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춘

 


'''역임 직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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具滋春
1932년 5월 11일 ~ 1996년 2월 10일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군인
2.3. 관료
2.4. 정치규제
2.5. 정치인
2.6. 사망
3. 기타
4. 미디어에서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관료, 정치인이다. 본관은 능성(綾城)[1], 호는 취산(翠山).

2. 생애



2.1. 유년기


1932년 5월 11일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면 세천리(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2]#에서 태어났다.

2.2. 군인


1950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사 자격을 얻었다. 그 해 6.25 전쟁이 터지자 포병 소위로 임관하여 전쟁에 참여하였다. 전쟁이 끝난 1954년 미국 육군학교를 졸업하였다.
1961년 육군 중령으로 제6군단 포병사령부 제993포병대대장으로 있을 때 일어난 5.16 군사정변 당시 육군본부를 점령하는 데 기여하여, 당시 '혁명 주체세력' 으로 인정받았다.

2.3. 관료


1963년 대령으로 예편하여 경찰로 근무하면서 내무부의 치안국(국장은 이사관)에서 정보과장(과장은 경무관)으로 근무했으며, 서울특별시청 경찰국장과 경찰전문학교장으로 재임한 뒤에 제주지사, 수산청장, 경북지사를 차례로 맡았다.
1974년 9월 2일부터 1978년 12월 21일까지 제16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였다. 원래는 영등포-왕십리로 계획되어 있던 서울 지하철 2호선을 거대 순환선으로 만든 사람이다. 특히 2호선 계획 당시, 구자춘 혼자서 말 그대로 지도에 연필로 줄 그어서 노선을 2~30분 만에 만들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나름 유명하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날림처럼 노선이 정해졌음에도 정작 공사할 때 영등포역 경유 예정 구간이 당시 토목 기술로는 영등포역 구간을 공사할 수가 없어서 신도림역 경유로 바뀐 것, 이 딱 하나만을 제외하면 딱히 난공사라 할만한 구간이 없었다. 구자춘 시장은 포병 장교 출신이어서 지도를 보는 안목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 일화가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해당 이야기를 다룬 서적의 내용이다.

2월 초순의 어느날, 오전 11시 경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도시계획국장, 도시계획과장, 지하철건설본부장 등이 시장실로 호출되었다.

(중략)

구(자춘) 시장은 미리 준비해 둔 서울시 지도를 펴놓고 그들이 서서 보는 앞에서 지하철 2호선의 선을 그었다. 검은색 연필이었다. 종전에 정해져 있던 제2호선은 왕십리 ~ 을지로 ~ 마포 ~ 여의도 ~ 영등포였다. 그런데 구 시장은 마포, 여의도를 피하여 신촌 ~제 2한강교(양화대교) ~ 당산으로 이었고, 그것을 더 연장하여 구로공업단지 ~ 봉천동 ~ 관악구청앞 ~ 사당동 ~ 서초 ~ 강남 ~ 삼성동 ~ 잠실 ~ 성수 ~ 뚝섬을 거쳐 왕십리로 이었다. 구도심(을지로) ~ 영등포 ~ 영동을 잇는 3핵의 연결이었다. 마포 ~ 여의도를 피한 것은 그의 전임 김현옥, 양택식 시장이 만든 것이었기에 구 시장은 여의도에의 새로운 투자는 피하는 눈치였다.

(중략)

포병장교 출신답게 구 시장의 지도 파악력은 정확했다. "구로공단 앞은 통과해야 되겠지" "서울대 앞도 지나야 되겠지" 질문인지 독백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말들이 튀어나왔지만 누구 하나 발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 그렇게 선을 긋는 데 걸린 시간은 20분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손정목 -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권 발췌

이로 인하여 강남 개발이 가속화되었다. 그 이외에도 서울특별시 강북 지역의 명문고 이전, 반포동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립[3], 금화터널 건설 과정에서의 독립문 이전, 한양도성 일부 복원, 도심부 주차장 확충 등을 추진하였다. 이런 그의 별명은 대표적으로는 '''황야의 무법자'''였다. 그 이외에도 몇 가지 별명이 붙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인 1978년 12월 22일부터 1979년 12월 14일까지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을 지냈다. 10.26 사건 당시 육군본부 국무회의에 참석하였다.

2.4. 정치규제


전두환이 집권하자 1984년 해제될 때까지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2.5. 정치인


1987년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입당하였다. 이듬해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달성군-고령군 지역구에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신민주공화당이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으로 통합되고 나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달성군-고령군 지역구에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5년 민주자유당 김종필 대표가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자 이에 따라갔다.

2.6. 사망


그러던 도중 1996년 2월 8일 의정보고회의 참석하기 위해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심장마비를 일으킨 뒤에 이틀 뒤인 1996년 2월 10일 심장수술을 받던 중 갑자기 혈압이 떨어져 향년 6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3. 기타


19대 총선, 20대 총선에서 달성군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던 구성재는 구자춘의 아들이다.

4. 미디어에서


제4공화국(드라마)에서는 배우 고희준이, 코리아게이트에서는 배우 문회원이 연기하였다.

[1] 27세손 자(滋) 항렬.[2] 능성 구씨 좌정승파(左政丞派) 절도사공계(節度使公系) 집성촌이다.[3] 다만 본인이 기안한 서울 지하철 2호선이 고속터미널을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 지하철 3호선을 무리해서 끌어오느라 3호선의 선형에 '''지랄맞은 ㄷ자 드리프트'''가 생기는 원흉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