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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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승문(金勝文)
본관
광주 김씨[1]#
생몰
1900년[2] 7월 17일 ~ 1984년 4월 5일
출생지
평안남도 덕천군 금성면 금성리[3][4]
(현 평안남도 덕천시 신흥동)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승문은 1900년 7월 17일 평안남도 덕천군 금성면 금성리(현 덕천시 신흥동)에서 아버지 김봉규(金鳳奎)와 어머니 진주 강씨 강건규(姜建奎) 사이의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같은 학교 학생 400여명을 이끌고 평양부 숭실학당 운동장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학교로부터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1920년 2월 그는 만주에 있는 대한독립단 단장 조맹선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 비밀리에 파견된 박승엽(朴承燁)[5]과 상의하여 덕천 지역에 대한독립단의 지단(支團)을 조직하였다. 이때 그는 서기장의 직책을 맡고 지단장 정진원, 부단장 정계록, 재무감 정붕익, 통신부장 이종현 등과 함께 독립사상의 고취·무장대원에 대한 지원·군자금 모집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5월에는 대한독립단 단원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의 지시를 받고 김창문(金昌文)·김봉준(金鳳俊) 등으로부터 300엔을 모금하여 지단에 전달하는 등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같은 달 10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본 교토로 유학하여 리츠메이칸대학 전문부 경제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28년 9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판매부 서기를 시작으로 경리부장과 광고부장을 거쳐 1937년 11월 도쿄지국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책임을 지고 물러난 송진우 전 사장으로부터 "지금 일본에는 우리의 대사관이 없으므로 지국장(支局長)인 당신이 대사 역할까지 겸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도쿄지국장으로서 재일동포들의 고충을 대변하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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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 재직 당시 모습
이후 영업국차장 등을 지내다가 1940년 8월 동아일보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자 송진우 등과 함께 투옥되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 거주하였다. 1945년 12월 1일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재입사하여 영업국장 겸 발행인으로 근무하였으며 1947년 2월 발행인 직을 사퇴하고 취체역에 취임하였다. 1949년 3월에는 영업국장 직에서 물러나 잠시 농림부장관 이종현비서실장(이사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이듬해인 1950년 3월 상무취체역에 취임하였으나 곧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실질적인 근무기간은 길지 않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동아일보 창업주 인촌 김성수가 제2대 대한민국 부통령에 취임하자 그의 비서관 및 비서실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54년에는 화신산업주식회사의 상무이사에 취임하였으며 1966년 7월 30일 동아일보 취체역 직에서 정년퇴직하고 화신그룹 계열의 화신산업주식회사, 흥한화학섬유주식회사, 흥한방적주식회사 등의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재직하였으며, 박흥식이 재단이사장으로 있던 재단법인 흥한재단에 상무이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밖에 자선당제약주식회사에서 이사 직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관악구 신림동에 거주하였으며,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자문위원을 지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 1984년 4월 5일 별세하였다.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수해공파 23세손.[2] 대한민국인물연감에는 1901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광주 김씨 집성촌이다.[4] 구한말 덕천군 금성방 금성리 → 1896년 덕천군 금성면 금성리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덕천군 성양면 금성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덕천군 금성리 → 1982년 덕천군 덕천읍.[5]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승엽과 동명이인이다.