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김시대

 




'''▲ 왼쪽부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 왼쪽부터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1. 개요
2. 역사
3. 2강 1약, 김종필의 입지
4. 영향
5. 아류 - 제주도의 삼김
6. 여담


1. 개요



'''△ 삼김시대의 시작을 알린 뉴스(1987.11.28)[1]'''
1920년대에 태어나 1960년대부터 1998년/2003년/2004년까지[2] 정치계를 풍미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사람이 정치를 했던 시대다.
이들은 모두 성씨가 김씨로 같았기에[3] 헷갈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니셜을 따서 일명 DJ(김대중), YS(김영삼), JP(김종필)로 불렸다. 셋 중에서 상대적으로 출신이 이질적인 김종필을 제외하고 민주화 투사 출신인 두 사람만 묶어 양김이라는 분류법도 많이 쓰였다.[4]

2. 역사


김영삼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여 집권한 시대는 90년대지만 본격적인 역사는 군사정권의 시대이던 60년대, 70년대,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영삼은 제1공화국자유당 소속으로 최연소 당선되면서 삼김 가운데 제일 먼저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며 통합야당 민주당에 합류했고,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윤보선을 비롯한 민주당 구파 소속 정치인으로 경력을 쌓아갔다. 김대중의 정치적 대부는 제2공화국의 유일한 총리이자 실질적인 집권자가 되는 민주당 신파의 장면 부통령이었다.[5][6] 김종필은 4.19 혁명 전부터 정군활동을 내세우며 정치적 입지를 모색하고 있었으며, 결국 박정희와 함께 5.16 군사정변을 통해 정계에 벼락처럼 등장하게 된다.
1969년 11월, 이미 4선의원, 원내총무였던 42세의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1970년 1월 3선의원인 46세의 김대중이 출마하면서 삼김정치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유진산의 일선 후퇴와 함께 신민당의 대선 경선은 김영삼 우세구도로 구성되었으나, 막판에 이철승 계파를 끌어들인 김대중의 역전승으로 제7대 대선은 박정희와 김대중의 한판 승부가 된다. 박정희는 부정선거 의혹을 크게 일으키며 대선에서 승리했고, 김대중이 정권의 탄압과 납치로 주춤한 사이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가 되면서 양김은 정계의 전면에 부상한다. 김종필3선 개헌 반대로 박정희에게서 한발 멀어졌지만 10월 유신에 동조함으로써 실세 국무총리로 전면에 나섰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한 뒤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는 직선제 개헌을 거쳐 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신민당의 김영삼/김대중의 격돌이 예상되었으나, 12.12 쿠데타5.17 쿠데타전두환/노태우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하자 이들의 매치는 7년 뒤로 미루어진다. 1980년대 제5공화국 시대에 김영삼-김대중 "양김"은 계속 민주화 투쟁에 나섰고 결국 12대 총선신한민주당 돌풍과 함께 정계에 복귀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제13대 대통령 선거제13대 국회의원 선거로 부활한 세 사람은[7] 각각 PK, 호남, 충청(충남)의 지지를 바탕으로 합종, 연횡했으며, 김영삼과 김대중은 제14대 대통령 선거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차례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삼김시대가 30년 넘게 지속되면서 90년대 중반부터는 삼김시대에 대한 피로감도 일부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김영삼, 김대중의 정당이나 다름 없었던 통일민주당-신한국당평화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는 물론,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자유민주연합은 삼김이 공천을 포함한 전권을 갖고 있었으며, 대선 후보 경선은 사실상 추대식이나 다름 없는 요식행위였다.[8] 결국 2000년대에 이르자 삼김정치는 패거리 보스정치, 권위주의의 대명사로 낙인 찍히게 된다. 김대중이 당선된 15대 대선은 역설적으로 "삼김정치"가 처음으로 청산대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이회창, 이인제, 그리고 민주당에서 불어온 "제3후보론"(조순 후보론)이 대표적이었다.[9]
그래서 삼김이 모두 정치지도자에서 내려온 2002년의 16대 대선에서 "삼김정치 청산"은 90년대의 정치 슬로건 수준을 넘어선 새 시대 정치의 기본 전제처럼 되었다. 각각 김영삼과 김대중을 통해 성장한 이회창노무현은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법조인'''(이회창은 소수의견 판사, 노무현은 인권변호사)으로서 정치적 권위를 확보했으며, 공천 개혁과 분당 등을 거치면서 기존 상도동, 동교동계의 권력과 권위를 무너트리기 시작했다.[10] 김종필에게는 전면적으로 당권에 도전하는 차세대 주자는 없었지만, 한국정치 전반이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양당구도로 재편되면서 구태와 노욕의 이미지를 얻으며 영향력이 시나브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17대 대선까지 한나라당의 이회창, 이명박과 민주당의 노무현,[11] 정동영은 각각 YS와 DJ가 직접 키운 인물들이었기에 "포스트 삼김"이라고 명명할 수는 있었다.
2009년 8월 18일에 김대중이 사망하면서 삼김시대는 막을 내렸고, 2012년의 19대 총선18대 대선은 삼김의 흔적이 사라졌다는 것을 증명한 선거가 되었다. 동교동계 일부가 세운 정통민주당 세력이 박근혜새누리당으로,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을 포함한 상도동계 일부가 문재인민주통합당으로 헤쳐 모였지만 이는 구 정객들의 이합집산이었을 뿐 의미있는 정계 개편으로 여겨지지 못했다. 김종필 역시 박근혜를 지지했지만 새누리당의 충청권 승리는 김종필의 지지나 자민련의 후신인 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의 투항이 직접 원인으로 분석되지 못했다.[12]
그리고 2015년 11월 22일에 김영삼이, 2018년 6월 23일에 김종필이 차례로 숨을 거두면서 삼김은 대한민국의 현대 정치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2020년에도 여전히 대한민국 정치권의 거물들 상당수는 삼김에 의해 정치권에 등용되었거나 삼김에 의해 정치 인생이 바뀐 인물들이 절대다수이고, 여야중진 대부분이 삼김시대에 정치를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삼김의 영향력을 물리적으로 받지 않는 정치 세대가 정치권에서 주류를 차지하려면 적어도 20년은 더 지나야 할 정도로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삼김의 비중은 상당한 것이다.
일각에선 19대 총선18대 대선으로 삼김시대에 정립된 정당구조, 지역구도가 상당수 희석되고, 각각 이어서 실시된 20대 총선, 19대 대선에서 삼김이 형성한 정치 구도가 완전히 붕괴되어, 삼김시대에서의 탈출이 빨라지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21대 총선에서는 지역주의 구도가 부활하며, 지역 간, 도농 간 정치 구도의 차이가 극명히 드러났기에 삼김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음이 나타났다.

3. 2강 1약, 김종필의 입지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에서 총리를 역임하고 박정희의 가장 큰 정치적 적수였던 김대중 정권에서도 총리를 역임했다는 진기록을 세우기는 했지만 실상 대통령을 역임한 김영삼이나 김대중에 비하면 '''유력한 대선 수권후보로 등장한 적조차 없다.'''[13][14] 즉, 삼김정치는 사실 김영삼/김대중의 양김정치에 김종필이 추가 된 구도였다. 애초에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와 대선 주자로 격돌하던 인물인데 비해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의 2인자 레벨이었기 때문이다.[15] 애초에 김종필 자신도 이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잘 알았기에 80년대 말 정계에 복귀한 뒤로는 3당 합당이든, DJP연합이든 캐스팅보터 이상의 역할을 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같은 이유로 민주화 운동가였던 DJ와 YS에 비해 유명세가 딸렸고, DJ가 가진 전라도, YS가 가진 경상남도 기반에 비해 JP의 충청도 기반 위력은 작은 편이었다. 이 점에서, 김종필의 충청(충남) 지역색 자체가 호남의 김대중, 영남(PK)의 김영삼이라는 지역 구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게다가 DJP 연합이 1차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일시 붕괴되면서 충청도의 제1정당은 민주당계 정당이 되었으며, 한때 충청지역은 물론, 수도권 일부와 강원일대에서도 선전했던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은 군소당 수준으로 사라지게 된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정국에서 김종필의 세력은 "(신민주)공화계"로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김종필의 민주공화당 세력은 신군부의 탄압으로 몰락한 80년대조차 관제야당의 형태인 한국국민당으로 남아있었기에 김종필은 이들과 정치활동규제에서 해금된 측근들을 규합하여 87년 정국에서 자신의 세력을 복구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삼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의 당내 소계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의 당내 숙청이 시작되자 역시 자유민주연합으로 뛰쳐나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15대 총선에서 "녹색돌풍"을 일으키며 제3세력으로 입지를 다시 굳혀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김종필의 위력이 양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대세를 파악하는 안목과 더불어 자신의 한계를 알고 명확하게 선을 그어 정계의 주요 세력으로 두 번이나 부활하여 할거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17] [18]

4. 영향


이들 세 사람의 일생 그 자체가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 정치사와 매우 밀접하게 맞물리기 때문에 이들을 빼놓고서 대한민국 정치사를 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김영삼김대중, 김대중과 김영삼의 양김은 당시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 존재나 다름없었다. 당시 야당(민주당-신민당-민주한국당)이 지리멸렬한 상황이었기에 야당의 대선 후보이자 민주화 투쟁에 온몸을 다 바친 YS나 DJ의 존재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민주화의 상징이자 전설 그 자체였다.[19] 거꾸로 말하면, 군부 독재세력에게 김영삼과 김대중은 눈엣가시 그 자체였다.[20]
민주화 이후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한국 정치에서 대표적인 양대 계파가 되었다.[21] 그리고 이 두 계파는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의 보수계 정당과 더불어민주당/더불어시민당의 민주계 정당의 직계 조상이 된다.[22][23] 다만, 두 당은 YS가 밀어준 이명박 대통령과, DJ가 밀어준 노무현 대통령 시대 이후로 계파 색이 많이 옅어져 상도동계 / 동교동계의 본래 성향은 많이 사라졌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회창과 노무현은 자신을 키워준 김영삼, 김대중의 계파들을 쳐내고 권력을 장악하며 양김과 갈등을 쌓았다.
삼김이 직접적으로 공천권을 장악하여 격돌한 1996년의 15대 총선에서 삼김은 차세대 주자 격인 인물들을 대거 육성했는데, 이들은 현재까지도 주요 정치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386세대의 주요 정치인들은 그 경력을 대개 1996년을 전후해 시작했다.

5. 아류 - 제주도의 삼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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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시행된 1995년부터 2014년까지 제주도에서는 이른바 '''제주도 3김'''이라고 불리는 우근민, 신구범, 김태환이 정가의 중심이었다. 보다시피 이들은 세 사람 중 한 사람만 김씨이지만 중앙정계의 3김과 그 구도가 비슷해서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이다. 이들은 민선 1~5기 제주지사를 돌아가면서 맡았다. (1기 신구범, 2기 우근민, 3~4기 김태환, 5기 우근민)
이러한 상황은 2014년 지방선거에서 제주 출신으로 젊은 소장파 정치인으로 부상한 원희룡이 신구범을 꺾고 당선되면서 일단 막을 내렸다. 2020년 현재 제주 3김은 부패와 각종 스캔들로 도내에서의 평판도 별로 좋지 못한 편이다.[24]
세 사람은 모두 1942년생(신구범 2월 2일, 김태환 5월 21일, 우근민 11월 4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 세 사람 모두 북제주군 출신인데 우근민과 김태환은 구좌읍 출신이고 신구범은 조천읍 출신이다. 구좌읍과 조천읍은 서로 이웃한 동네다.

6. 여담


셋 다 성향과는 별개로 젊을 때의 인물이 워낙 좋아서 화제가 되기도 한다. JP, DJ, YS 이 사진들의 시기는 무려 김대중은 60년대, 김영삼/김종필은 50년대로, 사실 지금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냥 할아버지가 아니라 고령의 할아버지들인 셈이다. 이 세 사람은 제1공화국때부터도 주요 요직이나 정치인 자리에 있었으니 정치에 관해선 수십년 경력을 가진 베테랑인 것이다.
셋 다 입춘 이전에 출생한 빠른 1월생이다.
DJ, YS, JP 3명 모두 대한민국 남성들의 평균수명보다 오래 살아[25] 이들의 건강관리를 음으로, 양으로 도운 주변인들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는다. 특히 다리가 불편해 몸관리에 제한이 따른 DJ나 중풍으로 한 손을 못쓰게 된 상황에서 10년을 더 살아간 JP 같은 경우는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의 헌신 없이는 정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26]
세 정치거물들이 활동시기가 겹치고 모두 성이 김(金)이다 보니 이들을 줄여부를 때는 구분이 안되는 성씨 한글자 대신 이니셜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전이나 이후로나 삼김 이외의 거물급 정치인들은 우연히 성씨가 거의 겹치지 않기도 했고, 삼김의 임팩트가 워낙 컸다 보니 다른 정치인들에 대한 이니셜은 대부분 널리 쓰이지 못했다. 예외적으로 이명박의 경우 성씨인 이(李)가 본인보다는 이회창을 지칭하는 약칭이었기 때문에 MB라는 표현이 널리 쓰였다. 삼김 이후의 대통령들 중 이명박을 제외한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은 활동 당시 자기 정도의 인지도를 지녔던 동성 정치인이 없었기 때문에 노(盧),[27] 박(朴), 문(文) 등의 성씨 약칭이 곧잘 쓰였다.
재밌게도 축구계에 이들의 동명이인이 있다. 해당기사 울산 현대에 수비수 김영삼, 인천 유나이티드의 김대중, 경남 FC의 김종필이 있다. 김영삼은 2016시즌에 은퇴했고, 김대중은 상주 상무에 입대했다. 김종필은 2011년 프로 생활을 시작한 일본에서 줄곧 뛰다가 201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영삼이 울산에서 은퇴한 이후 인천의 김대중이 직접 영상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야구에서는 김응용, 김인식, 김성근 세감독이 돌아가며 우승을 하던 시대를 삼김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1] 비록 87년 선거는 노태우가 당선되었으나, 당시 삼김의 출마선언 및 연설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치계에 영향을 미친 대한민국 정치사의 한 획이 그어질 그야말로 대사건의 시작점이었다.[2] 김영삼은 1998년에 대통령직 퇴임, 김대중은 2003년에 대통령직 퇴임, 김종필은 2004년에 정계에서 은퇴[3] 친족관계는 아니다. 본관도 서로 달라서 김영삼은 신라김녕 김씨, 김대중과 김종필은 가야김해 김씨다.[4] 민주화 투사로 거의 반평생을 군사독재와 맞서 싸워온 양김과 다르게 김종필은 군인, 군사정권 2인자 출신이고 단지 신군부 세력과 대립한다는 점에서 양김과 접점이 있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내내 2강 1약의 1약을 차지하는 위치였다. 변수로서는 매우 중요하지만 엎치락뒤치락하던 나머지 둘과 대등한 위상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실제로도 김영삼과 김대중은 나란히 대통령을 역임했으나, 김종필은 국무총리 역임과 국회 9선 의원으로 만족하고 내려와야 했다.[5] 민주당 구파는 일제강점기와 그 이전으로 거슬러가는 구 지주 세력이 중심이 되었고, 민주당 신파는 신흥 자본가를 중심으로 했다. 김영삼의 집안이 거제의 유지 집안이었고, 김대중은 스스로 일어선 자본가였다는 점에서 이들은 출신 배경과 정확히 일치하는 계파로 정치 경력을 쌓게 된 것이다. 민주당 구파가 상대적 보수, 민주당 신파가 상대적 진보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도 이들에게서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6] 민주당은 4.19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분열하여 구파의 신민당이 딴 살림을 차렸고, 군부독재 시대가 도래하고 나서도 구파의 민정당과 신파의 민주당은 대립했다. 이들은 한일협정 투쟁 국면에서 민중당으로 합당한지 1년만에 구파가 또 신한당을 차리며 재분열했다가 다음해 6대 대선을 앞두고서야 신민당으로 재통합하게 된다.[7] 이 총선에서 DJ의 평화민주당이 70석을, YS의 통일민주당이 59석을, JP의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각각 획득하며 세 당 모두 125석에 그쳐 과반 확보에 실패한 여당 민주정의당을 압박하기에 충분한 의석수를 확보했다.[8] 물론 합당을 거쳐야 했던 민주자유당이나 민주당(1991년) 등에서는 당내 다른 계파들과 경선을 치러야 하긴 했었다. 김영삼의 상대로는 박태준 등이 거론되었으나 상대적으로 중량이 약한 이종찬이 나왔고, 김대중의 상대로는 꼬마민주당 출신인 이기택이 나왔다. 두 후보 모두 60%를 넘기는 득표로 무난하게 경선에서 승리하였다.[9] 14대 대선에서도 정주영통일국민당이나 박찬종의 신정당이 개인정당으로서는 상당히 선전하기도 했는데, 특히 박찬종은 삼김정치 청산과 차세대 정치를 외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10] 김영삼 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은 대선후보로 나서자마자 전당대회에서 현직 대통령인 김영삼의 얼굴을 붙인 허수아비를 불태웠으며(...), 노무현 대통령 역시 대북송금 특검과 그로 빚어진 분당사태로 김대중 대통령을 격분시켜, 김 전 대통령이 공식석상 외에는 노무현의 얼굴조차도 안 보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많았다. 이 갈등은 훗날 친노-친문과 동교동계로 이어지게 될 정도. 다만 노무현과 김대중은 사적인 화해는 이루었다고 한다.[11] 다만, 노무현은 김영삼이 발탁해서 정계에 입문했지만 3당합당에 대해 크게 반발하여 김영삼을 떠나 김대중으로 갈아탄 것이다.[12] 충북에서는 박근혜의 모친 육영수의 후광이 있었고, 충남권에서는 세종시 수정안 논란 당시 박근혜가 원안 추진을 주장하고 결국 수정안 부결까지 이끌었던 것이 승리의 요인으로 지목되었다.[13] 이 세 인물이 노태우와 전면적으로 경쟁한 13대 대선에서도 김종필은 4대 유력 후보 4위, 그것도 한 자리 수 득표만을 거둔 4위였고, 다음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도 김종필의 신민주 공화당은 원내 4당이었다. 87년 대선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각 김종필의 3배가 넘는 표를 얻었다.[14] 특히 87년의 13대 대선 결과가 김종필의 정치적 입지와 그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 것이 4위 김종필의 8.1% 득표를 그대로 2위 김영삼의 28.0%에 더하더라도 1위 노태우의 36.6%를 넘을 수는 없었다. 즉, 0.2%의 쩌리 5위 신정일 후보를 제외한 4강(또는 1강 2중 1약) 후보군 중에서 유일하게 단독으로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흔히 김종필의 역할을 '캐스팅보터' 라고 설명하지만 실상은 캐스팅보터로써의 영향력에도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예를 들어 3당 합당 이후 양당 체제로의 재편성이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노태우(민정당)-김영삼(통민당)-김대중(평민당)의 3강 체제가 유지되었다면 김종필(공화당)은 캐스팅보터의 역할조차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3당 합당으로 민정당과 퓨전했지만 기어코 민자당의 주도권을 확보한 김영삼이나 역시 3당 합당으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지만 시민사회운동세력+학생운동세력을 영입하여 다시 세력을 확보한 김대중이 한국 정치 양대 정파의 실질적인 창업자가 된 것에 비하면 김종필의 정치적 한계는 명확했던 것이다.[15] 다만, 박정희 정권 말기까지만 해도 김종필의 정치적 커리어가 김영삼/김대중 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권주자로 박정희와 격돌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소장파 정치인'(소위 40대 기수)으로써 기존 정치인인 박정희와 대결한 구도에 가깝기 때문이다. 당장 세대로 봐도 1910년대생인 박정희에 비해 삼김씨는 1920년대생으로 반 세대 젊다. 즉 박정희 다음 세대로써 박정희 정권의 2인자이던 김종필과 박정희 다음 세대로서 소장파 대권 도전자이던 양김씨의 경력은 비슷한 레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김종필이 김영삼/김대중에 비해 정치적으로 도태된 것은 박정희 사망 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국내에 남아 탄압을 감내하면서 저항하여 정치적 위상을 높인 양김씨에 비해 김종필은 사실상 굴복하고 미국으로 도피하면서 대중적 관심 바깥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16] DJP 연합이 무너진 직후 이인제를 중심으로 했던 새천년민주당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원내교섭단체를 무너트렸으며, 17대 총선에서도 여당 열린우리당16대 대선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바탕으로 충청도 전역을 석권했다. 행정수도 이슈가 희미해진 노무현 정권 후반부터 충청권의 한나라당의 지지세가 크게 증가하였지만, 17대 대선으로 집권한 이명박 정권의 행정수도 폐기 기조로 18대 총선을 거치면서 도로 충남은 국민중심당-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에게, 충북은 민주당의 영역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19대 총선20대 총선에서 정계 전체가 새누리당민주연합당의 양당구도로 이인제가 이끄는 자민련의 마지막 후신인 선진통일당은 새누리당에 흡수되었다.[17] 다만, 김종필의 세력(공화계)가 한국 현대정치사에 남긴 흔적은 (특히 현존 정당중에서 공화당계의 계보를 잇는 정당의 명맥이 끊어졌다는 이유로) 과소평가되어서도 안되지만 반대로 너무 과대평가되어서도 안된다. 한국 현대 정치에서 김종필의 공화계가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고는 하지만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뚜렷한 흔적 수준이 아니라 21세기 초 한국 정치의 양대 거대정당(신한국-한나라-새누리-자한당계 정당과 범민주당계 정당)의 직접적인 모태가 되었다. 또한, 김종필이 두 번이나 정계의 주요 세력 중 하나로 할거했다고는 하지만 김영삼/김대중 역시 목숨까지 위협받는 심각한 탄압까지 감내하면서 여러 번 세력을 재구축했고, 6공 성립 이후에는 '민정당과 합당해서 결국 민자당을 안에서 삼켜버린' 김영삼이나 '3당 합당으로 주요 정치세력 내에서 철저히 따돌림당하고도 시민사회운동단체나 학생운동 경력자들을 규합하여 자신을 따돌린 민자당에 버금가는 세력을 다시 키워낸' 김대중에 비교할 때 김종필의 행적이 그리 대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삼김관게는 기본적으로 2강 1약 관계이고 김종필의 행적과 성과에 대한 평가 역시 이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것이다.[18] 취소선 농담이라면 모를까, 진지한 평가로써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대통령 중심제에 연임/중임이 불가능한 6공 체제의 특성상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임기를 마친 이후에는 정계에서 은퇴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또한 이것이 현실적으로 정치인이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공적인 경력이기도 하다. 즉, 삼김중 김영삼/김대중은 대통령까지 역임했으니 정치인으로써는 최고의 경력을 완성시킨 뒤 은퇴한 데 비해 김종필은 대통령을 못 해서 은퇴하지 못하고 정치활동을 계속한 것 뿐이다. 말하자면 '남보다 빨리 출세하면 나중에 할 일이 없어지니까 승진이 늦을수록 인생의 승리자다. 남보다 빨리 승진하면 인생의 패배자' 라는 논리인 것이다. 더구나 김종필이 정치적으로 오래갔다고 해 봤자 김대중보다 달랑 2년 더 간것 뿐이고, 그나마도 선거 승리 후 명예로운 은퇴도 아니고 충격적인 낙선 후의 은퇴 형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19] 박정희 정부와 신군부 시절 반독재 특종으로 이름을 날렸던 조갑제 기자는 이 시기를 '''김영삼과 김대중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에 피가 끓던 시절'''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20] 대표적인 사건이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이지만 그 밖에도 교통사고나 폭발물을 동원한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21] 이들을 모방해 김종필의 계파는 청구동계라고 칭하는데, 3김 중에 제일 미약하고 인지도가 낮았다. 애당초 김영삼과 김대중이 각각 자기가 사는 동네의 이름을 계파로 갖게 된 이유는, 군부 독재 세력이 이들을 가택 연금하면서 이들의 집이 정치활동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22] 미래통합당의 실질적인 뿌리는 김영삼과 노태우, 김종필의 삼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이다. 김영삼의 상도동계가 민자당에 합류하여 주도권을 쥐지 않았다면 군부 세력인 구 민주정의당계는 군사독재잔당이라는 원죄에 눌려 정치적인 성장이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23] 민주당계 정당 역시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동교동계를 밀어내고 친노계가 주도권을 장악하기는 했으나, 민주당계 정당 자체가 김대중의 동교동계가 시민사회운동세력이나 학생운동 출신 인물, 노무현 등의 꼬마민주당 등 다른 세력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대선 경선에서 노무현을 선택한 것도 김대중과 호남 민심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김대중 없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민주당계 정당이 성장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24] 신구범은 2017년 이후 극우의 행보를 취하고 있고 우근민은 도지사 재임 당시 크고 작은 논란을 발생시켰으며 김태환은 음주 뺑소니 사고를 치는 등 세 사람 모두 시끄러운 일들을 자주 치렀다.[25] DJ 85세, YS 86세, JP 92세[26] YS는 삼김 중 가장 건강상태가 좋아 말년까지도 꾸준히 운동과 조깅을 즐기며 건강관리를 스스로 했다.[27] 노무현 이전까지는 '盧'나 '盧 前대통령' 같은 용어 모두 노태우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