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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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末鳳
1901년 4월 3일 ~ 1961년 2월 9일
한국의 소설가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개신교 장로. 본관은 김해 김씨.
필명은 노초(蘆草).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인 망명녀를 투고할 때는 필명을 보옥(步玉)이라고 했다.
활발한 신문소설 연재로 대중소설 세계를 개척한 대중소설가이다.
대표작으로는 <밀림과 찔레꽃>, <생명> 등이 있다.
1901년 4월 3일 부산 중구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일신여학교(지금의 동래여자고등학교) 고등과 3년을 수료했다. 그 뒤 1917년 서울로 와서 정신여학교 3학년에 편입한 뒤 4년 과정을 졸업했다.
그 뒤 황해도 재령의 명신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타카네 여숙에서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1923년 도시샤여자대학 영문과에서 신학문을 접했다. 이때 신생활 잡지에 발표한 <이상향의 남녀생활>이란 평론이 문학계에서 인정을 받았다. 한편 1925년 4월에 동아일보 신춘문단에 <시집살이>를 발표하기는 했으나, 이때는 문학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으며, 공식적으로 문단에 등단하지 않았다. 1927년, 도시샤여자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한국으로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취직하면서 전상범과 결혼했다. 중외일보에 취직한 이유가 있었는데, 민족 정기를 일으키기 위해, 재정난을 겪던 중외일보를 인수해 사장이었던 안희제의 뜻을 따른 것이다.
중외일보 기자 시절 쓴 탐방기나 수필이 높은 평가를 받자,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193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한 <망명녀(亡命女)>라는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고행>, <편지> 등 작품을 발표하다, 남편 전상범이 죽자 이종하와 재혼했다.
1935년에 <신가정>에 <5월의 노래>를 발표해 인기를 얻으면서, 동아일보 편집국장인 설의식과 학예부장인 서항석의 주선으로 장편소설 <밀림>을 연재했다. <밀림>을 쓸 당시 거처인 부산 동구 좌천동에 머물고 있었다. <밀림>은 인기를 얻었고, 김말봉은 저널리즘 스타가 되었다.
이어서 1937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찔레꽃>이 인기를 얻으면서 통속소설가로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찔레꽃> 역시 부산에 머물면서 썼다. <밀림>과 <찔레꽃>으로 인해 대중소설 작가로서의 지위를 얻어 통속소설이 저널리즘과 영합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 후 일제가 조선 청년들을 징용하고 있을 때, 어떤 조선 청년이 찾아와 일본어로 소설을 쓰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일본어를 몰라서 못 쓴다"고 둘러댔지만, 김말봉이 일본에 유학을 갔다왔다는 사실이 온 조선에 퍼져서 그 변명이 소용없게 되자, 결국 일시적으로 절필하고 주부생활을 하며 은둔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김말봉은 곧바로 교회로 가서 거듭 이렇게 기도했다.
서울로 올라와서 공창지대인 중구 묵정동과 용산구 원효로로 가서 공창을 폐지하는 운동을 벌였고, 공창은 폐지되었다. 그 후 박순천과 함께 "남성의 성노예가 된 여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입법화에 앞장섰다. 윤락 여성들을 돕기 위해 박애원을 경영했으며, 소년, 소녀들의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이러한 사회활동을 위해 <학원>, <새벗>, <여원> 등 월간잡지에 많은 글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공창제도는 법적으로 해산되었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공창제도는 부활했다. 결국 공창폐지운동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시 문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6.25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을 온 문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52년 베니스에서 열린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자주 다니던 교회가 성남교회였는데, 자체적인 건물이 없어서 조선신학교(지금의 한신대학교)에서 일본천리교 경성본부를 접수하고 학교를 사용하지 않는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다. 김말봉은 건축위원회 총무가 되어 매일 새벽기도를 했고, 결국 성남교회는 자체적인 건물을 가지게 되었다. 1954년에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여성 장로가 되었다.
한국예술원 위원과 한국문학가협회 대표위원을 역임했다.
1962년 2월 9일, 지병인 폐암으로 소천했다. 소천 후 남편인 이종하와 함께 망우리공원묘지에 묻혔다.
김말봉은 문학의 순수성을 중점으로 하는 문예 사조와는 달리, 처음부터 흥미에 중점을 둔 통속소설을 썼다. 애정의 욕구로 인한 갈등 속에서도 '정의는 이긴다'는 도덕성을 갖추되, 독자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소설을 쓴다는 신조를 가졌다.
광복 이전에는 서구식 사조를 받아들여, 사람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애욕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광복 이후에는 사회에 눈을 돌려 인간의 애욕 문제와 동시에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김말봉의 작품 세계는 대중적인 멜로드라마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찔레꽃> 이후, 청순하고 가련한 여학생과 가난하지만 재능 있는 청년인 두 주인공을 둘러싼 복잡하고 단계적인 애욕의 갈등이 벌어지면서 나타나는 고난과 그 고난을 극복해나가는 서사 구조는 대중적의 멜로드라마의 한 유형화된 틀을 이루고 있다. 또한 <생명>은 사회비판적인 요소를 담고 있으나, 마찬가지로 이러한 서사구조를 토대로 집필되었다.
작가는 인간의 현실적 상황에 눈을 돌려 대중과 함께 살아가햐 한다는 것을 신념으로 삼았다. 때문에, 예술성과 인간을 탐구하는 것을 문학의 제일가치로 둔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문학의 본질을 벗어났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반대로 김말봉은 순수문학에만 초점을 맞춘 문단을 비판하면서 "순수귀신을 버리라"고 말했다.
한국 작가 중에서 단편소설보다 장편소설을 자주 썼다.
현대소설과는 달리 구성의 밀도나 진지한 감도 면에서 약하지만. 일제강점기 속에서 의지를 가진 인간의 인간애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일신여학교에 다닐 때, 후에 정치인이 되는 박순천과, 박시연을 동기로 두었다.
그네를 작곡한 금수현의 아내 전혜금의 어머니이며, 지휘자 금난새의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끊어진 한강교에서>라는 아폴리네르풍 시로 유명했던 시인 이현우의 계모[1] 이기도 했다. 이현우가 3살 때부터 김말봉이 키웠는데, 이현우는 기행과 방랑으로 유명했고, 그 방랑이 심화되어 1960년대 이후 정말로 거지패와 구걸을 다니는 거지가 되었다. 1970년대 부산에서 거지짓을 하고 다니면서 모두에게 외면을 당했고, 1983년에 모 시인이 돈을 모아 서울행 기차를 태워보낸 이후에는 그를 목격한 사람이 없다. 지인들은 "1980년대 군부의 사회정화 운동 때, 부랑자로 몰려 끌려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2014년부터 소명출판에서 김말봉 전집을 출판하고 있다. 2016년 12월 현재 6권까지 출판된 상황이다.
金末鳳
1901년 4월 3일 ~ 1961년 2월 9일
1. 개요
한국의 소설가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개신교 장로. 본관은 김해 김씨.
필명은 노초(蘆草).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인 망명녀를 투고할 때는 필명을 보옥(步玉)이라고 했다.
활발한 신문소설 연재로 대중소설 세계를 개척한 대중소설가이다.
대표작으로는 <밀림과 찔레꽃>, <생명> 등이 있다.
2. 생애
2.1. 학창시절
1901년 4월 3일 부산 중구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일신여학교(지금의 동래여자고등학교) 고등과 3년을 수료했다. 그 뒤 1917년 서울로 와서 정신여학교 3학년에 편입한 뒤 4년 과정을 졸업했다.
그 뒤 황해도 재령의 명신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타카네 여숙에서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1923년 도시샤여자대학 영문과에서 신학문을 접했다. 이때 신생활 잡지에 발표한 <이상향의 남녀생활>이란 평론이 문학계에서 인정을 받았다. 한편 1925년 4월에 동아일보 신춘문단에 <시집살이>를 발표하기는 했으나, 이때는 문학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으며, 공식적으로 문단에 등단하지 않았다. 1927년, 도시샤여자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한국으로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취직하면서 전상범과 결혼했다. 중외일보에 취직한 이유가 있었는데, 민족 정기를 일으키기 위해, 재정난을 겪던 중외일보를 인수해 사장이었던 안희제의 뜻을 따른 것이다.
2.2. 작가활동
중외일보 기자 시절 쓴 탐방기나 수필이 높은 평가를 받자,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193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한 <망명녀(亡命女)>라는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고행>, <편지> 등 작품을 발표하다, 남편 전상범이 죽자 이종하와 재혼했다.
1935년에 <신가정>에 <5월의 노래>를 발표해 인기를 얻으면서, 동아일보 편집국장인 설의식과 학예부장인 서항석의 주선으로 장편소설 <밀림>을 연재했다. <밀림>을 쓸 당시 거처인 부산 동구 좌천동에 머물고 있었다. <밀림>은 인기를 얻었고, 김말봉은 저널리즘 스타가 되었다.
이어서 1937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찔레꽃>이 인기를 얻으면서 통속소설가로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찔레꽃> 역시 부산에 머물면서 썼다. <밀림>과 <찔레꽃>으로 인해 대중소설 작가로서의 지위를 얻어 통속소설이 저널리즘과 영합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 후 일제가 조선 청년들을 징용하고 있을 때, 어떤 조선 청년이 찾아와 일본어로 소설을 쓰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일본어를 몰라서 못 쓴다"고 둘러댔지만, 김말봉이 일본에 유학을 갔다왔다는 사실이 온 조선에 퍼져서 그 변명이 소용없게 되자, 결국 일시적으로 절필하고 주부생활을 하며 은둔했다.
2.3.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김말봉은 곧바로 교회로 가서 거듭 이렇게 기도했다.
그 후 온 가족을 설득해서 부산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와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같은 해 <카인의 시장>과 <화려한 지옥> 등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1949년에는 하와이로 시찰여행을 갔다.'''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펜을 들고, 해방된 이 나라에서 좋은 글을 많이 쓰겠습니다.'''
서울로 올라와서 공창지대인 중구 묵정동과 용산구 원효로로 가서 공창을 폐지하는 운동을 벌였고, 공창은 폐지되었다. 그 후 박순천과 함께 "남성의 성노예가 된 여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입법화에 앞장섰다. 윤락 여성들을 돕기 위해 박애원을 경영했으며, 소년, 소녀들의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이러한 사회활동을 위해 <학원>, <새벗>, <여원> 등 월간잡지에 많은 글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공창제도는 법적으로 해산되었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공창제도는 부활했다. 결국 공창폐지운동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시 문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6.25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을 온 문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52년 베니스에서 열린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자주 다니던 교회가 성남교회였는데, 자체적인 건물이 없어서 조선신학교(지금의 한신대학교)에서 일본천리교 경성본부를 접수하고 학교를 사용하지 않는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다. 김말봉은 건축위원회 총무가 되어 매일 새벽기도를 했고, 결국 성남교회는 자체적인 건물을 가지게 되었다. 1954년에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여성 장로가 되었다.
한국예술원 위원과 한국문학가협회 대표위원을 역임했다.
1962년 2월 9일, 지병인 폐암으로 소천했다. 소천 후 남편인 이종하와 함께 망우리공원묘지에 묻혔다.
3. 작품 성향
김말봉은 문학의 순수성을 중점으로 하는 문예 사조와는 달리, 처음부터 흥미에 중점을 둔 통속소설을 썼다. 애정의 욕구로 인한 갈등 속에서도 '정의는 이긴다'는 도덕성을 갖추되, 독자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소설을 쓴다는 신조를 가졌다.
광복 이전에는 서구식 사조를 받아들여, 사람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애욕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광복 이후에는 사회에 눈을 돌려 인간의 애욕 문제와 동시에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김말봉의 작품 세계는 대중적인 멜로드라마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찔레꽃> 이후, 청순하고 가련한 여학생과 가난하지만 재능 있는 청년인 두 주인공을 둘러싼 복잡하고 단계적인 애욕의 갈등이 벌어지면서 나타나는 고난과 그 고난을 극복해나가는 서사 구조는 대중적의 멜로드라마의 한 유형화된 틀을 이루고 있다. 또한 <생명>은 사회비판적인 요소를 담고 있으나, 마찬가지로 이러한 서사구조를 토대로 집필되었다.
작가는 인간의 현실적 상황에 눈을 돌려 대중과 함께 살아가햐 한다는 것을 신념으로 삼았다. 때문에, 예술성과 인간을 탐구하는 것을 문학의 제일가치로 둔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문학의 본질을 벗어났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반대로 김말봉은 순수문학에만 초점을 맞춘 문단을 비판하면서 "순수귀신을 버리라"고 말했다.
한국 작가 중에서 단편소설보다 장편소설을 자주 썼다.
현대소설과는 달리 구성의 밀도나 진지한 감도 면에서 약하지만. 일제강점기 속에서 의지를 가진 인간의 인간애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4. 작품
- 망명녀(중앙일보, 1932) - 단편소설
- 밀림(동아일보, 1935)
- 찔레꽃(조선일보, 1937~1938)
- 화려한 지옥(1945) - 소설집
- 별들의 고향(1950) - 소설집
- 태양의 권속(서울신문, 1952)
- 파도에 부서지는 노래('희망', 1952)
- 새를 보라(영남일보, 1953)
- 바람의 향연(여성계, 1953)
- 푸른 날개(조선일보, 1954)
- 푸른 장미(국제신보, 1957)
- 화관의 계절(한국일보, 1957)
- 생명(1957) - 소설집
- 사슴(연합신문, 1958)
- 환희(조선일보, 1958),
- 제비야 오렴(부산일보, 1959
- 장미의 고향(대구일보, 1959)
- 해바라기(연합신문, 1959)
- 이브의 후예(1960) - 소설집
- 바람의 향연(1962) - 소설집
5. 기타
일신여학교에 다닐 때, 후에 정치인이 되는 박순천과, 박시연을 동기로 두었다.
그네를 작곡한 금수현의 아내 전혜금의 어머니이며, 지휘자 금난새의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끊어진 한강교에서>라는 아폴리네르풍 시로 유명했던 시인 이현우의 계모[1] 이기도 했다. 이현우가 3살 때부터 김말봉이 키웠는데, 이현우는 기행과 방랑으로 유명했고, 그 방랑이 심화되어 1960년대 이후 정말로 거지패와 구걸을 다니는 거지가 되었다. 1970년대 부산에서 거지짓을 하고 다니면서 모두에게 외면을 당했고, 1983년에 모 시인이 돈을 모아 서울행 기차를 태워보낸 이후에는 그를 목격한 사람이 없다. 지인들은 "1980년대 군부의 사회정화 운동 때, 부랑자로 몰려 끌려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2014년부터 소명출판에서 김말봉 전집을 출판하고 있다. 2016년 12월 현재 6권까지 출판된 상황이다.
[1] 마지막 남편 이종하의 전처 소생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