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학부/문과대학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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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ge of Liberal Arts
단과대 학번 13. 1946년 종합대학인 고려대학교로 승격하면서 설립. 1952년 문리과대학 문학부로 개편되었다가 1963년 다시 문과대학으로 분리.녹두문대
FM의 유래는 정오 12시에 서관 시계탑에서 울려 퍼지는 파랑새 차임벨.[2] 여기에 착안해서 '''녹두'''가 되었다. 단일 단과대로 고려대에서 두 번째로 인원이 많'''았'''다. 입학정원 685명. 총원 약 3600명 대였으나 최근에는 외국에서 특별전형으로 유입되는 학생(흔히 .5학번이라 부르는 2학기 입학제도)이 많고 해서 총원이 3800명대까지도 늘어났다. 사실 공과대와 입학 정원 자체가 차이가 별로 나지 않기 때문에 그 해 자퇴와 휴학을 누가 더 많이 했냐 정도로 공대와 1, 2위를 엎치락뒤치락 한다. 아마 전국 대학 중에서도 문과대 인원으로는 제일 많을 듯.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비교해서 학생 수가 3배나 된다(...) 당연히 고려대학교에서 학과가 제일 많은 단과대학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건물은 서관뿐이라 안습...
1998년에서 2013년까지 학부제를 시행하였다. 최초에는 한국·동양어문학부(국어국문학과, 중어중문학과, 일어일문학과, 한문학과)/서양어문학부(영어영문학과, 독어독문학과, 불어불문학과, 노어노문학과, 서어서문학과)/인문학부(철학과, 한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 심리학과, 사회학과, 언어과학과)의 3학부로 운영하다가 2001년 7월 잠시 문과대학 단일학부로 합쳤고, 그 이후 2003년 7월부터는 인문학부(국어국문학과, 철학과, 한국사학과, 사학과, 심리학과, 사회학과, 한문학과)와 국제어문학부(영어영문학과, 독어독문학과, 불어불문학과, 중어중문학과, 노어노문학과, 일어일문학과, 서어서문학과, 언어학과)로 신입생을 받았던 형식. 이 당시 단일입학단위로 국제어문학부가 387명으로 고대에서 제일 많았다. 전공 배정은 1학년을 마친 후 1지망에서 7, 8지망까지 받아서 했다. 국제어문학부의 경우 영어영문학과가 최선호학과였고 2008년경까지는 그 뒤를 일문/불문이, 이후로는 중문/서문이 2위권을 형성하였으며 그 아래 나머지는 비슷비슷하게 가져가면서 독문/언어가 꼴찌를 다퉜다. 인문학부는 학과의 스펙트럼이 넓지만 대체로 심리학과와 사회학과에 지원자가 몰리는 경향이 있었다. 국어국문학과, 한국사학과, 사학과, 철학과는 대체로 지원자가 다소 적은 편이었고 한문학과는 1지망자가 한 학번당 한 명 정도거나 심지어 없는 경우도 있었다(...). 한문학과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학부제로 모집하던 시절, 전공 배정에서 학점이 모자라 한문학과로 떨어지면 반수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과반: 학부제 체제로 유지되고 있는 편제로, 2014년 학과제가 시행되면서 공동학생회 체제로 전환되는 단위들이다. 나무위키에 소개되는 반 이름은 인문학부 한정으로, 국제어문학부는 거의 다 과와 반이 같은 이름을 사용한다. 역시 위에서 사용하는 과별 FM은 예전 과 FM에서 유래된 반 FM이었고, 다시 과 FM으로 환원.
- 인문학부: 동양사피차일반(인문1반), 서양사돌+아이반(인문2반), 한국사대동반(인문3반), 불패한문반(인문4반), 고철반(인문5반), 막강국문반(인문6반), 사회악칠반(인문7반), 심리싸이코반(인문8반)
- 국제어문학부: 독문반(어문1반), 언어반(어문2반), 중문반(어문3반), 불문반(어문4반), 노문반(어문5반), 서문반(어문6반), 일문반(어문7반), 영문반(어문8반)
2. 국어국문학과 #
꺾이지 않는 붓으로 막강국문
1946년 국문학과로 시작한 문과대 설립 멤버. 1968년 국어국문학과로 개칭. 학부제 시절 다른 어문관련학과와는 달리 혼자 인문학부에 있었다. 언어학과와는 반대의 케이스로, 실제로 국문과의 경우 한국-동양어문학부에 속해 있다가 인문학부로 왔던 학과다. 다만 언어학과와는 달리 번지수를 잘못 찾아 국문과를 전공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 국제어문학부로 가는 일은 언어학과와는 달리 별로 없었다. 학부 명에 '국제'라는 말이 붙기 때문에 헷갈리지는 않는 모양.
자국의 언어를 다루는 학과이기 때문인지 학생 수에 비해 교수 수가 많은 편이다(2016년 1월 현재 15명. 2015년에 외국인 교수(!)가 임용되어 학부 전공 수업에도 영강이 열리게 되었다. 물론 외국인이라도 한국어학 전공자인 만큼 한국어를 매우 잘하지만(...)). 물론 다들 각 분야에서 한자리씩 하는 분들이지만, 고전 문학 쪽이 특히 강세다. 국어학의 경우 국어국문학과 학부 과정에서 음향 음성학을 배울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국어국문학과지만 홀수 해에만 창작 수업이 개설된다는 것도 특징이다.
소속 소모임으로는 문학반, 국어학반, 편집반, 햇새벽(토론), 열린패 민(풍물패), 하프라인(축구 팀), 놀씨(밴드), 유희(댄스)가 있다. 특히 '열린패 민'은 역사가 매우 깊은 학회로, 학회원들 간의 결속력이 매우 뛰어나다. 국어학반과 편집반은 문과대가 학부제로 바뀌었을 때 학과 소속으로 남으면서 반 소속인 다른 학회에 비해 그 존재가 굉장히 위태로웠다. 그러나 14년도에 문과대가 학과제로 돌아오면서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한국에 있는 국어국문학과이므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학과라고 할 수 있고, 때문에 유학생(주로 동아시아 계열)이 학부에도 대학원에도 매우 많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홍보 영상 슬로건이 "우주에서 제일 좋은 국어국문학과"(...)였다.
3. 영어영문학과 #
1946년 영문학과로 시작한 문과대 설립 멤버이자 문과대를 대표하는 메이저 학과. 1968년 영어영문학과로 개칭. 06-07학번 국제어문학부에서 시행한 자유전공제도로 인하여 문과대학 전체의 1/4이나 차지하는 과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문과대학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결국 2년만인 08학번부터 폐지되었고, 폐지된 이후에는 규모가 많이 작아졌다. 그래도 재적인원 수[3] 로 봐서는 최대 규모 학과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4]자주영문
연극반을 운영하고 있다. 영어 문학작품을 한글로 번역해서 매년 9월에 공연한다.
4. 철학과 #
1946년 만들어진 문과대 설립 멤버.막강인문 진리고철
10명의 전임교수가 있다. 한때 동양철학의 중심지적 역할을 한 바 있는데, 동양철학 전공의 김충렬, 윤사순 교수가 특히 유명했으며 이들이 90년대까지 한국 동양철학계를 이끌어 갔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동양철학자라고 규정하기엔 발 담근 영역이 좀 많은 김용옥 역시 김충렬에게 사사하고, 고려대에서 잠시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동양철학쪽 후임 교수들이 두 교수의 포스와 권위를 그대로 이어받진 못하였고, 학과차원에서도 서양철학쪽으로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교수진 숫자를 봐도 서양-동양-한국 순으로 수가 많다.
그래도 동양철학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 다른 학교의 철학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균형잡힌 교수진을 가지고 있으며, 커리큘럼 역시 서양철학, 동양철학, 실천철학, 논리ㆍ이론철학의 분야 등 철학의 전반적인 줄기들이 골고루 열리는 편이라 여러 분야를 접할 수 있는 양질의 기회가 많다. 특히 논리, 분석철학 쪽 유명한 교수들이 있는 터라 이쪽 연구도 활발하다. 덕분에 교수진도 10명[5] 수준으로 갖춰져 국내 철학과 중에서 꽤 규모가 큰 축에 속한다. 여담으로 연세대 철학과는 7명이며, 사실상 대표 국립대인 서울대 철학과는 19명으로 넘사벽 수준.
특이하게도 타 학과에서 오는 이중전공 학생의 비율이 상당히 높고, 늘 신청 T.O.가 꽉 차는 현상이 있다. 심지어 가끔 어떤 교수님들이 출석을 부르실 때 들어보면 인문계열이 아닌 이공계열 학생들도 상당수. [6]
5. 한국사학과 #
모체는 1946년 만들어진 문과대 설립 멤버인 사학과였고, 1989년 사학과에서 분과하여 설립, 대학원은 1999년 분과. 정원 상으로는 24명[8] 으로 고려대학교에서 가장 작은 학과이지만 재외국민 등 정원 외 입학생을 받아 신입생이 30명 선이다.(19학번이 이례적으로 29명을 기록했다. 대개 20명 중후반대에 머문다. 그 해 재외국민 수에 따라 입학생 수가 달라지는 경향이 크다) 대학원이 인기가 많아 학부 타교 출신 대학원생이 많아 대학원생이 학부생의 2배에 육박한다. 그런데 시대별로 전임교원이 배정되어있는 관계로, 2015년에는 전임교원이 9명에 육박했다. 목표는 서울대 국사학과와 같은 12명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인문사회계 교원 1인당 학생 수 평균이 35.1명인데 반면, 한국사학과는 14.1명을 자랑하고 있다.[9] 학생 수 대비 교원 수가 많은 것은 크고 아름다운 대학원생의 수 때문이기도 하다.역사의 주인 한국사대동반[7]
현재 명예교수인 강만길 교수의 영향으로 학풍이 비교적 진보적인 것으로 유명하다.[10] 고려시대를 담당하면서 토지제도사를 전공한 강진철 교수의 경우에는 무려 빨치산 출신이다. 그러니 그 제자들은...[11] 2015년 국정 역사교과서 사태에는 대부분의 교수들이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근데 국정교과서 집필거부선언에는 교수 전원이 참여했다!
학풍이 자유로운 걸로 유명하다. 심지어 어느 대학원생은 박사논문 서론에 5페이지에 걸쳐 '''지도교수의 학설을 까기도 했다'''(...) 그래서 논문심사에서 지도교수의 극딜을 당했고 망했어요가 될 뻔했으나 심사 후에 지도교수가 동의하지는 않지만 말은 된다며 '''쿨하게 통과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야말로 대학원생 한정으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에피소드.[12] 또 다른 이야기로 현재 한국사학과 근현대사 과목의 교과서처럼 되어 있는 강만길의 고쳐 쓴 한국근대사, 고쳐 쓴 한국현대사의 경우 강만길 선생이 대학원 수업시간에 초고를 가져와 대학원생들에게 뿌리고 "씹어라!"라고 했다는 실화가 있다. 그리고 대학원생들은 그걸 또 신나게 깠다고(...). 대학원 수업 시간에 교수와 제자가 맞담배를 필 수 있는 학과로도 유명했다. 모 교수는 건강을 위해 금연한 후에도 제자들이 담배 피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적어도 학부 수업시간 만큼은" 교수들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대학원의 경우 전공이 고대사[13] , 중세사는 고려시대/조선전기/조선후기[14] , 근현대사는 개항기/일제시대/현대로 나누어진다. 어느 시대를 선택하냐에 따라 지도교수가 달라지니 대학원 입시 지원자들은 주의하자. 구 인문학부 학과 중에서 사학과와 함께 유이하게 교직과정이 설치되어 있지 않으니 유의하자.
사범대 역교과에 대한 배려라는 루머가 있다[15] 는 아니고 한국사학과와 사학과가 두어 번 분리, 통합되는 과정에서 신설학과로 분류되는 바람에 교직과정을 맡을 만한 역사가 없어 그렇다는 또 아니고 워낙 교사 자격자가 넘쳐나서 그냥 정부가 설치[16] 를 안 해주려고 하기도 하고 복합적인 이유가 존재하는 듯하다. 의외로(?) 영어로 진행되는 전공이 매학기 마다 한 과목씩은 열린다.[17] 또한 문화재 큐레이터를 꿈꾸고 들어오는 학생들이 적지 않으나, 실상은 고고학이나 미술사 관련해서는 수업이 거의 열리지 않는다.[18]
사실 고려대 고고학이 지금처럼 침체한 이유는 김정학 선생 때문이다. 김정학은 고고학의 대가로 고려대 사학과 교수였는데 학문의 열정(?)으로 인하여 출장 혹은 답사로 수업을 펑크내는 경우가 허다하였다고 한다. 학교본부에서도 더 이상 무단결강을 용납하지 못하고 한번만 더 하면 징계한다고 엄포를 놨는데, 선생은 그래? 그렇다면!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영남대에 잠시 있다가 부산대 고고학과로 옮겼는데, 그 덕분에 고고학계에서 부산대는 네임드가 되었다는 레전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공식적인 이야기는 아니로 말 그대로 레전설이다. 실제로는 김정학 선생은 당시 미국에 교환교수로 해외에 나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사표를 던졌다. 사표의 이유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사안은 없다. 그러니 앞의 이야기를 너무 믿지는 말자.
그런데 강만길 선생도 ''학문적 욕심'' 때문에 그가 학교를 떠났다고 그의 저서에서 언급했다. 여담으로 고려대 사학과는 철저한 문헌사학을 위주로 하며 고고학은 어디까지는 문헌사학에 대한 보충으로 생각하는 전통이 있다. 이는 서울대 국사학과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이 그가 학교를 옮기면서 강만길이라는 거인이 출현할 수 있게 된 배경 중 하나다. 그 시기 신석호[19] 도 성균관대로 옮기고[20] , 김정학도 떠나면서 사학과 학부 강의를 맡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강만길 선생은 당시 석사를 마치고 국편위 연구원으로 있다가 젊은 나이로 고려대 사학과로 왔는데, 결국 젊은 교수인 자기가 빠진 사람들 강의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그 때문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전시대를 가르쳐본 사람은 강만길이 유일하다고 한다.[21]
6. 사학과 #
고려대학교 구 (학부) 사학과는 1989년 한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의 3사과로 분과되었지만 2004년 동양사학과와 서양사학과가 다시 합과하면서 현재의 한국사학과-사학과 2사 체제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학생회의 경우 동양사반, 서양사반, 사학과 학생회가 모두 같이 존재하던 시절도 있었다(...). 학과제 전환 이후 학생회도 전부 통합하여 사학과 FM으로 사용했던 구 서양사학과 FM도 개정하면서 동사과/서사과의 흔적은 이제 사실상 사라졌다. 참고로 서양사학과 FM 및 이후 사학과에서 잠시 사용한 FM은 꺼지지 않는 역사의 등불 (서양)사학과였고 동양사학과는 '황건동사'였다. 구 인문학부 학과 중에서 한사과와 함께 유이하게 교직과정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마르지 않는 진리의 물줄기 맹호사학
7. 사회학과 #
1963년 설립. 심리학과에 뒤이어 옛 인문학부 TOP 2. 하도 데모를 많이 나가다보니 사회악(惡)적인 존재라고 불려 여타 대학의 사회학과처럼 악반으로 불리었는데, 당시 문과대학은 학부제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1반부터 순서를 세어 7번째 반이라는 이유로 '악반+7반'이 되어 악칠(惡七)반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또한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NL-PD논쟁에서 PD의 영향이 더 강했던 관계로 민족/자주/통일이 아닌 '해방'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대체로 큰 규모의 학과임에도 불구하고 학과 활동이 활성화되어 있는 편이며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편이다.해방악칠[22]
[23]
소속 소모임으로는 UMAK(보컬, 힙합 소모임), 비몽(밴드 소모임), 악동(춤 소모임), 고민한 척(학회), 비차-앙(학회), 여민락(풍물패), FC악칠(축구 소모임), 악법(법사회학회) 등이 있다. 비공식 소모임으로는 악바구니(농구 소모임), 악당(당구 소모임), 악칰(치킨 소모임), DVDAK(영화 소모임)이 있다. 한근(역사학회)는 현재 사라졌다.
8. 독어독문학과 #
1963년 독문학과로 설립, 1968년 독어독문학과로 개칭.해방독문
9. 불어불문학과 #
1963년 불문학과로 설립, 1968년 불어불문학과로 개칭.섹시불문[24]
10. 중어중문학과 #
1972년 설립. 일반대학원에서는 중어중문학과와 일어일문학과가 통합되어 '중일어문학과'이다 [25]열혈중문
11. 노어노문학과 #
1974년 설립.혁명노문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후로 일반대 최초의 노문어학과이다.
12. 일어일문학과 #
1983년 설립. SKY대 중에서 제일 먼저 설립되고 현재도 학과로서는 유일무이하다.[27]박력일문[26]
13. 서어서문학과 #
1983년 서반아어학과로 설립, 1988년 서어서문학과로 개칭. 2013년 학부제 마지막 전공 배정에서 경쟁률로 영문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구 국제어문학부 학과 중에서 언어학과와 함께 유이하게 교직과정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광호(狂虎)서문[28]
소모임으로는 Pasión(원어연극), Caballero(축구), Mobimiento(페미니즘 연구), Declaración(아카펠라), 그리고 아라리요(풍물패)가 있다.
14. 한문학과 #
1987년 설립. 원래 한문학은 국어국문학과에서 다루고 있다가 독립한 학과로,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한문학과는 학부에서만 존재하고 일반대학원에서는 국어국문학과 한문학 전공으로 남아 있다. 한 학년 당 28명 정도의 인원이다.불패한문
15. 언어학과 #
1989년 언어과학과로 설립, 2004년 언어학과로 개칭. 커리큘럼과는 다르게 국제어문학부에 속해 있던 불행한 학과(...). 분명히 3학부 시절까지만 해도 인문학부에 속해 있었는데 2학부로 재편하는 과정에 왠지 모르게 국제어문학부로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싶어서 인문학부에 왔는데 번지 수를 틀려서 언어학 전공을 못하는 안습한 신입생이 아주 가끔 있다(...). 참고로 고대는 '''전과제도가 없다.'''[29] 구 국제어문학부 학과 중에서 서어서문학과와 함께 유이하게 교직과정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자주언어
16. 동아리
고려대학교/학부/문과대학/동아리 문서 참고. 문서의 원래 제목은 '고려대학교/동아리/문과대학 소속 동아리'이나 문과대학 문서 밑으로 넣어도 문제가 없어서 이렇게 리다이렉트를 걸어두었다.
[1] 상징색: 흰색, 상징물: 서관의 시계탑과 월계수(성취와 영광)의 조합, 보조 상징물: 고려대학교를 상징하는 건축물의 직선적 특징을 패턴화[2] 공교롭게도 KBS 월드 라디오에서 단파 송출 개시될 때도 인터벌 시그널용으로 이 음악이 쓰인다. 단파라디오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오후 4시 55분경에 주파수를 7275kHz로 맞춰볼 것.[3] 학번당 정원 100명, 정원 외 포함시 약 120명 정도[4] 단, 옛 국제어문학부에 한해서 최선호학과였지 사실 이중/복수전공이나 자유전공 학생의 선호도는 아웃 오브 안중이다. 게다가 학부제 시절에 이상하게도 학점 컷을 부풀려 후배들에게 알려줘 선택에 혼란을 초래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5] 임홍빈 교수의 정년퇴임으로 2020년 현재는 9명 재임[6] 2013년 이승환 교수님의 수업 중 멘트[7] 과거에는 불복종 한국사[8] 2015년 신입생 기준[9] 그래서 수강신청 할 때 전날 밤새고 숙취에 쩔어서 늦잠을 잔다하더라도 다 넣는다고도 하는 정도다. 애초에 수강인원 제한을 걸어둔 과목이 얼마 없다.[10]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의 주역 가운데 한분인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여기 출신이란 걸 보면 썩(...)[11] 실제로 깜빵에 다녀온 사람이 두 명 있다. 단, 사실 최근 재심이 개시되어 무죄선고와 보상을 받으실 듯하다.[12] 학부생이라면 공감이 힘들 수 있지만 대학원생이라면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대학원생 항목 참조.[13] 한사과에서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쓰면 안 된다. 심지어 원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왜 틀렸는지 시험에 빈번하게 출제된다.[14] 한사과에서는 조선을 전기/중기/후기로 나누면 까인다고 한다. 보통 조선은 왜란으로 전후를 나누는게 인지상정이다.[15] 아마도 역교과 교수진이 대부분 한사과 또는 사학과 출신이라 정책적인 배려를 한 듯하다.[16] 인천대의 경우 사범대를 신규 설치하는 조건으로 기존단대에 있던 교직폐지를 조건으로 내세워 폐지가 된 사례가 있다.[17] 하지만 외국인들이 너무 많이 들어서 오히려 한국 학생이 적다.[18] 이 학문을 다루는 고고미술사학과는 세종캠퍼스에 존재한다. 그래서 가끔 가다가 세종캠에서 강의를 담당하는 분이 올라와서 수업하기도 한다. 아니면 고고미술사학과를 이중/복수전공해도 된다.[19] 서울대에 이병도가 있었다면, 고대에는 그가 있었는데, 둘 다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다만, 그는 그 부채의식 때문인지 제자들의 연구방향에 있어서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그의 밑에서 자본주의 맹아론이라는 시대를 풍미한 이론이 김용섭과 강만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20] 그는 또 제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성균관대로 옮길 때, 강만길을 학교 본부에 적극 추천하였었다.[21] 강만길 선생의 걸어온 길을 알고 싶다면 그의 자서전인 '역사가의 시간'을 읽어보도록 하자.[22] '악(惡)'을 매우 강조하여 실제로 할 때는 "해방 악~~~칠"이라고 한다.[23] 참고로 인문7반이 아닌 '사회학과'의 FM은 '해방사회'로 학부제 이후와 FM구가 다르다. 2014년 학과제로 복귀 이후 "해방악칠"로 바뀐다. [24] 2005년까지는 자주불문[25] 통합한 이유는 BK21 사업에서 '합치면 합칠수록' 지원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학과 통폐합 문서 참조.[26] 본래 자주일문 이었으나 '자주'를 사용하는 곳이 너무 많아 13학번부터 박력일문으로 변경.[27] 2020년 현재까지도 연세대학교에는 일어일문학과가 설치되어 있지 않고, 심지어 서울대학교에서도 일어일문학을 단독으로 가르치지 않는 대신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일본 언어문명전공'으로 학부 내의 세부전공에 그치고 있다.[28] 2011년까지는 자주서문[29] 엄밀히 말하면 '전과' 자체는 있지만 교육조직 변경에 따라 단과대학(독립학부), 학과(부)가 바뀐 경우와 캠퍼스 간 소속변경의 경우에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