 만이었다.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등장한 한 심리학자가 강성병의 심리를 유추하며, 자신은 '''장난''' 정도로 생각하고 한 짓이었지만 파장이 너무 크고 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에 심적 부담을 느낀 것 아니겠느냐고 추정했다.

3. 진짜 이강석


당시 이강석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명목으로 권세가 대단해서, 파출소에 들어가 헌병장교의 싸다구를 날리는 등 꽤 안하무인이었다. 심지어 애국지사의 아들이란 명목으로 서울대 법대에 편입하려다가 서울대생들의 강력한 반발에 법대 편입을 취소한 일도 있었을 정도라 이 사건이 알려진 뒤 이강석은 온 천하의 조소와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가 겨우 편입한 학교가 바로 육군사관학교이다. 왜 그곳으로 갔나면 권력에 순종하는 면이 많은 군대의 특성상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아들이 온다니 감히 반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시대상을 보면 더더욱 반발하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1960년 4.19 혁명 이후 대한민국 육군 보병 소위였던 이강석은 진짜 가족들을 살해한 뒤 본인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4. 미디어에서


[1]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재혼하기 전의 전처와의 사이에서 이봉수라는 아들 하나만을 두었으나 그때 얻은 아들은 10살 무렵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얻지 못했다.[2] 이 조항은 1990년 삭제된다.[3] 당시 이승만 대통령 스스로 왕족(전주 이씨)임을 내세워 '프린스 리'라고 자처했으며, 주변에서도 각하가 아닌 전하라고 부르는 등 '대통령=왕' 정도로 인식하는 상황이었다. 또 아직 전근대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흔하던 시절이라 국민들에게도 그런 사고방식이 있었다.[4] 이런 문화는 권력층 내부에선 의외로 오래 지속되었는데, 노태우정부 시절까지도 청와대에서 직접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석비서관회의나 국무회의를 어전회의로 불렀다고 한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비판이 괜히 나오는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