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순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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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효종과 인선왕후의 양녀. 본래 성종의 서9남 익양군의 후손인 금림군(錦林君) 이개윤[1] 부인 문화 류씨[2][3]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본명은 이애숙(李愛淑)이다.
그녀의 삶을 요약하면 종실의 딸로 태어나 공주가 되고, 청나라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의 대복진(大福晉)[4] 이 되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인물이다.
2. 생애
2.1. 탄생
1635년(인조 13) 7남 4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5] 아버지 금림군은 성종과 후궁 숙의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익양군 이회의 후손이므로 성종의 4대 후손이 되고, 효종과는 10촌이 된다. 따라서 의순공주는 익양군의 현손이며, 효종의 11촌이 된다.
2.2. 정치적인 혼인
의순공주의 일이 있기 전인 1637년(인조15) 9월, 청은 조선의 여자를 요구했다. 화친을 맺을 때 ''''내외의 여러 신하들과 혼인하여 화친을 공고히 할 것'''' 이라는 조항이 있었던 탓에 청의 타타라 잉굴다이와 마부타가 "비록 황제의 분부가 없지만 조선이 성의가 있다면 이치상 먼저 스스로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조선에서 혼인은 큰일이라 이런 식으로 할 수 없다고 쳐냈지만, 잠깐 수습한 것 뿐이었다.[6] 그해 11월 20일, 청은 다시 타타라 잉굴다이를 통해 칙서를 보냈다. "시녀를 뽑아 보내는 일은 근거할만한 문적(文籍)[7] 이 있다. 재상의 딸은 몇 사람이나 거두어 기르고 있는가?"
당시 병자호란 직후였기 때문에 오랑캐에 향한 증오와 반감이 매우 높았다. 오죽하면 청의 사신과 정명수가 기생을 바치라고 요구하니 기생들이 죽음으로 항거할 정도였다.[8] 천민에 속하는 기생조차 싫다고 자살하는데, 양반들이 자신의 딸을 선뜻 내놓을 리 없었다. 그러나 국가의 안위가 달려있는 일이었으므로 결국 6명의 여자를 뽑았다.
다행히 마음이 바뀐 숭덕제의 명령으로 혼인은 취소된다.[9] 하지만 시녀는 뽑아 보내라고 닥달을 해서 각사(各司)의 여종으로 10명을 보냈다.[10] 1638년(인조 16) 9월 12일, 숭덕제는 조선이 보낸 시녀 10명 중 4명은 궁중에 들였고, 정친왕 지르갈랑과 도르곤에게 1명씩, 나머지는 다른 곳에 분배했다.비국이 결혼할 여자 여섯 사람을 뽑아 아뢰었다. 나이 8세인 첩손녀(妾孫女)를 변개한 우의정 신경진의 양녀, 8세인 전 판서 이명(李溟)의 첩녀, 8세인 공조 판서 이시백의 양녀, 12세인 전 첨지 이후근의 첩녀, 11세인 전 판서 심기원의 첩녀이며, 종실의 딸 한 사람도 그 가운데에 있었는데 상이 명하여 빼게 하고 드디어 평안 병사 이시영의 첩녀로 그 간선(簡選)을 채웠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 11월 27일
그로부터 13년 후인 1650년(효종 1) 3월 다시 청이 여자를 요구했다. 3월 5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오던 사환사 내궁 나업(羅嶪)[11] 이 같이 오던 청의 사신 파흘내(巴訖乃) 등이 한 말을 효종에게 전한다.
이에 나업이 "현재 있는 공주는 두 살" 이라고 하니 도르곤은 "공주의 나이가 어리면 종실(宗室) 가운데 적합한 자로 선택하여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사실 내관 나업을 시켜 거짓말을 하게 했는데, 효종에게 혼인 적령기에 해당하는 공주가 없었던 게 아니다. 인조의 고명딸 효명옹주는 이미 가례를 치렀고, 효종의 장녀 숙신공주는 어려서 죽고 없었지만, 차녀 숙안공주의 나이가 15세였다. 또한 소현세자의 딸들도 있었다. 그러나 효종은 왕녀를 보낼 생각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구왕(九王)이 부지(夫之)[12]
를 갓 잃어 국왕과 혼인을 맺고자 한다. 국왕의 딸이 몇이며 몇 살인지 우리들이 모두 안다. 만일 혼인이 성사되면 여러 신하가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이며, 대국에서도 전적으로 믿게 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효종 1년 3월 5일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금림군 이개윤이 먼저 나서서 "딸이 있는데 자색이 있다"면서 바쳤는데, 3월 20일 청 사신이 창덕궁으로 들어와 후보자들을 모두 보고 금림군의 딸로 최종 선택했다. 효종은 그녀를 양녀로 삼아 의순공주(義順公主)로 책봉하고, 생부 금림군은 종1품 가덕대부로 품계를 올려주고, 그녀의 오빠 이준은 장릉 참봉으로 이수는 전설사 별검으로 삼았다. 딸 덕분에 집안이 번성하게 된 셈.
그런데 금림군의 딸을 데리고 갈 때는 인평대군도 같이 가야한다는 것과 대신들의 딸을 시녀로 충당하라는 추가 요구까지 했다. 당장 시녀 선발이 가장 큰일이었다. 사대부 집안에서는 앞다투어 혼인할 정도였고, 이런 현실을 효종도 알고 있었다.[13] 민간이라고 해서 분위기가 다르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반청 분위기는 대한민국의 반일 분위기와 비교할 수가 없다. 특히 도르곤은 '섭정 도르곤'이라고 불렸는데, 어린 조카 순치제를 대신해 청나라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어서 거의 황제와 다름없었는데도 말이다.[14]
사실 여기에는 먼저 효종이 즉위하고, 반청복명 성향의 김상헌, 송시열, 김집을 등용한 배경이 있었다. 청은 이외에도 여러가지를 트집 잡았는데, 그 중에는 탄핵당해 관직에서 쫓겨난 김자점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청에서는 그가 큰 공이 있는 사람인데 쫓아낸 이유가 무엇이며, 누가 쫓아내라고 탄핵했는지까지 고하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김자점 부자가 조정의 일을 청에 누설한 것으로 의심했다. 효종도 마찬가지로 김자점을 의심했지만 물증이 없어서 처벌하지는 못했다. 이를 통해 청이 효종의 반청 분위기를 감지하고, 이를 조기에 제압하고 사대관계를 확립하기 위한 통치수단으로 국가 간의 혼인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2.3. 부부 생활
마침내 4월 22일, 공주는 고국을 떠나 청으로 갔다. 이날은 효종이 서대문 밖 근교까지 나와서 공주를 전송했고, 공조 판서 원두표가 공주를 호위했으며, 시녀 16명과 의녀, 유모, 몸종, 수모(首母)가 그 뒤를 따랐다.
도르곤은 버일러들과 사냥을 한다고 산해관 밖으로 나와 있다가 5월 21일 공주가 도착하자 맞이하여 당일에 성혼했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이역만리로 떠나 39세의 도르곤과 부부가 된 것이다. 무려 23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부부 생활은 원만했던 듯 하다. 후일 도르곤은 공주를 맞이할 때 육례를 순서대로 갖추지 못했음을 이해해달라고 했고, 먼저 사신을 보내고 친영을 하려고 했는데 조선은 길이 멀어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원래 예법대로 한다면 육례를 순서대로 다 갖추지 못하면 첩이고, 육례를 다 갖추면 처다. 그러나 도르곤은 그녀를 대복진으로 대우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원두표가 도르곤이 처음에는 만족스러워 했으나 연경에 도착하자 태도를 바꾸어 공주와 시녀들이 못생겼다고 불만족스러워 했다고 한다. 실학자 성해응이 쓴 연경재전집에서는 도르곤이 의순공주를 보고 매우 기뻐하여 '백송골' 이라고 불렀단다. 백송골은 '흰 빛깔의 매'를 말하는데 자태가 뛰어나고 훌륭하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도르곤의 말을 보면 도르곤의 '진짜 불만'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선한(先汗) 때부터 본국에 은혜를 베푼 것이 매우 두터웠고, 나도 국왕에게 사사로이 베푼 은혜가 있다. 그런데 '''번번이 왜적과 흔단이 있다는 핑계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겠다고 청하니''', 이는 필시 그대 나라가 상하 간에 모두 다른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녀를 선발하여 올리는 일은 명나라 때부터 이미 구례(舊例)로 되어 있다. 오늘날 일은 그대 나라의 행동을 보려는 것인데, 그대 나라가 정밀하게 선발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주도 만족스럽지 못할 뿐 아니라 시녀 역시 못생긴 자가 대부분이다. 그대 나라의 불성실함을 여기에서 더욱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효종 1년 8월 27일
2.4. 귀국
12월 31일, 도르곤이 열하로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진 부상으로 사망했다. 혼인한지 단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역만리 타국에 시집와 과부가 된 것도 통탄할 노릇인데, 도르곤의 장례를 치르고 한달 반 만에 순치제가 숙청 작업을 시작했다. 도르곤의 묘호, 시호, 존호를 박탈하고 위패를 부수고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목을 잘라 효수했다. 잔혹하지만 도르곤이 조선에서도 주제 넘었다고 평가할만큼 쌓아온 업보가 있었고, 순치제의 통치에도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의순공주는 다른 황족[15] 과 재혼했다. 본래 조선의 종실 여성으로 태어나 교육받은 그녀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16] 하지만 중국은 유목민족의 전통인 형사취수 제도도 있고, 화번공주들도 사정에 따라 두 번이든 세 번이든 혼인했다.[17]
다만, 이 재혼은 도르곤 사후 불어닥친 역풍에서 보로가 의순공주를 구하기 위함이었다는 설이 있다. 약간 미묘한게 이 단친왕 보로는 도르곤이 죽자마자 도르곤의 다른 첩을 건드려서 스캔들이 났던 적이 있다. 어쨌든 정백기에서 군왕에 불과했던 아버지보다 높은 작위까지 오를 정도로 도르곤 밑에서 열일했던 부하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번째 남편 역시 1652년에 죽어서 또 다시 과부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사신으로 청을 오고 가던 금림군은 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시 데려오고자 순치제에게 요청했다. 청의 입장에서는 의순공주는 더이상 이용 가치가 없었다.[18] 그런데 이 귀국이 조선에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금림군이 독단적으로 추진한 일이고, 일이 잘못 되었으면 청의 질책이 떨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정작 청에서는 '과부로 혼자 사는게 가여우니 특별히 돌려보낸다'라는 반응을 보였고 신경쓰지 않았다. 다행히 효종의 동정으로 의순공주는 정기적으로 쌀을 지급받았고, 금림군이 죽었을 때는 현종의 뜻에 따라 예장되었다.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의순공주에 대한 조정의 여론도 완전히 바뀌었다. 더는 의순공주라고 쓰지 않고 '이개윤의 딸'이라고 썼으며, 두 번 혼인했다는 오욕을 견뎌야 했다. 그래도 1662년(현종 3) 그녀가 죽자 특별히 장례비를 넉넉히 지급하라고 했다.
3. 여담
- 의순공주의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에 위치해 있다.[19] 이 묘를 '족두리묘'라고 부르는데, 야사에서는 의순공주가 청에 가기 직전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유품인 족두리만 겨우 건졌다고 한다. 박씨전처럼 일종의 정신승리로 보인다. 근처에는 아버지인 금림군 이개윤의 묘가 있다.
- 연려실기술에서는 금림군 이개윤이 자청하여 딸을 보냈는데, 나라를 위하는 뜻에서 한 일이 아니고 청나라에서 보내는 비단이 많은 걸 탐낸 것이라고 했다. 과연 금림군이 지극히 가난했다가 부유해졌다. 딸은 도르곤이 소박놓고 그의 하졸에게 시집보냈다. 그래서 금림군이 의순공주를 데려왔을 때는 사람들이 침 뱉고 욕했다고 한다.
- 서유문의 무오연행록에서는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의순공주가 간택되었을 때 정명수가 청 사신을 보좌하는 역할로 왔었다. 정명수는 언제나 그랬듯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은화를 빼앗고자 했다. 그러자 의순공주가 정명수를 불러 곤장을 치고 "내가 혼인한 뒤에 도르곤에게 네가 한 짓을 알리면 목숨이 끊어질 줄 알라"고 꾸짖었다. 정명수가 겁나서 살려달라고 간청했고 조선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4. 매체에서
- 조선마술사. 의순공주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청나라에 시집가는 공주'라는 대목을 보면 의순공주를 모티브로 한 인물인 듯 하다. 극중에서는 청명공주로 나오는데, 왕족이라고는 하나 잔반에 가까운 이름 뿐인 종실을 양녀로 삼아 대신 보낸다.
- 신쥬신 건국사. 도르곤 사후 주인공 손월의 첩이 된다. 손월의 죽은 누나와 닮았다는 설정이다. 처음엔 그저 얼굴이나 보려는 생각으로 구해줬고 둘 사이도 냉랭했으나 점차 개선되어 간다.
[1] 계보는 익양군 이회-용천군 이수한(적장자)-기성군 이현(적자)-금림군 이개윤(서자) 순으로 이어진다. 해당 내용은 선원속보에서 확인 가능하다. # [2] 조선전기 대사헌, 병조참판,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류경심의 딸이며, 류경심의 족질이 류성룡이다. [3] 금림군 이개윤의 원배는 안산 안씨 안여관의 딸, 재취는 문화 류씨 류경심의 딸, 삼취가 원주 이씨 이익의 딸이다. [4]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은 일부다처제로 정실이라도 서열이 있었다. 여기서 대복진은 정실부인 중 으뜸을 의미한다. [5] 왕실의 족보인 돈녕보첩은 여계 후손도 기재하는데, 의순공주는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의도적인 누락일 가능성이 높다. [6] 《심양장계(瀋陽狀啓)》 인조 15년 9월 5일. [7] 조선 초기 명나라의 요구로 시행한 적이 있다. 청나라가 말하는 근거는 명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8]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11월 8일 임신 2번째기사. # [9] 인조는 "청나라의 속임수는 헤아리기 어려우니, 이것 역시 무슨 계책인지 모르겠다"며 의구심을 표했다. # [10] 이때 청나라 쪽에서는 천한 창기를 뽑아 보냈다고 난리를 쳤다. 박로라고 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의 기생은 몸 파는 천한 창기가 아니며 우리나라 사대부는 기생을 첩으로 삼고 자식을 낳고 관리가 될 수도 있다고 쉴드를 쳐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11] 인조와 효종 시기에 활동한 내관이다. [12] 푸진 또는 복진(福晋). 청나라에서는 부인을 이렇게 말했는데, 일부다처제라서 여기서 다시 대복진, 계복진, 측복진, 서복진 등으로 출신과 서열에 따라 나뉘었다. [13] 효종실록 3권, 효종 1년 3월 23일 병자 1번째기사. # [14] 위아래 모두 도르곤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그를 감히 직접 마주하여 말을 꺼내지 못하였고, 그가 외출하였다 돌아올 시에는 백관이 정렬하여 그를 알현하였다. 《타타르 전기》 마티노 마티니. [15] 기록마다 각각 다른 사람을 지목하고 있어 정확하지 않다. 다만 의순공주의 새 남편도 재차 요절했다는 점과 청사고에 기록된 생몰년도룰 대조하면 누르하치의 7남 아바타이의 3남인 단친왕 보로로 추정된다. 도르곤과는 한 살 차이 나는 시조카이다. [16] 조선에서는 절대 과부의 개가를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부가 되어 절개를 지키고자 죽으면 열녀가 되는 나라다. [17] 당장 우리가 잘 아는 왕소군이 그 예시다. [18] 만약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자식을 낳기라도 했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대신 아들이라면 도르곤이 부관참시 당할 때 자식이랑 같이 목이 잘렸을 수도 있다. [19] 그리고 이 근처에 의순공주의 이름을 딴 의순초등학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