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영(정치인)

 


金東英
(1936∼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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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소속 정당
4. 선거 이력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며 호는 민초(民草)이다.
생전의 별명은 거창불곰.

2. 생애


1936년 12월 23일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태어났다. 거창농림고등학교, 동국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부산동성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그 해 일어난 4.19 혁명 때 학생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 뒤 김영삼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신민당의 공천으로 경상남도 거창군-산청군-함양군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정우식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노인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0년 전두환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그는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였다.[1]
1981년 김영삼 계열 인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민주산악회가 결성될 때 이민우 회장 밑에 최형우와 함께 그 부회장이 되었다. 1984년 김영삼 계열과 김대중 계열이 합동하여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할 때 상임운영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 해 정치규제에서 해제되었으며, 해금 인사들을 중심으로 신한민주당을 창당할 때 창당준비위원 및 정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85년 신한민주당의 공천으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권익현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6년 신한민주당 원내총무로서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에 연루되었다. 1987년 김영삼과 김대중 등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 그 부총재가 되었으며, 헌법개정을 위한 8인정치회담 통일민주당측 대표(나머지 3인은 박용만, 이중재, 이용희)로 참여하였다. 1988년에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 거창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89년 김정수의 뒤를 이어 통일민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통합여당인 민주자유당이 되자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정무제1장관이 되었다.
세간에서 최형우와 함께 대표적인 상도동 가신그룹으로 꼽히며 "좌동영 우형우"로 불렸다. 불곰이라는 별명이 보여주듯, 행동으로 말하는 정치인이었으며, 행동력으로는 최형우 못지 않았다.[2]
그러나 주군이었던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을 지켜보지 못한 채 1991년 8월 19일, 지병인 암으로 별세했다[3]. 그가 세상을 떠나자 김영삼은 빈소로 달려와 영정 앞에서 "이 문디 자슥아, 저 시상에 무신 맛있는 떡이 있다꼬 와 이리 빨리 가노!!"[4] 라고 고인을 책망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또한 국회장으로 열린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읽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당시 신문 기사
뒤에도 김영삼은 김동영에 대해서 회한의 감정을 드러내고는 했는데, 2001년 김동영의 추모 10주기 행사에 참석해서 "김동영 동지는 능력 있는 사람이고 의리의 사나이다"며 "김동영 동지가 살아있었다면 정권을 놓치지 않았을 것인데 아까운 일이다"고 말했다. 당시 신문 기사
거창에서 나고 자라서 거창 지역구에서 계속 정치를 해왔기에,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을 평생의 숙원으로 여겼다. 애초에 정치에 뛰어든 이유가 바로 거창 사건. 하지만 김영삼이 집권한 후에도 그다지 큰 진척을 보지 못했다.
무소속인 김태호 의원과 산청군수 이재근이 그의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삼김시대에서는 정한헌이, 제5공화국에서는 최상훈이 연기했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60
입당

196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60 - 1961
창당

1961 - 1963
5·16 군사정변로 인한 정당 해산

1963 - 1965
입당
정계 입문

1965 - 1967
합당[5]

1967 - 1969
합당[6]

1969
자진 정당 해산

1969 - 1980
정당 재등록

1980 - 1985
정당 해산

1985 - 1987
창당

198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87 - 1990
창당

1990 - 1991
합당[7]

4.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9선거구)[8]
신민당
28,595 (22.34%)
당선 (2위)[9]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9선거구)
신민당
39,766 (32.16%)
당선 (2위)[10]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거창/산청/함양)
신한민주당
32,839 (25.38%)
당선 (2위)[11]
1987년 탈당
통일민주당 합류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거창)
통일민주당
27,513 (59.82%)
당선 (1위)
1991. 8. 19 작고
정치적인 중량감이나 명성과 달리 중대선거구제였던 9, 10, 12대 총선에서는 계속 2위로 당선되었는데 김동영 의원이 거창에서 표를 받고 경쟁자들이 산청과 함양 표를 주로 쓸어담다보니 생긴 소지역주의의 결과물이다.


[1] 제5공화국에 의하면 김영삼이 정계은퇴 선언을 할 때까지 고문했다고. 결국 정계은퇴 선언을 하고 칩거에 들어간 김영삼 앞에 김동영이 나타나서는 "정계은퇴를 왜 하십니까? 나 하나 죽는게 뭐 대수라고!"라는 말을 하는데, 이에 김영삼은 착잡한 얼굴로 김동영을 포옹한다.[2] 이쪽은 끝까지 살아서 주군을 편안히 저세상으로 보냈으니 다행일수도.[3] 통일민주당 부총재를 할 때 암선고를 받았으나, 주변의 간곡한 치료권유를 뿌리치고 정무제1장관 자리에 오르는 초인적 의지를 보였었다고.여담으로 사망한 곳이 서울대학교병원인데 그로부터 24년 후 김영삼도 이곳에서 사망하게 된다.[4] 향년 54세.일제강점기 때 사람이라지만 짧은 일생이라 더 그런듯.[5] 민주당과 신설 합당[6] 신한당과 신설 합당[7]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8] 경남 거창군, 산청군, 함양군[9] 민주공화당 정우식 후보와 동반 당선[10] 민주공화당 노인환 후보와 동반 당선[11] 민주정의당 권익현 후보와 동반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