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환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김규환
金奎煥 | Kim Kyuhyuan
'''
<colbgcolor=#E61E2B> '''출생'''
1956년 6월 18일 (68세)
강원도 평창군
'''병역'''
공군 이병 소집해제
'''소속 정당'''

'''지역구'''
비례대표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20
1. 개요
2. 생애
3. 대우중공업 시절
3.1. 취준생 시절
3.2. 사환 시절
3.3. 기능사원 보조공 시절
3.4. 기능공 시절
3.5. 반장 시절
3.6. 전문대 시절
3.7. 직장 (職長) 시절
3.8. 직장생활에 대한 사상
4. 퇴사 이후
5. 정치인으로서의 생활
6. 선거 이력
7. 가족 관계
8. 한계
9. 여담
10. 둘러보기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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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술자, 교육자, 정치인이다.
1956년 강원도 평창군에서 태어났다. 1977년 8월부터 2010년 9월까지 대우중공업 종합기계사업부문(현 두산인프라코어에 재직하였다.[1] 학력은 초등학교 중퇴이지만 한국폴리텍Ⅶ대학 기계공작과의 2년 과정을 이수하였고[2], 인제대학교 석좌교수도 역임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6번)으로 당선되었다.

2. 생애


가난하여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대구 동구 방촌동의 냄비공장에서 일했다.[3]
1975년경에는 어머니가 병환으로 쓰러졌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사북 탄광으로 갔고 그는 소년가장으로서 여동생을 보호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그는 여동생을 데리고 상경해 아무 일이라도 찾으면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당시 음식물 쓰레기통을 보면 잔반을 주워먹을 정도의 가난에 시달렸다. 밤중에 상갓집에 몰래 들어가 음식을 마구 훔쳐먹고 도망나온 적도 있다.
1976년에는 중학교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국민학교 중퇴였던 그는 중학교 교복이 입어보고 싶어 빨랫줄에 널려있던 집주인 아들의 교복을 몰래 가져다가 입고 찍었다.
1977년 8월경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더 이상 삶의 의미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열심히 노력했던 이유가 어머니 병 약값을 벌기 위해서인데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학력과 기술이 없어 가난에서 벗어날 희망도 없었다. 그래서 여동생한테 아이스크림을 사 주고 쥐약을 사 자살하려고 했지만 여동생이 자살을 말려서 그만두었다.

3. 대우중공업 시절



3.1. 취준생 시절


자살을 포기한 직후[4], 어머니가 벽지 대용으로 붙인 신문지에서 '대우가족을 찾는다' 내용을 보고 대우중공업 (대우종합기계) 창원공장에 찾아가서 입사하려고 시도했다. 근처 중소기업 채용공고는 '채용공고' 처럼 평범하게 적혀 있었는데 대기업 채용공고는 '가족을 찾는다'고 적혀 있으니 가족적인 회사일 거라고 짐작해서 간 것이었다.
대우중공업은 당시 최고 인기 직장이었다. 그래서 기술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명문 공고를 졸업하고 기계 가공 경진대회 등에서 수상한 사람들 위주로 합격하였다. 1977년에도 '고졸, 군필[5], 자격증 보유자'가 아니면 생산직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대우중공업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대기업이라든지 그런 것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노트에 이력서를 작성하여 수위에게 제출하려 했다. 그러자 수위가 거지라며 때리고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차 타고 지나가던 김성중 (김우중 대우 회장의 막내동생) 씨가 우연히 발견하고 폭행을 멈춘 후 불쌍하게 생각하여 "무슨 행패냐, 거둬줘"라고 말했고 이 때문에 면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울 사람에게 "거둬줘"라는 말은 '밥 한 끼 정도 도와줘라' 정도의 뜻이다. 그런데 경상도에서는 '우리 식구로 받아주고 도와줘라'라는 말이라고 한다. 높은 임원은 서울 사람이라 전자의 의미로 말했지만 수위가 경상도 사람이었기에 후자의 의미로 알아듣고 부장에게 그 임원이 이 사람을 쓰라고 했다고 잘못 전했다. 그런 우연의 일치 끝에 간신히 면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정밀가공기계(lathe)인 선반에 대해 잘 아느냐는 질문을 받자 벽에 물건 보관할 때 쓰는 가구(shelf)인 선반을 만들어본 적도 있고 써 본 적도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 그가 기계정밀가공 회사에서 일자리를 정상적으로 구할 수는 없었으므로, 청소부 겸 사환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이것이 1977년 8월의 일이다.[6]
김규환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 한 사실이지만, 운이 매우 많이 따랐다. 1976년 대우중공업은 국영기업이었던 한국기계공업을 인수했다. 그래서 ‘대우맨’을 키우려고 젊은 기계가공 기술자를 많이 뽑았다[7].

3.2. 사환 시절


청소부 겸 사환의 업무는 회사 마당을 쓸고 풀을 뽑는 일이다. 기술을 배울 수 없기 때문에 열심히 해 봤자 승진된다는 가망이 없다. 국가에 의한 사회복지가 부족하던 시절 김규환이 굶어죽지 않게 회사에서 살려준다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일자리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식당 아주머니들이 회사 식당에서 밥 짓는 것을 도왔다. 비오는 날에도 마당을 쓸었다. 그리고 임원 면담 때 이 회사 사람들이 마당에 꽃을 심지 않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고 어그로를 끌어가며 꽃씨 살 돈을 받아왔다. 여러 사람에게 잘 보이는 자리에는 꽃을 심고, 구석의 안 보이는 자리에는 야채를 심어 기능공들이 회식할 때 나눠 먹을 수 있게 했다.
기술을 모르는 청소부가 대기업에 기여한다는 것은 허황된 소리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그는 꽃을 심어서 그런 황당한 일을 실제로 해냈다. 도라지를 심어놓았는데 몇 달 후 미국인 바이어가 공장을 방문한 뒤 'American starflower'라며 매우 반가워해서 계약에 유리했다는 것이다.
사원들은 통근버스를 타고 도착한 뒤 아침 8시부터 근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김규환은 회사가 자신을 뽑아준 것이 너무 고맙다며 매일 새벽 5시에 출근하였다. 2002년 박경림 길거리특강에서는 자신이 그 당시 8시 출근하는 기능공들을 위해 새벽 6시부터 기계를 워밍업시켰다고 했다.
당시 회사 사장은 주로 5시 20분경에 출근하고 있었다. 사장이 청소부를 보고 '누구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김규환은 '아저씨는 누구세요?' 하고 반문하였다. 사장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지금 청소하는 것은 누가 지시한 일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김규환은 ‘시키긴 누가 시킵니까? 그냥 제가 좋아서 하는거죠.’라고 했더니, 사장이 ‘음, 훌륭하군’ 하고 대답하였다. 며칠 후 사장이 기능사원 보조공으로 승진시켰다. 입사 1년 후의 일이다. 이는 삼성 강연에서 말한 내용이다. 참고로 대우중공업은 1999년 기준 15,000명짜리 대기업이라 웬만큼 성실히 해서 사장 눈에 띈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3.3. 기능사원 보조공 시절


그는 생산 1부 생산 1과 사상반에 배치되었다. 기능사원 보조공은 기술자들이 제품을 가공하면 쇠 다듬는 줄로 날카로운 모서리를 제거하고, 작업이 끝나면 기계의 기름때를 청소하는 일을 한다.
기능사원 보조공은 대개 공고나 전문대에서 2~3년간 기계가공을 배운 다음에 생산직으로 처음 입사했을 때 주어지는 자리다. 그런데 초등학교 중퇴에 기술도 없이 사장 지시로 들어온 자리이니 복잡한 일을 할 수가 없다.[8] 그래서 선배 기능공들은 첫날부터 기름때를 닦는 일부터 맡겼다. 다음날 그는 선배 기능공에게 주먹으로 맞고 눈꺼풀이 찢어져서 병원에 가야 했다. 물을 데우고 가루비누를 풀어 비눗물로 걸레질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대충 닦았다는 것이었다. 이런 폭행을 당하면 그 당시에도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은 뒤 사람을 때린다'면서 화를 내거나 회사를 관두기가 쉽고, 요즘은 사측에 정식으로 문제삼으라고 교육받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는 '역시 선배가 가르쳐준 대로 하니까 일이 잘 된다'면서 감탄하고 새벽 3시까지 기계를 닦았다.
기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정밀한 기계를 보면 대개 고장낼까봐 사고날까봐 겁먹어서 만지려고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둘째날 밤 기계를 돌려봐야 기술을 배우지 않겠냐며 몰래 기계를 켰다. 그런데 내부에서 비누거품과 기름이 섞여서 나오자 또 얻어맞을까봐 겁을 먹고 청소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먼저 호스를 구해서 입으로 기름을 빨아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9] 그러자 기계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지만 기어를 닦으려는 생각으로 볼트를 풀어서 기계를 분해하였다. 분해 청소에는 성공했지만 기계에 대해 모르니 조립을 할 수 없었다. 도망갈까, 편지를 써서 사죄할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공구함에서 사용설명서를 발견해서 조립에 성공하였다. 밤을 새고 새벽 6시 40분이 되어서야 조립에 성공하였다.
어쨌든 선배 기능공들은 중간과정은 모르니 잘 닦았다고 칭찬하였다. 대개의 기능사원 보조공은 청소를 할 때 겉만 닦지 이런 식으로 기계를 분해해서 닦지는 못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배 기능공들은 밥을 사줘가면서 계속 일을 시켰다. 그의 자평으로는 기능공 보조 및 기능공 초기 시절 4년간 2,612개의 기계를 분해했다고 하며 이 때문에 설비과의 기계 수리공을 부르는 것보다 빠르게 고칠 수 있다는 소문이 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선배 기능공들이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부르고 욕을 하고 다칠 때까지 주먹으로 때렸지만 6개월만에 '김 군'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이런 식으로 여러 기계를 분해해보고 기술을 익히면서 입사 1년 6개월 후에는 정식 기능공 (사상공)으로 승진하였다.

3.4. 기능공 시절


기능공이 된 후에는 메인 스핀들 연삭 부서에 배치되었다. 1980년대 초 이 부품은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산화가 필요했고 회사의 큰 관심이 쏠려 있었다. 가공시 허용 오차가 1/1000mm 수준인데[10] 대우중공업의 가공 기술은 이 수준에 이르지 못 했다. '새벽분임조' 품질 분임조 활동을 하면서 김규환과 조원들은 메인 스핀들 국산화에 성공했다.
입사 2년 6개월 후쯤에는 일본인 기술자가 컴퓨터를 고치러 오니까 준비하라는 지시를 듣고 컴퓨터를 뜯었다. 기존에 선반 가공기계를 청소할 때처럼 컴퓨터를 분해한 뒤 뜨거운 비눗물을 적셔서 내부 부품들을 솔로 빡빡 닦은 뒤 맑은 물로 헹구었다. 컴퓨터는 합선으로 완전히 고장났지만 그에게는 다행으로 누가 고장냈는지 범인을 찾지 못 했다. [11] 그는 취급설명서를 보지 않은 채 지레짐작으로 닦은 것이 원인이라고 반성하고 이후부터는 취급설명서 내용을 숙지하였으며 25년간 1만여권의 책을 읽었다.
1980년 즈음부터는 기술 개발에 관한 메모를 일기처럼 남기기 시작했다. 이런 메모는 아이디어 착안에 도움이 되었고, 나중에 자서전을 낼 때도 도움이 되었다.
입사 3년 6개월 후에는 반장으로 승진하였다.

3.5. 반장 시절


그는 이 시기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외국인 바이어들은 한국 현지 사정을 알기 위해 통역을 대동하고 공장을 방문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통역은 기계가공 기술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전달 못한다. 생산직 중 영어회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주변 기능공들을 놀라게 했다.
1982~1983년경에는 정밀가공연삭기능사 2급 (현 연삭기능사)[12]에 응시하였다. 실기는 1번만에 합격하였지만 필기는 9번을 떨어지고 10번째에야 합격했다. 1988년에 기계가공기능사 1급 (현 컴퓨터응용가공산업기사) 역시 필기를 5번 떨어지고 6번째에야 합격했다.[13] 운전면허 필기도 5번쯤 떨어지고 합격했다.

3.6. 전문대 시절


국제 대회나 전국 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을 받은 사람이니만큼 한 번은 이경훈 사장이 직접 관심을 가지고 불러서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규환은 국민학교 정도까지밖에 못 공부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장이 이사에게 직접 그를 공부시키라고 지시하였다. 나이 먹고 초중고 과정을 일일이 통과하려면 단계가 많아 힘드니까 중간과정은 생략하고 대학교육만 받는 쪽으로 접근했다. [14]
학비 지원을 위해 4,500여명의 대우 사원이 지원했는데 사내 시험에서 1등을 해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사측에서는 회사를 휴직할 수 있게 해 주고 교육비를 모두 지원했다.
1990~1991년에는 창원기능대학 (현 한국폴리텍 7대학) 기계공작과에 2년간 교육을 받았다. 당시 이 학교의 교육수준은 국내 최고수준 전문대였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당시 중견기업의 중역으로 취업하든지 창업을 했다. 그런 반면 당시 그의 학력은 초등학생 수준이었으므로 영어 등의 학업을 따라가지 못 해 큰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한 끝에 성적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학점이 높아졌고 끝내 졸업도 했다. 졸업하자마자 사장이 부인과 함께 본사로 불러올려 축하한 후 직장으로 승진시켰다.
당시 이 학교에서는 영어를 못하면 졸업을 못하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재학 당시 5개 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3.7. 직장 (職長) 시절


생산직에서 '직장'은 상당히 높은 중간관리직 직급을 의미한다. (예: 김 직장, 이 직장)] 그가 직장으로 승진한 것은 전문대 졸업 직후이자 입사 15년만이었다.
그 후 1992년경 탁월한 성과를 인정받아 국가품질명장이 되었다. 33년 동안 대우중공업 (대우종합기계, 두산인프라코어)에서 근무하였다. 직장으로 승진한 뒤 그는 TV에 나오는 등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자서전도 썼다. 외국이나 삼성에 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3.8. 직장생활에 대한 사상


그가 자평하는 개인적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이다. 내가 1등이고 최고의 명품을 만들 것이며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려고 했다.
그 다음으로는 매사를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은 하찮은 일, 하기 싫은 일이 주어지면 짜증을 낸다. 하지만 김규환은 매우 고마워하며 일을 했다.
70년대 말 중공업 회사의 생산직 사원들의 조직문화는 몹시 험했다. 친절한 교육 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마음에 들지 않게 일을 해 놓으면 바로 얼굴을 주먹으로 심하게 때렸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가도록 선배에게 맞아도 맞은 것보다 선배가 가르쳐준 것 하나를 더 대단하게 생각하고 선배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아들 대학 학자금을 회사에서 지원해주기에 당시 대우중공업 대표이사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더니 대표이사가 이상하게 생각하더라고 한다. 이미 명장을 시켜주었건만 이상한 콩고물을 바라고 청탁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할 때 월급을 주고 학자금까지 주었으니 이는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대우중공업에 처음 채용될 때 하찮은 청소부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기뻐했다. "얼마나 좋은 곳인가? 보수를 얼마나 받는가? 얼마나 편하게 일하는가? 어떤 일을 하는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떤 마음으로 일하는가?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더 중요했다. 따라서 청소부를 하면서도 항상 남들보다 2~3시간 일찍 출근했으며 사원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아주머니 일을 도왔다. 이것은 기능공 보조로 발탁되어 기술을 배우고 명장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미래를 예측한 결과가 아니라 어떤 일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했을 때 추가적인 기회가 온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우연히 사장의 눈에 들어 자격증이나 기술 교육을 받은 학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능사원 보조공으로 발탁되었다.[15]
그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시절(1977.8)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75~1978)과 동시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매사에 감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중요한 것은 부지런한 것이다. 그는 30여년의 직장생활 동안 매우 많은 시간을 일했다. 직장생활 초기에는 8시에 업무를 시작해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5시에 출근했다. 반장으로 승진한 뒤 1989년경 그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는 회사에서 일했으며 밤 12시에 잠든다. 그리고 새벽 3시에 일어나 어시장에 생선 배달 부업을 하러 간다. 그러다가 출근을 한다. 김규환이 야근, 밤샘근무를 너무 자주 하자 건강을 해친다고 주위에서 '강제 퇴근 명령, 출근 금지 명령'을 제안해서 장시간 일하지 못 하게 막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기존 방식보다 더 잘 하려고 노력했다. 청소부를 할 때는 마당에 꽃씨와 작물을 심었으며, 기능사원 보조공을 할 때는 한밤중까지 선배들 기계를 분해하고 닦았다. 그러다 보니 기능사원 보조공으로 처음 기계를 만져본 지 6개월도 안 되어 '기계를 잘 고치는 사람'으로 여기저기 불려다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사소하거나 반복되는 일이라 해도 열심히 했다.[16]

4. 퇴사 이후


2010년 대우중공업을 퇴사한 다음에는 무동력대체에너지개발연구소 소장, 월드맥스원코리아 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하였고 제20대 국회에 비례대표로 입성하였다.

5. 정치인으로서의 생활


자신의 보좌관을 모집할 때 애국심, 가치관을 보기 위해 태극기 그리기, 애국가 제창하기, 조부모 성함 쓰기 등의 기준으로 모집하였다.
국기를 그리는 이유를 기자에게 질문받자 그는 “공장 어디서나 국기가 보였고, 국기를 단 차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국기를 브랜드화했고, 어린이들은 눈 감고도 국기를 그렸다”고 소개했다.
대개의 국회의원들은 선거 일등공신들을 보좌관으로 임명하고 심한 경우 인맥 채용을 하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현재 2019년에 펼쳐질 창원시 성산구 재보궐선거에서 강기윤 전 의원과 함께 출마할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친박(잔류파)계열 의원[17][18]으로 분류되나 다만 강기윤 전 의원과의 친분을 이유로 2019 재보궐선거 후보직을 고사했고, 유승민 바른미래당 前 대표의 지역구이면서 본인이 유년기를 보낸 대구 동구 을 출마를 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보수의 텃밭인 대구라고는 해도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어려운 승부가 될 듯 했으나 유승민 의원이 총선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보수진영 단일 후보가 되였다.
그러나 이후 경선에서 배제되었고 유승민 의원의 측근인 강대식 전 동구청장이 경선에서 승리하였다. 설령 김규환이 나온다고 해도, 도태우, 김재수 급으로 강대식에게 패배할 가능성이 있다. 지역 여론에서도 강대식을 상대하는 사람으로 김규환이 나왔으면 강대식이 압도적으로 이길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실제로 강대식은 군 생활 외에는 계속 동구 지역에서 거주한데다 친유 출신이라 중도층 확장에 유리하지만, 김규환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에 동구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7,960,272 (33.50%)'''
'''당선 (6번)'''
'''초선'''

7. 가족 관계


자신이 정밀가공을 하면서 품질관리 전문가가 된 것은 물론, 부인도 마산의 한 공장에서 품질관리직 출신을 품질관리에 대해 같이 공부한다는 구실로 만나서 결혼하였다. 김규환은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이 명장이 된 것에는 부인의 공로가 결정적이라고 평가하였다. 부인 역시 생산직 출신이라 회사에서 몹시 복잡한 정밀가공 품질관리 문제가 생기면 아내가 아이디어를 내놓아 문제를 해결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부인은 이런 직접적인 기술로만 김규환을 도와주었던 것이 아니었다. 김규환은 회사에서 연구개발을 하겠다고 들다가 메인 스핀들이라는 매우 비싼 부품을 불량낸 적이 있었다. 들키면 집을 팔아서 변상해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김규환은 2년 반 가까이 노가다성 연구를 시행해서 공으로 과를 덮겠다는 방안을 택했다. 그러자 부인은 연구를 해내서 과실을 덮는다는 발상을 지지해주고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원망하거나 이혼하자고 요구하지 않았다.[19] 오히려 집에 오는 날에는 힘든 기술개발 과정에 몸 상하지 말라고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또 부인은 생활비 절약 노하우의 달인이었다. 젊을 시절부터 사고 싶은 물건을 많이 사면 경제력이 남아나지 않을까봐 일부러 상점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80년대 기능공 월급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외벌이로 경제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김규환이 초등학교 중퇴였던 데 비해 부인은 4살 연하의 고졸이었다. 다른 맞선에서 김규환은 학력이 없다며 멸시받고 쫓겨나기 일쑤였는데 유독 현재의 부인만 '학교를 다니지 못했으면 나중에 다니면 된다'면서 단점을 덮어주었다.
위와 같은 태도 때문에 이들 부부는 결혼생활 중의 갈등이 거의 없었다.
이들의 이런 생활방식은 교육에도 적용되었다. 자녀들과도 집에서 아이디어를 내놓아 비누 낭비 등 집 안에서 개선할 수 있는 것들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아들 이름은 '김 품질', 딸 이름은 '김 관리'라고 지었다. [20] 2017년 기준 아들은 심장내과 전문의 겸 박사, 딸은 지방국립대 피아노 조교수를 하고 있다.

8. 한계


그는 직장생활에서의 성공에 대해 개인의 노력과 감사를 중시하였다. 실제로도 그는 매우 노력하여 성공한 인물이지만 노력 뿐만 아니라 직장 운 역시 많이 있었기에 단순히 노력만으로는 일반화가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그 근거로 우선 노력을 알아준 김성중 (대우 오너 일가), 이경훈 (대우중공업 사장) 등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성공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못 나왔고 기술자격증도 없는 사람을 기능공 보조로 발령한 것은 특혜에 해당한다. 임원진들은 열심히 하는 사람, 잘 하는 사람에게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 회사의 장래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갖고 있었기에 이런 특혜를 주었고 김규환은 이런 좋은 기회들을 잘 활용해 최선의 성과를 거두어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양측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오너 일가가 청소부 채용을 지시하고 전문경영인 사장이 청소부의 승진을 지시한다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대기업에서는 상무 정도만 되어도 자기 밑에 말단 사원들이 누가 있고 누가 훌륭한지 알지 못 한다. 사장쯤 되면 상무 정도 되어야 누가 있는지 정도 겨우 알고 부장 밑으로는 거의 파악하지 못 한다. 하지만 이경훈 사장은 당시 30대 초반의 기능직 사원이었던 김규환을 알고 여러 차례 면담하였으며 회사 돈으로 대학 교육을 시키라고 돈도 대어주었고 사장을 만나러 올 때 창원에서 서울까지 부부동반으로 비행기도 태워주었다.
둘째로, 우연히 들어간 직장이었지만 당대 국내 최고의 대기업이었기 때문에 많은 성장 기회가 있었다. 1999년 당시 대우중공업의 구성은 남성 관리사무직 5,327명, 남성 생산직 10,025명이었으며 남성 근속연수 14.5년, 남성 평균연봉 3,400만원으로 대우가 매우 좋았다. 삼성전자의 남성 근속연수가 8.5년이고 평균연봉이 3,406만원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비교가 가능하다. 즉, 연봉은 전국 최고 수준이고 근속연수는 당시 기준으로 평생직장이 보장되는 곳이었다는 뜻이다. 그는 22살때까지 다른 곳에서도 항상 성실하게 일해왔지만 다른 회사에서는 그런 성실성에 대한 보답을 받지 못 하고 기술이 없다고 쫓겨나기만 했다.
셋째로, 크게 말아먹을 뻔하다 운 좋게 멈추거나 실제로 회사에 큰 손해를 입힌 게 여러번이지만 운이 좋아 들키지 않거나 상사가 용서해주어 넘어간 경우가 많다. 기능공 보조로 발령되자 기계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 기계를 분해했는데 다행히 직장 선배들이 오기 전에 조립에 성공하였다. 만약 조립에 실패했을 경우 해당 부서에서 쫓겨나기 쉽다. 그리고 사용설명서를 모르고 컴퓨터를 물로 씻다가 고장냈지만 들키지 않았다. 하이스피드 아답터를 개발할 때도 부품이 튕겨나오면서 자신은 머리에 부상을 입고 비싼 기계는 망가져 사측에서 실험 금지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간신히 변상을 면했다. 또 80년대 초반 가격으로 350만원 하던 스핀들 2개를 불량을 냈는데 2년간 연구해서 더 큰 성과를 거두는 바람에 이 잘못이 묻혔다. 이는 당시 그의 10여평짜리 집을 팔아야 변상할 수 있는 거액이었다. 대기업이었기에 연구개발비의 비중을 높게 두어 이런 잘못들이 묻힌 것이 많을 뿐, 중소기업이었으면 매출과 영업이익 자체가 적기 때문에 조그만 잘못만 저질러도 회사에 큰 피해를 끼치는 것으로 되어 잘리기 쉽다. 그리고 이건 그냥 운이 좋은 거다. 특히 요즘은 공장 내에 CCTV와 출입자 카드체크기도 설치하고 있고 기업의 노무관리도 점점 치밀해지고 있기 때문에 80년대처럼 큰 사고를 쳐놓고 범인을 잡지 못 했다고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어시장에서 생선 배달 부업을 한 것 역시 겸업금지 사규를 어기고 영리행위를 한 것이므로 징계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가 책을 썼을 때쯤에는 이미 회사 전체를 빛낸다고 할 만한 명장이 되어 있었으므로 아무도 문제삼지 않고 넘어갔다.
넷째로, 그가 만진 기계들은 공고졸 기능공들이 다루는 기계였기에 그의 초등학교 중퇴 수준 학력으로도 일정부분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운이었다. 첨단 장비를 사용하는 회사에 그가 사환으로 입사했다면 평생가도 기술을 배울 기회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첨단 기계는 만져볼 권한이 주어진다 한들 복잡해서 이해할 수 없다. 사용설명서는 당연히 영어로 적혀 있으므로 영어를 모르면 쓸 수도 없고, 영어를 안다 한들 전문지식이 없으면 내용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래서 고객사의 박사급 엔지니어도 장비 업체 경력이 없으면 뜯어볼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많다.
장비 제조사의 CS 엔지니어 역시 석사급 이상으로 뽑아서 1년쯤 교육을 해야 기계의 가장 사소한 고장을 점검할 기회가 주어지며, 더욱 정밀한 고장은 박사급 CS 엔지니어들이 몇 년의 교육을 거친 후에야 겨우 확인할 권한이 주어진다. 권한없는 사람이 함부로 뜯었다가는 수리 보증을 받을 수 없어 수십억원~수백억원의 손해가 나므로 카메라 감시를 해서 권한없는 사람의 접근을 엄금한다.
다섯째로, 우리나라에 CAD/CAM이 일반화되기 전에 그의 기계가공 기술에 대한 산업적 수요가 매우 오래갔다. 그의 전문기술이 만약 90년대에 수요가 거의 없어진 기술이었다면 그는 IMF때 일찌감치 정리해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여섯째로, 그의 행동 방침은 청소부, 기능공 등 실무자의 위치에서는 잘 통했지만 중간관리직으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윗사람으로 있을 때 그의 방식을 다른 아랫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가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 보좌관들에게 아침 출근을 시킨다는 보도가 나오자 여러 사람들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비판하였다.

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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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계입문 전에 '어머니 저는 해냈어요'라는 책을 낸 적이 있는데, 어떤 사람의 얼굴이 표지와 딱 들어맞는 사진 덕에 다른 쪽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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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관련 문서



[1] 두산인프라코어 공작기계분야는 두산그룹의 경영난으로 인해, 사모펀드로 매각되었다. 다만 두산이라는 이름은 유지하여 두산공작기계라는 사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2021년 현재, 두산인프라코어 자체는 현대중공업그룹으로의 매각이 유력한 상황이다. 대우맨이었던 김규환에게 이러한 변화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2] 정식 학위는 아니지만 당시에는 기능사 1급 (현 산업기사) + 5년 경력이 필요했다. 요즘도 이 대학의 기계시스템 기능장 과정 (=가공 전문가)은 산업기사+1년 경력이 필요하다.[3] 냄비뚜껑에 상표 붙이는 일을 했다고 본인이 말했다.[4] 1977년 남성 평균수명은 60.8세였다. 가난으로 인해 22살까지 학교도 다니지 못 했고 기술도 배우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그의 절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5] 그는 학력미달로 군면제 대상이었다. 지원자격에서 군필=면제임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군필자가 아닌 것 역시 지원자격 미달로 착각하고 또 한 번 좌절하였다.[6] 서울말과 경상도말의 착오에 대한 것은 김규환 씨의 강연 내용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김성중 씨가 적극적으로 도와주라고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생산직 사원들이 파출소에 잡혀가거나 부당한 인사조치를 당하면 오너 일가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맞서 싸웠다. 그래서 파업을 할 때 그만 나서면 생산직 사원들이 파업을 풀기도 했다.[7] 당시 대우중공업에 재직했던 이희연 (두산인프라코어 상무), 신문 인터뷰[8] 초등학교 중퇴와 공고졸 경력자 사이에는 대졸과 박사 정도의 차이가 있다.[9] 그는 나중에 이 방식을 업그레이드해서 청소기로 기계 내부 찌꺼기를 빨아내는 데 성공했다.[10] 일본 미라이 공업처럼 건축전기자재를 파는 경우 1/100mm 수준까지 허용된다. 1/100mm 정도만 되어도 정밀 산업은 아니기 때문에 가공 기술력보다는 아이디어나 사용자 편의성 등이 중요하다. 하지만 1/1000mm부터는 가공 기술력이 핵심이 된다.[11] 1980년에는 산업용 컴퓨터는 국내에서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의 고급 장비였다. 78년경 전문대졸 대우중공업 기능공의 월급은 7만원(2010년대의 50만원)에 불과했고, 당시 컴퓨터 가격은 개인용이라도 100만원이 넘었다. 자기 연봉을 넘는 장비를 고장냈으니 범인임이 발각되었다면 쫓겨났을 가능성이 높다.[12] 공작기계(연삭기)를 조작하여 다른 공작기계에서 가공된 금속제품 및 기계부품을 갈거나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거나 광택을 내는 작업 수행. (출처: 산업인력공단)[13] 기계가공기능장에는 도전하지 않았다.[14] 이 전략은 성공적이어서 지금도 김규환의 학력은 대부분의 장소에 '전문대졸'로 표기되어 있다. 정규 학력은 초등학교 중퇴다.[15] 참고로 당시 대우중공업에 기계가공 기능공으로 들어가려면 적어도 2~3년은 공고나 전문대 교육을 받아야 했다. 들어가서 기술을 배우는 게 아니라 기술을 배워야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 [16] "나사못 하나를 만들어도 기능올림픽에 나가서 세계 최고의 명품을 만드는 마음으로 하면 불량이 안 납니다. 저는 한 번도 불량을 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불량을 여러 번 냈으며 개중에는 회사에서 진절머리를 내면서 말린 것도 있었다.[17] 강경 친박 성향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일명 JTBC 태블릿 특검법에서 기존에 대외적으로 언론을 통해 알려졌던 의원들 외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18] 하지만 김규환 의원은 탄핵에 찬성한 이력이 있다.[19] 신혼 초였고 이미 학력이 부족했던 남편이 경제적 무능까지 드러냈던 사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부인의 인내심을 짐작할 수 있다.[20] 중학생 때쯤 학교에서 놀림을 받자 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