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
'''서울 독립문'''
서울 獨立門
Independence 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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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
'''분류'''
석조문
'''면적'''
2715.8㎡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대한제국, 1896~1897년
'''위치'''


1. 개요
2. 설립 배경과 과정
3. 편액 글씨에 관해
4. 사건사고
5. 독립문의 이름에서 따 온 것들
5.1. 의류 회사 P.A.T의 예전 브랜드
6. 여담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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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립문'''() 또는 '''서울 독립문'''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로, 조선 말에서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1896년부터 1897년에 걸쳐 완공된 기념문이다. 양식은 유럽식 개선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문의 기능을 수행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기념비(monument)로서 만든 것이다.
의 정치적 간섭에서 독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이후로도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후 일제시대 동안에는 독립군가에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라는 가사가 나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제국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독립문의 디자인은 서재필이 담당하였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립 당시의 위치는 아니다. 원래 위치보다 서북쪽으로 70미터 정도 들어 옮겼다.

2. 설립 배경과 과정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이 전쟁에서 청은 패배하였고 일본은 승리하였다. 이듬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어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였다. 이전부터 조선과 중국이 맺고 있었던 전근대적 사대관계가 청산된 것이다.
독립문의 구체적인 건립 이유는 《독립신문》에 기재한 서재필의 기고문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그는 1895년 2월 사대외교 청산의 의미로 '''임금이 직접 나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철거한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조선이 몇 해를 청나라의 속국으로 있다가 하나님 덕에 독립이 되어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지금은 세계의 제일 높은 임금들과 동등이 되시고, 조선 인민이 세계에서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으니, 이런 경사를 그저 보고 지내는 것이 도리가 아니요, 조선 독립된 것을 세계에 광고도 하며, 또 조선 후생들에게도 이때에 조선이 분명하게 독립된 것을 전하자는 표적이 있어야 할 터이요. 또 조선 인민이 양생을 하려면 맑은 공기를 마셔야 할 터이요, 경치 좋고 맑은 데서 운동도 하여야 할지라.

1896년 7월 4일, 독립신문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독립문 건설의 중심이 된 인물들은 근대화를 위해 일본과 손을 잡았지만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자 그 중 하나인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했다. 당시 19세기 말 인물들 중에는 일본의 야욕을 미처 꿰뚫어보지 못하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지식인들이 꽤 있었다.
일본은 이를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서 조선인들을 청나라의 지배로부터 독립시켜 주었다.'라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이용하기 위하여 일제시대 동안에도 독립문을 철거하지 않았다.
당시 청이 꾸준히 털리는 상황에서 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인식은 전방위적으로 퍼져있었고, 서재필은 국적이 미국인 동시에 오로지 독립문 건립만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당시 조선 조정에서도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해 나간다. 서재필은 직접 파리의 개선문을 보고 기본 스케치를 하였고, 세레딘 사바친[1]이 설계를 했으며, 조선인 건축 기사 심의석이 실제로 건축을 하게 된다.
갑오개혁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인사들은 모두 복권되고, 박영효는 같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한때의 동지인 서재필에게 조선으로 건너올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그 서재필이 1896년 1월에 조선으로 와서 중추원의 고문[2]이되었고 그와 동시에 진행한 것이 독립문 건립 운동이었다.
다만 서재필의 귀국과 실제 독립문 건축 시작의 과정에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난다. 바로 1896년 2월에 벌어진 아관파천이다.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일본의 입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일본의 의도로만 독립문이 건설되었다는 것이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이 와중에 기존의 친일에 기울었던 정부 관료는 다 죽어나갔지만 서재필은 미국인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입지를 보존할 수 있었고, 꾸준히 독립문 건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게 설득력을 얻으면서 독립이란 표현이 들어간 최초의 단체가 등장하는데 바로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이다. 이 독립신문은 정부의 재정 지원금 4400원이 들어갈 정도로 친정부적 성향으로 시작되었다. 이 와중에 생성된 단체가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이다. 그리고 이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가 바로 이후의 독립 협회의 모체가 된다. 즉,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쌓은게 아니라, '''독립문을 쌓기 위해서 독립협회를 만든 것'''이다. 단적으로 이 독립문 추진 위원회 시기는 당시 정부 관료 중에서도 외교적 역할을 하던 정동구락부 출신 인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1896년 5월일본러시아의 관계가 호전되고[3] 반면에 러시아와 조선 관계는 슬슬 틀어지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대외적으로 독립을 밝힐 필요는 더 커졌다.
그래서 1896년 7월에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를 기반으로 해서 독립협회가 창설되었는데 회장이 안경수, 위원장이 이완용이었다[4]. 서재필은 고문이었고, 동농 김가진, 월남 이상재 등의 고위 관료와 명사들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는 독립 협회건 독립 신문이건 죄다 친정부 성향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독립신문독립협회를 앞세운 조선 정부의 주도로 독립문 건립은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건설 비용은 독립 신문과 독립 협회가 모금 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왕실의 기증으로 충당했다. 1896년 11월 21일 공사를 시작해서, 1897년 11월에 완공되었다. 이 가운데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고, 동년 10월에는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물론 독립 신문과 독립 협회는 충실하게 이 과정을 지지한다. 이 덕분에 완성된 독립문은 대한 제국의 문이 되었다. 한글과 한문으로 적힌 현판 아래에는 대한 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이 새겨졌다. 태극기 또한 새겨져 있는데, 이 태극기가 소위 말하는 '독립문 태극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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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유로 청의 사신을 맞는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개선문을 본뜬 석조문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에 나오는 기묘한 돌기둥이 영은문의 주초.[5]
하지만 이후에 독립협회독립신문은 서재필이나 박영효와의 문제로 대한제국과 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와는 다르게 상술한 '독립문 태극기'의 경우 3.1 운동 당시 민중들이 태극기의 정확한 모습을 몰라서 경성 주민들의 경우 독립문으로 가서 조각된 태극기를 보고 도안을 그렸다는 일화가 있다.

1979년, 구자춘 서울특별시장성산로[6]를 건설하는 건설하는 과정에서 현저고가차도와 금화터널 예정지가 독립문 부지와 간섭되자, 이를 이격시켜 고가도로를 놓기 위해 그냥 통째로 들어 옮겼다. 1979년에 성산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정도 이전하였다. 이에 대해 코미디언 전유성"차라리 고가를 돌아가게 만들자는 마음이 관광 상품을 만드는 것"이라는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독립문 고가 차도를 철거하고 원래대로 복원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문제는 독립문 고가 차도가 일산, 운정, 행신, 가좌동, 연대앞을 비롯한 '''수도권 서북부 지역과 광화문 도심을 연결하는 메인 간선 도로'''라서 반발이 엄청날 게 뻔해서 복원이 어렵다. 일산, 운정을 기점으로 하는 대부분의 서울역행 광역 버스가 이 독립문 고가 차도를 지나갈 정도로 중요한 도로이다.
그런데 이전하기 전에는 순수한 석조물로 알고 있었으나, 뜯어 보니 내부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것이었다. 돌 현판 글자는 당시에 지금과 달리 한글도 우에서 좌로 썼기에 '문립독'이라고 되어 있다.

3. 편액 글씨에 관해


현재 독립문의 편액 글씨를 누가 썼는가에 대해선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이완용이 썼다는 것과 둘째는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이 썼다는 것이다.

3.1. 이완용


이완용이 썼다는 근거의 기록은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 게재된 〈내 동리 명물〉이란 고정 연재물에 실린 뿐이다.
<이완용 평전>을 쓴 윤덕한은 독립문의 글씨는 이완용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100% 이완용 글씨입니다. 정동파가 중심이 돼 창립한 독립 협회지요. 외부 대신 이완용은 발기인 가운데 보조금도 가장 많이 냈고 위원장이 되어 독립문 건립을 주도했어요. 김가진도 발기인이긴 했지만 그는 친일파였어요. 정동파가 주도한 사업에 현판 글씨를 쓰겠다고 나설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3.2. 김가진


친일파 연구 전문가 정운현은 편액을 쓴 사람이 이완용이 아니라는 증거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자서전인 〈일당기사〉에 따르면, 이완용이 66세 될 적인 1923년 1월 11일 직지사에 대웅전, 천왕문 등 두 개의 편액을 쓴 건 소상히 썼음에도 독립문 글씨와 관련된 것은 한 줄도 없다.

'''둘째'''.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 <내 동리 명물>에 실린 독립문 관련 글의 신뢰도에도 문제가 있는데, 이 글은 정식 취재 기사가 아닌 당시 교북동에 살던 한 주민의 이야기를 실은 것이라 근거가 부족한 면이 있다.

'''셋째'''. 독립문 편액은 한글, 한자 할 것 없이 이완용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완용의 친필 서체는 주로 해서체이고 획이 날카로운 반면, 독립문 편액은 글씨 획의 끝이 뭉텅하여 선이 굵고 힘찬 것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김가진의 손자인 김자동[7]은 2010년에 한겨레와 중앙선데이에서 김가진이 쓴 글이라고 주장했다.

독립 협회 결성의 주역 중 한 사람이던 할아버지는 당대 명필로도 꼽혀 서대문 밖에 세운 ‘독립문’의 한자·한글 제자 모두 쓰셨다. 비원에 있는 현판도 대부분 할아버지 글씨다. 독립문의 제자가 ‘역적’ 이완용의 글씨로 일부 잘못 알려져 있는데, 육안으로 서체만 비교해도 틀린 주장임을 알 수 있다.

한겨레 2010년 1월 3일자 기사 [길을찾아서] 〈일본 작위 내던지고 망명한 할아버지 / 김자동〉 중에서 #

우리 집안에서는 당연히 할아버님(동농 김가진·1846 ~ 1922) 글씨로 알고 있습니다. 강단이 남달랐던 어머니(정정화·1900 ~ 1991)의 회고록 장강일기에도 한문과 한글 현판을 정성 들여 쓰셨다고 나와 있고요. 어머니는 홀로 상하이에 건너가 시아버지를 모셨어요. 할아버님은 1903년 중추원 부의장으로 계셨을 때, 비원 감독직을 맡아 창덕궁 모든 현판 글씨들도 쓰셨습니다.

중앙SUNDAY 2010년 9월 18일자 기사 〈일제의 만행 증언하는 사형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 중에서 #

제3자인 서예 전문가 김선원은 중앙SUNDAY 기사에서 독립문의 ‘문 문(門)자’와 ‘설 립(立)자’의 체형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이완용의 글이 아니라고 단언했으며 이완용 글씨로 알려진 경복궁 함원전(含元殿) 현판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완숙한 독립문 글씨와는 체형과 서법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 증거로 김가진이 1903년에 창덕궁 후원감독을 맡아 쓴 몽룡정, 부용정, 애련정, 희우정, 금마문, 폄우사, 운경거 등의 편액 역시 전부 글씨체가 뭉텅하며 예리하지 않은 스타일이다. 이는 독립문 편액 글씨체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미스테리를 풀 핵심인 독립문의 한글 현판은 현재 김가진이 쓴 한글 친필이 전무한 관계로 비교의 대상은 한문 편액밖에 남지 않는다.
독립협회는 출범 뒤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면서 현판을 내걸었는데, 현재 현판은 전해진 것이 없으나 1897년 5월 25일 독립신문 잡보에 따르면 태자 시절의 순종황제썼다. 또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에선 당시 황해도 관찰사인 김가진이 독립문에 관심을 지녔을 것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황해도 관찰사 김가진 씨가 해주 먹판을 금번에 새로 만들어 먹에 박아서 전국에 반포하였는데. 그 먹 전면에는 제국 독립문(帝國獨立門)이라 박아 도금 하였고 후면에는 독립문을 온통 모본하여 박고 국기와 독립문에는 또한 도금을 하였더라. 물건에 까지 이렇게 판각하였으니 김씨의 마음에 독립이자 사랑하는 것을 깊이 치사하노라. 전국 인민이 일심으로 애국하여 독립이자 생각하기를 이 먹에다 각(刻)한 것과 같이 함을 우리는 바라노라.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

독립문의 글씨를 누가, 언제 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므로 서체 고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정운현은 위와 같은 견해들을 종합해 보아 김가진의 것이 맞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4. 사건사고


  • 독립문 등반 관련 사건
과거에는독립문 아치 좌측에 철판 문이 있었고 그 문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8] 그에 따르면 당시 독립문 내부에 일본 귀신들이 산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좌측에 있는 문을 통해 들어가면 파리의 개선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좁고 가파른 계단이 있는데, 꼭대기에 올라가면 콘크리트로 된 바닥이 나온다.
  • 1993년 12월 13일에 전국 농업대학교 대표자 협의회(전농련. 한총련 소속.)가 독립문 옥상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연행된 사건이 있었다.링크

  • 2004년 12월 20일에는 전농 소속 농민들이 쌀개방 반대를 외치며 독립문 위에 올라가 시위를 벌였지만, 역시 경찰에 연행됐다.링크
  • 2008년 1월 24일에는 인권단체들이 독립문을 점거해 시위를 열 계획이었지만 오르는 것에는 실패했다.링크

5. 독립문의 이름에서 따 온 것들



5.1. 의류 회사 P.A.T의 예전 브랜드


구 평안섬유공업, 현 평안엘앤씨에서 1971년에 PAT(Pyong-An Textile의 약어)로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사용한 내의 브랜드명이다. PAT로 바꾼 이후에도 한참 동안 독립문 PAT라고 친숙한 브랜드명을 함께 사용했다. 지금은 코뿔소 모양 상표를 쓰고 있다. 창업주 일가는 고향이 평안도독립운동에 투신한 경력이 있다. 평안섬유공업, 독립문이라는 이름도 이 경력으로 인해 쓰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초반 당시에 "여성용 빤쓰는 독립문표, 남성용 빤쓰는 쌍방울표"라는 화장실 유머도 있었다.

5.2. 대한민국 육군 제1공병여단 독립문부대




6. 여담


  • 영화 그림자 살인의 배경에 나왔다.
  • 무한도전 세계 일주 특집에서 파리 개선문 대용으로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공사 중이었다.
  • 자음동화의 예시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독'의 종성 ㄱ과 '립'의 초성 ㄹ이 만나 '[동닙]'으로 발음되는 '상호 동화'에 이어, '[동닙]'의 종성인 ㅂ과 '문'의 초성인 ㅁ이 만나면 ㅁ 소리가 덧나 [동님문]으로 발음되는 '비음 동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몇 안 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 한때 인근 교통 표지판에 로마자 표기를 Dogribmun이라고 써 놓아서 조롱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9] 그대로 하면 '개(dog) 갈비뼈(rib) 문'이 된다.(…) 이후 로마자 표기법의 개정에 따라 Tongnimmun을 거쳐 현재는 Dongnimmun이 되었다. 비슷한 원리로 Dogok도 외국인 입장에서는 보기에 따라서 웃겨보일 수도 있다. # [10]
  • 찾아가는 방법은 지하철로 갈경우 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리면 바로 보인다.
  • 서재필의 출생지인 보성에 독립문 1:1 실사 모형이 있다. 문덕면 용암리에 있는 서재필 기념 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광주에서 벌교로 가는 시외 버스를 타고가다 보면 아주 잘 보이니 참고.
  • 대한민국 육군 공병병과휘장이 독립문에 별이 들어간 형태였으며, 현재는 서양성곽이 들어간 형태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공병가에도 독립문이 언급된다. 미합중국 육군이 서양식 성채 형태의 문양을 공병 병과휘장으로 쓰고 있어 이를 본뜨다 보니 얼추 분위기가 비슷한 독립문의 디자인을 쓴 것이라 추정된다.
  • 2018년 삼일절을 맞이하여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기념행사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문까지 퍼레이드를 한 적 있는데,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독립문이 일본이 아니라 청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청산한 기념으로 설치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나'라는 비판이 있었다. 전 국회의원이자 평론가인 신지호는 "독립문은 반일(反日)이 아니라 반중(反中)의 산물이다."라는 칼럼으로 이를 지적하면서, "서방세계인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비판하는 반면 중국에 대해서는 침묵, 차분하게 일관한다." 며 문재인 정부의 외교방침과 엮어 비판했다. #
그러나 한국 광복군독립군가 후렴구에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라는 가사가 나온다는 점, 3.1 운동8.15 광복 당시 사람들이 태극기를 그리기 위해 독립문 앞에 모여서 태극기의 도안을 베꼈다는 점, 독립운동가 김항복이 회사 명칭으로 '독립문'을 쓴 사례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틀린 것은 아니라는 반론이 있다. 경술국치 이후와 8.15 광복 이전의 광복군으로 대표되는 민중의 기저 의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사례이다. 설립 당시에는 독립문이 가지고 있던 의의가 모화(慕華)에 대한 극복에 불과했을지라도 이후 일제시대가 되면서 그 의미가 일본제국에 대한 독립이라는 상징으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건축물이 가지는 상징이 변화하는 사례는 다른 건축물에도 찾아볼 수 있다. 당장 독립문의 모델이 된 에투알 개선문만 하더라도 설립 그 자체는 나폴레옹 1세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아치의 중앙 밑에 1차 대전 무명용사 묘비가 씌여져 있고, 샤를 드골2차 대전 전후에 이 문으로 입성하면서 이념을 떠나 현 프랑스 정부의 승리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어 있다.

7. 관련 문서



[1] Середин-Cабатин.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청에서 파견한 고문 묄렌도르프와 함께 조선으로 건너왔는데 묄렌도르프와 마찬가지로 딱히 청의 목적을 위해서 활동하지는 않았다. 손탁호텔이나 덕수궁 중명전, 러시아 공사관 등 이 시기의 서양식 건축물을 대부분 설계하였을 정도로, 당시 조선의 조정과도 사이가 좋았다. 덕분에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의 사망을 실제로 목격한 2명의 서양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서재필은 사바친을 스위스인이라고 기록을 했기 때문에 이 사람의 국적과 혈통 문제로 논란이 있었고, 스위스 방식으로 읽어서 이름이 사바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 국적이란 것이 드러났고, 좀 더 뒤져본 결과 부계에서 스위스계 혈통이 발견되긴 했다.[2] 이 시기의 중추원은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일본의 영향력을 피할 수 없었다.[3] 이 과정에서 로마노프-야마가타 의정서가 체결되었다.[4] 이 시기의 이완용은 고종에 의해 촉망받는 신진 관료로, 춘생문 사건에도 개입해서 고종의 신임도 두터웠고 백성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좋았다.[5] 영은문 주초 또한 사적 제 33호로 등록되어 있다.[6] 이 때 성산대교모래내고가차도가 같이 건설되었다.[7]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8] 독립문 외형의 모티브가 된 프랑스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도 옆에 문이 있고 일반 관람객들이 계단으로 꼭대기에 올라 갈 수 있다.[9] 사실 1959년 ~ 1984년의 공식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Dogribmun이 아니라 Doglibmun으로 쓰는 것이 맞았다.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받침 뒤의 ㄹ은 r이 아니라 l로 쓴다는 조항이 있다. 다만 저 조항이 현실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아서 그랬는지 표지판에 Dogribmun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10] Do gok이 아니라 Dog OK라고 읽은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